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7장 · 예루살렘에서 시작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

성전에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걷고 뛰는 모습을 직접 보았고, 베드로는 그 일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4장은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을 낫게 한 베드로와 요한이 붙잡힙니다.

그들이 돈을 요구하거나 사람들을 속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폭동을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한 사람을 걷게 했고, 그 일이 누구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다음 날 지도자들은 두 사람에게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고 묻고, 베드로는 그 사람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았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지도자들은 의논 끝에 두 사람을 놓아주기로 합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을 불러 예수의 이름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사도행전 4:18 · 두루새김

처음에는 누구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느냐고 묻더니, 그 이름을 듣고 나서는 다시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지도자들은 그 사람을 고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막으려는 것은 몸이 나은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금지하려는 인간의 권위가 충돌할 때 어떻게 됩니까?

누가는 그 대답을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말로만 끝내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풀려난 뒤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서로 나누는 장면까지 이어서 보여 줍니다. 말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그들은 다시 말할 힘을 구하고, 그들의 삶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더는 오직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 두 모습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74장 본문 읽기 →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일을 들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사도행전 4:1–4 본문 →

반대자들이 등장한 이유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왔습니다.사도행전 4:1 · 두루새김

말씀이 전해지는 도중에 이를 막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등장한 사람들을 보면 이 일이 단순히 개인적인 논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의 예배와 제사에 관련된 사람들이고, 성전 경비대장은 성전의 질서와 경비를 책임지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의 제사장 귀족층과 긴밀하게 연결된 집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백성을 가르치며, 예수께서 살아나신 일을 들어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전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2 · 두루새김

핵심은 부활입니다.

사도행전 23:8은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죽은 사람들이 언젠가 부활한다는 일반적인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붙잡힌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신 일을 들어」 부활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 안에서도 부활에 관한 견해는 갈렸습니다. 사도들은 부활이 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습니다. 더구나 그 예수님은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분입니다.

따라서 이 선포는 종교적 교리의 문제일 뿐 아니라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의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가 됩니다. 사도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거절하고 죽음에 넘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하시고 높이신 것입니다. 다만 누가는 지도자들의 구체적인 정치적 계산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로마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행동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도들은 갇혔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혀 다음 날까지 갇힙니다. 이미 저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습니다. 믿는 남자들의 수는 오천 명쯤 되었습니다.사도행전 4:4 · 두루새김

사도들은 붙잡혔고, 그들의 말을 막으려는 힘이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을 가두는 일이 이미 전해진 말씀의 결과까지 가둘 수는 없었습니다.

누가는 이처럼 시작부터 두 가지 움직임을 나란히 놓습니다. 인간의 권위는 사도들의 활동을 중단시키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소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성전 경비대장은 로마군 지휘관이 아니라 성전 경비 조직을 지휘하는 관리로 이해됩니다. 또 누가는 오천 명이 앞서 믿었던 사람들에 추가된 수인지, 당시 믿는 남자들의 전체 수인지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2장의 삼천 명과 단순히 더해 정확한 신자 수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피고가 된 사람들, 그러나 심문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4:5–12 본문 →

지도자들이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다음 날 예루살렘에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대제사장 집안의 사람들도 함께합니다. 누가는 이 모임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직분을 자세히 기록하지만, 심문받는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운데 세우고 물었습니다. 「너희는 무슨 힘으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사도행전 4:7 · 두루새김

지도자들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묻는 것은 그 사건을 일으킨 힘과 권위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한 것 때문에, 곧 이 사람이 어떻게 나았는지를 두고 오늘 심문을 받는 것이라면,」사도행전 4:9 · 두루새김

질문의 방향이 바뀝니다.

지도자들은 어떤 권위로 그 일을 했는지 묻지만, 베드로는 그 일이 사람에게 도움이 된 일이었다는 사실부터 확인합니다. 그는 이 사건을 추상적인 종교 논쟁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실제로 몸이 불편했던 한 사람이 이제 건강하게 서 있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심문의 출발점입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주신 것

8절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성령으로 가득 차서」 대답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화가 나서 격렬하게 말하거나 타고난 말솜씨로 지도자들을 압도했다는 설명과는 다릅니다.

