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누구의 목소리였는가?

오순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세찬 바람 같은 소리가 집을 가득 채웁니다. 불 같은 혀들이 나타나 사람들 위에 머물고, 그들은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져 여러 언어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소리를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놀랍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모여든 사람들 각자의 고향 말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대에서 온 사람도, 이집트에서 온 사람도, 로마에서 온 사람도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모두가 알아듣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서로 묻습니다.

그들은 모두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에게 말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사도행전 2:12 · 본디새김

어떤 사람들은 아예 술에 취한 것이라고 비웃습니다. 말은 알아들었지만, 사건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하나 더 보태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보고 들은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의 설명은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거룩한 영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 연설이 나사렛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는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습니다」(2:33)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듣고 있던 사건의 궁극적인 근원은 부활하시어 높임받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은 그 사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말을 듣습니다. 이어서 그 말의 의미를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읽는 시간 33분소단락 92장 본문 읽기 →

집을 채운 소리, 사람마다 머문 불 같은 혀

사도행전 2:1–4 본문 →

왜 하필 오순절이었을까?

오순절 날이 찼을 때에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함께 있었다.사도행전 2:1 · 본디새김

오순절은 본래 기독교에서 시작된 절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절기인 칠칠절, 곧 주간절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34:22에서는 밀을 거두는 첫 열매의 절기로, 신명기 16:9–12에서는 추수의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는 절기로 소개되며,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주요 순례 절기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과 유대교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방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계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모인 때에, 세계 여러 곳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선포됩니다.

누가는 「오순절이 되었을 때」라고만 쓰지 않고 「오순절 날이 찼을 때」라고 표현합니다. 오순절은 우연히 선택된 어느 하루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하셨던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이 되었습니다.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닌 것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나서, 그들이 앉아 있던 집 전체를 채웠다.사도행전 2:2 · 본디새김
불 같은 혀들이 갈라져 그들에게 보였고, 그것이 그들 하나하나 위에 앉았다.사도행전 2:3 · 본디새김

본문은 실제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불이 사람들 머리 위에서 타올랐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불 같은 혀들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자신들이 경험한 현상을 익숙한 자연현상에 빗대어 묘사하면서도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들려주는 소리와 불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을 주시는 활동을 연상시킵니다.

불 같은 혀들은 갈라져서 사람들 하나하나 위에 머뭅니다.

어떤 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특정한 지도자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모습을 기대했다면, 이 장면은 뜻밖입니다. 누가는 모두가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들 모두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불 같은 혀가 사람의 혀로 이어진다

2절에는 바람 같은 소리가 나옵니다. 3절에는 「불 같은 혀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사람들이 「여러 다른 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3·4절의 혀는 글로싸(γλῶσσα)라는 낱말로, 사람의 신체 기관인 혀를 가리키기도 하고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눈에 보이는 ‘혀’에서 사람이 말하는 ‘혀’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누가는 불 같은 혀가 언어 능력을 직접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지 않지만, 같은 낱말의 반복은 두 장면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11절에서 밝혀집니다.

「유대 사람과 유대교 개종자들,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 우리 모두가 저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우리 자신의 혀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사도행전 2:11 · 본디새김

사람들에게 나타난 거룩한 영의 첫 번째 가시적인 결과는 새로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으로 사도행전에서 계속 펼쳐질 모습입니다. 거룩한 영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말하도록 하시고, 그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알려집니다.

조금 더 깊이

오순절은 유월절 시기의 곡식 단을 바치는 날을 기준으로 일곱 주를 세고 쉰째 날에 맞이하는 절기여서 ‘쉰째’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후대 유대교에서는 이 절기를 시나이산에서 율법을 받은 사건과도 연결했지만, 사도행전 2장은 그 연관성을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누가가 반드시 시나이산 사건을 재현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날이 찼을 때」의 동사는 어떤 기간이나 때가 차거나 완성되는 것을 뜻하며, 누가복음 9:51에서도 예수님께서 들려 올라가실 날이 차 가는 때를 이야기하며 같은 동사를 씁니다. 두 사건의 의미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누가가 시간의 도래를 단순한 날짜의 경과 이상으로 서술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소리와 불의 이미지는 출애굽기 19:16–19에서 여호와야훼가 시나이산에 임하실 때의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 출애굽기 3:2의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 에스겔 37:9–14에서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바람과 숨과 하나님의 영을 떠올리게 하지만, 이 본문들이 오순절 사건의 세부 요소를 하나하나 예언한 것은 아닙니다. 또 4절의 「모두」가 정확히 누구까지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 장의 백스무 명 전체로 이해할 수도 있고,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무리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후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처음부터 열두 사도만 거룩한 영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대 사람도, 로마 사람도 자기 고향의 말로 듣는다

사도행전 2:5–13 본문 →

기적은 말하는 사람에게 있었을까, 듣는 사람에게 있었을까?

