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성전 문을 나서는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 10장에는 이상한 역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기 시작하는데, 그 순간 성전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찹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약속과, 사람들이 그분의 임재를 마음대로 붙잡아 둘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앞 장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고 집행되는 장면이 나타났습니다. 이제 에스겔은 그 심판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좌를 봅니다. 그룹들 사이의 불이 성읍을 향하고, 왕좌 아래의 바퀴들이 움직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동쪽 문에 이릅니다.

심판의 불은 성읍을 향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밖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두 움직임 모두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됩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810장 본문 읽기 →

왕좌 아래의 불 — 심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에스겔 10:1–2 본문 →

에스겔이 처음 보는 것은 왕좌입니다.

내가 보니, 그룹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면에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들 위에 나타난 것은 사피르 보석 같고 왕좌의 형상처럼 보였다.에스겔 10:1 · 본디새김

이 모습은 에스겔이 처음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 1:22–28에서도 생물들의 머리 위에 펼쳐진 면이 있고, 그 위에는 사피르 보석 같은 왕좌의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환상과 이번 환상의 역할은 다릅니다.

1장에서 에스겔은 바벨론이라는 낯선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루살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10장에서는 같은 왕좌의 환상이 예루살렘 성전을 배경으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보다, 그 영광이 성전과 성읍에 대해 무엇을 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가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에게 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룹 아래, 돌아가는 바퀴들 사이로 들어가라. 그룹들 사이의 숯불로 네 두 손을 가득 채우고 성읍 위에 흩뿌려라.」 그 남자가 내 눈앞에서 들어갔다.에스겔 10:2 · 본디새김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앞 장에서 이마에 보호의 표를 남겼던,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입니다. 그는 앞에서는 서기관의 먹통을 차고 사람들을 구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룹들 사이에서 숯불을 받아 성읍 위에 흩뿌리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보호할 사람들을 구별하라는 명령도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성읍에 불을 흩뿌리라는 명령도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불은 성읍 바깥에서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적군의 무기고에서 가져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룹들 사이, 곧 하나님의 왕좌 아래에 있는 불입니다.

에스겔 1:13에서도 생물들 사이에는 숯불처럼 타오르는 불이 있었습니다. 그 불은 밝게 빛났고, 그 가운데서 번개가 나왔습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 그 불은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싼 장엄한 광경의 일부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불이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출애굽기 3:2에서 불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됩니다. 레위기 9:24에서는 여호와야훼 앞에서 나온 불이 제단의 제물을 삼킵니다. 이사야 6:6–7에서는 제단에서 가져온 숯불이 예언자의 입술에 닿아 그의 죄가 제거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에스겔 10장에서 불의 목적은 정화 의식이나 예언자의 소명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그 불을 성읍 위에 흩뿌리는 일입니다.

그 불의 의미는 성읍에 대한 심판이라는 문맥에서 결정됩니다.

에스겔의 시선은 잠시 불에서 벗어나, 그 불을 품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 자체로 옮겨 갑니다.

떠나는 영광이 남긴 구름과 광채

에스겔 10:3–5 본문 →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가 그룹들 사이로 들어갈 때, 그룹들은 성전 오른쪽에 서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룹 위에서 올라와 그 집의 문지방 위로 옮겨 갔다. 그 집은 구름으로 가득 찼고, 뜰은 여호와야훼의 영광에서 나는 광채로 가득 찼다.에스겔 10:4 · 본디새김

출애굽기 40:34–35에서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었고,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습니다. 그 영광 때문에 모세조차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8:10–11에서도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구름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제사장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섬기는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두 장면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본 구름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나타납니다.

