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먹고 누구와 함께 먹는가
신명기 14장은 죽은 사람을 위해 몸을 베지 말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는지 길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소출의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 레위 사람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가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얼핏 서로 관계없는 세 가지 주제처럼 보입니다. 장례 풍습, 음식 규정, 십일조 제도가 한 장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첫머리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밝힙니다. 마지막에서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수확을 누구와 나누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이 장에서 음식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매일의 식탁에서 기억하게 하는 것이며, 그분에게서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과 다른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일이 한 장 안에서 연결됩니다.
죽은 사람 앞에서 기억해야 할 자신의 신분
왜 장례 풍습에 관한 명령으로 시작하는가
「여러분은 여호와야훼 여러분의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여러분의 몸을 베지 말고, 두 눈 사이의 머리털을 밀지 마십시오.」신명기 14:1 · 본디새김
모세는 먼저 금지 사항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출애굽기 4:22에서 여호와야훼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자신의 맏아들이라고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 1:31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듯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안고 가셨다고 회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관계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행동과 연결됩니다.
「두 눈 사이의 머리털을 밀다」는 말은 이마 부근의 머리털을 밀어 대머리처럼 만드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런 행동은 고대 세계의 애도 관습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16:6과 41:5에서도 죽음과 슬픔을 표현하는 문맥에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행동이 등장합니다.
다만 신명기 14:1에 나오는 두 행동이 언제나 특정 이방신을 섬기는 의식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풍습의 정확한 기원이나 의례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명령일까
모세는 여기서 슬픔이나 애도 자체를 금지하지 않습니다. 금지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행하는 특정한 신체 훼손과 머리털을 미는 관습입니다.
창세기 50:1에서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죽자 그의 얼굴 위로 엎드려 울었습니다. 신명기 34:8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를 위해 삼십 일 동안 애곡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믿음이 깊은 사람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이 행동들이 금지되었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장례 의식의 역사에서 찾지 않고, 이스라엘의 신분에서 찾습니다.
「당신은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는 땅 위의 모든 백성 가운데서 당신을 선택하여 그분의 특별한 소유인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신명기 14: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 속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깊은 슬픔의 순간에도 그 관계는 중요합니다.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는 말
출애굽기 19:5와 신명기 7:6에서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7:7–8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이유가 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시고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특별함은 자신들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행동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그 신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신분을 먼저 밝힌 뒤, 모세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 가운데 하나로 시선을 옮깁니다.
먹는 일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무엇을 먹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식탁
3절은 음식 규정 전체의 제목처럼 놓여 있습니다.
「당신은 역겨운 것을 아무것도 먹지 마십시오.」신명기 14:3 · 본디새김
이어서 육지의 짐승, 물속의 생물, 새와 날아다니는 생물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 법규들은 레위기 11장과 매우 가깝습니다. 두 본문 모두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을 구별합니다.
레위기 11장은 동물의 사체를 만졌을 때 생기는 부정함과 정결하게 되는 절차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반면 신명기 14장은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먹을 수 없는가에 집중합니다.
또한 신명기는 음식 규정의 앞과 뒤에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놓습니다(14:2, 21). 이스라엘이 무엇을 먹는가도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짐승
4–6절에서는 먼저 먹을 수 있는 육지 동물을 열거합니다. 소와 양과 염소가 등장하고, 사슴과 가젤을 비롯한 여러 들짐승이 이어집니다.
「짐승 가운데 굽이 완전히 두 갈래로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신명기 14:6 · 본디새김
둘 중 하나만 갖춘 짐승은 먹을 수 없습니다. 낙타와 산토끼와 바위너구리는 본문에서 되새김질하는 동물로 분류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으로 설명됩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하지 않는 동물로 제시됩니다.
예를 들어 산토끼와 바위너구리는 오늘날 생물학에서 소와 같은 반추동물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들이 되새김질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를 설명할 때에는 고대의 동물 관찰 방식과 오늘날의 해부학적 분류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은 현대 생물학의 소화기관 분류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사람들이 동물의 겉모습과 먹는 행동을 관찰하며 사용한 범주로 음식 규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토끼와 바위너구리의 입 움직임이나 먹는 행동을 되새김질과 유사하게 관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어떤 관찰을 근거로 이 표현을 사용했는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부정한 동물은 나쁜 동물인가
신명기 14장은 특정 동물이 건강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먹을 수 없는 동물들이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의례적·음식적 구별과 관련된 범주입니다.
