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잊은 예루살렘, 기억하시는 여호와야훼
에스겔 16장은 버려진 아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피투성이로 들판에 내던져진 아이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아이를 발견합니다. 그는 아이를 살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마침내 자기와 계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아 끔찍한 배신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사랑받고 풍요로워진 여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가져다가 다른 이들을 섬깁니다. 심지어 자기 자녀들까지 희생시킵니다. 마침내 그녀는 처음 버려졌을 때처럼 벌거벗은 모습으로 남겨집니다.
그러나 에스겔 16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에스겔 16장의 중심에는 기억을 잃어버린 백성과, 그 백성을 향한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앞 장에서 예루살렘의 배신이 심판의 이유로 제시되었다면(15:8), 16장은 그 배신이 어떤 관계 안에서 일어났는지를 긴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아이
「너는 말해라. 주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기원과 네 출생은 가나안 사람의 땅에서 비롯되었다. 네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네 어머니는 헷 사람이었다.』」에스겔 16:3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이며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지만, 여호와야훼가 들려주시는 출생 이야기는 영광스러운 조상의 족보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한 여성으로 의인화한 이야기 안에서 사용되는 출생의 비유입니다.
다만 그 비유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다윗이 차지하기 전에 여부스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습니다(사무엘하 5:6–9). 이 도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3절은 예루살렘의 현재 지위가 그 도시의 태생적 우월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일깨웁니다.
「『네가 태어난 날, 네 탯줄은 잘리지 않았고 너는 물로 깨끗이 씻기지도 않았다. 소금으로 문질러지지도 않았고 포대기에 싸이지도 않았다.』」에스겔 16:4 · 본디새김
탯줄을 자르고, 몸을 씻기고, 아이를 감싸는 일은 태어난 생명을 돌보는 기본적인 행동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아이를 둘러싼 완전한 무관심을 보여 줍니다.
「『너를 불쌍히 여긴 눈은 하나도 없었고, 너를 가엾게 여겨 이 가운데 하나라도 해 준 이도 없었다. 네가 태어난 날, 너는 사람들에게 혐오를 받아 들판에 내던져졌다.』」에스겔 16:5 · 본디새김
아이는 아직 무엇을 잘하거나 잘못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예루살렘의 처음 모습은 죄를 지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이의 돌봄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예루살렘을 만나셨을 때, 그 도시에는 하나님께 내세울 공로나 업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야훼와의 관계는 예루살렘의 성취에 대한 보상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들판에 버려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가 아니라 자신을 살려 줄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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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으로 문지르는 행위도 이 구절에서는 출생 직후의 돌봄에 속합니다. 그 구체적인 의학적 목적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돌봄 행위들과 함께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네 피 속에서도 살아라」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네 피 속에서 버둥거리는 너를 보았다.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 속에서도 살아라.」 나는 너에게 말했다. 「네 피 속에서도 살아라.」』」에스겔 16: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는 먼저 아이를 씻기거나 옷을 입히지 않으십니다. 아이가 피 속에서 버둥거리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아이에게 생명을 보장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두 번 들립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과 생명을 명하시는 말씀 사이의 대조가 한층 선명해집니다.
「『나는 너를 들의 새싹처럼 무수히 불어나게 했다. 너는 자라고 커서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에 이르렀다. 젖가슴이 여물고 네 털이 자랐다. 그러나 너는 벌거벗은 알몸이었다.』」에스겔 16:7 · 본디새김
생명은 얻었지만,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6절에서 여호와야훼는 버려진 아이를 죽음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그 아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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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출애굽기 1:7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고 크게 강해졌다는 묘사를 떠올리게 하는 표현상의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이야기를 출애굽부터 왕국 시대까지 정확히 대응하는 연대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의인화된 한 여성의 생애 속에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옷자락을 펼치고 계약을 맺다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 너를 보니, 보아라, 네 때는 사랑을 나눌 때였다. 나는 내 옷자락을 네 위에 펼쳐 네 음부를 덮었다. 나는 네게 맹세하고 너와 계약을 맺었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너는 내 것이 되었다.』」에스겔 16:8 · 본디새김
여기서 「내가 네 곁을 지나가다가」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 지나가실 때 여호와야훼는 죽어 가는 아기를 보셨습니다. 이번에는 성장한 여인을 보십니다. 첫 번째는 생명을 구하는 만남이고, 두 번째는 계약을 맺는 만남입니다.
