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아름다운 문 앞에서 시작된 회복

성전에는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는 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 문을 지나 하나님께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는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그를 성전 문까지 데려다주었고, 그는 그곳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구체적인 일상을 설명하지 않지만, 「날마다」라는 짧은 표현 하나가 그의 삶에 오랫동안 반복되었을 일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며 성전 문 앞에 앉아 있었는지는 분명합니다. 돈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돈 대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몰려듭니다. 처음에는 걷지 못하는 사람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이제는 군중이 그들을 바라봅니다. 베드로는 「왜 우리를 빤히 바라보십니까?」라고 물으며 그 시선을 자신들에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람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분, 생명의 근원이신 분,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신 종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사도행전 3장은 한 사람이 어떻게 걷게 되었는지 보여 주는 이야기이면서, 그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누구를 바라보아야 하는지 밝혀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발과 발목이 튼튼해진 사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의 회복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 거대한 약속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이었습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우리를 보세요」 —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받은 사람

사도행전 3:1–6 본문 →

기도하러 가던 길에 만난 사람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인 오후 세 시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3:1 · 두루새김

「오후 세 시」(ἔνατος)는 원문에서 아홉째 시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던 시간이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적을 일으키려고 성전으로 향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고치기로 미리 약속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의 움직임을 보여 줍니다.

그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한 남자가 실려 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구걸하도록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 앉혀 놓았습니다.사도행전 3:2 · 두루새김

두 움직임이 만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발로 성전에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누군가에게 실려 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들어가는 이들에게 돈을 구걸하기 위해 문 앞에 앉혀집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이동할 수 없었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에 오는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했습니다. 성전 문은 그에게 중요한 생계의 장소였습니다. 누가는 문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묘사하지 않고 이름만 알려 주지만, 그 이름은 묘한 대비를 만듭니다.

아름다운 문 앞에,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그곳에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전과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바뀐다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우리를 보세요.」사도행전 3:4 · 두루새김

「똑바로 바라보며」는 시선을 한곳에 집중한다는 뜻의 표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에게도 자신들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두 사람을 바라봅니다.

눈길은 서로 마주쳤지만, 기대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 사람은 돈을 기대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것을 주려 합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제게 없어요. 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드릴게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사도행전 3:6 · 두루새김

이 말을 흔히 물질적인 도움보다 영적인 도움이 더 중요하다는 교훈으로 읽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돈이 가치 없다고 말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앞 장에서는 믿는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이 기록되었습니다(2:44–45).

베드로가 실제로 말한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그가 지금 가진 것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놓는 것은 자신의 재산도 아니고, 개인적인 능력도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아름다운 문」이 정확히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확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니카노르 문이나 성전 동쪽의 다른 문과 연결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그 위치에 관한 자료와 해석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일어나서 걸어라 —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

사도행전 3:7–10 본문 →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드로의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권위와 관계가 있는지를 나타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라는 이름 자체에 신비한 소리의 힘이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특정한 소리를 발음하여 능력을 작동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주문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이 누구를 통해 일어나는지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곧바로 그의 발과 발목이 튼튼해졌습니다.사도행전 3:7 · 두루새김

기적은 베드로의 말이 끝난 뒤 멀리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구체적인 행동 속에서 나타납니다.

원문에서는 7절의 「일으키자」에 해당하는 말이 그리스어 에게이렌(ἐγείρω)인데, 15절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라고 말할 때에도 똑같은 동사형이 쓰입니다. 몸이 낫는 일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은 같지 않지만, 같은 낱말은 두 장면을 연결해서 읽게 합니다. 눈앞에서 일어난 사람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사건이 됩니다.

기적의 중심은 베드로의 손이 아니라 그 손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뛰어오른다

그는 벌떡 일어나 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두 사람과 함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사도행전 3:8 · 두루새김

벌떡 일어납니다. 섭니다. 걷기 시작합니다. 다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누가는 그가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간단히 기록하고 넘어가지 않고, 그가 새로운 움직임을 실제로 사용하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이 장면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게 된다는 이사야의 구원의 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의 모습이 한 사람의 몸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기록하는 변화는 움직임만이 아닙니다.

