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2–26장 · 새 땅에서 지킬 규정
함께 기뻐하는 축제와 굽어지지 않는 정의
신명기 16장은 축제로 시작해서 재판관과 우상숭배에 관한 명령으로 끝납니다.
앞부분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해마다 세 번 여호와야훼 앞에 모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나온 날을 기억하고, 수확의 복에 감사하며, 가족과 이웃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데 18절에 이르면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조금 전까지 축제를 이야기하던 모세가 이제 재판의 공정성과 뇌물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여호와야훼의 제단 곁에 아세라와 기둥을 세우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왜 축제에 관한 가르침 뒤에 재판관과 우상숭배의 문제가 등장할까요?
이 장을 이해하는 단서는 반복되는 두 장소에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신의 모든 성읍」입니다.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며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 장소입니다.
모세는 먼저 백성을 하나님이 선택하실 한곳으로 모이게 한 다음, 다시 그들이 살아가는 여러 성읍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유월절 — 이집트에서 나온 밤을 잊지 말라
축제는 달을 지키는 일에서 시작된다
모세의 첫 명령은 아빕달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빕달을 지켜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을 위한 유월절을 지내십시오. 아빕달에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밤에 당신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기 때문입니다.」신명기 16:1 · 본디새김
그런데 모세는 이 계절에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사건을 새 곡식의 성장이나 풍요가 아니라 이집트에서의 해방으로 정합니다. 매년 곡식이 익어 갈 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지금 누리는 삶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한 해는 자연의 순환을 따라 흘러가지만, 그 시간에는 구원의 기억이 새겨져야 합니다.
특히 1절은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을 「밤에」 이끌어 내셨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12:29–42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는 사건은 마지막 재앙이 일어난 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밤은 하루의 활동이 멈추는 시간이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해방의 사건이 시작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월절은 바로 그 밤을 기억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자유는 먼저 하나님의 행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기억도 자신들이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왜 이제는 아무 성읍에서나 유월절을 지낼 수 없는가
2절과 5–7절에는 한 장소가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이름을 머물게 하려고 선택하실 곳에서, 양과 염소와 소를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 유월절 제물로 잡아 바치십시오.」신명기 16:2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장소의 지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대신 그곳을 선택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거듭 강조합니다.
출애굽기 12:3–13에서 이스라엘은 가족 단위로 유월절 제물을 준비하고,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며, 집 안에서 고기를 먹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16장은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 여러 성읍 가운데 아무 곳에서나 유월절 제물을 잡아 바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제 백성은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실 장소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명기 12:5–14에서 이미 강조되었던 예배 장소에 관한 원칙이 여기서 유월절 규정에 적용됩니다. 백성은 가나안 땅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 집과 밭을 갖고, 서로 다른 성읍에서 생활할 것입니다.
그들이 각자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다면,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도 지역의 관습과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신명기는 예배의 중심을 사람이 선택하는 장소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는 장소에 두도록 합니다.
또한 이 규정은 서로 다른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구원의 사건을 함께 기억하도록 합니다. 각자의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은 하나님 앞에 모여,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흩어져 살아가는 백성이 하나의 구원 이야기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이 축제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유월절 제물에 왜 소가 포함되어 있는가
출애굽기 12:5에서는 유월절 제물을 양이나 염소 가운데서 고르도록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까지 언급됩니다.
하나는 신명기가 유월절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의 유월절 제물에만 한정하지 않고, 유월절과 연결된 축제의 제사 전체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양과 염소는 유월절의 중심 제물이며, 소는 함께 드리는 다른 축제 제물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명기 16장이 출애굽기 12장보다 넓은 제물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고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두 본문의 표현 차이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역대하 35:7–9에서 요시야 시대의 유월절을 묘사할 때에도 어린 양과 염소뿐 아니라 소가 함께 준비됩니다. 그 서술은 유월절 축제 안에서 여러 종류의 제물이 사용될 수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신명기 16:2 자체는 양과 염소와 소를 명시적으로 모두 언급하며, 각각을 어떤 종류의 제사로 구분해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소를 삭제하거나 별도의 제물로 확정해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7절의 조리 방법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바샬(בָּשַׁל)은 삶거나 익히는 행위를 가리키는데, 문맥에 따라 조리 방식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9은 물에 삶는 것을 금지하고 불에 구워 먹도록 명령하지만, 신명기 16:7은 그 조리 방법을 출애굽기처럼 명확히 구분하지 않습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신명기 16:7은 삶는 일과 굽는 일을 함께 언급합니다. 이는 두 규정을 함께 이해하려는 오래된 해석의 흔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빵을 먹어야 하는 이유
3절은 유월절 제물과 함께 먹는 빵을 설명합니다.
