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9–24장 · 시나이산의 언약
명령보다 먼저 밝히신 이름
십계명은 「살인하지 마라」나 「도둑질하지 마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를 섬겨라」라는 명령으로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이 계명들을 지켜서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듣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자 백성은 죽을까 두려워 멀리 물러섭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짙은 구름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흙으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왜 온 산이 떨 만큼 장엄하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마지막에는 흙과 돌로 만드는 소박한 제단에 관해 말씀하실까요?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인간이 자기 뜻대로 정해서는 안 되며, 그분과의 관계도 그분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나는 너를 이끌어 낸 여호와야훼다」 — 명령보다 먼저 주어진 관계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나이산 아래에 섰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흔히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말씀은 성경 안에서 「열 가지 말씀」으로도 불립니다(출애굽기 34:28; 신명기 4:13). 출애굽기 20장 자체는 각 항목에 번호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여러 기독교 전통은 열 가지를 나누는 방식에 차이를 보입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다.」출애굽기 20:2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아무 관계도 없는 강력한 존재에게 갑자기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에게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집트 땅」이라고만 하지 않고 「종살이하던 집」이라고 덧붙입니다. 이집트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이전에 살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파라오의 지배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들에게 쉬는 날을 주십니다.
이집트에서는 약한 백성이 강한 권력의 폭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서로를 다시 억압하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백성 전체를 한 사람처럼 부르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공동체 전체가 받아야 할 언약의 말씀이면서, 그 공동체에 속한 각 사람이 자기 삶에서 응답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함께 구원받았지만, 그 관계는 각자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도 만들지 마라
「내 앞에서 네게 다른 신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0:3 · 본디새김
여기서 「내 앞에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알 파나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내 얼굴 앞에」라는 표현입니다. 이를 「나 외에」 또는 「나와 나란히」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 안에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주변에는 여러 신을 숭배하는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도 다양한 신들이 있었고, 가나안에서도 여러 신이 숭배되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자신을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이고, 필요에 따라 다른 신들과 함께 섬기는 일을 금지하십니다.
이 계명을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어라」는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바꾸면 원래의 의미가 흐려집니다. 본문은 단순히 여러 관심사 가운데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금지하는 구체적인 종교적 명령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명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너 자신을 위해 새긴 우상도, 위 하늘이나 아래 땅이나 땅 아래 물에 있는 어떤 것의 형상도 만들지 마라.」출애굽기 20:4 · 본디새김
왜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면서도 여호와야훼를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누구를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고대의 신상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었습니다. 신을 특정한 형상으로 나타내고, 그 형상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종교적 관행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본문은 「하늘」, 「땅」, 「물」을 모두 언급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전체가 형상의 재료로 열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어떤 것도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모든 조각이나 그림을 예외 없이 금지하는 명령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출애굽기 25:18–20에서는 성막의 속죄 덮개 위에 그룹 형상을 만들도록 명령하십니다. 따라서 핵심은 형상을 만드는 행위 자체보다, 그 형상을 신적 존재로 만들어 경배하고 섬기는 일과 관련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 자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 역시 문제가 됩니다. 신명기 4:12, 15–19는 이스라엘이 호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형상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자신을 인간이 복제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보여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것들에게 엎드려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마라. 나 여호와야훼,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경우에는 아버지들의 죄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묻고,」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수천 대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애굽기 20:5–6 · 본디새김
오늘날 질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것을 부러워하거나 소유욕에 사로잡히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언약 관계의 배타성이 중심입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분에게 속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는 단순히 종교적 취향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를 저버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는 다른 신들보다 인정받고 싶어 하시는 불안정한 마음으로 이해하기보다,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시는 태도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먼저 주의할 것은 「나를 미워하는 자들의 경우에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심판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후손에게 기계적으로 내려지는 것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사람들에 관한 문맥에서 언급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절만으로 자손이 반드시 조상과 동일한 죄를 직접 지었을 경우에만 심판받는다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세대에 걸쳐 죄의 책임을 묻는다는 말이 개인의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실제로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신명기 24:16은 자녀가 부모의 죄 때문에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18:20도 아들이 아버지의 죄책을 짊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들을 함께 읽으면 출애굽기 20:5를 모든 자손에게 조상의 죄책이 자동으로 전가된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한 세대의 죄가 그 세대에서 아무런 영향 없이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무겁게 다룹니다.
심판은 삼사 대까지 언급됩니다.
사랑은 수천 대까지 언급됩니다.
