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성전을 잃은 사람들의 성소가 되신 하나님

에스겔 11장에서 가장 놀라운 말씀은 성전의 지도자들에게 내려진 심판도, 돌로 된 마음을 살로 된 마음으로 바꾸시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그 모든 말씀의 한가운데 놓인 이 선언입니다.

「그들이 간 여러 땅에서 나는 그들에게 잠시 성소가 되었다.」

예루살렘에는 아직 성전이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반면 에스겔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고향도, 땅도, 예루살렘에서 예배할 기회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성전에 가까이 있는지로 하나님과의 거리를 판단했지만, 하나님은 그 판단을 뒤집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으로 결정됩니까? 땅을 소유하고 성전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관계입니까?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1011장 본문 읽기 →

솥 안의 고기는 안전한가 —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착각

에스겔 11:1–4 본문 →

에스겔은 영에 이끌려 성전 동쪽 문으로 갑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멈추어 섰던 바로 그 문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곳에서 스물다섯 명의 남자를 봅니다. 그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됩니다.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입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이들이 이 성읍에서 악을 꾀하고 악한 계책을 내놓는 사람들이다.」에스겔 11:2 · 본디새김

성읍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는 계책을 내놓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공동체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이 큽니다.

「그들은 『집들을 지을 때가 가깝지 않다. 이 성읍은 솥이고 우리는 고기다.』 하고 말한다.」에스겔 11:3 · 본디새김

집을 지을 때가 가깝지 않다는 말

3절 앞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이 표현을 재앙이 아직 멀었다는 안일한 판단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이 말을 평화롭게 집을 짓고 정착할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의문문으로 읽어 집을 지을 때가 가까웠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각 해석은 뒤따르는 솥의 비유를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판단을 근거로 예루살렘의 앞날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성읍은 솥이고 우리는 고기다

솥은 고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고기는 솥 안에 있고, 솥은 그 고기를 둘러쌉니다. 불이 솥 바깥에서 타오를 때, 솥은 고기가 불길에 직접 닿지 않도록 막아 주는 그릇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말도 이러한 보호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견고한 성벽을 가진 성읍입니다. 외부의 적이 몰려와도 자신들은 성읍 안에 있습니다. 솥 안의 고기처럼 그곳에 머무르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솥은 고기를 보호하는 동시에 익히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비유에는 처음부터 다른 방향으로 뒤집힐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을 보던 시기에는 이미 바벨론의 침공으로 여호야긴과 일부 유다 사람들이 끌려간 상태였습니다(열왕기하 24:10–17).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외국의 위협이 계속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과 성벽이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놓치고 있는 현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성읍 안에는 이미 폭력과 죽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성벽 바깥에서 찾아올 적을 두려워하면서도, 자신들이 성벽 안에서 저지른 악에 대해서는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을 거슬러 예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솥의 의미를 하나님이 직접 뒤집으실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8:16에도 스물다섯 명쯤 되는 남자들이 등장했지만, 그들과 여기의 스물다섯 명을 반드시 동일한 집단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 장면의 사람들은 성전 안뜰에서 태양에게 절하고 있었고, 이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동쪽 문 입구에서 성읍의 일을 논의하는 지도자들입니다. 본디새김은 히브리어의 부정문을 살려 ‘집들을 지을 때가 가깝지 않다’라고 옮겼습니다. 이 표현을 재앙이 아직 멀었다는 안일한 판단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짓는 때’와 재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문장 자체만으로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이 말을 평화롭게 집을 짓고 정착할 때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으므로 주택 건설보다 성읍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의문문으로 읽어 집을 지을 때가 가까웠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는 길도 있습니다.

너희가 아니라 죽임당한 사람들이 고기다

에스겔 11:5–12 본문 →

에스겔이 예언하려 하자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 위에 내려앉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이 내 위에 내려앉았고, 그가 내게 말했다. 「말하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그렇게 말했다. 너희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나는 알고 있다.』」에스겔 11:5 · 본디새김

앞 장들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도자들이 성읍의 운명을 판단하고 백성에게 제시하는 계책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이 성읍에서 너희에게 죽임당한 사람들을 늘렸고, 그 거리들을 죽임당한 사람들로 가득 채웠다.』」에스겔 11:6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죽음들이 어떤 사건에서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이 직접 행사한 폭력인지, 그들의 결정으로 벌어진 죽음까지 포함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읍 안의 유혈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비유가 뒤집힙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에게 죽임당하여 너희가 그 안에 놓아둔 사람들, 그들이 고기이고 이 성읍은 솥이다. 그러나 그가 너희를 그 안에서 끌어낼 것이다.』」에스겔 11:7 · 본디새김

성읍이 솥이라는 비유 자체는 그대로 남습니다. 바뀌는 것은 그 솥 안에 있는 고기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이 만들어 낸 죽음의 현실을 드러내는 비유가 됩니다.