성막이 세워지는 순간도 아니고, 성전이 봉헌되는 순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 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은 그분의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영광은 여전히 성전을 가득 채울 만큼 찬란하지만,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장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그 장소 자체가 영원히 보호받는다는 보증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막과 성전의 영광은 하나님이 그 건물에 속하게 되셨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로 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 만큼, 그분의 임재를 건물 자체가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열왕기상 8:27에서 그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도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데, 자신이 지은 성전이 어떻게 그분을 온전히 담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바깥뜰까지 들리는 소리

그룹들의 날개 소리가 바깥뜰까지 들렸다. 엘 샤다이가 말할 때의 목소리 같았다.에스겔 10:5 · 본디새김

에스겔 1:24에서도 생물들의 날개 소리는 큰 물소리와 샤다이의 목소리에 비유됩니다. 에스겔의 시야에는 구름과 광채가 가득하고, 그의 귀에는 바깥뜰까지 울려 퍼지는 날개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찬란함 속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은 계속 진행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엘 샤다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과 의미는 확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번역은 그 이름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에스겔 9:3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위에서 문지방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런데 10:4에서는 비슷한 움직임이 다시 묘사됩니다. 이것을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과 문지방 사이를 두 차례 왕복했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환상은 앞서 언급한 장면을 다시 보여 주면서 새로운 요소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9장에서는 문지방으로 옮겨 간 하나님의 영광이 심판을 명령하시는 일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10장에서는 그 이동과 함께 나타나는 구름, 광채, 날개 소리가 강조됩니다.

그룹의 손에서 사람의 손으로 — 전달되는 불

에스겔 10:6–8 본문 →

하나님은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에게 다시 불을 가져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남자가 바퀴 곁에 서자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뻗어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들고, 아마포 옷을 입은 남자의 두 손에 담아 주었다. 그 남자는 그것을 받아 들고 나갔다.에스겔 10:7 · 본디새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그룹들은 단순히 왕좌를 장식하는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실행되는 과정에 참여합니다.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는 사람 손의 형상이 보였다.에스겔 10:8 · 본디새김

이것은 에스겔 1:8의 묘사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생물들의 날개 아래에는 사람의 손과 같은 형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장에서는 그 손이 실제로 행동합니다.

앞선 환상에서 묘사된 신비로운 신체의 특징이 이번 환상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동작으로 드러납니다. 심판의 도구가 하나님의 왕좌 아래에서 출발하여 성읍을 향해 전달되는 과정이 하나하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지고, 그룹이 불을 건네고, 남자가 그것을 받습니다. 이러한 세부 묘사는 심판이 우연한 재난이나 통제되지 않은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아래 이루어지는 일임을 강조합니다.

남자가 불을 가지고 나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불을 성읍에 흩뿌리는 장면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시선은 그 남자를 따라 성읍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룹들과 바퀴들에 머무릅니다.

네 방향으로 움직이는 바퀴 — 누구도 붙잡아 둘 수 없는 왕좌

에스겔 10:9–13 본문 →

에스겔은 그룹들 곁에 있는 네 바퀴를 봅니다.

각 그룹 곁에 바퀴 하나씩 있습니다. 바퀴들은 타르시스 보석처럼 빛나고, 모두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형태는 바퀴 안에 또 다른 바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1:15–18에 나왔던 묘사와 닮아 있습니다.

그것들은 움직일 때 자기들의 네 방향으로 나아갔고, 나아가면서 돌이키지 않았다. 머리가 향하는 곳으로 그 뒤를 따라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나아가면서 돌이키지 않았다.에스겔 10:11 · 본디새김

여기서 ‘나아가면서 돌이키지 않았다’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일반적인 탈것은 방향을 바꾸려면 차체를 돌리거나 바퀴의 방향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존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듯한 형상과 연결됩니다. 환상 속의 바퀴들은 일반적인 수레바퀴와 달리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습을 지닙니다.

11절의 ‘머리가 향하는 곳’도 구체적으로 누구의 머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룹의 머리일 수도 있고, 전체 움직임의 선두를 가리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바퀴들이 독립적으로 방향을 정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끄는 움직임에 따라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눈이 가득한 몸과 바퀴

그들의 온몸과 등과 손과 날개, 그리고 바퀴들, 곧 그 넷의 바퀴들은 둘레에 눈이 가득했다.에스겔 10:12 · 본디새김

에스겔 1:18에서는 바퀴 둘레에 눈이 가득하다고 묘사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눈이 가득한 범위가 더욱 넓게 서술됩니다. 몸과 등과 손과 날개, 그리고 바퀴들이 함께 언급됩니다.

