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성전에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걷고 뛰는 모습을 직접 보았고, 베드로는 그 일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을 낫게 한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힙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돈을 요구하거나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폭동을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걷게 했고, 그 일이 누구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다음 날 지도자들은 두 사람을 가운데에 세우고 「너희가 무슨 힘으로, 또는 무슨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서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논의 끝에 두 사람을 놓아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 도무지 입을 열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했다.사도행전 4:18 · 본디새김
처음에는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느냐고 묻더니, 그 이름을 듣고 나서는 다시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4장의 갈등이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금지하려는 인간의 권위가 충돌할 때 어떻게 됩니까?
누가는 그 대답을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발언으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풀려난 뒤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서로 나누는 장면까지 이어서 보여 줍니다. 말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그들은 다시 말할 힘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더는 오직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일을 예수 안에서」
반대자들이 등장한 이유
그들이 백성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그들에게 들이닥쳤다.사도행전 4:1 · 본디새김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직 백성에게 말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이 들이닥쳤다고 기록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도중에 제지가 시작된 것입니다.
등장한 사람들의 구성을 보면 이 일이 단순히 개인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예배와 제사에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성전 경비대장은 로마군 지휘관이 아니라 성전의 질서와 경비를 책임지는 성전 경비 조직의 관리로 이해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의 제사장 귀족층과 긴밀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들이 왜 언짢아했는지 명확히 밝힙니다.
두 사람이 백성을 가르치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일을 예수 안에서 알리는 것을 몹시 언짢아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4:2 · 본디새김
핵심은 부활입니다.
사도행전 23:8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죽은 사람들이 언젠가 부활한다는 일반적인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붙잡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일을 예수 안에서」 알리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도 부활에 관한 견해는 갈렸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부활이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 더구나 그 예수님은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입니다.
따라서 이 선포는 종교적 교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의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됩니다. 사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거절하고 죽음에 넘긴 예수님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고 높이신 것입니다. 이 선포가 성전 지도자들에게 불편했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누가는 그들의 구체적인 정치적 계산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혀 다음 날까지 갇힙니다.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이야기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다. 남자들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사도행전 4:4 · 본디새김
사도들은 붙잡혔고, 그들의 말을 막으려는 힘이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가두는 일이 이미 전해진 말씀의 결과까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누가는 이처럼 시작부터 두 가지 움직임을 나란히 놓습니다. 인간의 권위는 사도들의 활동을 중단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그 갈등은 다음 날 공식적인 심문 자리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는 오천 명이 앞서 믿었던 사람들에 추가된 수인지, 당시 믿는 남자들의 전체 수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 장의 삼천 명과 단순히 더해 정확한 신자 수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피고가 된 사람들, 그러나 심문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지도자들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다음 날 예루살렘에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모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집안의 사람들도 함께합니다. 누가는 이 모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분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 심문받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운데에 세우고 물었다. 「너희가 무슨 힘으로, 또는 무슨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사도행전 4:7 · 본디새김
지도자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먼저 묻지 않습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일으킨 힘과 권위의 근거를 묻습니다. 성전의 질서와 종교적 권위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던질 법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질문 자체를 다시 보게 합니다.
「우리가 오늘 몸이 성치 않은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한 것을 두고, 곧 이 사람이 무엇으로 나았는지를 두고 심문을 받는 것이라면,」사도행전 4:9 · 본디새김
질문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도자들은 어떤 권위로 그 일을 했는지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이 사람에게 유익을 준 일이었다는 사실부터 확인합니다. 그는 이 사건을 추상적인 종교 논쟁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실제로 몸이 성치 않았던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이제 성한 몸으로 서 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이 심문의 출발점입니다.