그들의 계책이 아무리 치밀해도, 그들이 저지른 폭력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솥에서 끌어내어지는 사람들

하나님은 이제 지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일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칼을 두려워했으니, 내가 너희 위로 칼을 가져오겠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1:8 · 본디새김

그렇기 때문에 성읍을 보호의 솥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어 그들을 성읍에서 끌어내어 낯선 이들의 손에 넘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읍 안에 남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성벽이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낯선 이들의 손에 넘기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솥 안의 고기라고 주장했지만, 하나님은 그 비유가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성읍은 너희에게 솥이 되지 않고, 너희도 그 안에서 고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계에서 내가 너희를 심판하겠다.』」에스겔 11:11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경계’라는 말은 심판이 성읍 내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최후의 안전지대로 생각하던 지도자들에게 그 땅과 성읍이 더 이상 피난처가 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 너희는 내 규례를 따라 걷지 않았고 내 법도를 행하지 않았다. 너희는 너희 주위 민족들의 법도대로 행했다.』」에스겔 11:12 · 본디새김

여기서는 심판을 통해 그들이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읍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벽과 정치적 계책으로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기준을 버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성읍을 지키기 위해 내놓은 그들의 계책도 그 잘못된 삶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7절 끝의 ‘그가 너희를 그 안에서 끌어낼 것이다’라는 표현에는 문법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형태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1인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본디새김처럼 3인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이 ‘그’의 정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특정 인물을 지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9절에서 하나님이 직접 ‘내가 너희를 그 안에서 끌어내어’라고 말씀하시므로, 성읍에서 지도자들을 끌어내는 일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블라댜의 죽음 — 심판을 전하던 예언자가 다시 엎드리다

에스겔 11:13 본문 →

심판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충격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내가 예언하는 동안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었다.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했다. 「아, 주 여호와야훼, 이스라엘의 남은 이들을 완전히 없애시는 것입니까?」에스겔 11:13 · 본디새김

블라댜는 앞서 동쪽 문에 서 있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방금 선포한 심판이 지도자 한 사람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여기서 한 사람의 죽음을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과 연결합니다. 블라댜는 악한 계책을 내놓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그를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가 죽는 모습을 보고 남은 이스라엘 전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그가 속한 백성입니다.

앞서 9:8에서도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심판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며 남은 사람들이 모두 멸망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지도자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다시 같은 두려움을 드러냅니다.

9장에서 하나님은 심판의 이유를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11장에서는 에스겔의 외침 뒤에 새로운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 말씀은 뜻밖에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향합니다.

예언자가 남은 사람들의 멸망을 두려워할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미 버려졌다고 여기는 이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죽음의 구체적인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목격한 죽음이며, 실제 역사에서 블라댜가 바로 그 시각에 죽었다는 사실까지 이 구절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나라는 사람들 — 누가 땅의 주인인가

에스겔 11:14–15 본문 →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의 형제들에게 향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 형제들, 네 형제들인 네 친족들, 그리고 이스라엘 온 집안 전체에게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소유로 주어졌다.』」에스겔 11:15 · 본디새김

‘네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에스겔에게 바벨론의 유배민들은 단순히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의 형제들이며 친족들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온 집안 전체’라는 표현까지 더해집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유배민들도 이스라엘의 일부입니다. 그들은 포로가 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약속에서 자동으로 제외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말에는 두 가지 주장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유배민들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땅이 예루살렘에 남은 자신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쫓겨나고 땅을 잃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웠습니다. 반대로 땅과 성전을 계속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과 보호를 받고 있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유배민들의 불행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확인해 주는 근거가 됩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24장에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과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대조하는 환상이 나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좋은 무화과에 비유하시고, 자신이 그들을 돌보시며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예레미야 24:4–7). 이는 유배를 당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에스겔 11장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두 본문을 통해 유배민들이 모두 본래부터 더 선한 사람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서의 다른 장면들은 유배민들 역시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14:1–5). 핵심은 사람이 처한 외적인 상황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자신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종적인 증거로 삼았습니다. 레위기 25:23에서 여호와야훼는 땅이 자신의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분 앞에서 나그네요 거류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땅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다른 형제들을 배제할 수 있는 절대적인 소유권의 근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증거로 여기는 사람들이, 정작 그 선물을 다른 형제들을 배제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성소가 되었다 — 유배지에서 들려온 약속