원문의 문장 구조 때문에 눈이 가득한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퀴들에 눈이 가득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눈은 일반적으로 보는 능력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이 광경은 단순히 이동하는 능력뿐 아니라, 보는 능력을 갖춘 존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들은 사방으로 움직이고, 눈으로 가득한 모습이며, 뒤이어 설명될 생물들의 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에스겔이 보고 있는 것이 사람이 만든 탈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신비로운 존재들의 움직임임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바퀴들은 성전 건물과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성전은 특정한 장소에 세워져 있습니다. 기둥과 벽과 문이 정해진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왕좌는 움직입니다.

그 움직임은 어느 한 방향에 묶이지 않습니다.

13절에서 에스겔은 바퀴들이 ‘돌아가는 바퀴들’이라고 불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모습을 설명할 뿐 아니라, 환상 속에서 실제로 들은 명칭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퀴들의 움직임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그룹들과 바퀴들이 함께 움직이는 장면에서 밝혀집니다.

생물과 바퀴를 움직이는 하나의 영

에스겔 10:14–17 본문 →

에스겔은 그룹들의 얼굴을 다시 봅니다.

저마다 얼굴이 넷이었다. 첫째 얼굴은 그룹의 얼굴이고, 둘째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고,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고,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었다.에스겔 10:14 · 본디새김

에스겔 1:10에서는 생물들의 얼굴이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의 얼굴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10:14에서는 황소 대신 ‘그룹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 가지 가능성은 ‘그룹의 얼굴’이 앞서 묘사한 황소의 얼굴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10:22에서 에스겔은 자신이 본 얼굴들이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얼굴들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왜 황소의 얼굴 대신 그룹의 얼굴이라고 표현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표현이 반드시 동일한 대상을 가리킨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번역이 ‘그룹의 얼굴’을 그대로 남긴 것은 이러한 차이를 숨기지 않는 선택입니다.

그룹들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내가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그 생물이었다.에스겔 10:15 · 본디새김

처음 환상에서는 네 존재가 ‘생물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에스겔은 그들이 그룹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10:20).

그룹은 이스라엘의 성소 전통에서 낯선 존재가 아닙니다.

출애굽기 25:18–22에서는 언약궤 위에 금으로 만든 그룹들이 놓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지성소에도 날개를 펼친 그룹들의 형상이 있었습니다(열왕기상 6:23–28).

그러나 에스겔이 본 그룹들은 성전 안에 세워진 형상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입니다. 날개를 펼치고, 손을 뻗고, 땅에서 솟아오릅니다. 그들 곁에는 바퀴가 있으며, 그들 위에는 하나님의 왕좌가 있습니다.

성전의 그룹 형상이 하나님의 보좌와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면, 에스겔의 환상에서는 그 보좌에 속한 그룹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바퀴들은 왜 그룹들을 떠나지 않는가

그룹들이 나아갈 때 바퀴들도 그들 곁에서 나아갔다. 그룹들이 땅 위로 솟아오르려고 날개를 들어 올릴 때에도 바퀴들 역시 그들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에스겔 10:16 · 본디새김

그런데 다음 절은 이 움직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이 멈추면 바퀴들도 멈추었고, 그들이 솟아오르면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솟아올랐다. 그 생물의 영이 바퀴들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에스겔 10:17 · 본디새김

바퀴들이 단순히 밖에서 가해지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물과 긴밀하게 연결된 영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이 일치된 움직임은 하나님의 왕좌가 우연히 움직이거나 여러 존재의 개별적인 선택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왕좌 아래의 모든 것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제 정말로 문지방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루아흐(⁨רוּחַ⁩)는 문맥에 따라 바람, 숨, 영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생물과 바퀴가 함께 움직이는 원인을 설명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생물을 가리키는 말은 단수로 나타납니다. 이 단수 표현이 정확히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러 그룹을 하나의 생명 있는 실체로 묶어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앞선 환상에서 보았던 생물들의 형상을 하나의 전체로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문지방에서 동쪽 문으로 — 멈추어 선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 10:18–19 본문 →

에스겔 10장의 결정적인 장면이 시작됩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 집의 문지방 위에서 나와 그룹들 위에 섰다.에스겔 10:18 · 본디새김

앞서 에스겔은 그룹들 위의 왕좌를 보았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자리합니다.

