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보고도 보지 않는 사람들

에스겔 12장에서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이상한 일을 명령하십니다. 짐을 꾸리고, 낮에 사람들 앞에 내놓고, 저녁에는 벽을 뚫고, 어둠 속에서 얼굴을 가린 채 그 짐을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3절부터 7절까지 ‘그들의 눈앞에서’라는 표현이 일곱 차례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남몰래 떠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보도록 하십니다. 그것도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아니라, 낮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행동을 통해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보여 주어야 합니까?

앞부분에서 사람들은 눈앞의 징표를 보아야 합니다. 뒷부분에서는 그 징표가 가리키는 시간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들어야 합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912장 본문 읽기 →

혹시 볼지 모른다 — 반역하는 집안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에스겔 12:1–3 본문 →

11장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떠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뒤 유배민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는 그들 가운데서 새로운 말씀을 받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역하는 집안 한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에게는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스겔 12:2 · 본디새김

그는 이미 바벨론에 끌려온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 역시 ‘반역하는 집안’이라고 부르십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이 심판받을 것이라는 사실이 바벨론의 유배민들을 자동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미 유배를 경험했으면서도,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볼 눈은 있지만 보지 않습니다.

들을 귀는 있지만 듣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장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들려주시는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29:4와도 연결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큰 행적을 보았지만, 그것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아직 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행위를 직접 경험하는 것과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구원받는 일을 경험했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언제나 신실한 순종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반역하는 집안이라고 부르신 직후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마련하고 낮에 그들의 눈앞에서 유배길을 떠나라. 그들의 눈앞에서 네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유배길을 떠나라. 그들이 반역하는 집안이기는 해도 혹시 볼지 모른다.」에스겔 12:3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이 보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다시 볼 수 있도록 징표를 주십니다.

에스겔의 이상한 행동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공연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눈으로 보게 하려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조금 더 깊이

‘혹시 볼지 모른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그들의 반응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신다는 의미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가능성과 기대가 드러납니다.

낮에는 짐을 내놓고, 밤에는 벽을 뚫다

에스겔 12:4–7 본문 →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동은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왜 낮에 짐을 내놓는가

「네 짐을 유배 짐처럼 낮에 그들의 눈앞에서 내어 놓아라. 너는 저녁에 그들의 눈앞에서 유배자들이 떠나듯 나가라.」에스겔 12:4 · 본디새김

유배 짐은 평범한 여행 가방과 다릅니다. 유배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익숙한 집과 땅을 떠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 행동의 정확한 시간 간격은 나오지 않지만, 짐을 공개적으로 내놓는 시간과 실제로 떠나는 시간을 구별하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저녁이 되어 그가 움직일 때까지, 낮에 내놓은 짐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물건이 됩니다.

에스겔의 행동은 한순간에 모든 의미가 드러나는 광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의 간격을 포함합니다.

왜 문으로 나가지 않고 벽을 뚫는가

「그들의 눈앞에서 벽을 뚫고 그리로 짐을 내어 가라.」에스겔 12:5 · 본디새김

길을 떠나는 사람은 보통 문으로 나갑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벽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나갑니다. 그것은 도망과 탈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캄캄할 때 내어 가라. 땅을 보지 못하도록 네 얼굴을 가려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징표로 세웠기 때문이다.」에스겔 12:6 · 본디새김

에스겔이 재현하는 것은 단순히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람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고향 땅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는 한 지도자의 운명과도 연결됩니다.

명령대로 행동한 예언자

7절에서 에스겔은 자신이 명령받은 대로 행동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짐을 내놓고, 손으로 벽을 뚫고, 캄캄할 때 짐을 메고 나갑니다.

