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이집트의 종살이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출애굽기 6장에서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까지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기력이 꺾이고 고역에 시달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듣지 않는 백성을 버리시거나, 모세의 사명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갑자기 긴 족보로 방향을 바꿉니다.

왜 지금 족보가 등장할까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일이 급한데, 왜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후손들을 하나씩 소개할까요?

출애굽기 6장은 바로 이 간격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힘은 다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거듭 밝히십니다.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96장 본문 읽기 →

「이제 너는 보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6:1 본문 →

모세의 항의에 하나님이 주신 첫 대답

앞 장의 마지막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파라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 뒤부터 백성이 더욱 고통받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전혀 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이제 너는 내가 파라오에게 무엇을 할지 보게 될 것이다.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그가 그들을 보내고,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자기 땅에서 쫓아낼 것이기 때문이다.」출애굽기 6: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모세가 본 것은 파라오가 행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실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내지 않겠다던 왕이 쫓아내게 된다

파라오는 앞서 이스라엘을 보내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출애굽기 5:2). 그런데 하나님은 그가 결국 이스라엘을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땅에서 쫓아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내다’와 ‘쫓아내다’는 같은 말이 아닙니다.

보낸다는 것은 떠나도록 허용하거나 내보내는 행동입니다. 쫓아낸다는 말에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는 강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가 지금까지 보아 온 파라오의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에서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은 두 번 반복됩니다. 원문은 이 두 표현에서 손의 주인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파라오를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파라오가 강한 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보내는 상황에 초점을 두는지, 그가 강제로 내쫓는 행동까지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강조점이 갈릴 수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출애굽기 6:2–5 본문 →

하나님의 대답은 자신의 이름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출애굽기 6:2 · 본디새김

하나님은 2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고, 6절에서 구원의 약속을 시작하시며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8절에서도 약속을 마치며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9절에서 파라오에게 전할 명령을 반복하실 때에도 이 선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곧이어 나오는 약속과 명령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모세가 알아야 할 것은 이름의 발음만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 조상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셨으며, 이제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조상들은 정말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몰랐는가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엘 샤다이로 나타났으나, 내 이름 여호와야훼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않았다.」출애굽기 6:3 · 본디새김

전통적으로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과 원래 의미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엘 샤다이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창세기 35:11에서도 야곱에게 엘 샤다이로 자신을 밝히십니다.

창세기에는 이미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8에서 아브라함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창세기 15:7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직접 자신을 여호와야훼라고 밝히십니다. 창세기 28:13에서도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여호와야훼라고 소개하십니다.

하나는 ‘이름을 알다’라는 표현을 단순한 호칭의 인식보다 깊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여호와야훼라는 이름 자체를 전혀 들어 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아직 출애굽에서 드러날 방식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7절에서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실 때 그들이 자신이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야훼를 안다는 것은 이름을 처음 듣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3절은 실제로 「내 이름 여호와야훼로는 그들에게 나를 알리지 않았다」고 부정형으로 말합니다. 이 부정을 단순히 ‘그들이 내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바꾸면 문장 자체가 가진 어려움이 약해집니다.

다른 접근은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 시점에 관해 서로 다른 서술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출애굽기 6:3은 족장 시대에는 엘 샤다이로 알려지셨던 하나님이 모세의 시대에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을 드러내셨다고 말하는 본문입니다. 반면 창세기의 다른 대목들은 여호와야훼라는 이름이 이미 족장들에게 알려져 있었다고 서술합니다.

어느 접근을 택하든 한쪽 본문을 지우거나 원문에 없는 말을 보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분과 지금 이스라엘을 구하려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지만, 이제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되는 역사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국면은 이집트에서의 구원과 연결됩니다.

땅을 약속받았으나 나그네로 살았던 사람들

「또 나는 그들에게 가나안 땅, 곧 그들이 나그네로 머물러 살던 땅을 주려고 그들과 내 언약을 세웠다.」출애굽기 6:4 · 본디새김

그 땅이 약속의 대상이었지만, 아직 조상들의 완전한 소유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면서도 아내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구입해야 했습니다(창세기 23장). 야곱도 가나안에서 살다가 기근 때문에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창세기 46장).

