사도행전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27–28장 · 로마로 가는 길

아무런 막힘도 없이

사도행전은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끝납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가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23:11), 바울은 황제에게 상소했으며, 마침내 폭풍과 배가 부서지는 일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28장에서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당연히 황제 앞에서의 재판을 기대하게 됩니다. 바울이 풀려나는지, 계속 갇혀 있는지, 황제가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그 모든 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마지막 두 절에서 바울이 세를 내고 빌린 곳에서 두 해 동안 사람들을 맞아들이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신을 지키는 군인이 있고, 스스로도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말합니다. 황제에게 상소한 사건의 결말도 아직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는 마지막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방해받지 않은 것은 바울의 인생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마지막 장을 읽는 열쇠입니다.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누가는 뜻밖의 장면들을 보여 줍니다. 낯선 섬의 사람들이 배가 부서진 뒤 살아남은 이들에게 불을 피워 줍니다. 바울은 독사에게 물리지만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섬사람들은 그를 살인자라고 판단했다가 신이라고 부릅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는 이미 그곳에 살던 믿는 사람들이 먼 길을 마중 나오고,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설득되고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을 여러 방식으로 판단합니다. 살인자라고도 하고, 신이라고도 하며,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분파에 속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한 가지 일을 계속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일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그 증언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보여 주며 출발했습니다. 이제 그 증언이 로마에 이른 곳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끝났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1028장 본문 읽기 →

「특별한 친절」 — 낯선 사람들의 불에서 시작된 마지막 장

사도행전 28:1–2 본문 →

배가 부서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은 육지에 도착한 뒤에야 그곳이 멜리테라는 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몰타와 같은 곳으로 보는 섬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섬의 지리적 특징이나 역사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행동부터 이야기합니다.

섬사람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불을 피우고 우리 모두를 맞아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8:2 · 두루새김

「섬사람들」(βάρβαρος)로 옮긴 원문의 말은 그리스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오늘날 한국어의 ‘야만인’처럼 반드시 도덕적으로 열등하거나 난폭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원문은 이렇게 언어로 사람들을 구별하지만, 정작 특별하게 강조되는 것은 그들이 베푼 친절입니다.

「친절」(φιλανθρωπία)로 옮긴 말은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과 관련된 말입니다. 앞서 27:3에서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을 너그럽게 대했던 일에도 같은 어근의 표현이 쓰였습니다. 로마 군인도, 낯선 섬의 주민들도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친절을 종교적 소속과 연결하지 않습니다. 섬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거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 모두를」 맞아들입니다. 배에 탔던 사람이 로마 군인인지 죄수인지, 유대 사람인지 다른 민족 사람인지가 먼저 따질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내리고 추웠습니다.

그들은 불을 피웠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민족과 언어의 경계를 넘어 전해지는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독자는 먼저 그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친절을 만납니다. 그들이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장면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돌봄이 반드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만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누가는 그 평범한 행동 자체를 귀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바울도 그 불을 피우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지위를 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받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에 얹으며 추운 사람들을 위해 손을 보탭니다.

그런데 바로 그 손에 독사가 매달립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야」 — 고난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다

사도행전 28:3–6 본문 →

바울이 불에 나뭇가지를 얹었을 때 독사가 나와 그의 손을 물고 매달립니다. 섬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즉시 결론을 내립니다.

섬사람들은 바울의 손에 뱀이 매달린 것을 보고 서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살인자야. 바다에서는 살아났어도 정의가 그를 살려 두지 않는구나.」사도행전 28:4 · 두루새김

그들은 바울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이유로 죄수가 되었는지, 실제로 어떤 일을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독사에게 물리는 모습을 보고 그의 과거를 판단합니다. 바다에서 살아남았는데 다시 독사에게 물렸으니, 바다에서 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재앙은 감추어진 죄의 증거가 됩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곧 무너집니다.

바울은 뱀을 불 속으로 털어 버리고, 아무 해도 입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몸이 부어오르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기다려도 아무 이상이 생기지 않자,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했습니다.사도행전 28:6 · 두루새김

이 두 판단 사이에서 바울 자신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독사에게 물린 모습을 보고는 숨겨진 죄가 있다고, 물리고도 죽지 않는 모습을 보고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라고 판단했습니다. 두 번 모두 눈앞의 사건을 근거로, 바울이 실제로 누구인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그를 확정하려 한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반드시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기이한 일을 경험한다고 해서 신인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님께서는 비극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9:1-3에서도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이나 부모의 특정한 죄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생각을 거부하십니다. 두 본문은 문맥이 다르지만, 고난을 곧바로 개인의 죄에 대한 판결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이 장면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왜 아무 해도 입지 않았을까?

