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막을 수 없는 생명의 말씀

사도행전 5장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또 한 사람이 죽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선포되고, 병든 사람이 치유되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공동체가 형성되던 이야기가 갑자기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더구나 그들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그 일부를 사도들에게 가져온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앞에서 바나바는 밭을 팔아 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4:37). 5장에서도 아나니아가 재산을 팔아 돈을 가져와 같은 자리에 둡니다. 재산을 팔았고, 돈을 가져왔고,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행동은 공동체의 나눔을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은 참혹한 죽음으로 끝납니다.

도대체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요?

누가는 아나니아가 쓰러지는 장면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가 쓰러지는 장소까지 명시합니다.

그 여자는 곧바로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 여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메고 나가 그 여자의 남편 곁에 묻었다.사도행전 5:10 · 본디새김

처음에는 돈이 사도들의 발 앞에 놓였고, 마지막에는 그 돈을 가져온 사람의 아내가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집니다. 같은 장소를 반복하는 이 묘사는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행동이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까?

공동체 안에서는 사람들이 거룩한 영을 속이려 합니다. 공동체 밖에서는 권력자들이 거룩한 영을 받은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 합니다. 앞에서는 재산을 숨기고, 뒤에서는 말씀을 가두려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자신의 뜻대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5장은 거룩한 영이 함께하시는 공동체에서 무엇을 감출 수 있으며,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누가 막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75장 본문 읽기 →

아나니아와 삽비라 —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사도행전 5:1–11 본문 →

문제는 얼마를 드렸느냐가 아니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 하나가 자기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다. 판 값에서 얼마를 몰래 떼어 두었는데, 아내도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아나니아는 판 값의 일부를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행전 5:1–2 · 본디새김

그들이 돈의 일부를 남겨 두었다는 사실 자체가 죄였을까요? 초대 교회에서는 재산을 팔면 반드시 전액을 내놓아야 했을까요? 베드로의 말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팔기 전에는 네 것으로 남아 있지 않았느냐? 팔린 뒤에도 그 돈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느냐? 어찌하여 이 일을 마음먹었느냐?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사도행전 5:4 · 본디새김

베드로는 두 번에 걸쳐 아나니아의 선택권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팔지 않을 수도 있었고, 팔고 나서 일부를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 남겨 둘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재산의 전부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해석은 본문과 맞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실제로 한 일과 공동체 앞에 드러내려 한 모습 사이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아나니아가 돈을 내놓으면서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8절에서 삽비라가 실제 판매 금액에 관해 거짓으로 대답하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이 일부만 내놓으면서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해석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일부를 남겨 두려는 의도와, 남겨 두지 않은 사람처럼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함께 있었습니다. 누가는 소유를 갖고 있으려는 마음 자체보다, 실제보다 더 큰 헌신을 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거짓을 문제 삼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 부부의 행동은 바나바의 행동과 닮아 있으면서도 정반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방식으로 돈을 가져왔지만, 그 행동을 통해 드러내려 한 진실은 달랐습니다.

「몰래 떼어 두었다」는 말에 담긴 이야기

2절에서 「몰래 떼어 두었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노스피조마이(νοσφίζομαι)는 자신에게 정당하게 속하지 않는 몫을 슬쩍 빼돌린다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 구약성경은 여호수아 7:1에서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진 물건 가운데 일부를 몰래 취한 일을 설명할 때 같은 동사를 사용합니다. 아간은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장막에 숨겼지만, 그 일은 공동체 전체가 심각한 문제를 겪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두 사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간이 취한 물건은 애초에 하나님께 바쳐져 사적으로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만, 아나니아의 재산은 베드로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둘 다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몰래 취하거나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시점,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가던 이스라엘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을 누가가 의도한 확정적인 유형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같은 동사의 사용과 사건의 구조는 두 이야기를 함께 읽게 합니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협하는 것은 바깥에서 오는 적대만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감추어진 거짓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는 말

베드로가 말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을 가득 채워 네가 거룩한 영을 속이고 밭값에서 얼마를 몰래 떼어 두게 했느냐?」사도행전 5:3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사람들이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어 동사의 형태는 동일하지 않지만,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대조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는 사탄에게 조종당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곧이어 「어찌하여 이 일을 마음먹었느냐?」라고 묻습니다. 악한 영적 영향을 말하면서도 아나니아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지우지 않습니다. 누가는 사탄이 인간의 생각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아나니아가 의도적으로 거짓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짓을 사람들을 속인 일로 끝내지 않습니다. 3절에서는 거룩한 영을 속였다고 했고, 4절에서는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나니아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공동체는 인간들이 만든 친목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한 영을 통해 함께하시는 공동체에서, 그 거짓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적인 속임수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아나니아는 죽어야 했는가?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 일을 들은 모든 이에게 큰 두려움이 일었다.사도행전 5: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낫게 하던 베드로 앞에서, 이번에는 한 사람이 쓰러져 죽습니다. 본문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심판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읽게 하고, 공동체 전체에 큰 두려움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죽음의 물리적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는 말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의 생명을 거두셨는지에 대한 묘사도 없습니다.