「그것과 함께 누룩 든 것을 먹지 마십시오. 일곱 날 동안 그것과 함께 누룩 없는 빵, 곧 고난의 빵을 먹으십시오. 당신이 이집트 땅에서 서둘러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평생토록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신명기 16:3 · 본디새김
출애굽기 12:34, 39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반죽이 충분히 발효될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그날의 다급함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기쁨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구원받았는지도 기억해야 합니다.
유월절은 과거의 고난을 지워 버리고 즐거운 장면만 남기는 축제가 아닙니다.
고난의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이 과거에 종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립니다. 그리고 지금 누리는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유월절은 한 해에 정해진 때에 지키는 축제지만, 그 목적은 평생의 기억에 있습니다. 며칠 동안 특별한 음식을 먹는 행위가 남은 모든 날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축제는 긴밀하게 결합됩니다. 3절에서 일곱 날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으라고 하고, 8절에서는 엿새 동안 먹은 뒤 일곱째 날 집회를 가지라고 합니다. 앞에서는 전체 기간을, 뒤에서는 마지막 날의 특별한 집회를 강조합니다.
7절은 제물을 먹은 다음 아침에 천막들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 천막이 순례 기간에 머무는 임시 거처를 가리키는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간다는 일반적인 표현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정해진 장소에서 제물을 먹는 행위와 그 후 계속되는 절기의 생활을 구별하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함께 기억합니다.
칠칠절 — 수확의 기쁨은 누구와 나누어야 하는가
곡식에 낫을 대는 순간부터 시간을 세라
9절은 새로운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일곱 주를 세십시오. 서 있는 곡식에 낫을 대기 시작할 때부터 일곱 주를 세기 시작하십시오.」신명기 16:9 · 본디새김
유월절에서는 이집트에서 나온 날이 시간의 기준이었습니다. 이제 칠칠절에서는 곡식의 수확이 시작되는 때가 기준이 됩니다. 출애굽기 23:16은 이 절기를 수확과 연결하고, 민수기 28:26은 처음 거둔 소출을 바치는 날로 설명합니다.
신명기 16장은 칠칠절의 날짜를 고정된 달력의 숫자로 제시하지 않고, 농사일의 시작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농부가 들판에 나가 처음 낫을 대는 순간부터 축제를 향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곡식을 수확하는 노동은 단순히 축제에 사용할 재산을 모으는 일이 아닙니다. 그 노동 자체가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시점을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맞게 예물을 바치라
10절은 칠칠절에 바칠 예물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을 위한 칠칠절을 지키며,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복에 맞는 분량으로 자원하여 당신의 손으로 예물을 바치십시오.」신명기 16:10 · 본디새김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이 똑같은 양을 바쳐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받은 복에 따라 예물을 준비하도록 합니다.
칠칠절을 지켜야 한다는 명령은 분명하며, 그 명령 안에서 자원하는 예물이 강조됩니다. 이 구절에서 예물은 단순히 소유물의 일부를 하나님께 이전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축제의 모습이 크게 넓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 당신의 남종과 당신의 여종, 당신의 성읍에 있는 레위 사람, 당신 가운데 있는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십시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머물게 하려고 선택하실 곳에서 그렇게 하십시오.」신명기 16:11 · 본디새김
이 명단이 중요한 까닭은 그들이 모두 같은 경제적인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가족에 속하지만, 남종과 여종은 주인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입니다. 레위 사람은 다른 지파와 같은 방식으로 땅을 상속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신명기 10:9).