누가는 이제 장면을 집 안에서 예루살렘의 군중으로 옮깁니다.

이 소리가 나자 무리가 모여들어 어리둥절해졌다.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고장의 말로 들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6 · 본디새김

거룩한 영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여러 언어를 말한 것일까요? 아니면 듣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하게 된 것일까요?

4절은 제자들이 「여러 다른 혀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여 말하는 이들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그러나 6절과 8절은 듣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고향의 말로 들었다는 사실도 반복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현상은 분명합니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누가가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은 언어의 신비함 그 자체보다, 언어의 경계가 더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해하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에 놀랐을까?

그들은 넋을 잃고 놀라워하며 말했다. 「보아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닌가?」사도행전 2:7 · 본디새김

갈릴리 사람으로 알려진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역의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놀라움입니다. 갈릴리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지역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여러 나라의 언어에 능통한 전문 통역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지는 긴 지명 목록은 바대와 메대와 엘람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의 여러 지방, 이집트와 리비야, 로마, 크레타와 아라비아까지 이어지며 이 사건의 규모를 보여 줍니다. 그 지역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아가던 넓은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놓치기 쉬운 구별이 있습니다.

모든 언어가 등장한다고 해서 모든 민족의 비유대인들이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5절에서 이들을 유대 사람들이라고 소개하고, 11절에는 유대교 개종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우선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일을 듣는 사건입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음의 방향이 여기서 드러나지만, 그 확장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후 사도행전은 복음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전해지는지 별도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바벨탑과 오순절은 정반대의 사건인가?

창세기 11:1–9의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벨에서는 하나의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그들의 말을 뒤섞으신 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온 땅에 흩어집니다. 오순절에는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알아듣습니다.

두 장면을 대조하는 것은 의미 있는 정경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은 바벨탑 사건을 직접 인용하거나 바벨의 저주가 이제 폐지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벨과 오순절의 연결은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서 발견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두 사건은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도 않습니다. 오순절에 모두가 다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고향의 언어로 듣습니다.

오순절은 언어의 차이가 사라진 사건이 아니라,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함께 알아들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놀라운 사건을 보고도 사람들의 반응은 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의미를 묻고, 어떤 사람들은 술에 취했다고 비웃습니다. 같은 소리를 듣고도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건의 참뜻을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증인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면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모든 방언 현상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공동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관한 문제가 등장하지만, 사도행전 2장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의 언어로 알아듣는 사건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명 목록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깔끔한 지리적 순서도 아니고, 모든 지역을 빠짐없이 포함한 지도도 아닙니다. 「아시아」도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 전체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를 가리킵니다.

「도리어 이것은 예언자 요엘을 통해 전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14–21 본문 →

베드로의 설교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자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선포했다. 「유대 사람 여러분,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분들, 이것을 알아 두시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사도행전 2:14 · 본디새김

베드로는 혼자 떨어져 서 있지 않습니다. 열한 사도와 함께 섭니다.

4절에서 거룩한 영을 받은 이들이 또렷이 말하기 시작했다고 할 때의 동사가, 여기서 베드로가 선포하는 모습에도 쓰입니다. 분명하고 무게 있게 발언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는 앞에서 일어난 기적과 무관한 별도의 활동이 아닙니다. 그 역시 거룩한 영의 역사 가운데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술에 취했다는 비난에 답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짐작하는 것처럼 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낮의 셋째 시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15 · 본디새김

낮의 셋째 시는 해 뜰 무렵부터 세는 당시의 시간으로 대략 오전 아홉 시입니다. 이 대답은 그 시간에 술에 취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논증이 아니라, 그 시간대에 취했다는 비난이 부당하다는 일상적인 상식에 호소하는 말입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도리어 이것은 예언자 요엘을 통해 전해진 것입니다」라며, 사람들이 본 사건을 성경의 빛에서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모든 육체」라는 말의 파격

