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7–9장 · 짐승과 나라들의 환상
칠십 년의 약속과 일흔 번의 일곱
다니엘은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황폐에 정해 놓으신 기간이 칠십 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가 읽은 것은 새로운 예언이 아니라 오래전에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먼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쓴 채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이 저지른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찾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칠십 년에 이어, 이제 ‘일곱씩 묶인 일흔 기간’이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에는 예루살렘의 재건뿐 아니라 다시 찾아올 황폐와 제사의 중단, 기름부음 받은 이의 단절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황폐가 언제 끝날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대답은 더 깊은 문제를 향합니다. 성이 다시 세워지는 것과 죄가 끝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칠십 년을 발견한 다니엘은 왜 금식했을까?
시대는 메대 혈통의 다리우스가 칼데아 왕국의 왕으로 세워진 첫해입니다. 다니엘 5장에서는 벨사살이 죽고 다리우스가 나라를 차지했다고 기록했으므로, 이야기의 순서에서 바벨론 왕조의 몰락 직후에 해당합니다. 다만 이 ‘메대 사람 다리우스’를 알려진 역사 속 어느 통치자와 동일시해야 하는지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를 아하수에로의 아들로 소개하며, 그가 왕으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은 이때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말씀을 책들에서 읽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25:11–12는 여러 민족이 바벨론 왕을 칠십 년 동안 섬기며, 그 기간이 끝나면 바벨론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 29:10은 칠십 년이 차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레미야의 말씀은 바벨론의 지배 기간과 귀환의 약속을 함께 다룹니다. 다니엘은 그 말씀을 예루살렘의 황폐가 끝날 기간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하나님에게서 직접 환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왕의 꿈을 해석하기도 했고, 제국들의 미래에 관한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9장에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통로는 새로운 환상이 아니라 기록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약속된 칠십 년이 끝나 가고 있음을 깨달은 다니엘은 왜 기뻐하기보다 금식할까요?
그는 예레미야의 약속을 회복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9장에는 귀환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께 기도하며, 온 마음으로 찾으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렘 29:12–14). 다니엘은 그 약속을 따라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3절은 그가 ‘주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뒤이어 나오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비추어 주시기를 구합니다(17절). 이 두 장면은 서로 호응합니다. 다니엘이 먼저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하나님도 황폐해진 성소를 다시 돌아보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금식과 굵은 베옷과 재는 슬픔과 낮아짐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그는 칠십 년을 계산하여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칠십 년 동안 자기 백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성의 회복을 기다리기에 앞서, 다니엘은 왜 그 성이 무너졌는지를 고백하려 합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습니다'가 아니라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밝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에게 기도하고 고백하며 말했다. 「아, 주여, 크고 두려운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명령을 지키는 이들에게 언약과 한결같은 사랑을 지키시는 분이여,」다니엘 9: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7:9의 언약 언어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 신실하심에 기대어 기도를 시작합니다.
「저희가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악을 행하고 반역했습니다. 당신의 명령과 법도에서 벗어났습니다.」다니엘 9:5 · 본디새김
다니엘은 조상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죄도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하여 ‘저희가’라고 고백합니다. 다니엘은 자신을 공동체 밖에 세우고 그들의 잘못을 평가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선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기도 방식은 에스라 9:6–15와 느헤미야 1:5–11에서도 나타납니다. 공동체의 과거와 현재를 하나님 앞에 내놓을 때, 지도자는 자신을 그 역사로부터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죄를 단순히 잘못된 행동들의 목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6절은 그 죄의 핵심이 무엇인지 밝혀 줍니다.
「저희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이름으로 저희 왕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에게, 그리고 그 땅의 온 백성에게 말했습니다.」다니엘 9:6 · 본디새김
다니엘은 그들의 불행을 하나님이 아무런 경고 없이 내리신 재앙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듣는다’는 말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말씀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10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말을,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걷지 않았다’는 말과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7절에서는 기도의 시야가 넓어집니다.