이전에 그는 성전 문 앞에 앉혀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두 사람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이 그가 이전에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가 머무는 장소가 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사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일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드러내는 반응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그가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돈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모두 몹시 놀라 어리둥절해했습니다.사도행전 3:10 · 두루새김

낯선 사람이 갑자기 성전에서 뛰어다녔다면 사람들은 그가 원래 어떤 상태였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날마다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오래도록 걷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걷고 뛰는 모습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반복되던 일상이 기적의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35:5–6은 하나님이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눈먼 사람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사람들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저는 사람이 사슴처럼 뛰게 된다고 노래합니다. 그 본문은 광야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기쁨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환상 안에 놓여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이사야 35장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은 이사야가 그렸던 구원의 모습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왜 우리를 빤히 바라보십니까?」 — 시선이 향해야 할 곳

사도행전 3:11–16 본문 →

기적을 행한 사람에게 시선이 모이다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고 있을 때, 사람들이 솔로몬의 주랑이라 불리는 곳으로 달려와 모입니다. 성전 구역의 동쪽에 있던 주랑으로 알려진 곳이며, 사도행전 5:12에서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이를 보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왜 이 일을 보고 놀라십니까? 우리가 가진 힘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정성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빤히 바라보십니까?」사도행전 3:12 · 두루새김

「빤히 바라보십니까」(ἀτενίζω)는 원문에서 4절의 「똑바로 바라보며」와 같은 낱말입니다. 앞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았고, 이제는 군중이 베드로와 요한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베드로가 그 사람을 바라본 것은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였지만, 군중은 기적의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선을 돌립니다.

「힘」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을 섬기는 정성」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태도와 삶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이 둘 모두를 치유의 원인으로 내세우기를 거절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거룩하거나 뛰어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하신 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분을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정했는데도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거부했습니다.」사도행전 3:13 · 두루새김

베드로는 ‘우리가 믿는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3:6과 3:15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알리실 때 쓰신 이름,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신 바로 그 하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일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무관한 새로운 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신의 종」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아이나 자녀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종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이사야 52:13에서 하나님의 종이 높임받고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한 말씀과, 사용하는 말에서도 주제에서도 연결됩니다.

살인한 사람은 놓아주고 생명을 여시는 이는 죽였다

베드로의 말은 점점 날카로워집니다.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부하고, 오히려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사도행전 3:14 · 두루새김

빌라도는 놓아주기로 결정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3:13–25의 재판 이야기, 곧 빌라도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는데도 군중이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요구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15절에서 그 대조는 절정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사도행전 3:15 · 두루새김

죽음을 가져온 사람은 살리고, 생명의 근원이신 분은 죽인 셈입니다. 이 역설이 베드로가 청중 앞에 드러내는 인간의 잘못된 판단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죽음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그 판단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전에서 한 사람이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믿음이 그를 고쳤는가?

「여러분이 보고 알고 있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한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사도행전 3:16 · 두루새김

이 믿음은 누구의 믿음일까요? 본문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에 돈을 기대했을 뿐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에게 놀라운 믿음이 있어서 치유가 일어났다고 설명하면 본문에 없는 것을 덧붙이게 됩니다.

남는 읽기는 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은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이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예수를 통해 오는 믿음」이라는 표현에 기대어 믿음 자체가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것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튼튼하게 한 것이 예수님의 이름이고 그를 낫게 한 믿음도 예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누구에게도 공로를 돌리지 않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생명의 근원이신 분」은 그리스어 아르케고스를 옮긴 표현입니다. 이 낱말에는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이라는 뜻과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이라는 뜻이 함께 있어 ‘생명의 창시자’로도, ‘생명으로 이끄는 분’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며, 두루새김은 생명이 시작되는 근원이라는 의미를 살려 옮겼습니다. 또 13절의 「종」과 관련해, 이사야 52:13–53:12는 그 종이 고난받고 멸시당하지만 마침내 높임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사야서에는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종으로 등장하기도 하고(이사야 41:8–9), 이스라엘을 회복할 사명을 받은 종이 등장하기도 하여(49:5–6) 그 종이 본래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여러 관점에서 논의됩니다. 사도행전은 그 종의 사명과 고난과 영광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보여 주는 방향으로 읽습니다.