아이가 처음 버려졌을 때에는 몸을 감싸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장한 뒤에도 그는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가 자신의 옷자락으로 그 몸을 덮으십니다.
「너는 내 것이 되었다」는 일방적인 소유권 주장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바로 앞에 맹세와 계약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야훼는 그 여인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말씀으로 확증하십니다.
이후 9–13절에서는 선물이 쏟아집니다.
물로 씻기시고 기름을 바르십니다. 수놓은 옷과 고운 아마포를 입히십니다. 가죽신을 신기시고 금과 은으로 장식하십니다. 팔찌와 목걸이, 코걸이와 귀고리를 건네시고 머리에는 왕관까지 씌우십니다.
특히 9절에서 피를 씻어 내는 행동은 앞의 출생 장면과 맞물립니다. 태어났을 때 아무도 씻겨 주지 않았던 아이를 이제 여호와야훼가 직접 씻기십니다.
「『너는 금과 은으로 몸을 꾸몄고, 네 옷은 고운 아마포와 값비싼 천과 수놓은 천이었다. 너는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었다. 너는 아주, 아주 아름다워졌고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에스겔 16:13 · 본디새김
이 장면에는 예루살렘이 왕국의 중심 도시가 되고, 부와 명성을 누리던 시대가 겹쳐 보입니다. 특히 솔로몬 시대에 예루살렘이 누렸던 왕실의 영화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열왕기상 10장).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 부와 명성의 구체적인 역사보다 그것들의 출처입니다.
「『네 아름다움 때문에 민족들 사이에 네 이름이 퍼졌다. 내가 네 위에 입힌 나의 찬란함으로 네 아름다움이 완전해졌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6:14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영광은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을 통해 빛났습니다. 그 영광은 관계의 선물이었지, 관계를 떠나서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옷자락을 펼쳐 덮는 행동은 혼인 관계를 암시합니다. 룻기 3:9에서 룻이 보아스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펼쳐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과도 표현상 연결됩니다. 다만 에스겔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행동하시고, 이어지는 맹세와 계약이 그 행동의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선물로 받은 것을 다른 신에게 바치다
예루살렘의 배신은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워졌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네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을 의지하여 음행했다. 너는 지나가는 자 모두에게 네 음행을 쏟아부었다. 누구든 그것을 차지해도 좋았다.』」에스겔 16:15 · 본디새김
이전까지 아름다움은 여호와야훼가 이루어 주신 결과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그 아름다움 자체를 신뢰합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가 입혀 주신 옷으로 산당을 만듭니다. 여호와야훼가 주신 금과 은으로 우상 형상을 만듭니다. 여호와야훼의 기름과 향을 그 우상들 앞에 놓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먹이신 밀가루와 꿀과 기름까지 가져다가 다른 신에게 바칩니다.
더구나 17–19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것들을 「내 금과 내 은」, 「내 기름과 내 향」, 「내 음식」이라고 부르십니다. 그 물건들이 예루살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본래 여호와야훼에게서 왔다는 사실이 함께 강조됩니다.
배신의 핵심은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선물을 주신 분을 잊고 그 선물을 다른 신을 섬기는 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행의 비유는 주로 우상숭배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혼인 관계로 표현했으므로,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배우자에 대한 불충실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2장과 예레미야 2–3장에도 비슷한 언어가 등장합니다.
20절에서 이야기는 갑자기 더욱 무거워집니다.
「『너는 네가 내게 낳아 준 네 아들들과 네 딸들을 데려다가 그것들이 먹도록 희생 제물로 도살했다. 네 음행만으로는 부족했느냐?』」에스겔 16:20 · 본디새김
21절에서 여호와야훼는 그 자녀들을 「내 아들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 표현은 20절의 「네 아들들과 네 딸들」과 긴장을 이룹니다. 예루살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지만, 여호와야훼는 그들 역시 자신과 관계된 생명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때 우상숭배는 단지 그릇된 종교적 선택이 아닙니다. 다른 신을 섬긴다는 이유로 자녀들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2절에서는 처음 장면이 다시 등장합니다.
「『네가 온갖 역겨운 일과 음행을 저지르는 동안, 너는 벌거벗은 알몸으로 네 피 속에서 버둥거리던 네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다.』」에스겔 16:22 · 본디새김
어린 시절의 피와 자녀들의 피가 한 이야기 안에서 만납니다.
