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4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하나님께 묻는 마음과 남의 의에 기대는 삶
에스겔 14장은 조용한 방문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 몇 사람이 에스겔을 찾아와 그의 앞에 앉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듯합니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말씀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드러내십니다.
그들의 몸은 에스겔을 향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반부에 이르면 전혀 다른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다니엘과 욥처럼 의로운 사람들이 어떤 땅에 살고 있더라도, 그 땅에 내려진 심판을 막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앞부분에서는 우상을 품고 하나님께 묻는 태도가 문제 되고, 뒷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의 의로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이 두 장면은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신앙과 권위에 얼마나 의존할 수 있습니까?
에스겔 14장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는 일과, 그 말씀 앞에서 자기 삶으로 응답하는 일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예언자 앞에 앉은 장로들 — 마음속에 세운 우상
에스겔을 찾아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입니다.
본문은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문제를 묻기 위해 왔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을 보면 그들이 예언자를 통해 여호와야훼께 묻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 8:1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 앞에 앉아 있었고,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장면의 초점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일에 있지 않습니다.
장로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 사람들은 자기 우상들을 마음에 올려놓고, 자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다. 내가 정녕 그들이 내게 묻도록 허락하겠느냐?」에스겔 14:3 · 본디새김
히브리어의 ‘마음(לֵב)’은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판단, 의지와 결정을 포함하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우상을 자신의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중심에 두었습니다.
에스겔 8장에서는 성전 안에 세워진 형상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는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상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우상을 말씀하십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외적인 형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이 사람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마음에 올려놓았고, 죄악의 걸림돌은 얼굴 앞에 두었습니다. 이는 내면의 판단과 눈앞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질문하려는 내용을 먼저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의 상태를 문제 삼으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은 중요한 신앙적 행동이었습니다. 다윗도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여호와야훼께 물었습니다(사무엘상 23:2, 4; 사무엘하 5:19). 문제는 질문의 형식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이 이미 자신의 마음을 다른 신들에게 내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려면 그분의 말씀이 자신의 판단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장로들은 우상을 마음에 올려놓은 채 하나님의 말씀을 구합니다. 자신이 이미 붙잡은 것을 그대로 둔 채 하나님에게서도 어떤 대답을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수많은 우상에 따라 대답하겠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직접 대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의 누구든 자기 우상들을 마음에 올려놓고 자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둔 채 예언자에게 오면, 나 여호와야훼는 그렇게 온 그에게 그의 수많은 우상에 따라 대답하겠다.』」에스겔 14:4 · 본디새김
하나님의 대답은 질문자의 마음에 이미 자리 잡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이는 이스라엘 집안을 그들의 마음으로 붙잡으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자기 우상들 때문에 내게서 멀어졌다.』」에스겔 14:5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숭배를 계속하면서도 예언자를 통해 종교적인 대답만 얻어 가는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 자신과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드러내려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집안에 말하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돌이켜라. 너희 우상들에게서 돌아서라. 너희의 모든 역겨운 것들에서 얼굴을 돌려라.』」에스겔 14:6 · 본디새김
특히 ‘얼굴을 돌려라’라는 표현을 3절과 함께 읽으면 뜻이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죄악의 걸림돌을 자신의 얼굴 앞에 두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모든 역겨운 것들에서 얼굴을 돌리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횟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향하던 대상에서 돌아서는 일입니다.