거룩한 영이 베드로에게 주신 것
8절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화가 나서 격렬하게 말하거나 타고난 웅변술로 지도자들을 압도했다는 설명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회당이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거룩한 영이 그때에 해야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12:11–12). 그 약속이 여기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모두와 이스라엘 온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로 그 이름으로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사도행전 4:10 · 본디새김
베드로는 지도자들이 묻는 두 가지에 한꺼번에 대답합니다. 그 힘도, 그 일이 이루어진 이름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이라는 말을 덧붙여, 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호하게 두지 않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대조를 한층 더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시편을 인용합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
「이 예수는 집 짓는 여러분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입니다.」사도행전 4:1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시편 118:22에서 가져온 것으로,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판단해 버린 돌을 여호와야훼께서 중요한 돌로 삼으셨다는 역전을 노래합니다. 신약은 이 돌의 이미지를 예수님께 적용하며, 누가복음 20:17에서 예수님 자신도 이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의 인용에는 변화가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집 짓는 이들이」 버렸다고 말하지만, 베드로는 「집 짓는 여러분에게」 업신여김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시편 속의 집 짓는 사람들이 지금 베드로 앞에 앉아 있는 지도자들과 겹쳐집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지금 이 법정에서 일어난 일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의 신앙과 성전의 질서를 지키는 책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어느 돌을 사용할지 판단하듯, 그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판단했고,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권위자들은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을 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여러분이 버린 예수를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자리에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나은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의 구원으로
「그리고 다른 누구 안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중에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받아야 할 다른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12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선포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치유 사건과 분리하여 읽으면 누가가 의도한 연결을 놓칠 수 있습니다. 9절의 「나았는지」(σῴζω)와 12절의 「구원」(σωτηρία) 「구원받다」는 그리스어로 같은 어근의 말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처음에는 한 사람이 어떻게 나았는지가 문제였다면 이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누구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지 말합니다.
물론 한 사람이 걷게 된 것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두 사건을 같은 구원 언어 안에서 연결합니다. 성한 몸으로 서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 회복의 실제적인 증거라면, 베드로는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어떤 구원을 가져오는지 더 넓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 구원의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특정한 이름의 소리를 발음하는 행위가 구원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수님께 구원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너희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으로 구원받아야 할 다른 이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심문받는 사도들과 심문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며, 그에게도, 요한에게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이름은 같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분명한 선포를 들은 지도자들이 보인 반응은 뜻밖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8편은 고난과 압박 속에서 여호와야훼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시입니다. 본래 시편에서 그 돌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왕, 또는 구원받은 의인과 연결하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정확히 기초의 모퉁잇돌인지, 높은 곳의 머릿돌인지에 관한 해석도 갈릴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 돌이 건물의 핵심적인 자리에 놓였다는 점입니다. 9절의 「나았는지」에 쓰인 동사 소조는 구원하다, 건져 내다, 낫게 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며, 12절의 「구원」과 「구원받다」도 같은 어근에 속하는 소테리아와 소조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지도자들이 놀란 이유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고, 그 둘이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 예사 사람인 것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했다. 그리고 그 둘이 예수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사도행전 4:13 · 본디새김
베드로와 요한은 전문적인 율법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당시의 율법 전문가들과 같은 교육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는 두려움 없이 공개적으로,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담대함을 나타냅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13절에만 쓰지 않습니다. 29절에서 공동체는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고, 31절에서 그들은 실제로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도자들이 놀라워한 담대함이 공동체의 기도 제목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13절에는 또 하나의 문장이 있습니다. 「그 둘이 예수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 말은 그들의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여 주는 단서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보았습니다.
누가는 ‘정식 교육은 필요 없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교육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을 따랐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그 책임을 권력자들 앞에서도 피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쪽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반박할 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사도행전 4:14 · 본디새김
장면이 묘하게 뒤집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을 심문하던 사람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바로 옆에 나은 사람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공회 밖으로 내보낸 뒤 의논합니다.
그들이 말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지? 사실 그들을 통해 뚜렷한 표징이 일어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이에게 드러나 있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다.」사도행전 4:16 · 본디새김
이 말이 지도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과 신적 권위를 인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치유의 표징이 일어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표징의 의미를 더 깊이 살피거나 자신들의 판단을 다시 검토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백성에게 더 퍼지지 않게, 다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을 을러 두자.」사도행전 4:17 · 본디새김
지도자들은 일어난 일을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그 일이 알려지는 것은 막으려 합니다. 그래서 명령의 대상도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통제하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했다. 「하나님의 말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지, 여러분이 판단하십시오.」사도행전 4:19 · 본디새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20 · 본디새김
이 답변은 ‘우리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권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도자들의 명령과 하나님이 맡기신 증언의 책임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그 판단을 지도자들 자신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전파할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일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증언을 중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중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에는 두 부정이 겹쳐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지가 강하다는 주장만이 아니라, 보고 들은 사건과 그 사건을 증언해야 할 책임 때문에 침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국 풀려납니다. 지도자들이 베드로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 때문에 두 사람을 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입니다.