누가복음 12:11–12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회당이나 통치자들과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 무엇을 말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그때에 해야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이 지금 종교 지도자들 앞에 선 베드로에게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모두와 이스라엘 온 백성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 여러분 앞에 건강하게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사도행전 4:10 · 두루새김

베드로는 지도자들이 묻는 두 가지, 힘과 이름에 한꺼번에 대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모호하게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행동이 대조됩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

「집을 짓는 여러분이 하찮게 여겼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 그 돌이 바로 이 예수입니다.」사도행전 4:11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시편 118:22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감사하며 찬양하는 시이고, 22–23절은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버린 돌을 하나님께서 중요한 돌로 삼으셨다는 뒤바뀜을 노래합니다. 누가복음 20:17에서 예수님께서도 직접 이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에서는 「집 짓는 사람들이 버렸다」고 말하지만, 베드로는 「집을 짓는 여러분이 하찮게 여겼지만」이라고 말합니다. 인용의 말이 달라지면서 시편 속의 집 짓는 사람들이 지금 베드로 앞에 앉아 있는 지도자들과 겹쳐집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어느 돌을 사용할지 판단하듯,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판단했고 그분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버린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판단을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나은 사람에게서 모든 사람의 구원으로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늘 아래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12 · 두루새김

이 말씀은 바로 앞의 치유 사건과 이어져 있습니다. 9절에서 베드로가 이 사람이 「어떻게 나았는지」를 말할 때 쓴 그리스어 동사는 소조(σῴζω)입니다. 이 동사는 구원하다, 건져 내다, 낫게 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12절의 구원을 나타내는 표현들도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앞의 표현을 「나았는지」로, 뒤의 표현들을 「구원받을」로 옮겼기 때문에 그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누구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지 말합니다. 한 사람이 걷게 된 것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지만, 누가는 두 사건을 같은 구원 언어 안에서 연결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 구원의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특정한 이름의 소리를 발음하는 행위가 구원을 보장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 구원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너희가」가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심문받는 사도들과 심문하는 지도자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베드로에게도, 요한에게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름은 같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118편에서 그 돌이 본래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공동체, 왕, 또는 구원받은 의인과 연결하는 해석들이 있고, 신약은 이 돌의 이미지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은 건물의 구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돌을 가리키는 이미지입니다. 정확히 기초의 모퉁잇돌인지, 높은 곳의 머릿돌인지에 관한 해석은 갈릴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그 돌이 건물의 핵심적인 자리에 놓였다는 점입니다.

반박할 수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사도행전 4:13–22 본문 →

지도자들이 놀란 이유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것도 알아보았습니다.사도행전 4:13 · 두루새김

본문은 두 사람이 당시의 율법 전문가들과 같은 교육적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도자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는 두려움 없이 공개적으로 말하는 담대함,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29절과 31절에서 다시 씁니다. 지도자들이 놀라워한 담대함이 공동체의 기도 제목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으로 나타납니다.

13절의 마지막 문장, 「그들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것도 알아보았습니다」는 그 담대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보여 주는 단서로 읽힐 수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정식 교육은 필요 없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일반적인 교육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보여 주는 것은 예수님을 따랐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지 못하는 쪽은 누구인가?

게다가 몸이 나은 사람이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사도행전 4:14 · 두루새김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고 있는데, 그들을 심문하던 사람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바로 옆에 몸이 나은 사람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의회 회의장 밖으로 내보낸 뒤 의논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들을 통해 뚜렷한 표징이 일어났다는 걸 예루살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어. 우리도 그 일을 부인할 수 없어.」사도행전 4:16 · 두루새김

이 말이 지도자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과 신적 권위를 인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그들이 표징이 일어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징의 의미를 더 깊이 살피거나 자신들의 판단을 다시 검토하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사람들 사이에 더 퍼지지 않도록, 앞으로는 아무에게도 이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자.」사도행전 4:17 · 두루새김

그들이 통제하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증언입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지 여러분이 판단하십시오.」사도행전 4:19 · 두루새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20 · 두루새김

이 답변은 단순히 ‘우리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권위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권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을 지도자들 자신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전파할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보고 들은 일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증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문제는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증언을 중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에는 두 부정이 겹쳐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의지가 강하다는 주장만이 아닙니다. 보고 들은 사건과 그 사건을 증언해야 할 책임 때문에 침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국 풀려납니다.

지도자들이 베드로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누가는 지도자들이 백성 때문에 두 사람을 벌줄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한 가지 사실을 덧붙입니다.