또한 여기서 모든 거짓말에는 즉각적인 죽음의 심판이 따라야 한다는 일반 법칙을 도출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여전히 독자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 불편함을 무조건 제거하려 하기보다, 누가가 실제로 무엇을 보여 주는지 살펴보는 편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공동체라고 해서 그 안의 거짓이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이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삽비라는 무엇을 선택했는가?

세 시간쯤 지나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대답했다. 「내게 말해 보아라. 너희가 밭을 그만큼에 팔았느냐?」 그 여자가 말했다. 「예, 그만큼입니다.」사도행전 5:8 · 본디새김

베드로는 왜 돈을 일부 남겼느냐고 묻지 않고, 실제로 밭을 얼마에 팔았느냐고 묻습니다. 그 질문 앞에서 삽비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정한 거짓을 그대로 말합니다. 누가는 이미 그녀가 그 일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고, 이제 그녀 자신의 대답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가 그 여자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너희는 주의 영을 시험하기로 입을 맞추었느냐? 보아라, 네 남편을 묻은 이들의 발이 문 앞에 있다. 그들이 너도 메고 나갈 것이다.」사도행전 5:9 · 본디새김

「시험하다」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행동을 아시는지, 그 행동에 어떤 결과가 따르는지를 시험하는 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공동체의 사람들을 속이려 했지만, 베드로는 그것이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삽비라 역시 곧바로 쓰러져 죽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남편의 죄 때문에 아내가 함께 벌을 받은 것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행동을 함께 계획했고, 각자가 그 거짓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반드시 죽음이 따라야 했는지 설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독자는 심판의 무게를 그대로 마주하게 됩니다.

「온 교회」에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리고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이에게 큰 두려움이 일었다.사도행전 5:11 · 본디새김

여기서 「교회」라는 낱말이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합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문장이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는 문장에서 처음 꺼내지 않습니다. 「온 교회」에 큰 두려움이 일어났다는 문장에서 꺼냅니다. 그래서 교회의 출발은 승리와 성공의 언어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 있는 공동체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자신들이 함께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볍게 대할 수 없다는 경외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렇게 큰 두려움이 일어났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교회」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사람들이 모인 집회나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는 말로, 특별한 종교 건물이나 오늘날과 같은 조직 형태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가리키지만, 19:32, 39, 41에서는 에베소의 일반적인 집회를 가리킬 때에도 쓰입니다. 4절에서 거룩한 영을 속인 일과 하나님께 거짓말한 일을 나란히 둔 표현을 기독교의 성령론은 거룩한 영의 신적 위상을 설명하는 근거로 읽어 왔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여기서 성령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레위기 10:1–3에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야훼께서 명하지 않으신 불을 드리다가 죽은 사건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사건도 제사장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놓여 있고, 두 사건의 잘못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을 가볍게 여길 수 없다는 주제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이 연결이 아나니아에게 내려진 심판의 모든 이유나 형벌의 비례성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이 몰려오다

사도행전 5:12–16 본문 →

아무도 감히 합류하지 못했는데, 믿는 사람은 늘어났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 백성 가운데 표징과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의 주랑에 있었다.사도행전 5:12 · 본디새김

아나니아 부부의 죽음 이후에도 사도들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누가는 공동체 안의 심판을 묘사한 뒤, 공동체가 위축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표징과 놀라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표징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13절과 14절을 나란히 읽으면 이상한 대조가 나타납니다.