바벨론에 이미 유배되어 온 예언자가 다시 유배되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 날 하나님이 설명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곧 겪게 될 일을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그 벽이 정확히 어떤 건물의 벽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고, 부끄러움이나 슬픔과 관련된 몸짓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모든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명시된 목적은 땅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었지만,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에스겔 12:8–11 본문 →

다음 날 아침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 그 반역하는 집안이 네게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묻지 않았느냐?」에스겔 12:9 · 본디새김

이 질문이 곧 회개나 순종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징표가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사실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도록 하십니다.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의 지도자와 그들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집안에 관한 것이다.』」에스겔 12:10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신탁’은 히브리어 마사(⁨מַשָּׂא⁩), maśśāʾ입니다. 이 단어는 짊어지는 짐이라는 뜻과, 예언자가 선포하는 신탁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에스겔은 실제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가 짊어진 행동의 의미가 예루살렘에 관한 신탁으로 설명됩니다.

예언자가 어깨에 멘 짐은, 예루살렘에 내려질 말씀의 무게를 눈앞에 드러냅니다.

에스겔이 짐을 메고 나가는 모습만으로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말을 듣기만 했다면, 사람들은 그 경고를 이전처럼 흘려들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으로 질문을 일으키시고, 말씀으로 그 행동의 의미를 밝히십니다.

「말하라. 『나는 너희에게 징표다. 내가 한 그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유배되어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에스겔 12:11 · 본디새김

그가 손에 든 물건만 징표인 것이 아닙니다. 그가 행하는 행동만 징표인 것도 아닙니다. 예언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에스겔서에 반복되는 독특한 예언 방식입니다. 에스겔 4–5장에서 그는 예루살렘 포위와 심판을 여러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12장의 행동은 그 연장선에 있지만, 새로운 초점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예루살렘 성읍 전체의 포위뿐 아니라, 그곳의 지도자가 어떻게 빠져나가려 하고 결국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가 드러납니다.

땅을 보지 못하는 지도자 — 도망과 붙잡힘

에스겔 12:12–14 본문 →

하나님은 에스겔이 재현한 행동을 예루살렘 지도자의 운명과 연결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지도자는 캄캄할 때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갈 것이다. 그들은 그를 그리로 내보내려고 벽을 뚫을 것이다. 그는 자기 얼굴을 가릴 것이다. 그가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에스겔 12:12 · 본디새김

에스겔은 여기서 그 사람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통치자라는 문맥과 뒤따르는 예언을 고려하면, 당시 유다의 왕 시드기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내가 내 그물을 그 위에 펼치겠고, 그는 내 그물에 붙잡힐 것이다. 내가 그를 칼데아 땅 바벨론으로 데려가겠지만, 그는 그 땅을 보지 못하고 거기서 죽을 것이다.」에스겔 12:13 · 본디새김

어떻게 어떤 사람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면서도 바벨론을 보지 못할 수 있을까요?

열왕기하 25:7과 예레미야 52:10–11은 이 수수께끼와 연결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다음 눈이 뽑혔고,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 52:11은 그가 죽을 때까지 갇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바벨론에 도착했지만, 그 땅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의 도망과 하나님의 그물

성읍을 탈출하는 지도자는 적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이 그물을 펼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 군대는 역사 속에서 시드기야를 붙잡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신탁은 그 사건을 더 깊은 차원에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그를 붙잡습니다.

‘그물’이라는 비유는 도망치는 사람이 결국 피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듯, 지도자도 자신을 둘러싼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11장에서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을 안전한 솥이라고 여겼던 모습과의 짧은 연결도 있습니다. 그들은 성읍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성읍 밖으로 끌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2장에서는 실제로 성읍을 빠져나가려는 지도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읍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성읍 안에 머물러도 심판을 피할 수 없고, 성읍 밖으로 달아나도 하나님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지도자 곁의 사람들과 부대까지 흩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2:14). 지도자 한 사람의 운명은 공동체 전체의 붕괴와 연결됩니다. 그가 자신의 권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질서가 무너집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표현은 지도자가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도주 중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과 문맥상 눈에 띄지 않으려는 의미로 읽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은 그가 직접 땅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를 살렸습니다. 이 역사적 기록은 에스겔 12:13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렇다고 에스겔이 앞서 얼굴을 가리라고 명령받은 이유를 오직 시드기야의 실명만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얼굴을 가린 모습은 도망과 숨음의 상황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무엇을 말하게 되는가

