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아름다운 문 앞에서 시작된 회복

성전에는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 문을 지나 하나님께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그를 성전 문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는 그곳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적선을 구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누군가 그를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다시 같은 자리에 놓였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 일상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날마다」라는 짧은 표현 하나가 그의 삶에 오랫동안 반복되었을 일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며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었는지는 분명합니다. 돈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적선을 청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에게 돈을 주지 않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어라」 하고 말합니다. 곧이어 그는 평생 해 보지 못했던 일을 합니다. 일어서서 걷고, 뛰어오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듭니다. 처음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군중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우리를 뚫어지게 보십니까?」 하고 물으며, 그 시선을 자신들에게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일으키신 분, 생명을 여시는 분,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신 종 예수님입니다.

사도행전 3장은 한 사람이 어떻게 걷게 되었는지 보여 주는 이야기이면서,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밝혀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발과 발목이 튼튼해진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의 회복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거대한 약속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이었습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우리를 보아라」 —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받은 사람

사도행전 3:1–6 본문 →

기도하러 가던 길에 만난 사람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 시각인 아홉째 시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사도행전 3:1 · 본디새김

아홉째 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오후 세 시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던 시간이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특별한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성전으로 향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고치기로 미리 약속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의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실려 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성전 문 앞에 그를 두곤 했다. 그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이들에게 적선을 구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사도행전 3:2 · 본디새김

두 움직임이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발로 성전에 올라갑니다. 다른 사람은 누군가에게 실려 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은 들어가는 이들에게 적선을 받기 위해 문 앞에 놓입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이동할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자비에 의지했습니다. 성전 문은 그에게 중요한 생계의 장소였습니다.

누가는 문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묘사하지 않고 그 이름만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그 이름은 묘한 대비를 만듭니다. 아름다운 문 앞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뒤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그가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전과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바뀐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를 보아라.」사도행전 3:4 · 본디새김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시선을 한곳에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에게도 자신들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며 두 사람을 주목합니다.

눈길은 서로 마주쳤지만, 기대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 사람은 돈을 기대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것을 주려 합니다.

베드로가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준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걸어라.」사도행전 3:6 · 본디새김

이 말을 흔히 물질적인 도움보다 영적인 도움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돈이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적선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앞 장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2:44–45).

베드로가 실제로 말한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그가 지금 가진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것은 자신의 재산도 아니고, 개인적인 능력도 아닙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름다운 문」이 정확히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니카노르 문이나 성전 동쪽의 다른 문과 연결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그 위치에 관한 자료와 해석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걸어라 —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

사도행전 3:7–10 본문 →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표시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권위와 관계가 있는지를 나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를 그 이름 자체에 어떤 신비한 음성적 능력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특정한 소리를 발음하여 치유 능력을 작동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말하고 있습니다. 뒤이은 설교에서 그는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자신의 힘이나 경건이 아니라고 명확히 부정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주문이 아닙니다. 지금 이 일이 누구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그를 일으켰다. 그 자리에서 그의 발과 발목이 튼튼해졌다.사도행전 3:7 · 본디새김

기적은 베드로의 말이 끝난 뒤 멀리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납니다.

7절의 「그를 일으켰다」(ἐγείρω)는, 15절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말할 때와 똑같은 동사형입니다. 두 사건은 같지 않지만, 같은 낱말의 사용은 두 장면을 연결해서 읽게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일으켰고, 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눈앞에서 일어난 사람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사건이 됩니다. 기적의 중심은 베드로의 손이 아니라 그 손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어오른다

그는 뛰어올라 섰고 걸었다. 그리고 걷고 뛰어오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사도행전 3:8 · 본디새김

뛰어오릅니다. 섭니다. 걷습니다. 다시 걷고 뛰어오릅니다.