거류민은 이스라엘 가운데 살지만 본래 그 땅의 지파 구성원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는 가족의 경제적 보호를 충분히 받기 어려울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명기가 요구하는 것은 풍요로운 사람이 자기 기쁨을 누린 다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자신의 기쁨 안에 포함시키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집의 주인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가 가족과 함께 축제를 즐기면서 자기 집의 남종과 여종에게는 계속 일을 시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하나님이 주신 수확을 감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수확에 참여한 노동자들과는 기쁨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은 그런 방식으로 축제를 지내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기서 기쁨은 마음속의 감정만이 아닙니다. 누가 축제의 식탁에 참여하고 누가 그 기쁨을 누리는가 하는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왜 칠칠절에서 이집트의 종살이를 기억해야 하는가
12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당신이 이집트에서 종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 규정들을 지켜 행하십시오.」신명기 16:12 · 본디새김
처음의 유월절에서 이집트의 기억은 해방의 사건을 기념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칠칠절에서는 그 기억이 축제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종이었습니다. 자기 노동의 결과를 자유롭게 누릴 수 없었고, 다른 사람의 권력 아래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땅을 얻고 수확을 거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확을 누리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종들을 배제한다면, 과거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감사하는 일은 과거에 종이었던 자신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신명기는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 과거의 종살이를 잊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억을 통해 지금 자신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우게 합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축제의 기쁨 속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고난의 기억은 현재의 기쁨을 어둡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기쁨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기억이 됩니다.
초막절 — 기쁨은 명령이면서 약속이다
수확을 마친 뒤에 찾아오는 축제
13절은 세 번째 축제를 소개합니다.
「당신의 타작마당과 당신의 포도주 틀에서 거두어들일 때, 당신을 위해 일곱 날 동안 초막절을 지키십시오.」신명기 16:13 · 본디새김
칠칠절이 곡식 수확의 시작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초막절은 곡식과 포도 생산의 결과를 거두어들이는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을 처리하는 공간이고, 포도주 틀은 포도를 짜는 시설입니다. 두 장소는 일 년 동안의 노동이 눈에 보이는 결실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레위기 23:42–43에서는 초막에 거주하는 행위를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뒤 초막에서 살았던 역사와 연결합니다. 반면 신명기 16:13–15는 수확의 시기와 축제의 기쁨에 초점을 맞춥니다.
축제의 기쁨을 명령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4절은 말합니다.
「당신의 축제 때에 당신은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 당신의 남종과 당신의 여종, 당신의 성읍에 있는 레위 사람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기뻐하십시오.」신명기 16:14 · 본디새김
시기는 다르지만 기쁨을 누려야 할 사람들의 범위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소출이 적을 때나 많을 때나, 수확을 시작할 때나 마칠 때나,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공동체는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14절은 명확하게 「기뻐하십시오」라고 명령합니다. 기쁨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인데, 어떻게 기뻐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문맥에서 기쁨은 단지 순간적인 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정해진 때에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모이고, 함께 식사하고, 받은 복을 나누며 축제를 누리는 행동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쁨이 저절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기억하고 그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슬픈 사람에게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지으라는 요구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공동체가 그 은혜를 실제로 누리고 표현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오로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실 곳에서 일곱 날 동안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을 위한 축제를 지키십시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출과 당신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신명기 16:15 · 본디새김
앞에서는 기뻐하라고 명령했는데, 여기서는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이 표현이 축제를 지킨 결과로 누리게 될 기쁨을 약속하는 것인지, 앞의 명령에 이어 오직 기뻐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모든 일이 언제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여호와야훼께서 소출과 손으로 하는 일에 복을 주실 것이므로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의 기쁨은 자기 능력의 성취를 자랑하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갈 것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며, 그 선물을 함께 누리는 데서 표현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삶에 주어지는 복도 그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은 베하이타 아크(אַךְ) 사메아흐입니다. 여기서 아크는 오직, 다만이라는 제한이나 강조의 의미를 지니며, 문장 전체는 기쁨에 온전히 이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결과로 읽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 때문에 축제가 온전한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뜻이 됩니다. 명령으로 읽으면 그 기간을 다른 목적이 아니라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하는 일에 온전히 사용하라는 강조가 됩니다. 두 읽기 모두 앞 문장과 연결되지만, 「오로지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는 여호와야훼의 복이 가져오는 결과에 무게를 둡니다.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 — 예물의 크기보다 중요한 기준
세 축제를 설명한 뒤 모세는 그 규정을 하나로 묶습니다.