에스겔 11:19–20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한 마음과 새 영을 주시어 그분의 규례를 따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14장에서는 그 백성에게 실제로 돌아서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는 약속과 사람이 우상에게서 돌아서야 한다는 요구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키려 하시는 것은 바로 그분을 향해 살아가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의 수많은 우상에 따라’ 대답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원문에서 이 표현이 응답의 구체적인 방식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품은 우상숭배의 정도에 상응하는 심판으로 대답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우상으로 가득한 그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응답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질문자의 우상숭배를 무시하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주시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들의 마음에서 붙잡으신다는 뜻으로도,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을 근거로 그들을 붙잡으신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다는 두려운 뜻
7절에서 하나님의 경고는 장로들을 넘어 더 넓은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집안 사람이나 이스라엘에 머물러 사는 이주민 가운데 누구든 나를 따르는 길에서 떠나, 자기 우상들을 마음에 올려놓고 자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둔 채 자기를 위해 내게 물으려고 예언자에게 온다면, 나 여호와야훼가 직접 그에게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에스겔 14:7 · 본디새김
하나님을 따르는 길에서 떠나고 우상을 품은 채 그분께 묻는 문제는 특정한 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혈통상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되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여호와야훼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을 향한 자신의 태도에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내 얼굴을 맞세우고, 그를 표징과 속담거리로 삼으며, 내 백성 가운데서 그를 끊어 없애겠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14:8 · 본디새김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신다는 것은 여기서 심판의 선언입니다.
3절에서 그 사람은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얼굴 앞에 두었습니다. 6절에서는 그 역겨운 것들에서 얼굴을 돌리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 이제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맞세우십니다.
레위기 20:3, 5에서도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신의 얼굴을 향하신다는 표현이 심판의 맥락에서 등장합니다. 에스겔 14장에서도 같은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운명을 보며 이야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의 우상숭배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되는 존재가 됩니다.
묻는 사람과 대답하는 예언자의 죄책
「『예언자가 꾐에 넘어가 말을 한다면, 나 여호와야훼가 그 예언자를 꾄 것이다. 내가 그에게 내 손을 뻗어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멸하겠다.』」에스겔 14:9 · 본디새김
에스겔 14장은 왜곡된 예언이 하나님의 심판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자기 죄책을 짊어질 것이다. 묻는 자의 죄책과 예언자의 죄책은 같을 것이다.』」에스겔 14:10 · 본디새김
거짓된 대답을 구하는 사람은 예언자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습니다. 예언자는 질문자가 그런 답을 원했기 때문에 말해 주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13장에서는 거짓 예언이 사람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가 드러났습니다. 14장에서는 거짓된 말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거짓된 종교적 확신은 그것을 만들어 주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확신을 원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 관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엄중한 심판의 목적을 마지막에 다시 밝히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집안이 더는 나를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 헤매지 않고, 더는 그들의 온갖 범죄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4:11 · 본디새김
여기서 심판은 언약 관계의 회복이라는 목적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 개인이 반드시 회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 없애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 전체를 향해 품으신 목적은 그들이 다시 자신의 백성이 되고 자신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에서는 예언자가 꾐에 넘어간다는 말과 하나님이 그를 꾀셨다는 말에 같은 히브리어 동사 파타, pāthāh가 사용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셨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 선언을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하신 뒤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을 처벌하신다는 뜻으로 곧장 정리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에는 이미 우상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전하는 예언자들의 문제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선택한 거짓된 관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읽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미 거짓된 길로 기울어진 예언자를 그가 선택한 기만의 길에 내버려 두시며, 그 과정을 자신의 심판 아래 두신다는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거짓 예언자를 꾀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는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그 행동이 인간의 책임과 어떻게 양립하는지는 쉽게 해소하지 않는 읽기입니다. 열왕기상 22:19–23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아합 왕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에서 거짓말하는 영이 예언자들의 입에 들어가는 일이 하나님의 하늘 회의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함께 읽는다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있는 모든 긴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세 사람이 있어도 — 남의 의로 피할 수 없는 심판
12절에서 새로운 말씀이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예언자를 찾아온 장로들에 관해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어떤 땅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를 가정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어떤 땅이 내게 배신을 저질러 죄를 지으면, 내가 그 위에 내 손을 뻗어 그 땅을 지탱하는 빵의 지팡이를 꺾고, 그곳에 기근을 보내어 거기서 사람과 짐승을 끊어 없애겠다.」에스겔 14:13 · 본디새김
이는 사람의 생존을 지탱하는 식량 공급이 끊어진다는 뜻의 비유입니다. 사람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듯, 공동체는 식량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 공급이 끊어지면 땅 전체가 생존의 위기에 놓입니다.