누가는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기록하고 넘어가지 않고, 그가 새로운 움직임을 실제로 사용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의 모습이 한 사람의 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이전에는 성전 문 앞에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발로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은 그가 이전에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이야기의 공간적 변화는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가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났는지, 그 일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적선을 바라고 앉아 있던 그 사람인 줄 알아보고, 그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놀라움과 망연함으로 가득 채워졌다.사도행전 3:10 · 본디새김

만약 낯선 사람이 갑자기 성전에서 뛰어다녔다면 사람들은 그가 원래 어떤 상태였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날마다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오래도록 걷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걷고 뛰는 모습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반복되던 일상이 기적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달려가 모인 곳은 솔로몬의 주랑이라 불리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또 하나의 장면이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7절과 15절의 같은 동사가 두 사건을 같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은 걷지 못하다가 일어났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신체적 치유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 8절의 장면에서 이사야 35:5–6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은 하나님이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눈먼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들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게 된다고 노래합니다. 그 본문은 광야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쁨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환상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이사야 35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어오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은 이사야가 그렸던 구원의 모습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왜 우리를 뚫어지게 보십니까?」 — 시선이 향해야 할 곳

사도행전 3:11–16 본문 →

기적을 행한 사람에게 시선이 모이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있는 동안, 온 백성이 몹시 놀라 솔로몬의 주랑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와 모였다.사도행전 3:11 · 본디새김

솔로몬의 주랑은 성전 구역의 동쪽에 있던 주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도행전 5:12에서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그곳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백성에게 대답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이 일로 왜 놀라십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뚫어지게 보십니까?」사도행전 3:12 · 본디새김

누가는 4절에서 사용했던 낱말을 다시 사용합니다. 앞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이제는 군중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바라본 것은 그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였지만, 군중은 자신들이 본 기적의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선을 돌립니다.

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태도와 삶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을 걷게 한 원인이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도 아니고, 특별히 뛰어난 경건함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거나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하신 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자기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정했는데도 빌라도 앞에서 그를 부인했습니다.」사도행전 3:13 · 본디새김

베드로는 ‘우리가 믿는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6과 3:15에서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사용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시고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셨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관한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종」이라고 부릅니다. 「종」(파이스)은 문맥에 따라 아이, 자녀, 또는 종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종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이사야 52:13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종이 지혜롭게 행하고 높임받으며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종」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이사야의 종에 관한 본문과 언어적으로도, 주제적으로도 연결됩니다.

살인한 사람은 놓아주고 생명을 여시는 이는 죽였다

베드로의 말은 점점 날카로워집니다. 13절에서 그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기로 결정했는데도 사람들이 그를 부인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부인하고, 살인한 사람이 여러분을 위한 은전으로 풀려나도록 청했습니다.」사도행전 3:14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누가복음 23:13–25의 재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 군중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당시의 선택이 얼마나 뒤집혀 있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그 대조는 절정에 이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을 여는 이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우리가 바로 그 일의 증인입니다.」사도행전 3:15 · 본디새김

죽음을 가져온 사람은 살리고, 생명을 여시는 분은 죽인 셈입니다. 이 역설이야말로 베드로가 청중 앞에 드러내는 인간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죽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예수님을 죽음에 넘겼지만, 하나님은 그 판단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전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믿음이 그를 고쳤는가?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그의 이름이 여러분이 보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했습니다. 예수를 통해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에게 몸의 온전함을 주었습니다.」사도행전 3:16 · 본디새김

이 사람을 고친 믿음은 누구의 믿음일까요? 본문은 그것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처음에 그 사람은 적선을 기대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치유를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에게 놀라운 믿음이 있어서 치유가 일어났다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덧붙이는 일입니다. 반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통해 오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믿음 자체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있습니다. 그 사람을 튼튼하게 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이고, 온전함을 주는 믿음도 예수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치유받은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여 그에게 공로를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과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돌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신 이 사건은, 그곳에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할까요? 베드로는 이제 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의 종이 본래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에 따라 여러 층위에서 논의됩니다.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하기도 하고(이사야 41:8–9), 이스라엘을 회복할 사명을 받은 종이 등장하기도 합니다(49:5–6). 이사야 52:13–53:12에서는 그 종이 고난받고 사람들에게 멸시당하지만 마침내 높임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은 그 종의 사명과 고난과 영광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보여 주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15절의 「생명을 여는 이」는 그리스어 아르케고스를 옮긴 표현입니다. 이 낱말에는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이라는 뜻과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이라는 뜻이 함께 있어서, ‘생명의 창시자’로도, ‘생명으로 이끄는 분’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끄는 의미를 살려 옮긴 표현이 「생명을 여는 이」입니다. 다만 어느 한 뜻을 선택하는 문제보다, 베드로가 이 낱말을 살인한 사람과 맞세워 놓은 자리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모르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압니다」 — 정죄에서 회복의 초대로

사도행전 3:17–18 본문 →

베드로의 말투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는 청중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넘겨주었다고 했고,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부인했다고 했으며, 생명을 여시는 이를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말투가 달라집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여러분이 모르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로 모르고 그렇게 했습니다.」사도행전 3:17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자신이 책망했던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무지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앞에서 베드로가 그들의 행동을 분명하게 지적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일을 했고, 베드로는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넘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무지를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그들이 알아야 할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이것이 설교의 방향을 바꿉니다.