어떤 동물은 탐욕스럽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거나, 어떤 동물은 불결한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금지되었다고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장에서 분명하게 제시되는 근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배가 고플 때 단지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구하기 쉬운 것인지, 맛있는 것인지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음식 규정은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속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
「물속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여러분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러합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신명기 14:9 · 본디새김
물속에 사는 생물도 두 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구별됩니다. 지느러미와 비늘을 모두 갖춘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됩니다.
새와 날아다니는 생물
모세는 정결한 새는 먹을 수 있다고 말한 뒤, 먹어서는 안 되는 새와 날아다니는 생물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독수리와 여러 맹금류, 까마귀 종류, 다양한 새와 박쥐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모든 동물의 정확한 현대적 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 등장하는 몇몇 이름은 어떤 종을 가리키는지 불확실합니다. 예를 들어 본디새김에서 음역으로 남긴 페레스, 오즈니야, 라아, 타흐마스, 얀슈프, 틴셰메트 등의 이름은 고대어의 쓰임과 번역 전통을 비교해도 정확한 생물종을 모두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박쥐가 새들과 함께 열거된다는 사실은 이 목록이 현대의 동물 분류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박쥐는 오늘날 포유류로 분류되지만, 고대의 이 목록에서는 하늘을 나는 생물들과 함께 다루어집니다.
19–20절에서는 날아다니며 무리 지어 움직이는 생물과 정결한 날아다니는 생물이 구별됩니다. 레위기에서는 날아다니는 작은 생물 가운데 특정한 메뚜기 종류를 먹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신명기 14:19는 날아다니며 무리 지어 움직이는 생물을 모두 부정하다고 말하고, 20절은 정결한 날아다니는 생물은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두 본문을 조화롭게 읽는 해석은 20절의 정결한 날아다니는 생물에 레위기에서 허용된 종류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반면 신명기 14:19의 포괄적인 금지를 보다 엄격한 규정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신명기 본문은 어떤 곤충이 정결한지 구체적인 목록을 제시하지 않으므로, 이 두 구절만으로 그 범위를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식탁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구별에 따라 꾸리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14장의 음식 규정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까요? 이 규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음식과 정결에 관한 문제를 새로운 상황에서 다룹니다. 마가복음 7:18–23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는 문제를 음식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과 연결하십니다. 특히 마가복음 7:19의 마지막 표현을 모든 음식을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말씀으로 읽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문장이 앞선 음식의 소화 과정과 어떻게 문법적으로 연결되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상의 논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0:9–16에서는 베드로가 여러 동물이 담긴 환상을 보고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직접적인 전개를 따라가면, 베드로는 그 환상을 사람을 부정하거나 속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사도행전 10:28). 따라서 그 환상을 음식 규정만을 다루는 장면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로마서 14장에서는 음식 문제로 서로를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신약 본문들은 음식과 정결의 문제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되고 적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명기 14장의 규정이 이스라엘에게 아무 의미 없는 임시적이고 임의적인 명령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 규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내도록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죽은 짐승과 어미의 젖 — 음식 규정의 마지막 두 명령
거룩한 백성은 죽은 짐승을 먹지 않는다
21절은 음식 규정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신분을 언급합니다.
「당신은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이므로, 죽은 짐승의 사체는 어느 것도 먹지 마십시오. 당신의 성읍에 있는 거류민에게 그것을 주어 먹게 하거나 외국인에게 파십시오.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마십시오.」신명기 14:21 · 본디새김
여기서 죽은 짐승의 사체는 앞에서 열거한 부정한 동물과 완전히 같은 범주가 아닙니다. 따라서 원래 먹을 수 있는 종류의 짐승이라도 이런 상태로 죽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먹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종류의 짐승인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짐승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소는 먹을 수 있는 짐승입니다. 그러나 죽은 소의 사체라고 해서 무조건 먹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신명기 12장에서 피와 생명을 구별하여 다루었던 말씀과 연결됩니다. 다만 14:21 자체는 사체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별도로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거룩한 백성이므로 특정한 애도 관습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거룩한 백성이므로 죽은 짐승의 사체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분이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과 식탁에서의 행동을 함께 규정하는 것입니다.