본문은 이 사건을 일어난 그대로 서술합니다. 독사가 실제로 독을 넣었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바울을 보호하셨는지에 대한 설명도 붙이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전체의 흐름에서는 그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아직 로마에서 예수님을 증언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아야 했고, 이제 독사에게 물린 뒤에도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바울이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28장은 섬사람들이 바울을 신이라고 판단한 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14:11-18에서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기며 제사를 드리려 하자, 두 사도가 자신들도 같은 인간임을 밝히며 그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려 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병든 사람 앞에서 신적 존재처럼 숭배를 받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정의」는 원문에서 디케입니다. 디케는 일반적으로 정의나 잘못에 따른 공정한 벌을 뜻하지만,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정의를 인격을 가진 신적 존재로 나타낸 말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이 문맥에서도 죄인을 쫓아가 벌하는 신적 정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다만 섬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신을 섬겼는지, 누가가 그들의 말을 그리스 문화의 언어로 표현한 것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고 두 손을 얹어」 — 환대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다

사도행전 28:7–10 본문 →

바울 일행은 「섬의 지도자」 보블리오의 환대를 받습니다. 보블리오는 그들을 맞아들여 사흘 동안 친절하게 대접하며 묵게 해 줍니다. 처음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주민들이 불을 피워 주었고, 이제는 섬의 지도자가 자기 집에서 그들을 대접합니다.

이 환대가 이루어지는 동안 새로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열이 나고 이질을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기도하고 두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8:8 · 두루새김

바울은 먼저 기도합니다. 자신이 병을 고칠 수 있는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소유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얹습니다. 손을 얹는 행동은 성경에서 축복과 기도, 사명을 맡기는 일, 병을 고치는 일 등 여러 문맥에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그에게 손을 얹는 행동입니다.

이 일이 있은 뒤 섬의 다른 아픈 사람들도 찾아와 병을 고침받습니다(9절). 이 흐름은 누가복음 4:38-40을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해 질 무렵 찾아온 여러 병자에게 한 사람 한 사람 손을 얹어 낫게 하십니다.

그러나 차이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꾸짖으시고 자신의 권위로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한 뒤 병든 사람을 낫게 합니다. 사도행전 3:12-16에서 베드로가 걷지 못하던 사람이 나은 것은 자신들의 능력이나 경건함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통한 믿음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장면도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 계속 일하신다는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증인이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섬사람들과 바울 사이에 오간 선물

그들은 우리를 여러 가지로 귀하게 대접했습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떠날 때에는 필요한 물품도 배에 실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28:10 · 두루새김

처음에는 바울 일행이 도움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바울이 병든 사람들을 돕습니다.

마지막에는 섬사람들이 다시 바울 일행을 도와줍니다.

누가는 누가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서 한쪽으로만 선물을 베풀었는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환대와 돌봄이 오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만 누가는 몰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거나, 바울이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병을 고친 사건을 곧바로 섬 전체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에서 복음의 증인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면보다 먼저, 불을 피우고 병든 사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뒤 다시 배에 오릅니다.

조금 더 깊이

보블리오를 소개하는 「섬의 지도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몰타에서 사용되던 행정적·명예적 칭호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고대 몰타의 비문들에는 섬의 ‘첫째 사람’에 해당하는 호칭이 확인됩니다. 다만 보블리오 개인의 구체적인 행정권이나 직책을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쌍둥이 신인 디오스쿠로이」 — 다른 신들의 표지를 달고 로마로

사도행전 28:11–15 본문 →

바울 일행은 몰타에서 겨울을 지낸 뒤 새로운 배를 탑니다.

석 달 뒤에 우리는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배에는 쌍둥이 신인 디오스쿠로이를 나타내는 표시가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8:11 · 두루새김

디오스쿠로이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들로 알려진 쌍둥이, 로마식 이름으로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가리킵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특히 항해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신적 존재로 여겨졌고, 뱃머리에 그들을 나타내는 표시를 두는 것은 안전한 항해를 바라는 믿음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앞서 바울은 폭풍 속에서 자신이 속해 있고 예배하는 하나님이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고, 실제로 모든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다른 신들의 보호를 상징하는 표시가 붙은 배를 타고 로마로 향합니다.