이것이 출애굽기 6장에서 중요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가 지났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시대도 지났습니다. 그 후손들은 이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시간이 지나도록 그 언약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나는 이집트 사람들이 종살이를 시키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내 언약을 기억했다.」출애굽기 6:5 · 본디새김

이미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이 있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그들의 구원은 처음부터 아무런 관계가 없던 하나님이 갑자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신 사건이 아니라, 오래전에 맺으신 관계를 따라 행동하시는 사건입니다.

구원은 종살이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출애굽기 6:6–8 본문 →

세 동사로 펼쳐지는 구원의 모습

6절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전할 말씀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나는 여호와야훼다. 나는 이집트가 지운 짐 아래서 너희를 이끌어 내고, 이집트 사람들이 시키는 종살이에서 너희를 구해 내며, 뻗은 팔과 여러 큰 심판으로 너희를 되찾겠다.』」출애굽기 6:6 · 본디새김

세 동사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집트가 지운 짐 아래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짐’은 막연한 인생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파라오가 명령한 강제 노동입니다. 바로 앞 장에서 이스라엘은 짚을 스스로 구하면서도 정해진 벽돌 수를 채워야 했습니다.

둘째, 종살이에서 구해 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벽돌의 생산량을 줄이거나 짚을 다시 공급받는 것보다 큰 변화입니다. 종살이라는 상태 자체에서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그들을 되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되찾다(⁨גָּאַל⁩)’라는 동사는 성경에서 잃어버린 재산이나 자유를 되찾고, 가까운 친족이 어려움에 처한 가족의 권리를 회복시키는 일과 연결됩니다. 레위기 25:25에서는 가난해져서 땅을 판 사람이 있을 때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찾는 일을 가리킵니다. 룻기 4장에서도 가족의 재산과 이름을 이어 가는 책임을 설명할 때 이 어근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6:6에서는 구체적인 대가를 누구에게 얼마나 지불한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의 자유를 돈으로 사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낯선 집단처럼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자신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 대하십니다.

앞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취급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되찾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백성인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뻗은 팔과 여러 큰 심판

‘뻗은 팔’은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단순히 파라오를 벌하는 감정적인 보복으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붙잡아 두는 이집트의 권력에 대해 하나님이 행하실 판단과 조치를 가리킵니다.

구원과 심판이 같은 문장 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되찾는 일은 그들을 붙잡아 두는 권력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은 파라오의 의지와 무관하게 조용히 진행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억압하는 권력과 맞서 그 백성을 해방시키는 사건입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그런데 7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이집트가 지운 짐 아래서 너희를 이끌어 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출애굽기 6:7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출애굽기 3:7). 그런데 이제는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심으로써 그 관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세우시고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질 언약을 생각하면 이 말씀의 방향이 더욱 분명해집니다(출애굽기 19:4–6, 24:3–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지 더 좋은 노동 조건을 가진 집단으로 만들려 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갈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지 그 이름을 듣고 기억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 경험함으로써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이집트의 짐 아래에서 이끌어 내신다는 사실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로 머물던 땅이 소유가 되다

8절에서 약속은 조상들의 땅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내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려가겠다. 그 땅을 너희에게 소유로 주겠다. 나는 여호와야훼다.』」출애굽기 6:8 · 본디새김

4절에서는 가나안이 조상들이 나그네로 머물러 살던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그네로 머물다’와 ‘소유로 주다’ 사이에 큰 변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내 손을 들어 맹세한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들어 맹세한다는 표현은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땅을 주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주겠다고 맹세하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장에서 손과 팔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파라오를 움직이게 할 강한 손이 언급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되찾기 위해 뻗으실 팔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조상들에게 약속하실 때 들어 맹세하신 손이 등장합니다.

강제하는 힘, 구원하는 행동, 약속의 확실성이 하나님의 손과 팔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그 모든 약속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스라엘의 능력이나 모세의 자격이 아닙니다.

「기력이 꺾이고 고역에 시달려」 — 들을 힘조차 없는 사람들

출애굽기 6:9 본문 →

약속을 듣지 않은 이유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대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기력이 꺾이고 고역에 시달려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다.출애굽기 6:9 · 본디새김

이 반응을 단순히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한 것으로 이해하면 본문이 설명하는 이유를 놓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억압 속에서 기력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노동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붙잡을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작아서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을 들을 사람들의 숨이 너무 짧아져 있었습니다.