베드로는 요엘 2:28–32를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말한다. 마지막 날들에 이렇게 될 것이다.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어 주겠다. 그러면 너희 아들들과 너희 딸들이 예언하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나이 든 어른들은 꿈을 꿀 것이다.』」사도행전 2:17 · 본디새김

여기서 핵심은 「모든 육체」입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습니다. 민수기 11:24–30에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그들이 예언하고, 진영에 남아 있던 두 사람에게도 영이 임합니다. 여호수아가 이를 제지하려 하자 모세는 오히려 여호와야훼의 모든 백성이 예언자가 되고 여호와야훼가 그들 위에 자신의 영을 두시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이 요엘의 약속과 만날 때 더욱 넓어집니다.

요엘은 아들들과 딸들, 젊은 사람들과 나이 든 사람들, 그리고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들을 언급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나이나 성별, 신분은 사람이 행사할 수 있는 권위와 역할을 크게 제한했고, 특히 노예는 다른 사람의 소유 아래 놓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회적 구분에 따라 자신의 영을 나누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면 오순절에 이미 세상의 마지막이 왔다는 뜻일까요?

베드로가 인용하는 요엘의 말씀은 하늘의 놀라운 일들, 피와 불과 연기, 어두워지는 해와 피로 바뀌는 달, 그리고 주의 크고 빛나는 날에 관한 말씀까지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그 모든 현상이 오순절 당일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인용을 요엘서의 모든 세부 사항이 이미 완결되었다는 주장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더 자연스러운 이해는 요엘이 바라보던 하나님의 결정적인 때가 거룩한 영의 부어짐과 함께 도래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구원이 드러나는 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때입니다. 인용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다.』」사도행전 2:21 · 본디새김

앞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영을 받는지를 말했다면, 이제는 누가 구원받는지를 말합니다. 요엘서의 본래 문맥에서 이 「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가리킵니다. 재앙과 심판 가운데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곧바로 나사렛 예수님에 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설교가 끝나는 36절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묻는 물음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요엘 2:28–32는 히브리어 성경의 장 구분에 따라서는 요엘 3:1–5에 해당합니다. 요엘서는 메뚜기 재앙과 땅의 황폐함, 회복을 구하는 백성,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자기 백성에게 복을 주시는 일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베드로가 인용하는 본문에는 원래 요엘서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요엘의 히브리어 본문은 「그 뒤에」라고 시작하지만 사도행전의 인용은 「마지막 날들에」라고 시작하고, 18절은 남자 노예들과 여자 노예들을 「내」 노예들이라고 부르며 그들도 예언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하신 일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베드로의 관점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

사도행전 2:22–24 본문 →

하나님이 입증하신 사람을 사람들이 죽였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나사렛 사람 예수는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서 그를 통해 하신 힘 있는 일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입증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사도행전 2:22 · 본디새김

베드로가 예수님에 관해 처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분의 놀라운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예수님의 힘 있는 일과 놀라운 일과 표징은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 활동하셨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여러분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라는 말로 베드로는 청중의 기억에 호소합니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모든 기적을 직접 보았다는 뜻까지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그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대조가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정해진 뜻과 미리 아심으로 넘겨졌고, 여러분은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의 손을 빌려 그를 못 박아 죽였습니다.」사도행전 2:23 · 본디새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정해진 뜻과 미리 아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들의 폭력과 배반이 사라지거나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인간의 책임을 지우지 않고, 인간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지도 못한다는 긴장이 이 구절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이 하나님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관한 완성된 철학적 설명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설명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 곧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거절당하시고 죽임당하셨지만 그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좌절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구절을 모든 시대의 유대인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돌리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루살렘의 청중에게 말하고 있으며, 십자가 처형에 관여한 사람들과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의 손을 언급합니다. 이 표현은 로마의 처형 집행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흔히 이해됩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어느 민족에게 영구적인 죄책을 씌우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이 거절한 예수님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에 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을 붙들어 둘 수 없었다

「하나님이 죽음의 진통을 풀어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죽음이 그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죽음을 이기셨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죽음의 진통을 풀어」라는 표현에서 죽음은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고통스러운 세력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죽음의 힘을 풀어 버리셨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예수님을 붙들지 못했다는 결과만 진술하지 않고, 죽음이 예수님을 계속 붙들고 있는 일이 불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왜 불가능했을까요?