에스겔 11:16 본문 →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주장에 직접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들을 민족들 가운데로 멀리 보냈고, 내가 그들을 여러 땅에 흩어 놓았지만, 그들이 간 여러 땅에서 나는 그들에게 잠시 성소가 되었다.』」에스겔 11:16 · 본디새김

예루살렘 주민들은 유배민들이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그들을 멀리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배는 하나님이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시는 곳으로 백성이 떨어져 나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소가 되셨다는 말

이스라엘에게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중심으로 이해되는 장소였습니다. 성막과 성전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자신이 그들에게 성소가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성전이라는 건물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성전을 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흩어진 곳에서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바벨론의 크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에스겔 1:1–28). 그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에스겔이 경험한 그 사실을 유배민 전체를 위한 약속의 언어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소가 ‘되겠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성소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흩어져 살던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성소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는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나 소유하고 있는 종교적 시설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관계적 은혜에 근거합니다.

이 약속은 아직 회복의 완성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배지에 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오는 날까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이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에서 ‘잠시’로 옮긴 히브리어는 메아트(⁨מְעַט⁩), məʿaṭ입니다. 이 단어는 시간적으로 짧다는 의미로도, 양이나 정도가 작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디새김처럼 하나님이 유배민들에게 ‘잠시 성소’가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므로, 유배 기간 동안의 임재를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작은 성소’가 되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큰 성전과 대비하여, 흩어진 곳에서도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두 읽기에는 각각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 본문이 허락하는 유일한 의미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땅으로 돌아오는 것보다 더 깊은 회복

에스겔 11:17–20 본문 →

하나님은 유배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백성 가운데서 모으고, 너희가 흩어졌던 여러 땅에서 너희를 모아들여, 너희에게 이스라엘 땅을 주겠다.』」에스겔 11:17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누구에게 주실지 결정하시는 분이 자신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30:1–5에 나타난 회복의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고 조상들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에스겔 11장의 약속은 단순히 귀향과 땅의 회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곳으로 가서 그 땅의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과 모든 역겨운 것들을 그 땅에서 없앨 것이다.』」에스겔 11:18 · 본디새김

앞 장들에서 드러난 예루살렘의 문제는 땅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과 성소가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땅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 영을 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없애고, 그들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겠다.』」에스겔 11:19 · 본디새김

이제 하나님의 회복은 지리적 이동을 넘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한 마음을 주겠다는 약속

하나님은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실 뿐 아니라, 그들이 하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마음을 바꾸는 일은 단순히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없애는 것보다 더 깊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돌로 된 마음과 살로 된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는 완고함, 잘못을 보아도 돌이키지 않는 태도, 자신의 판단을 끝까지 고집하는 내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면 살로 된 마음은 부드럽고 살아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살’은 죄 많은 육체를 뜻하는 부정적인 상징이 아닙니다. 돌과 대비되는 살아 있고 반응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만져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살은 자극을 느끼고 반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더 이상 돌처럼 굳어진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도록, 살아서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 좋은 정치적 계책을 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시 성벽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전을 다시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성읍을 다시 세우시기 전에, 그 성읍을 더럽혔던 사람들의 마음 자체를 새롭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가 마음을 바꾸는가

여기서 회복은 사람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바꾸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내 규례를 따라 걷고 내 법도를 지키며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에스겔 11:20 · 본디새김

사람의 마음은 그대로 두고 겉으로만 규칙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서 신명기 30:6의 약속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백성과 그 후손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은 인간에게 요구되지만, 하나님은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내면의 변화까지 약속하십니다.

출애굽기 6:7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에스겔 11장에서 하나님은 죄와 유배로 무너진 그 관계를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으로 돌아오는 일은 그 회복의 일부입니다.