6절의 히브리어에는 「수천」(אֶלֶף)이라는 말만 직접 나타나며, 「대」라는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앞절의 세대 표현과 연결하여 수천 대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언약을 저버리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게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지 마라. 여호와야훼는 자기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출애굽기 20:7 · 본디새김
이 계명은 흔히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거나 욕설에 사용하는 일을 금지하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물론 그런 행동도 이 계명의 의미와 관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표현은 더 넓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떤 목적을 위해 가져다 사용하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고 헛된 일에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매우 중대한 행위였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말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자신의 거짓말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됩니다. 레위기 19:12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0:7 자체의 범위를 거짓 맹세 하나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에 그분의 권위를 끌어들이는 것도 이 명령의 취지와 관련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에 가두는 일과, 그분의 이름을 자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는 일은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공통된 문제를 지닙니다. 둘 다 하나님을 인간의 통제 아래 두려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 이름을 거짓에 이용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하는 일이 됩니다.
예레미야 7:9–10은 도둑질과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사람들이 성전에 나아와 안전하다고 말하는 모습을 비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는 행동이 그분의 명령을 거스르는 삶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 — 쉬는 날이 온 집안에 주어지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켜라.」출애굽기 20:8 · 본디새김
안식일은 이미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규칙과 함께 등장했습니다(출애굽기 16:22–30).
그런데 여기서는 그날이 왜 거룩한지, 그리고 누가 쉬어야 하는지를 더욱 폭넓게 설명합니다.
「엿새 동안 일하며 네 모든 일을 하여라.」출애굽기 20:9 · 본디새김
안식일 명령은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일할 시간이 있고, 그 일을 멈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쉼의 범위가 예상보다 넓어집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의 안식일이다. 너와 네 아들과 네 딸, 네 남자 노예와 네 여자 노예, 네 가축과 네 성문 안에 머무는 거류민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출애굽기 20:10 · 본디새김
고대 사회에서 집안의 가장이나 주인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 자신이 쉴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쉬는 동안에도 노예나 종속된 사람이 계속 일해야 한다면, 주인의 휴식은 다른 사람의 노동 위에서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그런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거류민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 살지만 혈통상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의 쉼은 이스라엘의 가장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닙니다. 그의 생활과 노동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칩니다.
다만 이 명령이 곧바로 노예 제도를 폐지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노예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위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명령을 받는 사람에게는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들과 가축에게도 쉼을 허락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야훼는 안식일을 복되게 하고 그날을 성별했다.」출애굽기 20:11 · 본디새김
여기서 안식일의 근거는 이집트 탈출이 아니라 창조 사건입니다. 창세기 2:2–3에서 하나님은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이 창조의 질서를 이스라엘의 생활 속에 적용합니다.
인간은 일을 계속한다고 해서 창조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더라도 세상의 존재와 유지가 전적으로 자신의 노동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에는 인간이 일을 멈춥니다.
그러나 세상이 멈추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이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신명기에서 안식일의 근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으나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남자 노예와 여자 노예도 쉬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출애굽기 20장은 창조를, 신명기 5장은 해방을 안식일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강조점을 지니지만 대립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정하신 쉼의 질서가, 노예 생활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이 왜 약속의 땅과 연결될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네게 주는 땅에서 네가 사는 날들이 길어지도록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출애굽기 20:12 · 본디새김
부모 공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명령들 다음에 놓여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족은 단순히 개인이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장소만이 아니었습니다. 생활과 생산, 재산의 전승, 자녀 교육과 공동체의 기억이 이어지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부모를 존중하는 일은 그런 공동체적 삶의 기초와 연결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앞으로 약속의 땅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가야 할 백성입니다. 한 세대가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출애굽기 12:26–27에서는 자녀들이 유월절의 의미를 물으면 부모가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6:6–9에서도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 공경은 이러한 세대 간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모든 판단이 언제나 옳다거나, 자녀가 부모의 부당한 요구까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부모에게 무제한적인 권력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명시합니다.
또한 이 명령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언급합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공경의 대상은 아버지만이 아닙니다. 어머니도 같은 명령 안에 놓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장수한다는 보편적인 수명 보증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은 「여호와야훼가 네게 주는 땅에서」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언약적 상황을 강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그 땅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질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짧은 네 가지 금지 — 이웃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
앞의 명령들이 비교적 길게 설명되었다면, 이제 놀라울 만큼 짧은 문장들이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살인하지 마라.」출애굽기 20:13 · 본디새김
「간음하지 마라.」출애굽기 20:14 · 본디새김
「도둑질하지 마라.」출애굽기 20:15 · 본디새김
이 네 문장은 각각 무엇을 금지하는지 명확하게 말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나 예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이후 출애굽기 21–23장의 법령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생명을 해치지 마라
13절의 「살인하지 마라」에서 사용된 동사는 라차흐(רָצַח)입니다. 이 동사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 가운데 살인과 관련된 문맥에서 사용되며, 전쟁이나 사법적 처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죽임을 동일하게 가리키는 일반적인 동사와는 구별됩니다.