이 표시는 실제 항해에 쓰인 배의 특징을 기록한 세부 사항일 수 있습니다. 또는 당시의 항해 신앙과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 사이의 대조를 의식하게 하는 문학적 장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그 배를 탔다고 해서 그 신들을 섬겼다고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당시의 일상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하면서 여전히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이번 항해는 앞선 항해와 달리 순조롭습니다. 시라쿠사에서 사흘을 머물고, 레기온을 거쳐,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이틀 만에 푸테올리에 이릅니다. 27:13에서는 같은 남쪽 바람이 출항하기 좋은 조건으로 보였다가 거센 폭풍으로 이어졌지만, 이번에는 순풍이 되어 바울 일행을 목적지에 가까이 데려갑니다.

「믿는 사람들을 만나」 —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도착한 복음

그곳에서 믿는 사람들을 만나, 이레 동안 함께 지내 달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습니다.사도행전 28:14 · 두루새김

바울이 로마에 가서 처음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이탈리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고 말하고(로마서 1:8)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고 밝혔습니다(1:10-13).

바울의 로마 도착은 그 도시의 첫 신자가 생기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믿음의 공동체와 바울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 로마의 믿는 사람들은 우리 소식을 듣고 아피우스 광장과 ‘세 여관’이라는 곳까지 우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용기를 얻었습니다.사도행전 28:15 · 두루새김

믿는 사람들은 바울이 로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로마 남쪽으로 먼 길을 나와 그를 맞았습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폭풍 속에서도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도 다른 믿는 사람들을 보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었다고 해서 공동체의 격려가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그 만남을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로 기록합니다.

몰타에서는 바울이 병든 이들을 도왔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바울을 격려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의 사랑과 돌봄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로마에 도착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피우스 광장과 세 여관은 로마 남쪽의 아피아 가도에 있던 지점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아피우스 광장은 로마에서 약 70킬로미터, 세 여관은 약 55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 — 로마에서 처음 부른 사람들

사도행전 28:16–22 본문 →

로마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자신을 지키는 군인과 함께 따로 지내도록 허락받습니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감옥에 갇히는 대신 군인의 감시를 받으며 별도의 거처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사흘 뒤 바울은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들의 관습을 거슬러 행동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또 로마 사람들은 사형을 내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유대 사람들의 반대로 황제에게 상소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건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다시 신앙의 중심으로 향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러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고 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제가 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8:20 · 두루새김

「이스라엘의 소망」은 앞에서 바울이 여러 차례 강조했던 하나님의 약속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에서 이야기했던 그 소망을 이제 로마의 유대 사람들에게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은 새로운 종교의 대표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믿기 때문에 쇠사슬에 묶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자세히 기록되는 그의 활동은 유대 사람들을 불러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유대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이 한 대답이 뜻밖입니다.

그들이 바울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유대에서 선생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곳에 온 동포들 가운데 선생에 관해 나쁜 소식을 전하거나 나쁘게 말한 사람도 없었습니다.」사도행전 28:21 · 두루새김

독자는 바울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러 차례 재판을 요구했던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에는 그 고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직 소식이 도착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직접 듣고 싶습니다. 선생이 속한 이 분파가 어디서나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8:22 · 두루새김

로마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곧 「분파」에 대한 소문과 반대를 알면서도 바울의 말을 직접 듣고 싶어 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유대 사람들은 모두 바울에게 적대적인 사람들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새로운 증언의 기회를 줍니다.

이제 한 죄수의 거처가 예수님에 관해 깊이 이야기하는 자리가 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 모세와 예언자들의 글에서 예수님을 설명하다

사도행전 28:23–24 본문 →

누가는 그날의 대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그들은 바울과 만날 날을 정했습니다. 그날 더 많은 사람이 바울이 묵는 곳으로 찾아왔습니다.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며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예수에 관해 그들을 설득하려 했습니다.사도행전 28:23 · 두루새김

이 한 문장 안에 사도들이 실제로 무엇을 전하려 했는지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예수님에 관해 사람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의 주제가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설명하고,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1:3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분은 예수님이고, 마지막에서 그 나라를 전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 여러 민족과 도시로 전해진다는 것이 사도행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사람들이 죽은 뒤에 들어가는 장소가 아닙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서 자신의 구원과 다스림을 이루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악한 영들을 내쫓으시며 그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누가복음 4:43; 11:20).