「한 해에 세 번, 누룩 없는 빵의 축제와 칠칠절과 초막절에 당신 가운데 모든 남자는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곳에서 그분 앞에 나와야 합니다. 여호와야훼 앞에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신명기 16:16 · 본디새김
16절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이 선택하신 곳으로 나아갈 의무를 모든 남자에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반면 11절과 14절은 축제의 기쁨에 참여할 사람들의 범위를 훨씬 넓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16절을 근거로 여자나 종, 거류민이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 앞에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라는 표현은 앞 장에서 종을 자유롭게 내보낼 때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고 했던 명령을 떠올리게 합니다(신명기 15:13). 두 본문에서 같은 말이 사용되지만, 그 목적과 대상은 다릅니다.
앞 장에서는 자유롭게 떠나는 사람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주인이 재산을 주어야 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야훼 앞에 나오는 사람이 그분께 받은 복을 인정하며 예물을 바쳐야 합니다.
「각 사람은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복에 맞는 분량의 예물을 자기 손으로 바치십시오.」신명기 16:17 · 본디새김
따라서 예물의 크기를 통해 사람의 경건함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받은 만큼, 적게 받은 사람은 자신이 받은 만큼 응답해야 합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자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이 하나님의 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 예물은 11절과 14절의 공동체적 기쁨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께 예물을 바치면서 그 복을 자기 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끼리만 누리는 것은, 앞에서 명령한 축제의 모습을 온전히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이웃과 나누는 기쁨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정의, 정의를 추구하라 — 축제의 장소에서 일상의 성읍으로
왜 축제 규정 다음에 재판관이 등장하는가
18절에서 모세는 새로운 주제를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당신의 모든 성읍에, 당신의 지파별로 재판관들과 관리들을 세우십시오. 그들은 백성을 정의롭게 재판해야 합니다.」신명기 16:18 · 본디새김
축제에 관한 말씀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실 장소가 반복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당신의 모든 성읍」(שַׁעַר)은 문자적으로 「당신의 모든 성문들」이라는 표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문은 도시로 드나드는 공간이면서 공적인 일과 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룻기 4:1–2에서는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장로들을 불러 법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재판관은 분쟁을 판단하는 사람이며, 관리들은 행정과 법 집행에 관계된 직무를 맡은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직무의 구분은 이 구절만으로 모두 알 수 없지만,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제도적인 역할을 맡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는 곳에 모여야 합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재판을 받기 위해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곳으로 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재판관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성읍마다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에는 백성을 한곳으로 모으는 질서가 있고,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일에는 각 지역에 책임 있는 사람을 세우는 질서가 있습니다.
예배의 장소는 한곳으로 모이지만, 정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성읍에서 실현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재판을 가로막는 세 가지 위험
19절은 재판관에게 세 가지를 금지합니다.
「재판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편들지 마십시오. 뇌물을 받지 마십시오. 뇌물은 지혜로운 이들의 눈을 멀게 하고 의로운 이들의 말을 뒤틀기 때문입니다.」신명기 16:19 · 본디새김
첫째는 재판 자체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판단을 내려야 할 사람이 사실과 법에 따라 판결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을 편드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유리하게 판단할 수도 있고, 권력이 있기 때문에 편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처지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증거를 살피지 않고 그 사람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는 것도 공정한 재판은 아닙니다.
레위기 19:15은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편들거나 권력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두둔하지 말고 공정하게 재판하라고 명령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과 재판할 때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분쟁을 판단하는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관한 명령입니다.
셋째는 뇌물을 받는 일입니다. 모세는 뇌물이 어리석고 악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눈도 멀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판단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뇌물을 받으면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도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바른 말을 뒤틀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재판의 공정성은 개인의 지혜나 선한 의도에만 맡겨 둘 수 없습니다.