처음에는 피 속에서 버둥거리던 아이를 여호와야훼가 살리셨습니다. 이제 그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의 자녀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도 단순한 건망증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의 과거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과거가 요구하는 관계와 책임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습니다. 성경에서 기억은 종종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 맺은 관계를 현재의 행동 속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 관계를 잊자 선물은 우상이 되었고, 생명은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자녀들을 도살하여 우상에게 넘겨 바쳤다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 본문에는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의식이 등장하지만(열왕기하 16:3; 21:6), 여기서는 구체적인 방식에 관하여 본문에 없는 내용을 덧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돈을 주는 여인
23절부터 비유의 공간이 크게 넓어집니다.
앞에서는 산당과 우상 형상이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광장과 길목이 등장하고,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칼데아가 차례로 언급됩니다.
「『길이 시작되는 곳마다 네 높은 단을 세우고 네 아름다움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 너는 지나가는 자 모두에게 두 다리를 벌리고 네 음행을 늘렸다.』」에스겔 16:25 · 본디새김
6절과 8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예루살렘의 곁을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시고 생명을 주시며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지나가는 자 모두」를 향해 자신을 내어 줍니다(15, 25절).
이것은 단순한 성적 비난을 넘어, 누구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누구의 인정을 구하는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26–29절에서는 그 상대가 역사적 나라들의 이름으로 구체화됩니다. 이집트, 아시리아, 칼데아가 등장합니다. 이 이름들은 유다 왕국이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의식해야 했던 강대국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실제로 유다 왕국의 역사에는 아시리아와 바벨론의 압박, 이집트와의 관계를 둘러싼 정치적 선택들이 반복됩니다(열왕기하 18:13–21; 24:1, 7, 20). 따라서 여기서의 음행에는 우상숭배뿐 아니라 외국 세력에 의존하는 정치적 행태를 비판하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야훼와의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세력들을 의지해 온 역사를 성적인 비유로 압축하여 고발합니다.
이때 반복되는 표현은 「만족하지 못했다」입니다.
아시리아와 관계를 맺고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칼데아에까지 관계를 넓혔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의지할 대상을 계속 늘리면서도 안정을 얻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31–34절에서 예상 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모든 창녀에게 선물을 주지만, 너는 네 모든 애인에게 네 선물을 주었다. 네 음행을 위해 그들이 사방에서 네게 오도록 너는 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에스겔 16:33 · 본디새김
한때 아무것도 없던 여인이 여호와야훼의 선물로 부유해졌습니다. 그러나 그 부를 사용하여 다른 세력의 호의를 사려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기 위해 그 선물을 계속 다른 이들에게 내주는 셈입니다.
자신을 살리시고 영화롭게 하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자, 다른 이들의 보호와 인정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대가를 지불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의 벌거벗음으로 돌아가다
35절에서 말의 형식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창녀야,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에스겔 16:35 · 본디새김
이제 긴 고발 뒤에 판결이 선포됩니다.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이 의지했던 모든 상대를 모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했던 자들뿐 아니라 미워했던 자들까지 함께 모입니다.
예루살렘이 스스로 관계를 맺고자 했던 이들이 이제 예루살렘을 치는 자들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만든 단들을 허물고, 옷을 벗기고, 장신구들을 빼앗습니다. 마침내 예루살렘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남겨 둡니다.
이 장면은 9–14절의 은혜를 정반대로 뒤집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벌거벗음과 이번의 벌거벗음은 같은 장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돌봄을 기다리는 무력한 아이였습니다. 지금은 관계를 배반한 뒤 심판을 맞는 도시입니다.
40–41절의 폭력적인 묘사는 더욱 무겁습니다. 돌로 치고, 칼로 토막 내고, 집들을 불태우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고대의 간음과 유혈 범죄에 대한 처벌 언어, 그리고 도시를 공격하는 전쟁의 파괴 장면이 결합된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있으므로 도시의 패배와 굴욕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을 개인의 혼인 관계에서 상대에게 굴욕이나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규범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표현이 나옵니다.
「『나는 너를 향한 내 분노를 가라앉히겠다.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고, 나는 잠잠해져 더 이상 화내지 않겠다.』」에스겔 16:42 · 본디새김
이 말씀은 당장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심판이 끝나고 분노가 가라앉는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야훼의 분노는 아무런 끝도 없이 지속되는 상태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다음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이 기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을 다시 지적하십니다(43절).