그리고 사도행전 2:32-36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높이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일은 이제 높임받으신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일과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과 무관한 막연한 정치 체제나 먼 미래의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일과 예수님을 통해 앞으로 이루실 구원을 포함하는 소식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

로마의 유대 사람들은 이미 조상들의 하나님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설명해야 했던 것은 그들이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믿고 있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신에 관한 일을 설명하셨습니다(누가복음 24:27). 또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과 시편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죄 용서의 소식을 설명하셨습니다(24:44-47). 바울이 하는 일도 같은 방향에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성경을 버리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구절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으로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에는 각각의 시대에 주어진 명령과 약속, 심판과 회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본래 의미를 존중하면서,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것들이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는지 설명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가 어떤 구절을 어떤 순서로 풀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지만, 설명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예수님.

「어떤 사람들은 …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을 근거로 설득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믿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 설득되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8:24 · 두루새김

같은 말씀을 듣고, 같은 성경을 놓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갈라졌습니다. 누가는 어느 쪽이 몇 명이었는지, 다수가 믿었는지 소수가 믿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로마의 모든 유대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한 사건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분명히 어떤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다음에 등장하는 이사야의 말씀을 이해할 때 더욱 중요해집니다. 사람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채 떠나가기 전에 바울이 인용한 그 말씀은 사도행전 전체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구약 인용입니다.

「듣고 또 들어도」 — 마지막에 인용된 이사야의 말씀

사도행전 28:25–28 본문 →

바울이 마지막으로 인용하는 구약 본문은 이사야 6:9-10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결코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사도행전 28:26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이사야가 부름받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깨끗하지 못함을 깨닫고, 제단에서 가져온 숯불로 입술이 깨끗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낼 것인지 물으시자 그가 응답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는 사람들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밖의 말씀입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 이것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해 온 백성에 대한 심판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1-5장에서 예언자는 예배는 계속되지만 정의가 무너지고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받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고발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어진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 온 백성이 그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누가 백성의 눈과 귀를 닫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사야 본문 자체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집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이루어지는 완고함을, 사도행전이 따르는 그리스어 본문은 백성이 스스로 눈을 감았다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이 백성은 마음이 무디어졌고 귀로 잘 듣지 못했으며,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내게 고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사도행전 28:27 · 두루새김

그들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단순히 인간에게만 돌리거나,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마음대로 막으셨다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27절 끝의 「…고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부정적 결과가 누구의 행동과 연결되는지도 문법과 문맥상 논의되는 문제입니다. 본문의 긴장을 없애고 하나의 단순한 원리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인용하셨던 말씀

이사야 6:9-10은 복음서에서도 비유를 듣고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설명할 때 인용됩니다(마태복음 13:14-15; 마가복음 4:12; 누가복음 8:10).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모두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때도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장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영원히 버린다는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장의 마지막에는 황폐와 심판 이후에도 남는 그루터기가 등장하고(이사야 6:13), 이사야서 전체에서 남은 사람들과 회복의 소망이 계속 펼쳐집니다.

게다가 누가는 바로 앞에서 유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설득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 사람이며, 그는 로마에 도착한 뒤 유대 지도자들을 먼저 불러 이스라엘의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인용을 곧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다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의 흐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입니다. 초점은 이스라엘 전체가 구원에서 제외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반응이 성경에 나타난 완고함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들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구원이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들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8:28 · 두루새김

다른 민족에게 향하는 구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10장),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의 말씀을 근거로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로 향한다고 선언했으며(13:46-47), 예루살렘 회의는 다른 민족의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논의했습니다(15장). 28절은 책 전체를 통해 진행되어 온 하나님의 구원이 로마에서도 계속된다는 선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들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모든 다른 민족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모든 유대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다른 민족 가운데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은 유대 사람들도 계속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대비하는 것은 두 민족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선언은 26:18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 곧 사람들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하고 죄 용서와 거룩해진 사람들 가운데서의 몫을 얻게 하는 일과 이어집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선언 다음에 누가 몇 명 믿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한 집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계속되는 선포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6:9-10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예언자에게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무겁게 하며 눈을 감기게 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반면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졌고 그들이 귀로 듣지 못하며 자기 눈을 감았다는 진술로 나타나며, 사도행전 28:26-27의 인용은 이 그리스어 본문의 표현을 따릅니다. 이사야 6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완고함이 어떻게 관계되는지에 대해 깊은 해석상의 논쟁을 낳았습니다. 또 그루터기를 말하는 6:13의 마지막 표현은 본문이 전해진 과정과 해석에 논의가 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였습니다」 — 환대받던 사람이 모든 사람을 맞다

사도행전 28:30 본문 →

바울은 자기가 세를 내고 빌린 곳에서 꼬박 두 해를 지내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모두 맞아들였습니다.사도행전 28:30 · 두루새김

바울은 수많은 도시를 여행했습니다. 회당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광장에서 논쟁했으며, 가정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한집에 머뭅니다.