다만 모든 사용례가 계획적인 살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민수기 35장에서는 고의적인 살인과 과실에 의한 죽음 모두를 다루는 문맥에서 관련 표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명령을 단순히 「계획적으로 살인하지 마라」는 뜻으로만 좁히거나, 반대로 모든 생명 박탈을 예외 없이 동일하게 금지하는 문장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중심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는 일을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은 개인이 자기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관계를 침해하지 마라
이 명령은 혼인 관계를 침해하는 성적 행동을 다룹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혼인과 성에 관한 법은 오늘날과 다른 사회적 구조 속에 있었고, 남성과 여성에게 적용되는 법적 기준도 반드시 대칭적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에 현대적인 혼인 윤리의 모든 내용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담아 넣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혼인 관계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마라
본문은 훔치는 대상이나 구체적인 방식을 한정하지 않습니다. 후대의 일부 해석 전통에서는 이 계명을 특히 사람을 납치하는 행위와 연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0:15 자체는 도둑질이라는 넓은 표현을 사용하며, 대상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1:16에서는 사람을 납치하는 행위가 별도로 다루어지고, 22:1–4에서는 가축을 훔치는 행위와 보상이 규정됩니다. 이러한 법령들을 함께 살펴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일이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보다 구체적인 금지 — 거짓 증언
16절은 단순히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네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출애굽기 20:16 · 본디새김
여기서는 재판과 증언의 상황이 특히 중요합니다. 출애굽기 18장에서 이스라엘은 재판의 책임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맡기는 구조를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재판관을 세워도 증언이 거짓이라면 공정한 판결은 불가능해집니다.
말은 눈에 보이는 물건을 빼앗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삶을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거짓 증언은 사람의 명예와 재산, 심지어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짓 증언의 금지는 단순히 개인적인 정직함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공정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명, 혼인 관계, 재산, 그리고 진실하게 판단받을 권리를 존중하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이웃을 대하는 방식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명령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19:18에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명령은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웃의 생명과 가정, 재산을 침해하지 말라고 하신 여러 명령을 더 넓은 관계적 요구 속에서 읽도록 돕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22:37–40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이해하는 중심으로 제시하십니다. 이는 출애굽기 20장의 계명들을 신약의 문맥에서 종합하여 읽는 중요한 연결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0장 자체가 먼저 보여 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구원받은 뒤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면입니다.
탐내지 마라 — 아직 빼앗지 않았어도 문제가 되는 욕망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마라. 네 이웃의 아내와 그의 남자 노예와 그의 여자 노예와 그의 소와 그의 나귀와 네 이웃에게 속한 어떤 것도 탐내지 마라.」출애굽기 20:17 · 본디새김
앞의 명령들은 비교적 분명한 행동을 금지했습니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은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피해를 일으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명령은 「탐내지 마라」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가를 갖고 싶어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자기 이웃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집」은 건물 자체뿐 아니라 가정과 가산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이어지는 항목들은 이웃이 지닌 생활 기반과 관계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이 목록이 당시의 가부장적 가구 구조를 반영한다는 점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아내와 노예, 가축이 한 사람의 집과 관련된 항목들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여성을 재산처럼 취급해야 한다는 규범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배경으로, 이웃의 가정과 그에게 속한 것을 탐내어 침해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남의 재산을 실제로 훔치지 않았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혼인 관계를 침해하지 않았어도 그 관계를 빼앗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이 실제 행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미가 2:2는 이 연결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남의 밭을 탐내고 그것을 빼앗으며, 집을 탐내고 그것을 차지합니다.
출애굽기 20장은 마지막 계명에서 그 행동의 앞자리를 다룹니다.