「그 안에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 자기 목숨만 건질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4:14 · 본디새김
본문은 세 사람의 이름을 나열하지만, 왜 그들을 선택하셨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불러오는 이야기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노아 — 심판 속에서 보존된 의인
창세기 6:9에서 노아는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그가 살던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게 하시고 그의 가족을 함께 보존하십니다(창세기 6:18; 7:1).
그런데 에스겔 14장의 말씀은 노아 이야기와 미묘하게 다릅니다.
창세기에서 노아의 가족은 그와 함께 방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에스겔에서는 노아 같은 사람이 있어도 자기 목숨만 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심판의 엄중함을 설명하기 위해, 노아 같은 의인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의 생존을 보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가정을 제시하십니다.
욥 —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은 의인
욥기 1:1은 그를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큰 재난을 겪었지만, 그 고난이 단순히 자신의 특정한 죄에 대한 처벌이라는 친구들의 설명은 책 전체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욥기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 그들이 자신에 대해 옳게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시고,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욥기 42:7–9). 욥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 14장에서는 욥조차 자기 목숨만 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운데 있는 다니엘은 누구인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해석이 어려운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한 가지 해석은 이 인물이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다니엘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이 인물이 이스라엘 주변의 오래된 전승에 등장하는 의로운 인물 다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14장의 본문만으로 어느 인물을 가리키는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만한 인물들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들의 의로움에도 한계가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 함께 살고 있어도, 그 사람의 의가 다른 사람의 죄책을 자동으로 대신 짊어지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글로 적힌 형태와 소리 내어 읽는 전통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자음 본문에는 다넬에 해당하는 형태가 나타나고, 읽기 전통에는 다니엘이 제시됩니다. 다니엘은 유배지에서 하나님께 신실했던 인물로 묘사됩니다. 또한 에스겔 28:3에서도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지혜와 관련되어 언급됩니다. 고대 우가릿의 아크하트 이야기에는 다넬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그는 정의로운 재판과 관련된 인물로 나타납니다. 노아와 욥도 이스라엘의 왕이나 제사장으로 소개되는 인물이 아니므로, 세 사람이 오래전부터 알려진 의인의 사례로 함께 제시되었다는 이해가 가능합니다.
아들들과 딸들조차 건지지 못한다 — 네 차례 반복되는 선언
하나님은 하나의 가정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같은 상황을 네 가지 재앙으로 바꾸어 반복하십니다.
기근은 식량을 끊어 놓습니다.
사나운 짐승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없도록 만들고 자식들을 앗아 갑니다.
칼은 전쟁과 폭력적인 죽음을 가져옵니다.
역병은 사람과 짐승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그러나 네 가지 상황에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결론은 같습니다.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땅에 있더라도 자기 목숨만 건질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아들들과 딸들조차 건지지 못한다고 반복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보호하고 희생하며, 자신의 생명을 걸어서라도 지키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이라도 자신의 자녀들을 반드시 구원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조차 하나님의 심판을 자동으로 피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부모가 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지도자가 있다고 해서 공동체 전체가 그 지도자의 의로움을 소유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은 에스겔 18장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곳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책임을 구별하면서 각 사람이 자신의 죄와 의에 따라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14장과 18장의 초점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18장은 죄책과 책임이 세대 사이에서 어떻게 관계하는지 다룹니다. 14장은 어떤 땅에 임한 심판 속에서 의로운 사람의 존재가 공동체 전체를 구원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여기서 ‘자기들의 의로 자기 목숨만 건질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재난에서 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살아남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 법칙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이 가정에서는 의로운 사람의 존재가 다른 이들을 심판에서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와 다른 점
이 대목을 읽으면 창세기 18:22–33에서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간청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는 것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그는 성읍 안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면 그곳을 용서해 주시겠느냐고 묻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열 명이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4장에서는 반대 방향의 선언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의인의 역할을 다룹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의 간청을 통해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질문이 전개됩니다. 에스겔에서는 이미 깊은 배신과 불의가 가득한 땅에 대해, 유명한 의인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심판이 취소될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에스겔 14장을 근거로 의로운 사람의 중보기도가 언제나 아무 의미도 없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의 목적은 중보기도 전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의로움과 신실함이 자신의 불순종을 덮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무너뜨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곁에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네 가지 재앙을 한꺼번에 보낼 때에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네 가지 재앙을 하나씩 가정하셨습니다.