「주여, 의로움은 당신께 있고, 오늘처럼 얼굴의 수치는 저희에게 있습니다. 곧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이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그들을 내쫓으신 모든 땅에 있는 온 이스라엘, 곧 가까이 있는 이들과 멀리 있는 이들에게 있습니다.」다니엘 9:7 · 본디새김
다니엘이 처음 읽은 약속은 예루살렘의 황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하는 대상은 예루살렘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가 구하는 회복은 무너진 수도 하나의 복구가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 전체의 회복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은 민족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의 수치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부당하게 대하셨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백성이 겪은 고통을 가볍게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 안에서 돌아봅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그분께 반역했어도, 주 저희 하나님께는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다니엘 9:9 · 본디새김
자신들에게 의로움이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까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로움과 인간의 죄 사이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죄를 줄여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죄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 작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재앙이 닥쳤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더 깊은 비극
다니엘은 이제 예루살렘에 닥친 재앙을 모세의 율법과 연결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당신의 율법을 어기고 돌아서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저주와 맹세가 저희 위에 쏟아졌습니다. 저희가 그분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9:11 · 본디새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렸을 때 겪게 될 재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26:31–35는 성읍과 성소가 황폐해지고, 백성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지며, 그들이 떠난 땅이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이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는 이 언약적 경고의 내용과 겹칩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저희에게 닥쳤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저희 죄악에서 돌아서고 당신의 진실을 깨닫고자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다니엘 9:13 · 본디새김
다니엘은 재앙 자체를 가장 큰 비극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재앙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한 것이 더 깊은 비극입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칠십 년이 끝나면 바벨론의 지배가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칠십 년이 흘렀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린 마음이 자동으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은 바로 이 문제를 자신의 기도로 마주합니다. 백성이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일을 그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죄악에서 돌아서고 하나님의 진실을 깨닫기 위해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 재앙을 두고 깨어 지켜보시며 저희에게 가져오셨습니다. 저희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는 행하신 모든 일에서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다니엘 9:14 · 본디새김
하나님이 재앙을 ‘깨어 지켜보셨다’는 표현은 낯설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예레미야 1:12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이루기 위해 지켜보신다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같은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회복의 약속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관해 하신 말씀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인정한 뒤에도 하나님께 회복을 구합니다.
레위기 26:40–45에서는 백성이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이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30:1–6도 흩어진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며 마음을 새롭게 하실 것을 전망합니다.
이제 그의 기도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고백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무엇을 해 주시기를 원하는지 간구하는 자리로 넘어갑니다.
'저희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당신의 크나큰 자비에 기대어서'
다니엘은 간구를 시작하면서 이집트에서의 구원을 떠올립니다.
「이제 주 저희 하나님, 당신께서는 강한 손으로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오늘과 같이 당신의 이름을 떨치셨습니다. 저희가 죄를 지었습니다. 악을 행했습니다.」다니엘 9:15 · 본디새김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얻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한 손으로 그들을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동하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회복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기대어 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의 모든 의로운 행위에 따라, 부디 당신의 분노와 격노가 당신의 성 예루살렘,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물러가게 해 주십시오. 저희의 죄와 저희 조상들의 죄악 때문에 예루살렘과 당신의 백성이 저희 주위의 모든 이에게 모욕거리가 되었습니다.」다니엘 9:16 · 본디새김
앞에서 다니엘은 의로움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의 심판이 정당했음을 인정했습니다(7절). 이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의로운 행위에 따라 분노를 거두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의로움이 심판을 인정하는 근거이면서 회복을 간구하는 근거가 됩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은 단지 잘못한 사람을 벌하는 성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고, 그 언약에 따라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성품 전체와 관계됩니다.
17절에서는 간구가 더욱 구체적이 됩니다.
「이제 저희 하나님, 당신의 종의 기도와 그의 간구를 들어 주십시오. 주를 위하여, 황폐한 당신의 성소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비추어 주십시오.」다니엘 9:17 · 본디새김
하나님의 얼굴이 비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호의와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민수기 6:24–26에서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도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해졌고 성소는 무너졌습니다. 다니엘이 가장 먼저 바라는 것은 그 폐허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다시 놓이는 일입니다.
「저의 하나님, 당신의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십시오. 당신의 눈을 열어 저희의 황폐한 곳들과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을 보아 주십시오. 저희가 당신 앞에 간구를 올리는 것은 저희의 의로운 행위에 기대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크나큰 자비에 기대어서입니다.」다니엘 9:18 · 본디새김
그는 자신들이 충분히 고생했으니 이제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견뎠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칠십 년이 다가온다는 사실조차 백성의 의로움에 대한 증거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단지 한 민족이 옛 영토를 되찾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신 곳과 그분의 백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를 두고 하나님께 간구한 장면들, 특히 출애굽기 32:11–14와 민수기 14:13–19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 역시 백성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에 기대어 간구했습니다.