베드로는 바로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시편을 인용합니다. 이 부활이 하나님이 오래전에 주신 약속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진통」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출산의 고통을 뜻하는데, 그 진통을 푼다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금 어색합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 성경의 시적인 어법과 관련하여 이해되기도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죽음의 고통과 죽음의 끈이나 올가미를 나타내는 표현이 서로 연관되어 사용되었고, 그리스어 성경 번역 전통에서 그 이미지들이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다만 누가가 기록한 문면은 분명히 「진통」입니다.

다윗의 무덤은 남아 있는데,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사도행전 2:25–32 본문 →

시편 16편은 원래 무엇을 말하는가?

베드로가 인용하는 것은 시편 16:8–11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을 늘 내 앞에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그가 내 오른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5 · 본디새김

시인은 「내 마음이 기뻐하고 내 혀가 즐거워했습니다」(2:26)라고 노래하고,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내 목숨을 하데스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가 썩음을 겪게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7 · 본디새김

시편 16편은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이자 몫으로 삼는 사람이 그분을 신뢰하는 노래입니다. 시인은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고, 자신이 누리는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고백하며,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 시인은 자신이 결코 육체적으로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편은 시인이 당면한 죽음의 위험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노래로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소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어 본문의 「썩음」이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부활에 관한 논증을 전개합니다.

베드로는 다윗의 무덤을 가리킨다

「형제 여러분, 조상 다윗을 두고 여러분에게 거리낌 없이 말해도 무방합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이 오늘까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사도행전 2:29 · 본디새김

베드로는 시편의 아름다운 표현을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무덤을 이야기합니다.

시편을 말한 다윗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거룩한 이가 썩음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은 다윗 개인의 삶에서 완전히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다윗을 예언자로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언자였고, 하나님이 그의 허리에서 난 열매 가운데 하나를 다윗의 왕좌에 앉히겠다고 맹세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사도행전 2:30 · 본디새김

이 말씀의 배경에는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키고 그의 왕권을 굳게 세우겠다고 약속하시고, 시편 132:11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다윗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왕좌에 앉히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약속을 예수님과 연결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시편 16편을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적힌 문장’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을 배경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에 대한 시편의 소망이 예수님의 부활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석합니다. 시편의 본래 기도와 소망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빛에서 읽는 사도적 해석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신의 증언을 덧붙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일으키셨고, 우리는 모두 그 일의 증인입니다.」사도행전 2:32 · 본디새김

시편 해석에서 사건의 증언으로 나아갑니다. 사도들이 하는 일은 고대 문헌에 숨어 있는 수수께끼의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성경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사건을 해석하게 하고, 부활의 사건이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에는 아직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27절의 하데스는 히브리어 원문의 ‘스올’, 곧 죽은 자들의 영역을 옮긴 말입니다. 이 표현을 곧바로 후대에 정교하게 발전한 지옥 개념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썩음」에 해당하는 말도 시편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구덩이’로 이해될 수 있지만,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부패’나 ‘썩음’을 뜻하는 표현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33–36 본문 →

오순절의 주인공이 드러나는 순간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아버지에게서 거룩한 영에 대한 약속을 받으셔서, 여러분이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습니다.」사도행전 2:33 · 본디새김

베드로가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가 모두 이곳에서 만납니다.

거룩한 영이 부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 가운데 높임받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이 참이니 거룩한 영이 임했다’는 추론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약속된 거룩한 영을 받으셔서, 바로 그 영을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에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누구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겉으로는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도록 하신 분은 거룩한 영이며, 그 영을 부어 주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셨지만, 그분이 하시는 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고 듣는 사건을 통해 그분이 살아 계시며 활동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라는 자리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으시고」에서 테 덱시아는 문법적으로 두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 곧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높임받으셨다는 뜻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오른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높임받으셨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앞의 읽기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베드로는 시편 110:1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사도행전 2:34 · 본디새김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2:35)로 이어지는 이 인용에서는 오른쪽이라는 자리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110편은 본래 왕의 권위와 승리를 노래하는 왕실 시편으로 읽을 수 있으며, 왕의 오른편은 단순히 의자를 놓는 위치가 아니라 왕권과 권위에 참여하는 특별한 지위를 나타냅니다. 베드로는 이 시편을 부활하시어 높임받으신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앞에서는 다윗의 무덤을 이야기했고, 이번에는 다윗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두 논증은 서로 대응합니다. 시편 16편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시편 110편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높임받으심을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시 살아나셔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높이신 주이시며, 그분의 권세 가운데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말의 의미