그 밖의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그들에게 감히 합류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높이 여겼다.사도행전 5:13 · 본디새김
믿는 이들이 더욱 많이 주에게 더해졌다. 남자도 여자도 그 수가 많았다.사도행전 5:14 · 본디새김

이 문제는 「그 밖의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직 믿지 않는 외부 사람들이 공동체를 존경하면서도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했다는 읽기, 진정한 믿음 없이 겉으로만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주저했다는 읽기, 사도들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과 그 밖의 사람들을 구별하는 표현이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그 범위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이 공동체를 가볍게 대할 수 없게 되었고, 다가가는 데에는 두려움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높이 평가하는 것과 실제로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가는 새 신자들이 「주에게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살아나신 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그림자까지 기대한 사람들

그래서 사람들이 병든 이들을 큰길로 메고 나와 침상과 요 위에 두기까지 했다.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라도 그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그늘을 드리우게 하려는 것이었다.사도행전 5:15 · 본디새김

베드로의 그림자에 실제로 치유 능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본문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했다고 말할 뿐, 그림자가 닿았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났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16절은 병든 사람들이 모두 고침을 받았다고 기록하지만, 그 방식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이 그만큼 널리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8:43–48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병이 나은 여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옷에 마법적인 능력이 있다고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 여자의 믿음과 구원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은 독립적인 기적 행위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들이며, 그들을 통한 치유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16절에서는 예루살렘 둘레의 도시들에서도 무리가 병든 이들과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데려오고, 모두 고침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치유로 시작된 소식이 이제 여러 도시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누가는 또 하나의 「가득 채워짐」을 기록합니다.

시샘으로 가득 찬 사람들, 그러나 감옥은 비어 있었다

사도행전 5:17–26 본문 →

무엇이 대제사장들을 움직였는가?

그러자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이들이 모두 일어났다. 그들은 사두개파라는 갈래였는데, 시샘으로 가득 채워져 사도들을 붙잡아 공공 감옥에 가두었다.사도행전 5:17–18 · 본디새김

「시샘」(ζῆλος)으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본래 강한 열정이나 열심을 뜻할 수 있어서, 문맥에 따라 긍정적인 열심도, 질투와 시기도 나타냅니다. 여기서는 사도들을 붙잡는 행동의 동기로 등장하므로 「시샘」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에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에 관한 표현이 반복됩니다. 아나니아의 마음은 사탄으로 가득 채워졌고, 대제사장 일행은 시샘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반면 사도들은 앞서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4:31).

하나님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낫게 하시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그 일을 기뻐하기보다 사도들을 붙잡습니다. 그들이 시샘을 품은 구체적인 이유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지만, 누가는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성전에서 가르치던 사람들을 가두어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왜 사도들을 풀어 주었을까?

그런데 주의 천사가 밤중에 옥문을 열고 그들을 이끌어 낸 뒤에 말했다.사도행전 5:19 · 본디새김
「가거라. 그리고 성전에 서서 이 생명에 관한 모든 말을 백성에게 일러 주어라.」사도행전 5:20 · 본디새김

천사는 몸을 숨기라고도, 예루살렘을 떠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붙잡았던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 성전으로 돌아가라고 명합니다. 사도들은 말씀을 전한다는 이유로 붙잡혔는데, 하나님이 그들을 이끌어 내신 목적은 다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에 관한 모든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시는 새로운 생명, 부활을 통해 드러난 생명, 또는 사도들이 경험하고 선포하는 구원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표현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깊이 연결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도들은 그 명령을 듣고 새벽에 성전으로 들어가 다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감옥은 잠겨 있는데 죄수들은 성전에 있다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공회를 불러 모으고 사도들을 데려오라고 옥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없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옥은 아주 단단히 잠겨 있고 간수들도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열어 보니 안에 아무도 없었습니다.」사도행전 5:23 · 본디새김

누가는 감옥이 다시 어떻게 잠기게 되었는지, 간수들이 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지도자들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감옥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누군가 와서 그들에게 알렸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옥에 가둔 그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5:25 · 본디새김

사도들은 숨어 있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가두어 말씀을 멈추게 하려 했지만, 사도들은 다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권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시기보다, 더 뜻밖의 방식으로 그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감옥 문을 잠글 수는 있었지만, 사도들을 그 안에 붙들어 둘 수는 없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그러자 경비대장이 부하들과 함께 가서 그들을 데려왔다. 힘으로 데려오지는 않았다. 백성에게 돌로 맞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사도행전 5:26 · 본디새김

공식적인 권력을 가진 쪽은 경비대장과 부하들인데, 두려움을 느끼는 쪽도 그들입니다. 그렇다고 사도들이 위험에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심문을 받고, 곧 매질까지 당합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붙잡을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언제나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사도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집단이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따르는지가 점점 선명하게 갈라집니다.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들씌우려 한다」

사도행전 5:27–32 본문 →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너희에게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보아라, 너희는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웠고, 이 사람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들씌우려 한다.」사도행전 5:28 · 본디새김