믿었던 백성이 왜 이제는 듣지 않는가

그때 백성은 여호와야훼가 자신들을 살피셨다는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 두 반응 사이에는 출애굽기 5장이 있습니다.

파라오가 짚의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벽돌의 생산량은 줄이지 않았습니다. 작업 책임자들은 매를 맞았습니다.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관한 소식이 희망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한 뒤 실제 생활은 더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이제 같은 종류의 약속을 듣는 일조차 어려워진 것입니다.

성경은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고통이 너무 깊어져 좋은 소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단순한 불순종이라고 정죄하기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노동은 몸뿐 아니라 말씀을 들을 여력까지 빼앗았다

앞 장에서 파라오는 이스라엘이 다른 말에 마음을 두지 못하게 하려고 노동을 더 무겁게 지우라고 명령했습니다(출애굽기 5:9). 그런데 6:9에서는 백성이 고역에 시달려 모세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파라오는 그들의 노동력을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노동 시간의 증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희망을 받아들이고 미래를 바라볼 힘까지 약해졌습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그것이 언제나 그 말의 내용을 고의로 거부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너무 지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고통에 짓눌려 미래를 바라볼 힘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더 강한 확신을 요구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좋은 말씀을 더 많이 듣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짓누르는 종살이에서 실제로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좋은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좋은 소식을 받아들일 힘조차 잃게 만든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기력이 꺾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코체르(⁨קֹצֶר⁩) 루아흐(⁨רוּחַ⁩)입니다. 코체르는 짧음이나 부족함을 나타내고, 루아흐는 숨, 바람, 영, 마음이나 기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는 ‘숨이 짧음’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참을성이 짧아져 조급해진 상태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낙담하여 마음의 여유를 잃은 상태로 읽을 수도 있고, 심한 노동으로 숨이 가빠진 신체적 상태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뒤에 「고역에 시달려」라는 이유가 함께 나와 있으므로, 여기서는 정신적인 낙담과 육체적인 고통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백성도 듣지 않는데, 어떻게 파라오가 듣겠습니까?

출애굽기 6:10–13 본문 →

모세의 질문은 이제 백성의 반응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들어가서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자기 땅에서 보내 주라고 말하여라.」출애굽기 6:11 · 본디새김
모세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말했다.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도 제 말을 듣지 않았는데, 파라오가 어떻게 제 말을 듣겠습니까? 저는 할례받지 않은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출애굽기 6:1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처음의 두려움과 다릅니다.

출애굽기 4:1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백성은 믿었습니다. 이번에는 실제로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 백성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말을 자신들의 해방을 거부하는 왕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자신의 말하는 능력을 문제 삼습니다.

할례받지 않은 입술이라는 이상한 비유

할례는 본래 신체에 행하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입술을 묘사하는 데 사용됩니다.

모세는 자신의 입술에 실제로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이 원활하게 나오지 않는 상태, 또는 자신이 맡은 말씀을 전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말하기 능력에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 표현만으로 특정한 언어 장애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모세는 입과 혀가 둔하다고 했습니다(출애굽기 4:10). 그런데 이제는 할례받지 않은 입술이라는 더 강한 비유를 사용합니다. 언약의 표징과 관련된 말로 자신의 입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백성과 말하지 못하겠다는 모세

이스라엘 백성은 고역 때문에 모세의 말을 듣지 못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입술이 할례받지 않았기 때문에 파라오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한쪽에서는 듣는 일이 막혀 있고, 다른 쪽에서는 말하는 일이 어렵습니다.

백성은 너무 지쳐서 듣지 못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제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파라오는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와 아론에게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과 이집트 왕 파라오에 관한 명령을 그들에게 내려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라고 했다.출애굽기 6:13 · 본디새김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대해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으십니다. 그가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설득하지도 않으십니다.

모세 혼자가 아니라 아론도 함께 언급됩니다.

모세의 질문은 ‘파라오가 어떻게 제 말을 듣겠습니까?’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가 자신의 말에 대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모세가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증명한 뒤에 시작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호소에도 두 사람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중단되고, 족보가 시작됩니다.