몸이 낫는 이 표징이 일어난 그 사람은 마흔 살이 넘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22 · 두루새김

그는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고, 이제 마흔 살이 넘었습니다. 이 치유는 잠시 아팠다가 회복된 사건이 아니라, 오랜 세월 사람들이 알고 지내던 그의 상태가 완전히 달라진 사건입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달라진 몸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정식으로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ἀγράμματο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정식 학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평범한 사람들」(ἰδιώτης)에 해당하는 말은 전문적인 지위나 훈련이 없는 일반인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두 사람이 글자를 전혀 읽지 못했다거나 아무런 지식도 없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위협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4:23–31 본문 →

그들은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곧바로 다시 군중에게 설교하러 나가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동료들에게 돌아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모두 전합니다. 공동체는 지도자들을 비난하거나 보복할 방법을 의논하지 않고, 당장 예루살렘을 떠나야 한다고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 주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사도행전 4:24 · 두루새김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협에 대처할 지혜와 용기인데, 기도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람들의 권위가 얼마나 큰지 알지만, 그 권위가 온 세상의 마지막 권위는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그분의 권위 아래 있으므로, 성전 지도자들의 명령도 하나님의 다스림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라는 호칭은 29절에서 그들이 자신들을 「주님의 종들」이라고 부르는 말과 짝을 이룹니다. 세상에는 그들에게 명령하는 권력자들이 있지만, 그들의 최종적인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위협 앞에서 자신의 주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왜 시편 2편을 기도하는가?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주님의 종인 우리 조상 다윗의 입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다른 민족들은 날뛰며 백성들은 헛된 일을 꾸몄는가?』」사도행전 4:25 · 두루새김
「『땅의 왕들은 일어서고 지도자들은 한데 모여 주님과 그분의 그리스도께 맞섰다.』」사도행전 4:26 · 두루새김

시편 2편은 주님과 그분이 세우신 왕에게 민족들과 왕들이 맞서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그들의 계획 때문에 당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이 세운 왕의 권위를 선포하십니다. 공동체는 이 시편을 예수님의 고난에 적용합니다.

「참으로 이 도시에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다른 민족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모여,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거룩한 종 예수께 맞섰습니다.」사도행전 4:27 · 두루새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본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합니다. 시편 2편의 기름 부음 받은 왕과 예수 그리스도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시편 2편이 처음부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을 예언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초기 공동체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한 민족들의 반역이라는 시편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고난과 높임받으심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얻었다고 이해합니다.

시편에서는 다른 민족들과 왕들이 반역하지만, 공동체가 예수님의 사건에 적용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등장합니다. 여러 집단이 함께 예수님께 맞섰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유대인 전체에 영구적인 책임을 돌리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기도의 중심은 특정 민족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의 반대가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셨다면 사람들은 책임이 없는가?

「그들이 모여 한 일은 주님께서 능력과 뜻으로 미리 일어나도록 정해 두신 일이었습니다.」사도행전 4:28 · 두루새김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절하고 죽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한 것뿐이므로 책임이 없는 것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는 분명히 사람들이 「예수께 맞섰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선한 일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들이 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람의 자유와 책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관해 완성된 철학적 설명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였지만,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패하게 만들지는 못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는 지금 자신들이 받는 위협도 하나님의 다스림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말 구한 것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전하게 해 주십시오.」사도행전 4:29 · 두루새김

그들은 지도자들을 벌해 달라고도, 다시는 자신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막아 달라고도, 안전한 곳으로 보내 달라고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보시고」라며 위협을 하나님 앞에 가져오지만, 그들이 구하는 것은 위협 속에서도 말씀을 거리낌 없이 전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이 장의 흐름을 하나로 묶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공동체는 실제로 그렇게 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용기가 충분하다고 선언하지 않고, 그 용기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종들이 말씀을 전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어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사도행전 4:30 · 두루새김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함께 놓입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기적을 일으킬 능력을 달라고만 요청하지 않고, 하나님이 손을 뻗어 일하시기를 구합니다. 전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근거가 되는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며, 사람들을 고치는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모인 곳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흔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리낌 없이 전했습니다.사도행전 4:31 · 두루새김

모인 곳이 흔들린 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응답은 그다음 문장, 그들이 거리낌 없이 말씀을 전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구한 일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 뒤로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새로운 위협 앞에서 다시 구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힘을 주셨습니다. 이 장은 그 힘을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위험이 여전히 있는 가운데서도 말씀을 전하는 용기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δεσπότης)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집과 그 안의 사람들을 다스리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흔히 「주님」으로 옮기는 표현과 구별되는 이 뜻을 풀어 옮겼습니다. 또 출애굽기 19:18에서도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실 때 산이 크게 흔들립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4장의 흔들림을 그와 완전히 같은 사건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4:32–35 본문 →

공동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는 사람들은 마음과 뜻이 하나였습니다. 아무도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만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함께 썼습니다.사도행전 4:32 · 두루새김

앞에서는 의회가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제 누가는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 기록합니다. 누가가 두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조시켰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의회가 사도들의 말을 통제하려 할 때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더는 자기만을 위해 붙들지 않습니다.