거류민은 먹어도 된다는 말
그런데 바로 다음에 뜻밖의 허락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지된 음식을 거류민에게는 주어 먹게 할 수 있고, 외국인에게는 팔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본문은 이에 관한 윤리적 설명을 길게 덧붙이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음식 규정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줍니다.
레위기에서는 본토인과 거류민이 사체를 먹었을 때 몸과 옷을 씻고 저녁까지 부정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나옵니다. 신명기 14:21은 거류민에게 사체를 주어 먹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레위기는 그러한 음식 섭취 이후의 부정함과 정결 절차를 다룹니다.
두 본문이 전혀 다른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규정의 적용 범위와 허용 여부를 완전히 동일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명기가 말하지 않은 조건을 보충하여 두 본문이 처음부터 세부 사항까지 같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 10:18–19는 하나님께서 거류민을 사랑하시어 빵과 옷을 주시며, 이스라엘도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거류민이 십일조로 마련한 양식을 먹고 배부르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21절을 이스라엘이 먹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거류민에게 떠넘겨도 된다는 일반적인 허가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은 특정한 음식의 처리에 관한 규정이며, 거류민을 사랑하고 돌보라는 신명기의 다른 명령들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새끼 염소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이 명령은 출애굽기 23:19와 34:26에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세 본문 모두 왜 이것을 금지하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이 행위가 당시의 특정한 종교적 풍습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합니다. 다른 읽기는 새끼를 먹이는 어미의 젖을 그 새끼를 삶는 데 사용하는 행위가 생명을 돌보는 관계를 뒤집는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후자의 해석은 젖이 본래 새끼를 먹여 살리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생명을 길러 내는 젖으로 그 생명을 잃은 새끼를 삶는다는 데서 부적절한 혼합이나 잔혹함의 이미지를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러한 이유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 구절이 정확히 어떤 가나안 의식에 대한 금지였다는 사실도 성경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도 확정적인 설명으로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후대 유대교에서는 이 명령을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광범위한 식사 규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4:21 자체가 모든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는 일을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에서 모세는 음식의 선택뿐 아니라 음식의 조리 방식에도 지켜야 할 규정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모세는 갑자기 소출의 십분의 일을 떼어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먹으라
십일조는 먹는 일과 연결된다
22절은 분명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이 뿌린 씨가 밭에서 내는 모든 소출에서 해마다 반드시 십분의 일을 떼어 놓으십시오.」신명기 14:22 · 본디새김
히브리어에는 「십분의 일을 떼어 놓다」(עָשַׂר)라는 동사가 같은 어근을 반복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23절을 보면 예상 밖의 지시가 나옵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 그분께서 자기 이름을 그곳에 머물게 하려고 선택하실 곳에서 당신의 곡식과 새 포도주와 갓 짠 기름의 십분의 일과 당신의 소 떼와 양과 염소 떼의 첫 새끼들을 먹으십시오. 이는 당신이 언제나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신명기 14:23 · 본디새김
여기서 먹는 행위는 소출의 근원을 기억하는 행동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밭에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에서 산물을 얻습니다. 가축도 번식합니다. 그런데 그 결실을 자기 집에서 모두 소비하지 않고 일부를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가져갑니다.
이것은 자신이 얻은 것이 오직 자신의 소유와 수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실제로 수확의 일부를 떼어 놓고, 먼 길을 가고, 하나님 앞에서 먹는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배우는 식사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그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수단으로 제시됩니다. 자신의 소출을 구별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로 가져가고, 그분 앞에서 먹는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먹고 기뻐하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 식사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기억하는 자리라면,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분이 주신 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누리는 것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아는 사람입니다.
너무 멀면 은으로 바꾸어 가져가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거운 짐을 끝까지 운반하는 일인가
24절에서 모세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정착하면 여러 성읍에 흩어져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장소와 가까이 살겠지만, 어떤 사람은 매우 먼 곳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로 구별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모두 직접 운반해야 한다면 먼 거리를 이동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은으로 바꾸고, 그 은을 묶어 손에 가지고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곳으로 가십시오.」신명기 14:25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목적은 모든 농산물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원래 형태 그대로 운반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수단은 상황에 맞게 바뀔 수 있지만,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 앞에서 기뻐하는 목적은 유지됩니다.