우상을 제거하는 일도 그 회복의 일부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받는 일도 그 회복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관계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한 마음’을 공동체가 하나의 마음으로 연합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여호와야훼께 충성하게 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에스겔 11장에서 유다 공동체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유배민들을 자신들과 구별하며 땅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동시에 공동체의 종교적 충성도 우상숭배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36:26에는 실제로 ‘새 마음’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11:19는 ‘한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36:26–27에서는 이 약속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고, 자신의 영을 그들 속에 두시어 규례를 따라 살아가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1장의 ‘새 영’을 곧바로 36장의 ‘내 영’과 완전히 같은 표현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은 백성의 순종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함께 강조합니다. 이러한 약속은 신약에서도 새로운 언약과 성령에 관한 가르침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에스겔 11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유배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언약 관계의 갱신을 가리킵니다.

모두가 자동으로 회복되는가

에스겔 11:21 본문 →

그런데 이 아름다운 약속 뒤에 경고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것들과 역겨운 것들의 마음을 향해 가는 자들에게는 내가 그들의 행실을 그들의 머리 위에 돌려놓겠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1:21 · 본디새김

앞서 9:10에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내려졌던 ‘행실을 그들의 머리 위에 돌려주겠다’는 심판의 언어가 다시 나타납니다. 따라서 회복의 약속은 악을 무조건 승인하시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면서도, 그 백성을 파괴했던 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에는 ‘마음’에 해당하는 낱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그 결과 문자 그대로 읽으면 사람의 마음이 혐오스러운 것들의 마음을 향해 간다는 어색한 표현이 됩니다. 이를 사람들이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뜻으로 풀어 읽을 수도 있지만, 원문의 중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는 어려움이 남습니다. 또한 이 경고를 받는 사람들이 앞서 새 마음을 약속받은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집단인지, 그들과 대비되는 다른 집단인지도 명시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성읍 동쪽 산 위에 멈추어 선 영광

에스겔 11:22–23 본문 →

회복의 약속이 끝나자 환상의 시선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갑니다.

그룹들이 다시 움직입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동쪽 문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읍 한가운데의 상공에서 올라가 성읍 동쪽에 있는 산 위에 섰다.에스겔 11:23 · 본디새김

그들은 유배민들에게 여호와야훼에게서 멀리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는 성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졌다고 판단했던 유배민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이 성소가 되어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소유하지 못했고, 땅을 잃은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났다는 사실을 그분이 이스라엘을 영원히 포기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하나님은 유배민들을 다시 모으시고 새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심판과 회복의 약속이 함께 선언된 뒤에 영광이 성읍을 떠납니다.

지금 에스겔의 눈앞에 있는 것은 성읍 동쪽 산 위에 멈추어 선 영광입니다.

그곳에 서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이 이 환상의 마지막 장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그 산은 지리적으로 감람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이 산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는 않으므로, 그 산을 감람산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리적 추론입니다. 에스겔 43:1–5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다시 나타나 성전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그것은 이곳에서 시작된 영광의 이탈과 방향상 대응하는 회복의 환상입니다.

예언자는 유배민들에게 돌아간다

에스겔 11:24–25 본문 →

환상의 마지막 움직임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에스겔 자신에게 일어납니다.

영이 나를 들어 올려,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칼데아 땅의 유배민들에게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내가 본 환상이 내 위에서 떠올라 사라졌다.에스겔 11:24 · 본디새김

8:1에서 시작된 환상은 그가 자기 집에 앉아 있고 유다의 장로들이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환상이 끝납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져 성전의 죄악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벨론의 유배민들을 향한 회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하신 말씀이 바벨론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나는 유배민들에게 여호와야훼가 내게 보여 준 모든 일을 전했다.에스겔 11:25 · 본디새김

에스겔이 본 환상은 그 혼자만을 위한 신비로운 경험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전달되는 사람들은 성전을 잃고 땅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직접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바벨론에 있습니다.

아직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새로운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읍을 떠난 영광, 유배민에게 전해진 말씀

에스겔 11:1–25 본문 →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분이 주신 것을 소유하는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죄악을 심판하시면서도, 흩어진 백성과 맺은 관계를 끝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땅을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만 모든 실패와 상실이 하나님의 특별한 회복 계획이라는 식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 11장의 약속은 역사 속에서 유배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 동쪽 산 위에 멈추어 선 영광을 마지막으로 본 뒤, 바벨론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온 곳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제단도, 성벽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이 간 여러 땅에서 나는 그들에게 잠시 성소가 되었다.」

그리고 에스겔은 바로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유배민들 가운데 돌아와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