「여러분이 모르고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 정죄에서 회복의 초대로

사도행전 3:17–18 본문 →

베드로의 말투가 달라진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는 청중을 향해 날카롭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부했으며,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말투가 달라집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모르고 그 일을 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사도행전 3:17 · 두루새김

베드로는 자신이 책망했던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몰랐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잘못된 일을 했고, 베드로는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에 넘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목적이 정죄에 있었다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돌이키도록 부르기 위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했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미 완전히 제외된 사람들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에게 회복의 길이 열려 있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어떻게 다루셨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것이라고 모든 예언자를 통해 미리 알리신 일을 이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행전 3:18 · 두루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악한 행동은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잘못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죽였다는 책망과,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약속을 이루셨다는 증언을 함께 둡니다.

인간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집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바로 다음 절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분을 죽인 사람들에게조차 하나님이 회복의 길을 열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예언자」라는 말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가 각각 메시아의 고난을 분명한 말로 예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통 전체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하고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한 읽기에서 특히 중요한 본문으로 이사야 52:13–53:12의 고난받는 종을 들 수 있고, 시편 22편처럼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의인의 노래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어 왔습니다. 그 본문들의 본래 의미를 존중하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비추어 새롭게 읽는 것입니다.

「새 힘을 얻는 때」와 「모든 것이 회복될 때」

사도행전 3:19–21 본문 →

죄가 지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사도행전 3:19 · 두루새김

회개는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그 변화가 실제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으로 나타남을 가리킵니다. 「지워지도록」은 닦아 내거나 지워 없앤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43:25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허물을 지워 버리시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시며, 시편 51:1에도 죄를 지워 달라는 간구가 나옵니다.

죄가 지워진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 역사에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넘겨준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가 사람을 영원히 붙들고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용서로 관계를 새롭게 열어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책망했던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새 힘을 얻는 때」는 어떤 때인가?

「그리하여 주님께로부터 새 힘을 얻는 때가 오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시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3:20 · 두루새김

「새 힘을 얻는 때」는 시원해짐, 기운을 되찾음, 부담에서 벗어나는 쉼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나듯 다시 숨을 쉬게 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주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내시는 일과 연결되므로 개인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태로만 좁힐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해석상 갈림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지금 경험하는 용서와 새 생명의 때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모든 것의 회복에 비추어 앞으로 올 메시아의 구원 시대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측면을 함께 보아, 죄의 용서가 지금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회복에 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어느 쪽이든 베드로는 듣는 사람들의 부르심을 죄책감의 문제로 끝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죄에서 돌아서게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이 약속하신 회복에 참여하게 하시려 합니다.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까지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회복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자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을 통해 이 일을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3:21 · 두루새김

「회복될」(ἀποκατάστασις)은 본래 상태로 되돌리거나 바로잡는다는 뜻으로, 1장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나라를 회복해 주실 것인지 물었을 때 쓴 동사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나라를 물었고,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의 회복을 말합니다. 두 구절이 정확히 같은 범위를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회복이라는 주제가 사도행전의 처음부터 이어집니다.

「모든 것」의 범위는 세 갈래로 읽힙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새로워지는 회복, 예언자들이 말한 이스라엘과 하나님 백성의 회복, 이미 시작된 메시아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베드로는 그 범위와 순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만으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확정할 수도 없고, 특정한 정치 체제가 회복된다는 미래 계획을 끌어낼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지금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과 앞으로 이루어질 회복의 때를 구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사람이 일어났지만, 아직 회복되어야 할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은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지금 그들의 삶을 향해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것」의 회복을 창조 세계 전체의 새로워짐으로 읽는 쪽은 이사야 65:17–25의 새 하늘과 새 땅, 로마서 8:19–23의 피조물이 해방되는 일과 주제상 연결합니다. 다른 해석은 예언자들이 말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백성이 새로워지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또 다른 해석은 이미 시작된 메시아의 구원 사역이 마침내 완성되는 때를 가리킨다고 이해합니다.

모세가 예고한 예언자 — 회복은 누구의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되는가?

사도행전 3:22–24 본문 →

왜 갑자기 모세가 등장할까?