이것은 신명기 12장에서 일상적인 고기 식사와 거룩한 제사를 구별했던 방식과도 통합니다.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구체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사서 먹으라
「그 은을 당신 마음이 바라는 모든 것, 곧 소와 양과 염소와 포도주와 취하게 하는 술과 당신 마음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에 쓰십시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 먹고, 당신과 당신 집안이 함께 기뻐하십시오.」신명기 14:26 · 본디새김
음식 규정 앞부분에서 모세는 먹고 싶다고 해서 모든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 안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마련해 먹고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먹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라는 사실을 배웁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기쁘게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 사람을 잊지 말라
「당신의 성읍에 있는 레위 사람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그에게는 당신과 함께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이 없기 때문입니다.」신명기 14:27 · 본디새김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식사를 설명한 뒤, 그 기쁨에서 빠질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레위 사람은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으로 토지를 상속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어 소출을 얻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소출을 하나님께 가져가 가족과 함께 기뻐하면서도 레위 사람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나누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어떤 사람에게는 토지의 수확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나눔을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자리에서 레위 사람이 버려져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목록에는 소와 양과 염소뿐 아니라 포도주와 취하게 하는 술도 등장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음료를 축제의 식사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합니다. 그렇다고 무절제한 취함을 명령하거나 모든 음주 행동을 승인하는 것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세 해마다 마련되는 또 하나의 식탁
십일조를 자기 성읍에 두라
28절에서는 십일조의 장소가 달라집니다.
「세 해가 끝날 때마다 그해 당신 소출의 십분의 일을 모두 내어 당신의 성읍에 놓아두십시오.」신명기 14:28 · 본디새김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로 가져가 먹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해 당신 소출」이라는 표현은 세 해 동안 쌓인 모든 소출을 합쳐 십분의 일을 계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당 연도의 소출에서 구별하는 십일조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세 번째 해의 십일조는 앞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에서 먹는 십일조와 별도로 더 내야 하는 것일까요?
본문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세 번째 해에는 평소 중앙 예배 장소에서 먹는 십일조를 지역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도록 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지역의 레위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십일조가 추가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신명기 26:12–13에서는 세 번째 해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에게 주었다고 고백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민수기 18:21–32에서는 레위 지파에게 주어지는 십일조를 설명합니다. 이 본문들을 어떻게 종합하느냐에 따라 십일조 제도의 전체 구성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 와서 먹고 배부르는가
「그러면 레위 사람과 당신의 성읍에 있는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를 것입니다. 레위 사람에게는 당신과 함께 받을 몫과 상속 재산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이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신명기 14:29 · 본디새김
이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보호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레위 사람은 다른 지파처럼 토지를 상속받지 못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제공하는 몫에 의존합니다. 거류민은 자기 출신 공동체를 떠나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토지 상속 구조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는 가족의 보호와 경제적 기반을 잃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음식의 형식적인 일부만 제공하고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을 목적에 포함하십니다. 이것은 십일조가 단지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생계를 지탱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은 왜 다른 사람의 배부름으로 이어지는가
23절에서는 십일조를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서 먹는 목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를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9절에서는 십일조를 성읍에 두는 목적이 레위 사람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가 먹고 배부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행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소출의 일부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보면 십일조는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첫째, 자신이 얻은 수확의 전부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소유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자신이 얻은 것으로 자신의 집안만 배부르게 하는 데서 만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출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소출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도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복을 받으려면 먼저 나누어야 한다는 뜻일까
29절은 마지막에 복을 약속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농업 공동체와 언약적 삶을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에게 주어진 소출을 구별하고,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기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가도록 명령하십니다. 본문이 약속하는 복도 바로 그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개인이 일정한 금액을 기부하면 정확히 몇 배의 수입을 보장받는다는 공식은 여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과, 그분께서 계속해서 그들의 노동에 복을 주시는 일을 하나의 관계 안에 놓습니다.
사람은 소출을 얻기 위해 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돌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얻은 소출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데도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식탁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백성은 자신들의 식탁만 거룩하게 지키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구별하여, 자기 곁의 배고픈 사람도 먹고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신명기 14장은 그렇게 한 사람의 몸에서 시작하여 공동체의 식탁으로 끝납니다.
레위 사람이 와서 먹습니다.
거류민이 와서 먹습니다.
고아와 과부도 와서 먹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땅에서 거둔 소출을 통해 배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는 바로 그 일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삶과 연결합니다.
모세가 그려 놓은 마지막 장면에서 거룩함은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성질이 아닙니다. 성읍에 남겨 둔 곡식이 있고, 그 곡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먹고 배부르게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