이 치유의 표징이 일어난 그 사람은 마흔 살이 넘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4:22 · 본디새김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고, 이제 마흔 살이 넘었습니다. 이 치유는 잠시 아팠다가 회복된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알고 지내던 그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진 사건입니다. 그가 직접 공회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나이는 사건의 무게를 더합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달라진 몸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곧바로 다시 군중에게 설교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자기네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에 해당하는 아그람마토이는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정식 학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이어지는 이디오타이는 전문적인 지위나 훈련이 없는 일반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글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거나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위협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풀려난 뒤에 그들은 자기네 사람들에게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두 사람에게 한 말을 다 알렸다.사도행전 4:23 · 본디새김
공동체는 즉시 지도자들을 비난하거나 보복할 방법을 의논하지 않습니다. 당장 예루살렘을 떠나야 한다고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에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주인님, 당신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사도행전 4:24 · 본디새김
왜 이런 상황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부를까요?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권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가 온 세상의 마지막 권위는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은 성전 지도자들보다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신적 권력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성전 지도자들의 명령도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주인님」은 집과 그 안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흔히 「주님」으로 옮기는 표현과 구별해 「주인님」(δεσπότης)으로 옮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29절에서 그들이 자신들을 「당신의 노예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세상에는 그들에게 명령하는 권력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간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왜 시편 2편을 기도하는가?
「당신은 거룩한 영으로 우리 조상이며 당신의 종인 다윗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사람들이 날뛰고 백성들이 헛된 것을 꾀했습니까?』」사도행전 4:25 · 본디새김
「『땅의 왕들이 나서고 지도자들이 주와 주의 그리스도를 거슬러 한자리에 모였습니다.』」사도행전 4:26 · 본디새김
시편 2편은 여호와야훼와 그분이 세우신 왕을 거슬러 민족들과 왕들이 반역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 때문에 당황하거나 위협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이 세운 왕의 권위를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공동체는 이 시편을 예수님의 고난에 적용합니다.
「참으로 이 도시에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기름 부으신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모였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27 · 본디새김
시편에서 왕들과 지도자들이 여호와야훼와 기름 부음 받은 왕을 거슬러 모였다면, 예루살렘에서는 헤롯과 빌라도,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슬러 모였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본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합니다. 시편 2편의 기름 부음 받은 왕과 예수 그리스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시편 2편이 처음부터 헤롯과 빌라도라는 두 인물의 이름을 예언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시편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한 민족들의 반역이며, 초기 공동체는 그 왕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고난과 높임받으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얻었다고 이해합니다.
또 시편에서는 이방 민족들과 왕들이 반역하지만, 공동체가 예수님의 사건에 적용할 때에는 이방 사람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등장합니다. 여러 집단이 함께 예수님을 거슬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유대인 전체에 영구적인 책임을 돌리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의 중심은 특정 민족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그들의 반대가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사람들은 책임이 없는가?
「그들이 행하려고 모인 그 모든 일은 당신의 손과 뜻이 일어나도록 미리 정해 두신 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4:28 · 본디새김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인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한 것뿐이므로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분명히 사람들이 「예수를 거슬러」 모였다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선한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행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다루시는지에 관한 완성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였지만,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따라서 공동체는 지금 자신들이 받는 위협도 하나님의 통치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구한 것
「그러니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살펴보시고, 당신의 노예들이 당신의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전하게 해 주십시오.」사도행전 4:29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한 지도자들을 당장 벌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아 달라거나, 안전한 다른 장소로 보내 달라는 요청도 없습니다. 위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협을 하나님 앞에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는 것은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 없이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장의 흐름을 하나로 묶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공동체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용기가 충분하다고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그 용기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이 이미 공회 앞에서 드러났지만, 그것이 앞으로의 모든 위험에 대해 스스로 충분하다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요청해야 합니다.
「당신이 손을 뻗어 낫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하시면서 말입니다.」사도행전 4:30 · 본디새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 함께 놓입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달라고만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손을 뻗어 일하시기를 구합니다. 사람들이 말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일의 근거가 되는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며, 사람들을 낫게 하시는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모인 곳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이 간구하자 모여 있던 곳이 흔들렸다. 그리고 모두가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하나님의 말을 거리낌 없이 전하고 있었다.사도행전 4:31 · 본디새김
모인 곳이 흔들린 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응답은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했다는 것, 바로 그들이 구한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에 거룩한 영을 받았다고 해서 그 뒤로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위협 앞에서 다시 구했고, 하나님은 말씀을 전할 힘을 주셨습니다. 이 장은 그 힘을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말씀을 전하는 담대함으로 보여 줍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공동체의 일상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모인 곳이 흔들린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도 여호와야훼가 시나이산에 임하실 때 산이 크게 진동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4장의 흔들림을 그와 완전히 같은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도 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
공동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은 이들의 무리는 마음과 목숨이 하나였다. 그리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두고 아무도 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은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사도행전 4:32 · 본디새김
앞에서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누가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기록합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이것은 오직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두 문장을 의도적으로 대조시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 전체를 읽으면 말과 소유의 관계가 의미 있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강제로 모든 소유권이 폐지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소유의 법적 형태보다 소유를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그들은 위협 속에서도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이제 누가는 그 공동체의 삶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믿음은 말로만 표현되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돌아보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부활 증언과 재산 나눔은 왜 한 문단에 놓였을까?