베드로는 연설의 결론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 집안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36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는 주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셨는데, 부활하신 뒤에 비로소 그런 존재가 되셨다는 뜻일까요? 그렇게만 읽으면 누가복음의 다른 진술들과 긴장이 생깁니다. 누가복음 2:11에서는 이미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 그분을 그리스도이자 주님이라고 부르고, 9:20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삼으셨다」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이전에는 그런 정체성을 전혀 지니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강조하는 것은 부활과 높임받으심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세우셨다는 사실, 특히 왕권과 권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존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관한 형이상학적 설명보다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의해 어떤 지위로 높임받으셨는지에 관한 선포입니다.

여기에는 요엘서 인용에서 시작된 연결도 있습니다. 요엘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는다고 말했는데,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주」라고 선포하고 곧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합니다. 요엘이 말한 여호와야훼의 구원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선포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구별이 사라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연설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시고 높이신 분이고,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약속된 영을 받으셔서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는 두 분의 관계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님의 이름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증언은 청중의 마음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도행전 2:37–41 본문 →

사람들의 마음이 찔렸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마음이 찔렸다. 그래서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말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사도행전 2:37 · 본디새김

그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새롭게 듣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찔렸다」는 말은 단순한 감동이나 일시적인 슬픔보다 강한 표현으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 깊이 동요한 모습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것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습니다(2:12).

이제 그 뜻을 듣고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처음에는 눈앞의 사건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건이 자신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묻습니다.

회개와 세례, 그리고 거룩한 영의 선물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하나하나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거룩한 영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38 · 본디새김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는 마음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서 있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청중에게 회개는 특별히 예수님을 향한 판단의 변화와 연결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선포를 들었다면, 이제 그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단지 세례 때 어떤 단어를 발음해야 한다는 지시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인정하고, 그분의 권위와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일과 연결됩니다.

세례와 죄의 용서 사이의 관계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습니다. 전치사 에이스는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가리킬 수 있어서, 「죄를 용서받으려고」라는 번역은 죄의 용서를 향하는 관계를 강조합니다. 반면 세례가 이미 받은 용서를 나타낸다는 해석도 제시되어 왔습니다. 이 전치사 하나만으로 세례와 죄의 용서 사이의 모든 신학적 관계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복음 3:3에서도 요한이 「죄 용서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거기에 새 요소를 더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거룩한 영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조금 전까지 거룩한 영의 부어짐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제 그 영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베드로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영은 몇몇 특별한 증인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선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멀리 있는 모든 이들」은 누구인가?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이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39 · 본디새김

「멀리 있는 모든 이들」은 우선 먼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미 오순절에 그런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전체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이 표현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일을 내다보는 말로도 읽힙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는 이사야 57:19의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사도행전 2:39만으로 이 표현이 정확히 어느 집단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분명히 전하는 것은 약속이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청중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고, 그 범위를 규정하는 것은 문장의 마지막 「곧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이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지리적 거리나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21절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다」와 만납니다. 사람은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내는 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고, 그날 「삼천쯤」 되는 사람이 더해집니다. 누가는 이 숫자 다음에, 그 사람들이 이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성전과 식탁 사이에서 — 거룩한 영이 만들어 낸 공동체

사도행전 2:42–46 본문 →

말씀이 생활이 되는 자리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또 함께 나눔에,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매달려 있었다.사도행전 2:42 · 본디새김

오순절의 극적인 사건 뒤에 누가는 놀랄 만큼 평범한 장면을 기록합니다.

사람들이 가르침을 듣습니다. 서로 나눕니다. 빵을 떼어 먹습니다. 기도합니다.

바람 같은 소리도 없고 불 같은 혀도 없습니다.