19절에 이르면 기도의 문장이 짧아지고 다급해집니다.
「주여, 들어 주십시오. 주여, 용서해 주십시오. 주여, 귀 기울여 주시고 행동해 주십시오. 저의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하여 지체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성과 당신의 백성이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입니다.」다니엘 9:19 · 본디새김
처음에는 길고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던 고백이 이제 연속된 간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 간청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예상하지 못한 응답이 찾아옵니다.
저녁 곡식제물을 드릴 무렵에 찾아온 가브리엘
다니엘은 기도를 마치고 기다리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아직 기도하며 말하고 있을 때, 처음 환상에서 보았던 그 사람 가브리엘이 몹시 지친 채 저녁 곡식제물을 드릴 무렵 내게 다가왔다.다니엘 9:21 · 본디새김
이 시간 표현이 특별한 이유는 다니엘이 예루살렘에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소는 황폐해졌고, 다니엘은 유배지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 시간을 기준으로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성전이 무너졌어도 성전에서 드리던 예배의 리듬은 그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다니엘은 황폐한 성소를 위해 기도하고 있고, 바로 성소에서 제물을 드려야 할 시간에 하나님의 응답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네가 간구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나왔다. 나는 그것을 알려 주러 왔다. 네가 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말을 깨닫고 그 환상을 깨달아라.」다니엘 9:23 · 본디새김
다니엘은 지금까지 자신들과 조상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다니엘의 간구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기대어 나아온 다니엘이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다니엘을 위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깨달음을 주러 왔다고 말합니다. 다니엘이 읽었던 칠십 년의 약속이 하나님의 더 큰 계획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칠십 년에서 일흔 번의 일곱으로 — 회복의 범위가 달라지다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두고 일곱씩 묶인 일흔 기간이 정해졌다. 반역을 억제하고 죄를 끝내며, 죄악을 속죄하고 영원한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예언자를 봉인하고 지극히 거룩한 것에 기름을 붓기 위해서다.」다니엘 9:24 · 본디새김
그 목적은 여섯 가지로 제시됩니다. 앞의 세 가지는 반역과 죄악을 다루고, 뒤의 세 가지는 새로운 의로움과 예언의 성취, 거룩함의 회복을 가리킵니다.
그는 성전이 무너졌다는 사실만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반역을 고백했고, 재앙을 겪은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던 마음을 탄식했습니다.
그런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회복의 목표가 죄를 다루는 데까지 이른다고 알려 주십니다.
다니엘은 용서를 간구했습니다. 가브리엘은 죄악 자체를 속죄하는 일을 회복의 목표에 포함합니다. 단지 유배의 형벌이 끝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무너뜨린 죄악의 문제가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어 ‘영원한 의’가 등장합니다.
지금까지 다니엘의 기도에서 의로움은 하나님께 있고 수치는 백성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하신 회복의 목표에는 영원한 의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변함없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그 의로움이 백성의 미래를 규정하는 상태가 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에 이르는 길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일곱으로 묶인 단위’가 일흔 개라는 뜻입니다. 한 단위를 일곱 해로 이해하면 전체는 70 × 7 = 490년이 됩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 자체가 ‘490년’이라고 직접 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곱의 구조는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레위기 25:8에서는 일곱 해를 한 주기로 하는 안식년을 일곱 번 세어, 7 × 7 = 49년을 계산합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희년에는 자유와 기업의 회복이 선포됩니다(레 25:8–13). 또한 역대기하 36:21은 예루살렘의 황폐와 예레미야의 칠십 년을 땅이 안식을 누리는 기간과 연결합니다. 다만 이것이 실제 희년 열 번을 정확히 계산하도록 의도된 것인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죄를 끝내며’라는 표현에는 본문 전승상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전승에는 죄를 끝낸다는 읽기와 봉인한다는 읽기가 함께 전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 단락에서 반역과 죄악이 제한되고 처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환상과 예언자를 봉인한다’는 표현은 더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봉인한다는 말은 감추거나 보존한다는 뜻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예언된 말씀이 확증되거나 그 목적에 도달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여지도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앞으로 예언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것’은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지만, 제단이나 거룩하게 구별된 예물 등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황폐한 성소의 회복과 연결하여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이 표현을 궁극적인 메시아적 거룩함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표현 자체가 특정한 사람을 직접 지칭하는 것은 아니므로, 먼저 성소와 예배의 회복이라는 구약적 문맥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죄악을 속죄하고 영원한 의를 가져온다’는 24절의 목표는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실 것을 전망합니다.