그리고 사도들은 큰 힘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었고,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사도행전 4:33 · 본디새김
32절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34–35절은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사이에 부활 증언에 관한 문장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두 가지 좋은 일을 동시에 했다는 보고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듣고 믿게 된 공동체는 이제 서로의 필요를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부활에 관한 증언과 새로운 공동체의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본문은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재산을 전부 나누어야 한다’는 명령이라기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신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에서는 각 사람의 필요가 중요해졌고, 그들이 가진 것이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밭이나 집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그것을 팔아 팔린 것의 값을 가져왔기 때문이다.사도행전 4:34 · 본디새김
「궁핍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은 신명기 15:4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이 하나님의 복 안에서 살아갈 때 그들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이상을 말씀하십니다. 빚을 면제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펴는 일에 관한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사람이 계속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누가가 초대 교회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당시 공동체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 그 값을 가져왔고, 그 결과 궁핍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자, 그 재산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러면 저마다 지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어졌다.사도행전 4:35 · 본디새김
나눔의 기준은 필요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받았다거나, 많이 가진 사람이 같은 액수를 내야 한다는 규칙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감정이나 추상적인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구체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누가는 이 나눔을 영웅적인 희생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33절에서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낫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고, 자신의 용기만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듯이, 공동체의 나눔도 자기들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바나바 — 한 사람의 행동으로 끝나는 이야기
왜 갑자기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까?
누가는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설명한 뒤, 마지막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요셉은 사도들에게 바나바라고 불린 사람인데, 그 이름을 옮기면 「위로의 아들」이다. 레위 사람이고 키프로스 태생이었다.사도행전 4:36 · 본디새김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그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격이나 역할과 연결된 별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나바가 어떤 위대한 설교를 했다거나 특별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먼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소유하고 있던 밭을 팔아 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행전 4:37 · 본디새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이 이제 한 사람의 이름과 행동을 통해 눈앞의 장면이 됩니다. 그 밭이 키프로스에 있었는지 예루살렘에 있었는지, 어떤 경위로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바나바의 재산 형성 과정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줍니다.
위로는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그가 실제로 한 일은 돈을 가져와 공동체 앞에 놓은 것입니다. 누가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의 필요를 채웠는지 기록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고 상상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앞 문맥은 그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졌다고 알려 줍니다.
바나바의 행동은 공동체의 나눔에 참여하는 행동이며, 그의 별명과 잘 어울리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위로는 반드시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도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셈어 표현에서 ‘무엇의 아들’은 어떤 성격이나 특징을 지닌 사람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쓰인 파라클레시스는 위로뿐 아니라 격려나 권고를 의미할 수 있어서, 「위로의 아들」과 「격려의 아들」 두 번역 모두 문맥상 가능한 읽기입니다. 또 구약에서 레위 지파는 일반적인 영토 분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의 몫이라는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민수기 18:20–24). 그렇다고 레위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토지나 집도 소유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민수기 35:1–8은 레위 사람들에게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를 주도록 규정합니다. 따라서 바나바가 레위 사람인데 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성경과 모순된 것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이 보여 주는 부활의 힘
사도행전 4장의 장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한 사람이 나았고, 그 이름 때문에 사도들은 붙잡혔으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름을 증언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공동체는 그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금지하려는 인간의 권위가 충돌할 때,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판단과 행동을 뒤집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지도자들은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 이름을 증언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재산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위험에서 보호받고, 언제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며, 언제나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혔고,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으며, 공동체 안에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도들이 말할 수 있도록 거룩한 영을 주시고,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지막에 그 모든 일을 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이 밭을 팔았습니다.
그는 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말을 막으려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발 앞에는 누군가 자신의 밭을 팔아 가져온 돈이 놓여 있습니다. 그 돈은 더 많은 말이나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날들의 이야기 끝에서, 한 사람이 말없이 자신의 것을 가져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내놓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바나바가 가져온 돈과 사도들의 발 앞에서 조용히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