만약 베드로의 목적이 그들의 죄를 확인하고 정죄하는 데 있었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을 돌이키도록 부르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미 완전히 제외된 사람들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에게 회복의 길이 열려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해 자기 그리스도가 고난받으리라고 미리 알리신 것을 이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행전 3:18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 일을 통해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이루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악한 행동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잘못이 아니었다는 말일까요?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서 분명히 사람들이 생명을 여시는 이를 죽였다고 책망했고, 동시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두 진술을 어느 한쪽으로 지워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로 다음 절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권합니다. 생명을 여시는 이를 죽인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이 회복의 길을 열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예언자」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각각 메시아의 고난을 명시적으로 예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 전체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하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읽기에서 특히 중요한 본문으로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을 들 수 있고, 시편 22편처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의인의 노래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종 본문과 시편의 본래 의미를 각각 존중하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비추어 새롭게 읽는 것입니다.

「숨을 돌리는 때」와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

사도행전 3:19–21 본문 →

죄가 지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도록 회개하고 돌이키십시오.」사도행전 3:19 · 본디새김

회개는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돌이킴은 그 변화가 실제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으로 나타남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라고 하지 않고, 그들의 죄가 지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워지다」는 닦아 내거나 지워 없앤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43:25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지워 버리시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시편 51:1에서도 죄를 지워 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이런 배경에서 죄가 지워진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넘겨준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그 결과도 실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가 사람을 영원히 붙들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워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열어 주시는 용서의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음에 넘기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책망했던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숨을 돌리는 때」는 어떤 때인가?

「그리하여 숨을 돌리는 때가 주에게서 오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미리 정해 두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도록 말입니다.」사도행전 3:20 · 본디새김

「숨을 돌리는 때」(ἀνάψυξις)의 낱말은 시원해짐, 원기 회복(ἀποκατάστασις), 고통이나 부담에서 벗어나는 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나는 것처럼, 고단한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숨을 쉬게 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그때는 「주에게서」 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시는 일과 연결됩니다. 개인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심리적 상태로만 축소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이 가져올 더 넓은 회복입니다.

여기에는 해석상 갈림이 있습니다. 이 때가 회개하는 사람들이 현재 경험하는 용서와 새 생명의 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모든 것의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장차 도래할 메시아의 구원 시대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측면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고, 곧 죄의 용서가 지금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에 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본문의 문장 구조는 회개와 죄의 용서, 주에게서 오는 회복의 때,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일을 서로 연결하지만, 회개한 각 개인이 어떤 시간표에 따라 이 모든 일을 경험하는지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약속하신 회복에 참여하게 하시려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까지

「하늘은 그 예수를 받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옛 시대부터 자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까지입니다.」사도행전 3:2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분이 하늘에 계시는 일이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회복」은 본래 상태로 되돌리거나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1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해 주실 것인지 물었을 때 사용한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나라를 물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그 모든 것」의 회복을 말합니다. 두 구절이 정확히 같은 범위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회복이라는 공통된 주제가 사도행전의 처음부터 이어집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가 새로워지는 종말론적 회복, 예언자들이 말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백성의 갱신, 이미 시작된 메시아의 구원 사역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때로 읽기가 갈립니다. 베드로는 그 구체적인 범위와 순서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보편구원론을 확정할 수도 없고, 특정한 정치 체제가 회복된다는 세부적인 미래 계획을 도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시작하신 회복은 지금 눈앞의 한 사람에게 일어난 치유보다 훨씬 큰 약속을 향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난 것은 그 큰 약속을 생각하게 하는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본문은 지금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앞으로 이루어질 회복의 때를 구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회복되어야 할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돌이키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은 막연히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들의 삶을 향해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것」의 회복을 세계 전체가 새로워지는 종말론적 회복으로 이해하는 쪽은 이사야 65:17–25의 새 하늘과 새 땅, 로마서 8:19–23의 피조물의 해방과 주제적으로 연결합니다. 다른 해석은 특별히 예언자들이 말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백성의 갱신에 초점을 맞춥니다.