성은 재건되지만, 다시 파괴될 것이다
가브리엘은 이제 그 기간을 나누어 설명합니다.
「그러니 알고 깨달아라. 예루살렘을 회복시키고 세우라는 말이 나온 때부터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까지 일곱씩 묶인 일곱 기간이 있다. 또 일곱씩 묶인 예순두 기간 동안, 고난의 때에도 그 성은 광장과 해자를 갖추어 다시 세워질 것이다.」다니엘 9:25 · 본디새김
전체 일흔 기간은 일곱 기간, 예순두 기간, 마지막 한 기간으로 나뉩니다. 각 단위를 일곱 해로 읽을 경우 각각 49년, 434년, 7년이 되고, 전체는 490년이 됩니다. 그러나 이 계산만으로 어느 역사적 사건을 기점과 종점으로 삼아야 하는지가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26절에서 더욱 뜻밖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일곱씩 묶인 그 예순두 기간 뒤에 기름부음 받은 이가 끊어지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다가오는 지도자의 백성이 성과 성소를 파괴할 것이다. 그의 끝은 홍수와 함께 올 것이며,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다. 황폐함이 정해져 있다.」다니엘 9:26 · 본디새김
다니엘은 황폐한 예루살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은 예루살렘이 다시 세워진 뒤에도 또 다른 파괴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이 다시 세워진다고 해서 그 성이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성소가 회복된다고 해서 거룩한 것을 모독하는 세력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읽는 해석에서는 26절의 인물을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와 연결합니다. 반면 기독교적 메시아 해석에서는 기름부음 받은 이의 단절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합니다. 두 읽기는 인물의 정체뿐 아니라 전체 기간을 계산하는 방식과 27절의 언약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에 직접 나오지 않는 인물의 이름이나 정확한 날짜를 본문 자체의 명시적인 설명처럼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이 그토록 간절히 회복되기를 구했던 성은 다시 전쟁과 황폐의 위험 속에 놓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요?
이 질문을 품고 마지막 한 기간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말’이 누구에게서 언제 나오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회복 약속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루살렘 재건을 허락하는 왕의 명령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라 1:1–4에는 고레스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고, 느헤미야 2:1–8에는 아닥사스다 시대의 예루살렘 재건 허가가 나타납니다. 본문이 기점을 명시적인 날짜로 확정하지 않으므로, 여러 연대 계산은 각각 선택한 출발점과 해석상의 전제를 드러내야 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의 정체 역시 확정적으로 이름 붙이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메시아’라는 칭호로 발전하는 표현이지만,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등 하나님께 구별된 직분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1에서는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도 이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 9장에 ‘기름부음 받은 이’가 등장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후대의 특정한 메시아 이해를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를 고레스나 귀환 시대의 지도자와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하며, 기독교적 읽기에서는 메시아를 향한 전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본디새김은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까지의 일곱 기간과 성이 재건되는 예순두 기간을 구별합니다.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낭송 구분 역시 일곱 기간 뒤에 큰 쉼을 둡니다. 다만 이 낭송 표지는 원래의 자음 본문보다 후대에 정리된 것이므로, 일곱 기간과 예순두 기간을 하나의 긴 기간으로 묶어 읽는 전통도 존재합니다. 어느 방식으로 구분하는지에 따라 ‘기름부음 받은 이’가 등장하는 시점이 달라집니다. ‘끊어진다’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생명의 단절이나 지위의 상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뒤따르는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 역시 그가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 정확히 한 가지로 확정하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또한 25절의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와 26절의 ‘기름부음 받은 이’가 반드시 동일 인물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마카베오기하 4:33–38에는 오니아스 3세가 부당하게 살해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해에서는 이어지는 성소의 황폐를 안티오코스 4세 시대의 박해와 연결합니다. 기독교적 메시아 해석의 경우 성과 성소의 파괴는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을 직접 밝히는 본문의 명시적 설명이라기보다, 신약의 구원 이해에 비추어 읽는 메시아적 해석입니다. ‘홍수’는 반드시 실제 물의 범람을 뜻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쟁과 파괴가 거세게 밀려오는 모습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의 끝’이 바로 앞의 지도자를 가리키는지, 그가 이끄는 파괴적 세력의 종말을 가리키는지는 문장의 연결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기간 — 언약과 제사의 중단, 그리고 정해진 파멸
마지막 절은 다니엘서에서도 특히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는 일곱씩 묶인 한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을 위해 언약을 굳게 할 것이며, 그 기간의 한가운데에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드리는 일을 그치게 할 것이다. 가증한 것들의 날개 위에는 황폐하게 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정해진 파멸이 황폐하게 하는 자 위에 쏟아질 때까지 그럴 것이다.」다니엘 9:27 · 본디새김