그룹들이 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이 나갈 때 내 눈앞에서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 바퀴들도 그들 곁에 있었다. 여호와야훼의 집 동쪽 문 입구에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 위에 있었다.에스겔 10:19 · 본디새김

이 장면의 힘은 하나님의 영광이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에스겔은 그 영광이 성전의 안쪽에서 문지방으로, 다시 그룹들 위로, 마침내 동쪽 문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분이 성읍 바깥까지 이동하시는 장면은 이어지는 11:22–23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10장의 마지막 움직임은 완전한 이탈이 아니라, 성전 동쪽 문에 이르러 멈추는 장면입니다.

왜 동쪽 문인가

여기서 에스겔 8장의 한 장면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태양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8:16).

사람들은 성전을 등지고 피조물을 향해 절했습니다.

이제 성전 안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움직입니다.

성전에서 벌어진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영광이 이동하는 일 사이에는 에스겔 8–11장의 문맥상 분명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들이 동쪽으로 절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 방향으로 떠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왜 하필 동쪽 문에 멈추는지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서 하나님은 성전 안에서 벌어진 우상숭배를 고발하셨고, 성읍을 가득 채운 폭력과 불의를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는 움직임은 그 고발에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멈추어 섰고’라는 동사의 주어에는 약간의 해석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동사는 단수형이므로, 그룹들을 하나의 전체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주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43:1–5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다시 나타나고, 동쪽을 향한 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성전을 가득 채웁니다. 이것은 10장의 움직임을 거꾸로 비추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임을 하나님이 떠나기를 망설이신다는 심리적 묘사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잠시 멈추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존재들

에스겔 10:20–22 본문 →

에스겔 10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 문에 멈추어 선 장면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 절에서 에스겔은 다시 그룹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내가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이스라엘 하나님 아래에 있던 그 생물이었다. 나는 그들이 그룹들임을 알았다.에스겔 10:20 · 본디새김

그가 바벨론에서 보았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이 성전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영광을 떠받치는 존재들 역시 같습니다.

그들의 얼굴 형상은 내가 크발 강가에서 본 그 얼굴들이었다. 그 모습도 그때와 같았고, 그들도 내가 그때 본 바로 그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얼굴이 향한 쪽으로 나아갔다.에스겔 10:22 · 본디새김

첫 번째 환상은 바벨론의 크발 강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환상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납니다. 한곳은 유배민이 살아가는 땅이고, 다른 곳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두신 성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두 장소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의 일부는 이미 포로로 끌려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는 것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시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 10장은 성전을 떠나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지만, 하나님이 더 이상 어디에도 임재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환상을 보고 있는 예언자 자신이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벨론의 유배민이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확인은 성전의 운명을 더욱 무겁게 만듭니다.

떠나는 영광은 거짓 신의 영광이 아닙니다. 바벨론의 낯선 신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오래전부터 섬겨 온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동쪽 문에 멈추어 선 영광

에스겔 10:1–22 본문 →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 하나의 종교적 지위가 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믿고 의지해 온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인 심판 앞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지만, 그 찬란함이 인간의 불의를 덮어 주는 장막이 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어떤 공동체의 어려움이나 위기를 곧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증거라고 판단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에스겔 10장의 환상은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직접 보여 주신 특정한 심판의 사건입니다. 오늘의 어떤 공동체에 똑같은 판정을 내릴 권한을 우리에게 주는 본문이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 영광이 아닙니다.

그분을 모시고 있던 성전의 운명이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머무르던 자리는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은 성전 동쪽 문에 멈추어 선 그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룹들은 여전히 그분 아래에 있고, 바퀴들은 그들 곁에 있습니다. 아직 성읍을 완전히 떠나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이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 광경 앞에서 에스겔 10장은 멈춥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