모세가 예고한 예언자 — 회복은 누구의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되는가?

사도행전 3:22–24 본문 →

왜 갑자기 모세가 등장할까?

「모세가 말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신 주께서 너희 형제들 가운데서 나 같은 예언자를 너희에게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너희는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모두 들어야 한다.』」사도행전 3:22 · 본디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신명기 18:15–19입니다. 신명기 18장은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의 점술과 주술적인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예언자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시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듣는 것은 선택적인 일이 아닙니다(신명기 18:18–19).

이제 베드로는 그 약속을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이시며, 고난받으셨고 하나님이 일으키신 생명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치유 사건과 베드로의 설교가 더욱 깊게 만납니다.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며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청중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치유받은 사람에게는 몸의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청중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이 요청됩니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듣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경고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백성 가운데서 멸절될 것이다.』」사도행전 3:23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18:19의 원문을 그대로 반복한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그 경고가 「백성 가운데서 멸절될 것이다」라는 더 강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비슷한 멸절의 표현은 이스라엘 율법의 다른 본문들에서도 발견되므로, 사도행전의 인용은 모세의 말씀을 그와 관련된 언약적 심판의 언어로 확장하여 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세를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어느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일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했고,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지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부르심을 모세에게서 끝내지 않습니다. 「사무엘부터 그 뒤로 이어진 예언자들」도 모두 이 날들을 알렸다고 말합니다(24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성취가 지금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약속의 가장 오래된 출발점 가운데 하나인 아브라함으로 돌아갑니다.

「너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사도행전 3:25–26 본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사도행전 3:25 · 본디새김

지금까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설명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일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 약속의 뿌리는 창세기 12:1–3에 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복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릅니다. 창세기 22:18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사도행전 3:25의 인용은 이 두 약속의 표현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씨」는 후손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창세기의 본래 문맥에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어질 후손과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복을 가리키며, 그 낱말 자체가 반드시 단 한 명의 특정 인물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약속이 예수님의 사역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신약의 읽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처음부터 다른 민족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언자들의 아들이자 언약을 이어받은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언약 안에 이미 다른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약속이 처음부터 얼마나 넓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는지 드러냅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다음 말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을 일으켜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종이 여러분 하나하나를 저마다의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게 하여 복을 주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3:26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먼저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만 보내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읽으면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바로 앞의 약속과 충돌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우선성을 보여 주면서도, 그 복이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방향을 열어 둡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마지막 문장은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하면서 건강, 재산, 성공, 평안 같은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사도행전 3장도 한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는 기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의 마지막에 말하는 복은 뜻밖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게 하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악을 버린 대가로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종을 보내어 사람들을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그렇게 복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복은 회개와 분리된 별도의 보상이 아닙니다. 악에서 돌이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식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회복은 단순히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했던 잘못에서 돌이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생명을 여시는 분께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먼저 찾아오셨는가?

베드로가 말하는 「여러분」은 바로 그가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죽음에 넘겼다고 책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절했고, 생명을 여시는 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약속을 거두셨다고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먼저 자기 종을 보내셨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악을 지적하시는 목적이 반드시 사람들을 끝내 버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보내어 그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것이 생명을 여시는 이의 사역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죽음에서 살아나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죽음과 악에서 생명의 길로 돌이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름다운 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사도행전 3:1–26 본문 →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회복은, 베드로의 설교가 끝날 때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모든 민족의 복,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발과 발목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 전체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 사이에서 베드로는 눈앞의 치유를 보고 사람들이 자기 능력에 감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예수님에게 돌렸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신 종이시며, 사람들이 거절했지만 하나님이 일으키신 분, 생명을 여시는 분이십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질병에서 즉시 치유받아야 한다는 약속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사건을 단순히 영적인 변화의 비유로 바꾸어 실제로 일어난 신체적 회복의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일어난 치유는 실제적인 회복이었고,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거대한 약속을 처음부터 웅장한 모습으로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람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받을지 모른 채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붙잡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데려다주던 사람들이 있어야만 올 수 있었던 성전에, 이제는 자신의 발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있었고, 베드로는 그 사람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이제 그 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적선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것은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새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붙잡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생명을 여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