모세는 정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언제나 공개적인 폭력이나 노골적인 불법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때로는 조용히 건네진 뇌물이 사람의 판단을 바꾸고, 그 결과 누군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판결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왜 「정의」를 두 번 말하는가
「정의,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이는 당신이 살고,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입니다.」신명기 16:20 · 본디새김
정의는 문제가 생겼을 때 어쩔 수 없이 고려하는 부차적인 가치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는 목표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땅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땅을 받는 일과 그 땅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정의가 공동체의 생존과 땅의 소유에 직접 연결됩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성대한 축제를 지내는지, 얼마나 많은 제물을 바치는지만으로 그 땅에서의 삶이 올바르게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서로를 공정하게 대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뇌물 때문에 판단을 왜곡하지 않으며, 분쟁이 정의롭게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공동체라면, 일상에서도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사야 1:11–17에서 여호와야훼는 제물과 절기를 지키면서 악을 행하는 백성을 책망하시고, 정의를 구하며 억압받는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모스 5:21–24에서도 축제와 제사가 정의와 공의가 없는 삶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 말씀들은 신명기 16장의 축제 규정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명기에서 이미 함께 놓여 있던 예배와 정의의 관계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이러한 반복은 강조의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라는 명령을 넘어, 정의를 힘써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특히 「추구하십시오」(רָדַף)라는 동사는 적극적으로 뒤쫓고 찾는 행동을 표현합니다.
제단 곁에 아세라를 심지 말라 —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누가 결정하는가
재판관 이야기 다음에 왜 우상숭배가 등장하는가
이 장의 마지막 두 절은 다시 예배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자신을 위해 만들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의 제단 곁에, 어떤 나무도 당신을 위한 아세라로 심지 마십시오.」신명기 16:21 · 본디새김
「당신을 위해 기둥을 세우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호와야훼 당신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신명기 16:22 · 본디새김
이 명령들은 앞에서 설명한 축제 규정과 연결되는 동시에, 이어지는 17장의 제물 규정으로 넘어가는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에 다른 신을 섬기는 방식이나 상징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세라는 나무인가, 신인가
아세라라는 이름은 고대 서아시아의 여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경에서는 그와 관련된 숭배 대상이나 상징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신명기 7:5과 12:3에서도 아세라는 이스라엘이 제거해야 할 우상숭배의 대상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16:21에서는 「심다」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아세라가 실제 살아 있는 나무인지, 나무로 만든 숭배용 기둥인지, 또는 그와 관련된 다른 상징물인지에 관해 해석이 갈립니다. 본문의 표현을 넓게 읽으면 여호와야훼의 제단 곁에 어떤 종류의 나무도 심지 못하게 하는 규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아세라라는 명칭과 심는 행위를 함께 읽으면, 단순한 나무 전체가 아니라 아세라 숭배를 위해 세우거나 심는 나무를 금지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본문에서 아세라가 우상숭배와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후자의 읽기가 문맥상 자연스럽지만, 16:21의 구체적인 대상이 어떤 형태였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모두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제단 곁에 다른 숭배의 상징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기둥도 금지하는가
세워 놓은 돌기둥이나 기념 기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에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뒤 돌을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창세기 28:18, 35:14). 그러므로 성경에서 돌기둥이라는 물건이 등장할 때마다 처음부터 동일한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명기 16:22은 그러한 기둥을 세우는 일을 금지합니다.
그 이유를 단지 돌로 만든 물건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보다, 이 문맥에서 기둥을 세우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 숭배 방식과 연결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바로 앞에서 아세라를 금지하고 있으며, 신명기 12장은 가나안의 숭배 장소와 상징물을 제거하고 여호와야훼께서 정하시는 방식으로 예배하라고 명령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시는 곳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 역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장소를 선택하시는 분이 여호와야훼이시듯, 예배의 방식에도 여호와야훼의 명령이 우선합니다.
맺음 — 축제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과거의 구원을 기억하는 사람은 현재의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며, 그렇게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는 일상에서도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기쁨과 정의는 서로를 대신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함께 지켜야 할 질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해의 정해진 때에 여호와야훼께서 선택하실 곳으로 모입니다. 그 자리에는 아들과 딸이 있고, 남종과 여종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도 함께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 복을 인정하며 예물을 바치고, 함께 축제를 누립니다.
그러나 축제는 영원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성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밭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며, 어떤 사람은 성문에서 해결해야 할 분쟁을 마주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모세의 다음 명령이 시작됩니다. 「정의, 정의를 추구하십시오.」
여호와야훼 앞에서 기뻐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성읍에서 공정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노래한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이웃에게 부당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축제의 노래가 멈춘 뒤에도, 성문에서는 정의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