그런데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바뀝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자매들이 등장합니다.
소돔보다 더 악한 예루살렘
「『보아라,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너를 두고 이런 속담을 말할 것이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에스겔 16:44 · 본디새김
이 말씀은 3절의 출생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의 아버지는 아모리 사람이고 어머니는 헷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에 두 자매가 추가됩니다. 사마리아와 소돔입니다.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유하지만, 별도의 왕국으로 살아갔습니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함락되었습니다(열왕기하 17:5–6). 반면 소돔은 창세기 19장에서 이미 멸망한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이 자신과 다르다고 여겼을 도시들, 특히 하나님께 심판받은 사례로 기억되던 도시들이 같은 가족으로 묶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말씀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너는 그들의 길을 걷고 그들의 역겨운 일을 행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는 듯,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들보다 더 타락했다.』」에스겔 16:47 · 본디새김
「『보아라, 네 자매 소돔의 죄는 이것이었다. 소돔과 그 딸들에게는 교만과 풍족한 음식과 걱정 없는 안락함이 있었으나, 소돔은 가난하고 궁핍한 이의 손을 붙들어 주지 않았다.』」에스겔 16:49 · 본디새김
소돔의 문제는 단지 부유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루살렘은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아무도 그 아이를 씻기거나 감싸 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여호와야훼는 아이를 보시고 살리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은 소돔과 같은 부류의 도시로 고발받습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돌봄으로 살아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도시가, 돌봄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는 도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하나님께 대한 배신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상숭배와 사회적 불의는 에스겔의 예언에서 서로 동떨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소돔이 멸망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가 망한 역사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도시들이 심판받을 만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만큼도 죄짓지 않았다. 너는 그들보다 역겨운 일을 더 많이 저질렀다. 네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로 네 자매들을 의롭게 보이게 했다.』」에스겔 16:51 · 본디새김
이 말은 소돔이나 사마리아가 실제로 죄 없는 도시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죄가 그토록 심하기 때문에, 그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그들이 의로워 보인다는 상대적 평가입니다. 52절의 「네 자매를 심판하던 너도 네 수치를 짊어져라」는 말씀이 그 의도를 분명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은 그 판단의 기준에서 제외한 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태도가 무너지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9장을 기억하는 독자는 소돔의 폭력적인 행동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낯선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적 성폭력 시도도 등장합니다(창세기 19:4–9). 다만 49절이 소돔의 모든 죄를 빠짐없이 열거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50절은 소돔이 교만해져 여호와야훼 앞에서 역겨운 일을 했다고 덧붙입니다. 그 표현의 모든 내용을 이 장에서 특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돔과 사마리아도 돌아온다
에스겔 16장에서 가장 뜻밖의 반전 가운데 하나는 53절입니다.
「『나는 그들의 포로 된 처지를 돌이키겠다. 소돔과 그 딸들의 포로 된 처지, 사마리아와 그 딸들의 포로 된 처지를 돌이키고, 그들 가운데서 포로로 잡힌 네 사람들의 처지도 돌이키겠다.』」에스겔 16:53 · 본디새김
소돔이 먼저 나옵니다. 사마리아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그들 가운데 놓입니다.
여호와야훼가 선언하시는 회복의 범위는 예루살렘이 스스로 인정하려 했던 범위보다 넓습니다.
54절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루살렘이 자매들에게 위로를 주면서 자신의 수치를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더 의롭기 때문에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의 죄가 드러나면서, 자신들이 유독 악한 도시라고 여겼던 자매들이 더 이상 홀로 수치를 짊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회복은 자신의 우월성을 회복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업신여겼던 다른 도시들과 자신이 같은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56절은 예루살렘이 교만하던 때에는 소돔이 입에 오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경멸의 대상이었던 도시를 이제 여호와야훼는 회복의 약속 안으로 불러들이십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듣는 예루살렘이 자신의 교만을 버리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아직 나오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먼저 앞서갑니다.