「참으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하물며 내가 나의 네 가지 혹독한 심판,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역병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거기서 사람과 짐승을 끊어 없앨 때에는 어떻겠느냐?』」에스겔 14:21 · 본디새김
하나의 재앙 앞에서도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네 가지 심판이 함께 임하는 예루살렘의 상황은 얼마나 심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앞선 긴 가정들이 모두 이 한 문장을 향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어떤 땅을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드러내십니다.
에스겔의 말을 듣고 있는 유배민들에게 예루살렘은 여전히 특별한 성읍이었습니다. 성전이 그곳에 있었고, 다윗 왕조의 통치가 그곳에서 이어졌으며, 자신들의 가족과 친척들 가운데 일부도 그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한 역사를 가진 성읍이라는 사실만으로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 의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성읍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선물이 인간의 계속된 불순종을 무조건 덮어 주는 보증으로 바뀌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가장 무거운 심판의 말씀 직후 예상과 다른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는 역설
22절은 뜻밖의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보아라, 그 안에서 살아남아 밖으로 이끌려 나오는 아들들과 딸들이 있다. 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오고 있다. 너희는 그들의 길과 그들의 행실을 보고, 내가 예루살렘에 닥치게 한 재앙, 내가 그 위에 닥치게 한 모든 일에 관하여 위로를 받을 것이다.」에스겔 14:22 · 본디새김
앞부분에서는 어떤 의인의 존재가 자기 가족이나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판을 받는 성읍에서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기준으로 살아남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남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왜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면 위로를 받는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실을 보는 일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너희가 그들의 길과 그들의 행실을 볼 때, 그들이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그 안에서 행한 모든 일을 아무 까닭 없이 행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4:23 · 본디새김
확실한 것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하게 하는 증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길과 행실’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타냅니다. 말로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는 것은 다릅니다.
위로가 고통을 정당화하는 말은 아니다
에스겔 14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예루살렘의 죄악과 심판의 관계를 밝히시는 특정한 예언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큰 재난을 겪었다고 해서 그에게 숨겨진 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근거를 제공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의 심판에는 수많은 사람의 생명과 삶이 걸려 있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가볍게 여기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자신도 앞서 백성의 멸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9:8; 11:13). 그런 예언자의 탄식을 기억하면, 14장의 위로를 재난에 대한 무감각한 만족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의 길과 그들의 행실’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예루살렘이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 알게 된다는 해석입니다. 유배민들은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아 온 사람들의 삶을 직접 보게 되면, 그 성읍이 어떤 상태였는지 더욱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까닭 없이 그 재앙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데서 오는 이해와 수긍에 가깝습니다. 두 번째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변화된 삶을 보여 주기 때문에 유배민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해석입니다.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의 삶이 이전과 달라졌고, 그들의 새로운 행실을 통해 유배민들이 하나님의 회복 가능성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존재와 회복의 가능성을 강조합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은 위로의 결과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 까닭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맥상으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행실이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이해하게 한다는 첫 번째 읽기가 더 직접적인 근거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길과 그들의 행실’이라는 표현 자체는 그 행실이 이전과 같은 악한 모습인지, 새롭게 변화된 모습인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설명하지 않은 구체적인 모습을 덧붙여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길과 행실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무엇을 주장하는지만 보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에 무엇이 있고,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도 보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아야 할 책임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개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공동체의 죄는 공동체 전체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장은 개인과 공동체를 서로 분리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에스겔 앞에 앉아 있던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물으러 왔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제 유배민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감추어진 마음이 드러났습니다.
마지막에는 걸어온 삶이 드러납니다.
그 두 장면 사이에서 하나님은 한결같이 사람의 실제 모습을 다루십니다.
에스겔 14장은 예루살렘의 생존자들이 유배민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길과 행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자신이 행하신 일을 아무 까닭 없이 행하신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