먼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지만, 본문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는 26절의 ‘다가오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성소를 파괴하는 통치자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등장한 기름부음 받은 이와 연결하여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성소를 파괴하는 통치자가 많은 사람과의 협약을 강요하거나 강화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언약을 확고하게 하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곧바로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악한 통치자가 맺는 정치적 협약이라고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기록된 저주가 자기 백성 위에 쏟아졌다고 고백했습니다(11절). 이제 가브리엘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정해진 파멸이 쏟아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처음에는 언약을 저버린 백성이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성소를 짓밟고 황폐를 가져오는 세력도 심판 아래 놓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은 악이 마음대로 활동하도록 내어 준 무한한 시간이 아니라, 그 악에도 마지막이 있음을 밝히는 시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언약을 굳게 한다’는 표현 역시 모호합니다. 반드시 새로운 언약을 맺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소를 파괴하는 통치자가 많은 사람과의 협약을 강요하거나 강화하는 장면으로 볼 경우 뒤이어 제사를 중단시키는 행동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언약을 확고하게 하는 장면으로 읽는 기독교의 메시아적 해석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읽으려면 이어지는 제사 중단과 황폐의 표현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기간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을 시점으로 읽고, 한 단위를 칠 년으로 환산한다면 7 ÷ 2 = 3.5년이 됩니다. 반면 원문의 ‘절반’을 시점보다 지속 기간에 가깝게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곱 기간의 절반이라는 구조는 다니엘 7:25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서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이 거룩한 백성을 압박하는 기간을 제한된 시간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두 표현은 관련됩니다. 특히 제사를 중단시키는 장면은 다니엘 8:11–13과 11:31에 나타나는 성소의 침해와 연결됩니다. 마카베오기상 1:54–59에는 안티오코스 4세 시대에 제단 위에 가증한 것이 세워지고, 기존 예배가 침해되며, 다른 제사가 드려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27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배경입니다. ‘가증한 것들의 날개’는 원문에서도 뜻을 확정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케나프은 날개뿐 아니라 옷자락이나 건축물의 끝부분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특정 부분, 우상 숭배와 관련된 시설, 또는 상징적인 형상을 가리키는지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황폐하게 하는 자’라는 표현도 문법과 문맥에 따라 황폐를 일으키는 주체 또는 황폐해진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24:15에서 예수가 다니엘의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언급하시는 장면은 다니엘 9:27과 11:31, 12:11의 표현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다니엘의 성소 황폐 이미지가 후대의 위기를 이해하는 언어로 다시 사용되는 것입니다.
회복을 구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믿음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기도할 필요를 없애는 보증서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다니엘은 자신이 이해한 칠십 년의 끝을 바라보며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일흔 번의 일곱으로 표현된 더 긴 역사의 전망을 들려주셨습니다. 다니엘이 바라던 회복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회복이 어디까지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제국의 폭력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고난이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이 지금의 모든 사건을 우리가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의 마지막 말씀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질 정해진 파멸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말씀의 출발점에는 조용한 장면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성전은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저녁 곡식제물을 드려야 할 시간이 되었지만,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제단 앞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 유배지에서 금식하고 자신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브리엘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네가 간구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나왔다.」
다니엘은 아직 기도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가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회복도 아직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황폐한 성소를 향해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어 달라고 간구하는 동안, 하나님에게서 온 말씀이 이미 그에게 이르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