조금 더 깊이

성경에서는 할례와 관련된 표현이 신체의 다른 부분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레위기 26:41에서는 ‘할례받지 않은 마음’이 언급되고, 예레미야 6:10에서는 귀가 할례받지 않았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각각 마음이나 귀가 마땅한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왜 지금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족보가 나오는가

출애굽기 6:14–25 본문 →

한창 진행되던 이야기가 멈추다

독자가 13절까지 읽었다면 다음에는 모세와 아론이 다시 파라오에게 가는 이야기를 예상할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조상 집안의 우두머리들이었다.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아들들은 하녹과 팔루, 헤스론과 카르미였다. 이들이 르우벤의 씨족들이었다.출애굽기 6:14 · 본디새김

모든 지파의 족보가 아니라,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는 족보다

14절의 족보는 르우벤에서 시작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맏아들입니다. 이어서 시므온이 나오고, 그다음 레위가 등장합니다. 이 순서는 창세기 29:32–34에서 레아가 낳은 야곱의 아들들의 순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6장의 족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모두 다루지 않습니다. 레위의 후손으로 들어간 뒤 그 계보를 자세히 추적하고, 마지막에는 모세와 아론 및 아론의 자손들에게 집중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집안에 속한 사람들인지를 보여 주는 계보입니다.

그 흐름은 레위에서 그핫으로, 그핫에서 암람으로, 암람에서 아론과 모세로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인물로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서 이어진 구체적인 가족과 씨족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받은 사명은 개인적인 경험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던 부모

20절에 이르면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암람은 자기 고모 요케베드를 아내로 맞았다. 요케베드는 그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아 주었다. 암람이 산 햇수는 137년이었다.출애굽기 6:20 · 본디새김

출애굽기 2장은 모세의 탄생을 소개하면서 그의 부모를 ‘레위 집안의 한 남자’와 ‘레위의 딸’이라고만 불렀습니다. 그때 이야기는 죽음의 위협을 받는 한 아이와 그 아이를 살리려는 어머니의 행동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부모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전에 이름 없이 등장한 인물들이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가족 역사 속에 자리 잡는 순간입니다. 특히 아론과 모세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라는 사실이 족보를 통해 다시 확인됩니다.

아론의 자손들이 특별히 길게 기록된 이유

20절에서는 아론과 모세가 나란히 소개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주로 아론의 가정에 집중합니다.

아론은 엘리셰바와 결혼했고, 그에게서 나답과 아비후, 엘르아살과 이타마르가 태어났습니다. 엘르아살에게서는 비느하스가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레위의 다른 후손들, 특히 이츠하르의 아들 고라와 고라의 자손들도 함께 소개됩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이후 제사장 직무와 직접 연결됩니다(출애굽기 28:1). 엘르아살과 비느하스는 뒤에 이스라엘의 제사장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민수기 20:25–28, 25:10–13). 또한 고라의 이름은 뒤에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야기에서 다시 등장합니다(민수기 16장).

그렇다면 왜 여기서는 모세의 자녀보다 아론의 자녀들이 자세하게 언급될까요? 이 족보가 모세 개인의 전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함께 소개하면서, 이후 이스라엘의 예배와 제사장 직무에 연결될 아론의 가문까지 보여 주고 있습니다.

레위 집안 밖으로도 이어지는 관계

23절에는 아론의 아내 엘리셰바의 가족 관계가 비교적 자세히 나옵니다. 그는 암미나답의 딸이자 나손의 누이입니다.

여기서 나손이라는 이름은 민수기 1:7과 2:3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유다 지파의 지도자로 소개됩니다. 따라서 아론의 결혼은 레위 집안과 유다 지파의 관계를 보여 주는 연결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부 사항은 족보가 단순히 한 사람의 조상을 추적하는 수직적인 목록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다른 집안과 결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며, 그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러 가문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백성은 이름 없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씨족, 세대와 혼인 관계로 이어져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족보의 수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16절부터는 레위와 그핫과 암람의 수명이 기록됩니다. 레위는 137년, 그핫은 133년, 암람은 137년을 살았다고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 수명들을 단순히 더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지낸 전체 기간을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생애는 서로 겹치며, 계보가 모든 세대의 시간 간격을 빠짐없이 제공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 후 여러 세대가 이어졌고, 이제 모세와 아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의 생애 안에서 모두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후손을 통해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현재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셨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긴 시간은 고통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언약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배경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런데 20절에는 현대 독자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암람이 자기 고모 요케베드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본문이 제시하는 실제 친족 관계입니다. 이를 먼 친척 관계로 완화할 이유는 없습니다. 레위기 18:12에서는 고모와의 성적 관계가 금지됩니다. 따라서 성경 전체를 읽을 때 두 본문 사이의 법적·역사적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출애굽기 6장은 암람과 요케베드의 결혼에 관하여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이 장의 관심은 그 결혼의 정당성을 논증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에게서 아론과 모세가 태어났다는 계보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해당 결혼을 모든 시대에 허용된 관계라고 주장할 수도 없고, 후대에 주어진 율법을 그대로 앞선 이야기의 인물들에게 적용하여 본문이 내리지 않은 판결을 내려서도 안 됩니다.