에스겔 12:15–16 본문 →

지도자가 붙잡히고 그의 사람들도 흩어진 뒤, 하나님은 심판의 결과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민족들 가운데 흩어 버리고 여러 땅에 흩어 놓을 때,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12:15 · 본디새김

에스겔서에서 반복되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순히 심판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시는 이유를 밝히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칼과 굶주림과 역병에서 살아남게 하겠다. 그들이 들어간 민족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모든 역겨운 짓을 이야기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12:16 · 본디새김

이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억울하게 고난을 겪었는지만 말하는 모습과 다릅니다. 예루살렘이 왜 무너졌는지 설명할 때, 단지 바벨론이 강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어떤 행동을 했고, 하나님이 왜 심판하셨는지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들은 단지 죽음을 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겪은 일을 증언할 사람들입니다.

이 점에서 에스겔 12장의 남은 사람들은 예레미야애가의 탄식과도 연결됩니다. 예레미야애가 1:8과 5:16은 예루살렘이 겪은 수치와 고난을 백성의 죄와 함께 고백합니다.

그들의 생존은 과거의 잘못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할 기회가 됩니다.

마지막의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서 ‘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문맥상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는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또는 그들의 증언을 듣는 민족들이 여호와야훼가 누구신지 알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주어를 명확하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가능성 모두 심판의 의미가 예루살렘 내부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흩어지는 사건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도 여호와야훼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떨면서 먹는 빵 — 평범한 식사가 무너질 때

에스겔 12:17–20 본문 →

두 번째 징표는 첫 번째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에스겔은 이제 짐을 꾸리지 않습니다. 벽을 뚫지도 않습니다. 그저 빵을 먹고 물을 마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떨면서 네 빵을 먹고, 몸을 떨며 불안 속에서 네 물을 마셔라.」에스겔 12:18 · 본디새김

유배 짐은 큰 사건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빵과 물은 하루하루의 삶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음식이 부족한 상황이 아닙니다. 먹고 마실 수 있어도 마음 놓고 먹고 마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에스겔 4:9–17에서는 포위된 예루살렘의 식량과 물이 제한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12장에서는 먹고 마시는 행위에 따라붙는 두려움과 불안이 특별히 강조됩니다.

빵이 있어도 떨면서 먹습니다.

물이 있어도 공포 속에서 마십니다.

전쟁은 단지 군대가 성벽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기 집에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장 평범한 순간까지 침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두려움의 원인을 명확하게 지적하십니다.

「이 땅의 백성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불안 속에서 자기 빵을 먹고, 공포 속에서 자기 물을 마실 것이다. 그곳에 사는 모든 이들의 폭력 때문에, 그 땅이 그 안을 가득 채운 것을 잃고 황폐해지게 하려는 것이다.』」에스겔 12:19 · 본디새김

에스겔은 앞서 예루살렘이 폭력과 피 흘림으로 가득 찼다는 하나님의 고발을 들었습니다(7:23; 11:6). 사람들은 땅을 폭력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 결과 땅은 자신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잃게 됩니다.

19절의 표현은 땅의 황폐화를 설명하지만, 단순히 땅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된다는 사실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한때 풍성하게 채워져 있던 땅에서 삶을 지탱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 땅을 가득 채운 폭력이 결국 그 땅을 텅 비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읍의 멸망을 외부의 적에게서 시작된 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성읍의 내부에 있던 폭력을 드러내십니다.

이 때문에 에스겔이 떨면서 먹는 빵은 단순한 개인적 공포의 상징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의 삶이 얼마나 깊이 파괴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징표입니다.