「모세는 말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신 주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너희를 위해 세우실 것이다. 너희는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모두 들어야 한다.』」사도행전 3:22 · 두루새김

이 말씀의 배경은 신명기 18:15–19입니다. 신명기 18장은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들의 점술과 주술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 해서는 안 되며, 대신 하나님이 세우시는 예언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미래를 맞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그의 입에 말씀을 두시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것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신명기 18:18–19).

베드로는 그 약속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고난받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생명의 근원이신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언자이십니다.

여기서 치유 사건과 설교가 만납니다.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고, 이제 듣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합니다. 치유받은 사람에게는 몸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움직임이 요청됩니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예수님이십니다.

듣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진 경고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그 백성에게서 끊어져 멸망할 것이다.』」사도행전 3:23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18:19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하시는데, 사도행전에서는 「그 백성에게서 끊어져 멸망할 것이다」라는 더 강한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백성 가운데서 끊어진다는 말은 이스라엘 율법의 다른 본문들에도 나오므로, 모세의 말씀을 언약의 심판을 나타내는 말로 넓혀 전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청중에게 주어진 문제는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금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과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예언자들도 모두 지금 이때의 일을 알렸습니다.」사도행전 3:24 · 두루새김

모세로 시작한 예언의 흐름은 사무엘과 그 뒤의 예언자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자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이루어진 일이 지금 예수님 안에서 드러났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 약속의 가장 오래된 출발점 가운데 하나로 돌아갑니다. 아브라함입니다.

「네 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집안이 복을 받을 것이다」

사도행전 3:25–26 본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집안이 복을 받을 것이다.』」사도행전 3:25 · 두루새김

이 약속의 뿌리는 창세기 12:1–3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큰 민족으로 만들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집안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18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자손」으로 옮긴 원문의 말은 본래 씨를 뜻하며, 창세기 문맥에서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어질 후손과 그들을 통한 복을 가리킵니다. 그 낱말 자체가 반드시 단 한 명의 특정 인물만을 뜻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인용은 이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신약의 읽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처음부터 다른 민족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예언자들의 자손이자 언약을 이어받은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언약 안에 이미 다른 모든 민족을 향한 복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을 지우지 않고, 그 약속이 처음부터 얼마나 넓은 목적을 지니고 있었는지 드러냅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을 세워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그 종 예수께서 여러분 각 사람을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하여 복을 주시도록 하신 것입니다.」사도행전 3:26 · 두루새김

「먼저」는 이스라엘에게만 보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바로 앞의 땅의 모든 집안이 복을 받는다는 약속과 충돌합니다. 「먼저」는 이스라엘에게 약속이 먼저 주어졌음을 보여 주면서, 그 복이 모든 민족을 향해 열려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여러분」은 베드로가 앞에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음에 넘겼다고 책망한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약속을 거두셨다고 선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먼저 자기 종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무시하지 않으시지만, 그 악을 지적하시는 목적이 사람들을 끝내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3장은 한 사람의 건강이 회복되는 기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의 마지막에 말하는 복은 뜻밖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하심으로 복을 주십니다.

이 말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스스로 악을 버린 대가로 복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종을 보내어 사람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방식입니다.

아름다운 문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졌는가

사도행전 3:1–26 본문 →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회복은, 베드로의 설교가 끝날 때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모든 민족의 복, 모든 것이 회복되는 때에 관한 이야기로 넓어져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기 능력에 감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그 시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영광스럽게 하신 종, 사람들이 거절했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생명의 근원이신 분께 돌렸습니다. 이 본문이 보여 주는 믿음은 더 큰 기적을 기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주시는 생명의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질병에서 즉시 치유받아야 한다는 약속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이 사건을 영적인 변화의 비유로만 바꾸어 실제로 일어난 몸의 회복이 지닌 의미를 지워서도 안 됩니다. 그의 치유는 실제적인 회복이었고,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주는 표징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거대한 약속을 처음부터 웅장한 모습으로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한 사람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받을지 모른 채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켰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데려다주던 사람들이 있어야만 올 수 있었던 성전에, 이제 그는 자신의 발로 들어갔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전의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이제 그 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것은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새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붙잡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분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