이것은 강제로 모든 소유권이 폐지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법적으로 누구의 소유인지보다 소유를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부활 증언과 재산 나눔은 왜 한 문단에 놓였을까?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함께했습니다.사도행전 4:33 · 두루새김

32절과 34–35절은 재산을 나누는 공동체를 설명하는데, 그 사이에 부활 증언에 관한 문장이 들어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증언과 새로운 공동체의 삶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부활을 믿으면 반드시 재산을 전부 나누어야 한다’는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되었는지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시고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이제 각 사람의 필요가 중요해졌고, 그들이 가진 것이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생활에 필요한 것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생활에 필요한 것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밭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재산을 팔아 그 값을 가져와,사도행전 4:34 · 두루새김

이 말은 신명기 15:4를 떠올리게 합니다. 빚을 면제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펴라는 신명기 15장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복 안에서 살아갈 때 그들 가운데 필요한 것이 부족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이상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4장의 공동체는 그 오래된 이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누가는 초대 교회에서 경제적인 문제가 영원히 사라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 그 값을 가져왔고, 그 결과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자, 그 재산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곤 했고, 그 돈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4:35 · 두루새김

나눔의 기준은 필요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양을 받았다거나 똑같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나 막연한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 사람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데까지 갑니다.

누가는 이 나눔을 특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33절의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함께했습니다」와 함께 기록합니다. 사도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낫게 했다고 말하지 않았듯, 공동체의 나눔도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바나바 — 한 사람의 행동으로 끝나는 이야기

사도행전 4:36–37 본문 →

왜 갑자기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할까?

누가는 공동체 전체의 모습을 설명한 뒤, 마지막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키프로스에서 태어난 레위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4:36 · 두루새김

셈어 표현에서 ‘무엇의 아들’은 어떤 성격이나 특징을 지닌 사람을 그리는 방식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위로의 아들」은 그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격이나 역할과 연결된 별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파라클레시스는 위로뿐 아니라 격려나 권고를 의미할 수 있으므로, 「위로의 아들」과 「격려의 아들」 모두 문맥상 가능한 읽기입니다.

누가는 바나바가 위대한 설교를 했다거나 특별한 기적을 일으켰다고 먼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가 무엇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밭을 팔아 돈을 가져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사도행전 4:37 · 두루새김

밭을 팔았습니다. 돈을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설명이 이제 한 사람의 이름과 행동을 통해 눈앞의 장면이 됩니다. 누가는 바나바가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소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줍니다.

위로는 말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렸지만, 이 장에서 그가 실제로 한 일은 돈을 가져와 공동체 앞에 놓은 것입니다. 누가는 그 돈으로 누구를 도왔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바로 앞 문맥은 그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다고 알려 줍니다. 바나바의 행동은 공동체의 나눔에 참여하는 행동이고, 그의 별명과 잘 어울리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도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몫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일반적인 영토 분배를 받지 않았습니다(민수기 18:20–24). 그러나 민수기 35:1–8에서는 레위 사람들에게 살 성읍과 목초지를 주도록 정하므로, 레위 사람인 바나바가 밭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과 모순된 것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 밭이 키프로스에 있었는지 예루살렘에 있었는지,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4장이 보여 주는 부활의 힘

사도행전 4:1–37 본문 →

사도행전 4장의 장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한 사람이 나았고, 그 이름 때문에 사도들은 붙잡혔으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름을 증언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고, 그 이름을 믿는 공동체는 서로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예수님의 이름을 인간의 권위가 금지하려 할 때, 그 이름은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긴 돌을 하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듯, 지도자들이 막으려 한 이름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누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언제나 위험에서 보호받고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혔고, 앞으로 더 이상 반대가 없을 것이라는 약속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은 사도들이 말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고, 사람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지막에 그 모든 일을 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여 줍니다. 바나바라고 불리는 요셉이 밭을 팔아 돈을 가지고 와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곳에는 자신들의 말을 막으려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증언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날들의 이야기 끝에서, 한 사람이 말없이 자신의 것을 가져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내놓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그렇게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