「매달려 있었다」는 말에는 지속적으로 전념하고 있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감격적인 모임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생활 방식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활동인 「함께 나눔」은 함께 참여하거나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흔히 ‘교제’라고 번역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친목이나 대화보다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이어 누가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 소유를 나누는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가 생기면 그 필요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말의 의미

믿는 이들은 모두 한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사도행전 2:44 · 본디새김
그리고 재산과 가진 것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모두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사도행전 2:4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때때로 초대 교회가 일종의 공산주의적 공동 소유 제도를 운영했다는 근거로 읽히고, 반대로 그저 마음을 나누었다는 비유적 표현으로만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습니다.

누가는 분명히 실제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누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모든 재산을 한꺼번에 처분하여 하나의 공동 금고에 넣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45절의 그리스어 동사들은 반복되거나 지속되는 행동을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로, 소유를 팔고 나누어 주는 일이 계속 이루어졌다는 그림을 보여 줍니다.

나눔의 기준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신명기 15:4–11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궁핍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 가난한 형제에게 마음을 닫거나 손을 움켜쥐지 말라고 명합니다. 사도행전은 그 율법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소유를 나누는 공동체의 모습은 그 오래된 이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원하셨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갈라진 혀들이 이제 가진 것을 나눈다

3절에서는 불 같은 혀들이 「갈라져」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45절에서는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두 구절에는 나누거나 분배한다는 뜻의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였습니다.

같은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누가가 반드시 두 장면을 직접 대응시키려 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생각하면 의미 있는 문학적 연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이 나누어졌습니다. 이제는 재산과 음식이 나누어집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던 사람들은, 이제 자기들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눕니다.

그들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날마다 성전에서 한마음으로 꾸준히 머물고 집집이 빵을 떼며, 기쁨과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몫으로 받아 먹었다.사도행전 2:46 · 본디새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여전히 성전에 모입니다.

그들은 새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종교 공간으로 옮겨 가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초기의 예수님 운동은 유대교의 역사와 예배 생활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새로운 신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신 일을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집에서는 함께 빵을 떼었고, 그 식탁에는 「기쁨과 순박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순박한 마음은 복잡한 계산이나 과시 없이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오순절의 놀라운 사건을 묘사한 뒤, 사람들이 날마다 함께 식사하는 장면을 충분히 보여 줍니다. 그 식탁이야말로 거룩한 영을 받은 공동체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조금 더 깊이

「빵을 떼는 일」을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와 연결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19에서 예수님은 빵을 떼셔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24:30–35에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빵을 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따라서 초기 공동체의 식사 안에 예수님을 기억하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만으로 그들이 가진 모든 식사가 오늘날의 성찬 예식과 정확히 같은 형태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가 명확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이 함께 빵을 떼며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 날마다 그 모임에 더해 주었다」

사도행전 2:47 본문 →

마지막 절에는 두 방향의 시선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온 백성에게 좋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다. 주님은 구원받는 이들을 날마다 그 모임에 더해 주었다.사도행전 2:47 · 본디새김

하나는 공동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세상의 칭찬을 받게 된다는 약속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앞으로 그들이 거센 반대와 박해를 경험하게 될 것도 보여 주지만, 이 시점에서 누가는 그들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다른 하나는 누가 그 공동체를 자라게 하셨는가입니다. 41절에서는 약 삼천 명이 「더해졌다」고만 하고 그들을 더한 주체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47절에서는 같은 계열의 동사를 사용하면서 행위자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은 ... 더해 주었다.」

누가는 오순절의 사건을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에는 주님이 사람들을 더해 주시는 모습으로 닫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앞선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님에게 부여된 칭호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누가가 마지막 문장에서 직접 이름을 적지는 않지만, 높임받으신 예수님께서 공동체와 무관하게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33절의 선포를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분이 거룩한 영을 부어 주셨고, 지금도 구원받는 이들이 공동체에 더해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 몰려와 넋을 잃고 놀라워했고,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들려준 나사렛 예수님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이제 함께 살아갑니다.

오순절 아침에 들렸던 바람 같은 소리는 더 이상 기록되지 않습니다. 불 같은 혀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 시작된 일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식탁이 차려집니다. 사람들이 모여 빵을 떼고 음식을 나눕니다. 성전에서는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모임에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더해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