「이들이 바로 아론과 모세였다」 — 족보가 끝나는 자리

출애굽기 6:26–27 본문 →

족보의 목적이 드러나다

이들이 바로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들의 부대별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라.」라고 말했던 아론과 모세였다.출애굽기 6:26 · 본디새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려고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었다.출애굽기 6:27 · 본디새김

26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명령하신 사람들로 소개됩니다. 27절에서는 파라오에게 말한 사람들로 소개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강조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행해야 하는 일이 강조됩니다.

또한 이름의 순서도 바뀝니다.

26절에서는 아론과 모세입니다. 27절에서는 모세와 아론입니다.

앞서 족보에서는 아론이 형으로서 먼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 받은 사람은 모세입니다. 따라서 이름의 순서가 바뀌는 것을 단순한 오류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사명을 맡은 형제이며, 그들을 소개하는 관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족보는 모세와 아론을 다시 소개하기 위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가문을 밝히고, 이스라엘 안에서의 소속을 보여 주고, 앞으로 파라오 앞에 설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것입니다.

종살이하던 백성이 부대별로 나오게 된다

‘부대’는 조직된 무리나 군대의 대열을 나타낼 수 있는 말입니다.

앞 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벽돌을 만들 짚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 온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6:26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부대별로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흩어져 노동하던 사람들이 이제 조직된 백성으로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이라는 미래가 제시됩니다.

물론 여기서 이스라엘이 이미 무장을 마친 군대가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대’라는 표현은 질서를 갖춘 공동체의 이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41에서는 마침내 여호와야훼의 모든 부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고 기록됩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노동력으로 조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는 자신의 백성으로 이끌어 내실 것입니다.

같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을 움직이는 명령과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달라질 것입니다.

다시 할례받지 않은 입술로 돌아오다

출애굽기 6:28–30 본문 →

족보가 끝나자 처음의 문제가 되돌아온다

여호와야훼가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여호와야훼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모든 것을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말하여라.」출애굽기 6:29 · 본디새김
모세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말했다. 「보십시오. 저는 할례받지 않은 입술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파라오가 어떻게 제 말을 듣겠습니까?」출애굽기 6:30 · 본디새김

이 대화는 10–12절에서 이미 등장한 내용과 매우 비슷합니다. 족보를 위해 잠시 중단되었던 이야기의 흐름이 다시 이어지는 방식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독자는 족보를 통해 모세가 누구의 후손이며 어떤 가족에 속해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론의 자녀와 손자들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설명이 끝난 뒤에도 모세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족보는 모세가 말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조상들이 훌륭했으므로 그도 자동으로 훌륭한 지도자라는 논증도 하지 않았습니다.

족보는 그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하는 능력에 대한 염려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세의 사명이 정당하다는 사실과 모세가 자신을 충분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할례받지 않은 입술 앞에 남은 말씀

출애굽기 6:1–30 본문 →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충분한 믿음과 확신을 갖춘 뒤에야 구원을 시작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뒤에도 자신의 명령을 이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먼저입니다.

모세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고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파라오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말씀하시는 음성과, 자신은 제대로 말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모세의 음성이 한 장 안에서 계속 마주칩니다.

하나님은 네 번이나 자신이 여호와야훼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마지막에 다시 입술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모세가 자신의 입술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그 입술을 통해 무엇을 하실 것인가입니다.

그 질문을 남긴 채, 모세는 아직 파라오 앞에 다시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