선교 여행의 길이 멈춘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증언이 멈추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삶에서,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바울을 찾아오는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는 찾아온 사람들을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찾아왔는지는 기록하지 않지만, 바울이 그들을 「모두」 맞아들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장면은 28장의 처음과 이어집니다. 멜리테에서는 섬사람들이 배가 부서져 살아남은 사람들을 맞아 주었고,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푸테올리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함께 지내 달라고 했고, 로마의 믿는 사람들은 먼 길을 나와 바울을 맞았습니다. 원문에서 각 장면에 쓰인 동사가 반드시 같지는 않지만, 누가는 이 장 전체에 걸쳐 맞아들이고, 대접하고, 돌보는 행동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울 자신이 머무는 집을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열어 둡니다.

환대받은 사람이 환대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소식이고,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는 일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그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려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전히 감시받는 사람입니다. 집을 빌리는 비용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두 해를 지낸 뒤 풀려났는지도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처지가 완전히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놓인 제한적인 자유 안에서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 사도행전의 마지막 단어

사도행전 28:31 본문 →

사도행전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28:31 · 두루새김

「거리낌 없이」는 거리낌 없이 말하는 담대함이나 공개적인 발언의 자유를 가리키는 말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원문의 마지막 단어 아콜뤼토스(ἀκωλύτως)는 방해받거나 제지당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사도행전은 수많은 방해의 이야기였습니다. 사도들은 붙잡혔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도시에서 쫓겨났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마지막 문장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라고 기록합니다.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사도행전 전체의 내용과 모순됩니다. 수많은 방해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마지막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동의 자유는 막혀 있지만, 그가 전하는 말씀은 계속됩니다.

누가가 왜 바울의 재판 결과를 설명하지 않고 이 지점에서 책을 끝냈는지는 견해가 갈립니다. 이 마지막 표현을 사도행전 전체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에 대해 내리는 결론으로 읽는 견해가 있고, 책을 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나 끝나지 않은 집필 과정에서 이유를 찾는 견해가 있습니다. 고대에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과 글의 결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견해가 갈리므로, 하나의 이유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 절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계속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3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고, 1:8에서는 성령이 임하시면 제자들이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제국의 중심 도시 로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합니다. 다만 로마는 제국의 중심이었지 세상의 끝은 아니었으므로, 로마를 곧 지리적인 의미의 「땅끝」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8의 약속이 로마에 도착함으로써 모든 면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보다, 복음이 로마에까지 이르렀으며 여전히 더 넓은 세계로 전해질 수 있는 상태로 이야기가 끝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열려 있는 집

사도행전 28:1–31 본문 →

사도행전 28장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장 전체에서 예수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자기 힘으로 구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부름받은 바울은 마지막에도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참되다고 해서 그 증인들에게 세상의 권력과 자유가 즉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와 고난이 예수님의 부활을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권력이 인정해 주어야만 전해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에, 그 소식은 쇠사슬에 묶인 사람의 입에서도 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진리를 전하는 일과 사람을 맞아들이는 일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분명하게 말했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언의 마지막 장면에는 사람들이 찾아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담대함은 다른 사람의 말을 막는 힘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예수님에 대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사도행전의 처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증언이 로마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곳에서 황제의 판결이나 완성의 선언을 남기지 않습니다. 바울이 결국 풀려났는지, 그의 생애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그 질문들에 답하는 대신 바울의 집을 보여 줍니다.

그 집에는 여전히 군인의 감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찾아오고, 바울은 그들을 맞아들여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예수님에 관해 가르칩니다. 누가는 몇 명이 믿게 되었는지도, 그가 마지막 방문객을 누구로 맞았는지도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일을 기록한 뒤 책을 마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방해받지 않았다는 말로 끝납니다.

로마의 한집에서 바울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아들이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