대제사장은 「이 이름」, 「이 사람」이라고만 말하고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의도적인 경멸인지, 법정에서 쓰던 표현상의 관례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그 명령을 어겼다고 심문하면서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너희 가르침으로 가득 채웠고」라는 말로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예루살렘에 널리 퍼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그들의 명령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지도자들의 입에서 드러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따른다는 말의 의미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사도행전 5:29 · 본디새김

이 말은 종종 모든 인간의 권위보다 자신의 신념을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모든 인간의 법과 권위를 부정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했고, 주의 천사는 성전에 서서 이 생명에 관한 모든 말을 일러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는 침묵하라는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말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이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과 같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명을 중단하라는 명령 앞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의 권위를 거절하는 데 머물지 않고, 곧바로 예수님에 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죽인 사람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주시려는 예수님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셨습니다.」사도행전 5:30 · 본디새김

베드로는 십자가 대신 「나무에 매달아」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수치스러운 죽음에 넘겼고,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분을 여는 이요 구원자로 자기 오른손으로 높이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5:31 · 본디새김

「여는 이」(ἀρχηγός)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이, 또는 앞장서 이끄는 이를 뜻하며, 3장에서 예수님을 「생명을 여는 이」라고 부른 말과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구원자」가 함께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이름을 금지하고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목적이 회개와 죄 용서를 주시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높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죽인 사람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높임받으신 분으로 소개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지도자들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라고 말하며 그들의 책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드러내는 말은 동시에 그들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길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회개와 죄 용서를 주려는」 분으로 높임받으셨다고 말합니다. 회개조차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함께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들의 증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주신 거룩한 영도 증인입니다.」사도행전 5:32 · 본디새김

사도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관해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을 말하는 증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만 증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영의 활동 자체가 예수님에 관한 증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 거룩한 영이 함께하셨고, 그들의 손을 통해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관한 증언은 사도들 개인의 기억이나 설득력에만 의존하는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여기서 끝나고, 이야기는 다시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나무에 매달아」라는 표현은 신명기 21:22–2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본문은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시신을 밤새 그대로 두지 말라고 하며, 나무에 달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라는 문제가 따름을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 신명기 본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5:30이 신명기를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지만,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율법 전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같은 증언을 듣고도 사람들은 다르게 반응한다

사도행전 5:33–40 본문 →

마음이 찔리는 대신 격분하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했다. 그리고 사도들을 죽일 계획을 의논했다.사도행전 5:33 · 본디새김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2:37). 두 장면에서 선포된 메시지의 중심은 같습니다. 사람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일으키셨으며, 그분을 통해 회개와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은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다른 쪽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없애려 합니다.

사도들의 증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돌이키고, 어떤 사람들은 증언 자체를 거부합니다. 거룩한 영이 함께하시는 증언이라고 해서 모든 청중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사도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가말리엘은 왜 사도들을 풀어 주자고 했을까?

그런데 공회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온 백성이 귀히 여기는 율법 교사였다. 그가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했다.사도행전 5:34 · 본디새김

지금까지 사도들을 강하게 반대한 이들 가운데 사두개파가 있었는데, 여기서 발언하는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이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을 스스로 신중히 살피십시오.」사도행전 5:35 · 본디새김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메시지가 진실이라고 선언하지 않고,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는 먼저 동료들이 내리려는 결정의 결과를 신중하게 살피라고 권하며, 드다와 갈릴리 사람 유다를 언급합니다. 드다를 따르던 약 사백 명도, 호적 등록 때 일어난 유다의 추종자들도 지도자가 죽자 흩어졌습니다.

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운동은 그 지도자의 죽음과 함께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운동도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무너질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드다의 연대에는 역사적 어려움이 있지만(아래 「조금 더 깊이」), 이 발언이 이야기에서 하는 역할은 분명합니다. 그는 성급한 살해 결정을 막으려 합니다.

「하나님과 싸우는 이」가 되지 않도록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여러분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싸우는 이로까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들이 그의 말에 설득되었다.사도행전 5:39 · 본디새김

공회는 사도들을 죽일 것인지 의논하고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들을 없애려는 시도가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로 앞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도자들이 가둔 사도들은 다시 성전에서 가르쳤고, 금지한 이름에 관한 가르침은 예루살렘에 널리 퍼졌습니다.