「『사람이 사는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그 땅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12:20 · 본디새김

성읍의 멸망은 단순히 바벨론이 승리하고 유다가 패배했다는 사실만을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폭력으로 땅을 가득 채운 공동체에 대한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에스겔은 그 심판을 자신이 먹는 빵과 마시는 물로 보여 줍니다. 그가 떨면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인지는 여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날들이 길어지고 모든 환상은 사라진다 — 말씀을 무력화하는 속담

에스겔 12:21–25 본문 →

에스겔 12장의 뒷부분은 앞부분과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속담을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땅에서 너희가 하는 이 속담은 무슨 말이냐? 『날들이 길어지고, 모든 환상은 사라진다.』」에스겔 12:22 · 본디새김

날들은 계속 지나갑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말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참된 예언과 거짓된 환상을 구별하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환상이 결국 사라진다고 일반화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예언이 주어져도 그 내용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속담을 끝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겠다.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다시는 이 속담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말하라. 『그 날들이 가까이 왔고, 모든 환상에 담긴 일도 가까이 왔다.』」에스겔 12:23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은 단순히 사람들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금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담이 더 이상 현실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드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환상이 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이 흐르면서 환상에 담긴 일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시간의 흐름을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이 맞섭니다.

모든 환상이 참되다는 뜻인가

「『이스라엘 집안 가운데 어떤 헛된 환상도, 아첨하는 점괘도 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에스겔 12:24 · 본디새김

‘아첨하는’이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을 전하는 거짓된 종교적 확신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어지는 에스겔 13장에서 더욱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23절의 모든 환상을 거짓 예언까지 포함해 모조리 성취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거짓된 환상들이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이지 못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선포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예언의 양이 아니라 그 출처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는 이유로 그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말씀이 거짓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오늘의 독자가 자신이 듣는 모든 경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경고를 무조건 믿는 일이 아니라, 참된 말씀을 진지하게 분별하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나 여호와야훼가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말은 이루어질 것이고, 더는 미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역하는 집안아, 너희의 날들에 내가 말을 하고 그것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2:25 · 본디새김

여기서 강조점은 ‘나 여호와야훼’에 있습니다.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이유는 에스겔의 예언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언을 믿어 주기 때문도 아닙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여호와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이 막연히 먼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반역하는 집안의 시대에 자신이 말하시고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언제나 즉각적으로 성취된다는 일반 원칙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한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 훗날의 일이라는 마지막 변명

에스겔 12:26–28 본문 →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앞선 속담보다 더 교묘한 말이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보아라. 이스라엘 집안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보는 환상은 많은 날이 지난 뒤의 일이고, 그는 먼 훗날을 두고 예언한다.』」에스겔 12:27 · 본디새김

첫 번째 주장은 예언의 진실성을 부정합니다. 두 번째 주장은 예언의 현실적 긴급성을 부정합니다.

두 번째 태도는 오히려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언을 듣고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먼 미래로 옮겨 놓습니다. 그러면 당장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꿀 필요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변명에도 대답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은 어느 것도 더는 미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은 이루어질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2:28 · 본디새김

본문은 여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회개했는지, 비웃었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믿지 못하는 모든 경우를 반역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 질문하고, 이해하지 못해 탄식하며,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신앙인들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초점은 모든 지연을 믿음 없음으로 판단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씀에 응답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핑계로 삼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하박국 2:3에서는 환상이 정해진 때를 기다리며, 더딘 것처럼 보여도 기다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에스겔 12장과 하박국 2장은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말씀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박국에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리는 신실함이 강조됩니다. 에스겔 12장에서는 이미 가까이 온 심판을 먼 미래로 밀어놓는 반역적 태도가 고발됩니다.

벽을 뚫고 나가는 사람

에스겔 12:1–28 본문 →

에스겔 12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들은 뒤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에스겔의 행동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분은 그들의 눈앞에 징표를 두셨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뜻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시간 계산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들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는 낮에 짐을 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그것을 준비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벽을 뚫었습니다. 그리고 캄캄할 때 짐을 어깨에 메고, 얼굴을 가린 채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장면을 보여 주신 이유는 그들이 단지 이상한 행동을 구경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행동 속에서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미래가 자신들과 무관한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에스겔이 짐을 메고 벽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한 사람의 기이한 행동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메고 있던 짐에는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한 사람이 유배 짐을 메고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에스겔의 짐이 아니라, 그 짐이 가리키는 자신들의 현실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