조금 더 깊이
소돔은 창세기 19장에서 파괴된 도시입니다. 사마리아처럼 포로로 끌려간 도시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야훼는 소돔의 「포로 된 처지」를 돌이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 읽기는 포로 상태를 돌이킨다는 표현을 운명의 전환과 회복을 나타내는 폭넓은 언어로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소돔의 회복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적인 역전의 사례로 기능합니다. 다른 읽기는 55절에서 소돔과 그 딸들이 「예전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점에 주목합니다. 소돔의 회복을 단순한 수사적 장치로 축소하지 않고, 여호와야훼의 회복 약속이 그 도시들까지 미친다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회복이 역사적으로 어떤 방식과 시점에 실현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소돔의 주민들 개개인의 최종 운명까지 이 말씀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겠다」
「이는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네가 한 대로 나도 너를 대하겠다. 너는 맹세를 업신여겨 계약을 깨뜨렸다.』」에스겔 16:59 · 본디새김
그때 여호와야훼는 옷자락을 펼쳐 예루살렘을 덮으시고, 맹세하여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이 깨뜨린 것은 바로 그 계약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나열된 우상숭배와 배신, 폭력과 외국 세력에 대한 의존은 모두 하나의 관계를 저버린 행동으로 정리됩니다.
그런데 60절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네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를 위해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에스겔 16:60 · 본디새김
22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3절에서도 같은 책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60절에서는 기억의 주체가 바뀝니다.
예루살렘은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하겠다.
여호와야훼는 단지 이전의 상태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가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계약을 깨뜨린 백성과의 관계를 여호와야훼가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계약을 깼는데 어떻게 다시 계약이 성립할 수 있습니까?
「『네가 너보다 큰 자매들과 너보다 작은 자매들을 받아들일 때, 너는 네 행실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네게 딸들로 주겠다. 그러나 그것은 네 계약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다.』」에스겔 16:61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마리아와 소돔이 예루살렘의 자매였습니다. 이제 그들이 딸들로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관계의 지형이 새롭게 정리되는 회복의 비유입니다.
이 회복은 예루살렘이 이전 계약에 충실했기 때문에 당연히 얻는 권리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그 계약을 깨뜨렸습니다. 따라서 이제 주어지는 회복을 과거의 공로나 계약상 자격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새롭게 세우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8절에서는 「너는 내 것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2절에서는 「내가 너와 내 계약을 세우겠다. 그러면 너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관계를 맺으셨고, 마지막에는 그 관계를 회복하시는 일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십니다.
앞 장과 에스겔서의 여러 심판 선언에서는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라는 말이 심판의 결과로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계약을 다시 세우는 일이 여호와야훼를 알게 하는 사건이 됩니다.
심판과 회복은 서로 다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말씀을 진지하게 여기시는 바로 그 여호와야훼가 심판하시고, 또한 관계를 다시 세우십니다.
조금 더 깊이
영원한 계약의 약속은 에스겔서 후반부의 회복 예언과 연결됩니다. 에스겔 36:25–27에서는 하나님이 백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7:26에서는 평화의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1절의 「그러나 그것은 네 계약에서 나오는 일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간결하여 구체적인 관계 설정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용서받았는데 왜 부끄러워하는가
에스겔 16장은 예상과 달리 기쁨의 축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는 내가 네가 한 모든 일을 용서해 줄 때, 네가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네 수치 때문에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16:63 · 본디새김
예루살렘이 자신의 죄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가 용서하십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과거를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은 기억하게 됩니다.
22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63절에서는 예루살렘이 자신의 모든 행위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가운데에는 여호와야훼의 기억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먼저 모든 것을 깨닫고 여호와야훼를 움직여 용서하시게 한 것이 아닙니다. 60절에서 여호와야훼가 먼저 자신의 계약을 기억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분이 계약을 다시 세우시고 용서하실 때, 예루살렘이 자신의 행실을 기억하며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이제 자신이 받은 아름다움과 영광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또 자신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무거운 배신이었는지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부끄러움은 단순히 벌을 받아 창피해지는 감정과는 다릅니다. 용서받은 뒤에도 자신의 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표현도 그런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는 자신의 고통이나 생각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변명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마지막에 말을 잃는 이유는 자기 죄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 죄를 아시는 여호와야훼가 여전히 계약을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기억
에스겔 16장의 마지막 희망은 예루살렘이 끝내 자신의 계약을 지켜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깨뜨린 계약을 여호와야훼가 기억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 속에서 버둥거리는 아이에게 「살아라」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아이가 되어 자랐던 도시,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다가 모든 것을 잃은 예루살렘을 향해 또 다른 말씀이 들립니다. 「그러나 나는 네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를 위해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그 침묵 속에, 여호와야훼께서 기억하시는 계약의 약속이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