다만 가말리엘의 말을 오래 살아남거나 성공한 운동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다는 보편적인 법칙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 속에는 오래 지속된 잘못된 운동도 있고, 오랫동안 억압받은 정의로운 운동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일이 언제나 단기간에 성공하거나 쉽게 인정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가말리엘의 말은 사도들의 증언이 참이라는 증명도 아닙니다. 누가가 제시한 증거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는 사도들의 증언, 거룩한 영의 활동,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표징들입니다. 가말리엘의 말은 신앙 고백이라기보다, 공회가 그것을 무력으로 억압하기 전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설득되었는데도 매질했다

공회는 가말리엘의 말에 설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40절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불러 매질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한 뒤 놓아주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이려는 계획은 중단했지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명령에 복종시키려 합니다. 사도들은 풀려났지만 상처를 입었고, 공식적인 금지 명령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조금 더 깊이

갈릴리 사람 유다는 기원후 6년 무렵 로마의 호적 등록과 과세에 반대했던 인물로, 요세푸스가 기록합니다. 요세푸스는 드다라는 인물이 사람들을 이끌고 요단강으로 갔다가 로마 당국에 진압된 사건도 기록하는데, 그 사건은 유대 총독 쿠스피우스 파두스의 재임기, 곧 기원후 44–46년 무렵에 일어났습니다(『유대 고대사』 18.1–10과 20.97–98). 그런데 사도행전의 가말리엘은 드다를 유다보다 먼저 활동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사도행전 5장의 사건도 그 드다 사건보다 앞섭니다. 두 기록의 드다가 동일 인물이라면 연대상 어려움이 생깁니다. 드다라는 이름의 다른 인물이 이전에도 활동했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고, 저자가 연대를 혼동했거나 가말리엘의 연설을 문학적으로 구성하면서 후대 사건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재 자료만으로 두 드다가 같은 사람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어려움을 없었던 것처럼 처리하거나 입증되지 않은 다른 드다가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모두 신중하지 못한 설명입니다.

매질을 당하고도 기뻐한 사람들

사도행전 5:41–42 본문 →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했는가?

그래서 그들은 그 이름을 위해 모욕을 당하기에 합당한 이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갔다.사도행전 5:41 · 본디새김

사도들은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기뻐합니다.

그들이 아프지 않았거나 매질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핵심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그 고통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다가 수치를 당했고, 그 수치를 우연한 불행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이름의 증인이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22–23에서 인자 때문에 사람들이 미워하고 배척하고 모욕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라는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판단이 아니라는 약속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그 말씀과 관련된 일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합당한 이로 여겨진 것」이라는 표현도 역설적입니다. 보통 사람은 명예로운 일을 맡을 자격을 인정받을 때 기뻐하지만, 사도들은 모욕을 당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여겨진 것을 기뻐합니다. 십자가에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일으키고 높이셨기에, 그분을 증언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수치가 자신들의 마지막 평가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모욕이나 고난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비판받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 책임을 지는 일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한 고난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사도들이 기뻐한 이유는 그들의 고난이 분명히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모든 것을 뒤집는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또 집집이 그리스도 예수에 관해 가르치고 그분을 복음으로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사도행전 5:42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을 붙잡았던 지도자들이 있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집에서도 가르쳤습니다. 큰 공개 장소에서도, 일상의 공간에서도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 계속 전해졌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에 또 다른 기적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천사가 다시 나타나지도 않고, 공회가 회개하거나 갈등이 해결되는 장면도 없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는 일도,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는 일도 특별한 순간에 일어났지만, 사도들이 맡은 일은 그런 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극적인 구출 이후에도, 심문과 매질 이후에도 날마다 계속되는 일상의 증언입니다.

거룩한 공동체와 멈추지 않는 말씀

사도행전 5:1–42 본문 →

사도행전 5장은 공동체 안의 거짓과 공동체 밖의 박해라는, 서로 크게 달라 보이는 두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감추지 못했고,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를 사람들이 거짓으로도, 권력으로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너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다」라고 말했고, 공회 앞에서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이신 목적이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용서를 주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공동체 안의 거짓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은 공동체 밖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회개와 죄 용서의 길을 열어 둡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사건만 강조하면 하나님은 거짓을 범한 사람을 즉시 죽이시는 두려운 분으로만 남고, 회개와 용서만 강조하면서 그들의 죽음을 가볍게 넘기면 공동체의 진실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놓치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도들은 공회에서 매질을 당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다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며 공회를 떠나, 성전에서, 또 집집이 그리스도 예수님에 관해 가르치고 그분을 복음으로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입을 막으려던 사람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감옥도 그대로 있고, 공회의 권위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의 성전과 집집에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이름을 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