이것은 모든 순간적인 욕구나 부러움을 동일한 죄로 판정하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탐욕이 마음속에서 자라고 있다면, 아직 겉으로 드러난 잘못이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무해하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이 아니라, 이웃을 대하는 사람의 욕망까지 문제 삼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와 「두려움이 너희 눈앞에 있게 하시려고」
온 백성은 천둥과 불꽃과 뿔나팔 소리와 연기 나는 산을 보고 있었다. 백성은 보고 몸을 떨었으며 멀리 떨어져 섰다.출애굽기 20:18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자 서술은 다시 시나이산의 광경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출애굽기 20:19 · 본디새김
여기서 백성의 반응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불순종으로 이해하면 본문의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문제는 듣는 행위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사건의 압도적인 위엄 앞에서 자신들이 죽을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를 시험하시려고, 또 너희가 죄를 짓지 않도록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너희 눈앞에 있게 하시려고 오셨다.」출애굽기 20:20 · 본디새김
백성이 느끼는 첫 번째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반면 모세가 두 번째로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정하고 죄를 짓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게 하는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두려움을 단순히 온화한 존경심으로만 바꾸어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도망치게 만드는 공포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그분 앞에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이 백성을 시험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백성이 그분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이전 광야에서는 물과 양식의 문제를 통해 백성이 시험받았습니다. 이제 시나이산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말씀하시는 사건 앞에서 그들의 태도가 시험받습니다.
백성은 멀리 떨어져 서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이 있는 짙은 구름으로 다가갔다.출애굽기 20:21 · 본디새김
이 두 움직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모세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그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고 말씀을 맡기신 사람입니다.
또한 백성이 멀리 선 것은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 모세가 하나님께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다음 말씀은 뜻밖에도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백성은 천둥과 불꽃, 뿔나팔 소리와 연기 나는 산을 모두 「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백성이 소리들을 보고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실제로 소리가 눈에 보이는 초자연적인 감각 경험을 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과 귀로 경험한 모든 현상을 하나의 감각적 표현으로 묶어 서술한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시나이산에서 백성이 경험한 사건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들지 말고, 흙으로 제단을 만들어라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내가 하늘에서 너희와 말했다는 것을 보았다.』」출애굽기 20:22 · 본디새김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천둥과 불꽃, 구름 가운데 나타났지만, 그분 자신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너희는 나와 나란히 둘 신들을 만들지 마라. 은으로 만든 신들과 금으로 만든 신들을 너희 자신을 위해 만들지 마라.』」출애굽기 20:2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신상을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은이나 금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그분을 더 잘 섬기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명령은 뒤에 나오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생각하면 더욱 날카롭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금으로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은과 금으로 신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은 곧바로 제단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 흙 제단을 만들어라. 그 위에서 네 양과 염소와 네 소를 잡아 네 번제와 네 친교 제물로 바쳐라. 내가 내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와서 네게 복을 주겠다.』」출애굽기 20:24 · 본디새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인간이 만든 물건의 화려함이나 정교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상은 인간이 만들어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제단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장소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장소에서 자동으로 복을 받는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시는 장소를 말씀합니다.
사람이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을 불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시는 곳에서 친히 백성에게 오시고 복을 주십니다.
왜 돌을 다듬으면 제단이 더러워질까?
「『네가 나를 위해 돌 제단을 만들거든, 돌을 다듬어 쌓지 마라. 네 칼을 그 돌에 휘두르면 그 돌을 더럽히게 되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0:25 · 본디새김
본문은 칼을 돌에 휘두르면 그 돌이 더럽혀진다고 설명하지만, 왜 그것이 더럽히는 행위가 되는지까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계단으로 내 제단에 올라가지 마라.』」출애굽기 20:26 · 본디새김
이것은 인체 자체가 더럽다는 선언이라기보다, 거룩한 제단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요구되는 적절한 태도와 관련된 규정입니다. 이후 출애굽기 28:42에서도 제사장들이 하체를 가리는 옷을 입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분 앞에서 어떤 물건을 만들고,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까지 자신의 뜻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흙 제단을 만들라는 명령을 모든 종교적 건축이나 장식의 화려함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뜻으로 확대할 수는 없습니다. 이후 성막을 만드는 명령에는 금과 은, 정교한 직물과 장식이 실제로 등장합니다. 25절에서 「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레브(חֶרֶב)입니다. 일반적으로 무기로 사용하는 칼을 뜻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돌을 다듬는 쇠 연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가공이 더해지지 않은 돌을 사용하도록 하여 제단의 거룩함을 지키려는 명령이라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칼이 제단 제작에 사용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제단과 폭력의 도구를 구별하려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읽기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해석은 상징적 추론이며, 본문이 칼과 폭력의 관계를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상징을 확정하기보다, 하나님이 제단을 만드는 방식까지 규정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짙은 구름과 흙 제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그분을 자기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그들에게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계명은 자유를 빼앗기 위해 새롭게 채워진 사슬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과 서로를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는 아직 짙은 구름이 드리워져 있고, 모세는 그 속에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제 백성에게 흙으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제단에 관한 말씀의 끝에서, 자신이 오셔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