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두 독수리와 여호와야훼께서 심으시는 나무

에스겔 17장에는 두 마리의 큰 독수리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 독수리는 백향나무의 꼭대기를 꺾어 먼 곳으로 가져가고, 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은 자라서 포도나무가 됩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는 자신을 심은 독수리를 떠나 다른 독수리에게 뿌리와 가지를 뻗습니다.

포도나무는 메마른 땅에 심겨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독수리에게 물을 달라고 손을 뻗었을까요?

이 비유는 단순히 힘없는 나라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강력한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가 자신이 서 있던 땅마저 잃게 되는 왕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7장은 그 실패를 보여 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세 번째로 나무를 옮겨 심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독수리가 아닙니다. 여호와야훼 자신이십니다.

사람의 권력이 심은 나무는 높아지려다가 말라 버리지만, 여호와야훼께서 심으신 작은 가지는 자라서 다른 생명들에게 그늘을 제공합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1017장 본문 읽기 →

레바논에 날아온 거대한 독수리

에스겔 17:1–4 본문 →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 수수께끼를 내고 비유를 말해라.」에스겔 17:2 · 본디새김

두 말이 함께 사용되면서 독자는 처음부터 등장인물과 사물의 정체를 생각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비유의 특징은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그저 상징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이 실제 역사와 연결되지만, 그 정체가 뒤에 가서야 밝혀진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것은 거대한 독수리입니다.

「너는 말해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날개가 크고 날갯깃이 길며, 깃털이 빽빽하고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는 큰 독수리가 레바논으로 와서 백향나무의 꼭대기를 가져갔다.』」에스겔 17:3 · 본디새김

레바논의 백향나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크고 웅장한 나무의 대표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솔로몬은 성전과 왕궁 건축에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용했습니다(열왕기상 5–7장). 또한 예레미야 22:6, 23에서는 유다 왕실과 예루살렘을 레바논 및 백향나무의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레바논의 백향나무는 실제 산림에 있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의 왕권과 영광을 떠올리게 합니다. 독수리는 나무 전체를 쓰러뜨리지 않습니다. 꼭대기의 어린 가지를 꺾어 가져갑니다.

그 가지는 「상인들의 땅」, 「장사꾼들의 도시」로 옮겨집니다(17:4). 이것은 정복자가 다른 나라의 왕과 지도층을 사로잡아 자기 수도로 데려가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가지를 꺾어 가져가는 일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그 땅에 새로운 씨앗을 심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케나안(⁨כְּנַעַן⁩)은 지명 가나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상인이나 무역과 관련된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뒤에 「장사꾼들의 도시」가 이어지므로 여기서는 상업의 중심지라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비유를 해설하는 12절에 따르면 그곳은 바벨론입니다.

낮지만 살아 있는 포도나무

에스겔 17:5–6 본문 →

「『그는 그 땅의 씨앗을 가져다가 씨 뿌릴 밭에 놓았다. 물이 많은 곳에 가져다가 버드나무처럼 심었다.』」에스겔 17:5 · 본디새김

이 두 행동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기존 왕을 제거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새로운 왕을 세우는 일입니다.

독수리는 씨앗을 바위틈이나 메마른 땅에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비유 속에서 그 씨앗은 살아 자랄 수 있는 환경에 심겼습니다.

「『그것은 싹이 나서 옆으로 뻗는 키 작은 포도나무가 되었는데, 가지들은 그 독수리를 향하고 뿌리들은 그 아래에 머물렀다. 그것은 포도나무가 되어 곁가지를 내고 가지들을 뻗었다.』」에스겔 17:6 · 본디새김

백향나무는 높이 솟아오르는 나무입니다. 반면 이 포도나무는 옆으로 뻗으며 낮게 자랍니다. 여기에는 강대국의 지배 아래 놓인 작은 왕국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 왕국은 독립적인 강대국이 아닙니다. 자신을 세운 제국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스스로 높아질 수 없으며, 정치적 자유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상태를 곧바로 죽음이나 멸망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낮다는 것은 반드시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포도나무는 낮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심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그 조건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미 물이 많은데 왜 또 물을 구하는가

에스겔 17:7–10 본문 →

「『또 날개가 크고 깃털이 많은 큰 독수리 하나가 있었다. 보아라, 이 포도나무는 그 독수리를 향해 뿌리들을 애타게 뻗었다. 그 독수리가 이 포도나무에 물을 대 주게 하려고, 포도나무는 자기가 심긴 두둑에서 그 독수리에게 가지들을 뻗었다.』」에스겔 17:7 · 본디새김

첫 번째 독수리는 직접 날아와 백향나무 꼭대기를 가져갔고 새로운 씨앗을 심었습니다. 두 번째 독수리는 비유 속에서 아무것도 심거나 가져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포도나무가 먼저 그를 향해 움직입니다.

「『그 포도나무는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어 웅장한 포도나무가 되도록 좋은 밭, 물이 많은 곳에 옮겨 심겨 있었다.』」에스겔 17:8 · 본디새김

그렇다면 문제는 물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밖에서 더 나은 생존 조건을 찾으려 합니다.

뿌리는 식물이 물과 양분을 얻는 부분이자 땅에 자신을 지탱하는 기반입니다. 따라서 뿌리가 다른 독수리를 향해 뻗는다는 묘사는 단순히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전달합니다.

자신의 생존을 지탱하는 기반을 바꾸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아직 옮겨 심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두둑에 뿌리를 둔 채 다른 독수리를 향해 뿌리와 가지를 뻗습니다. 기존의 의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다른 후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질문하십니다.

「말해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잘되겠느냐? 그가 그 뿌리들을 뽑고 그 열매를 훑어 내지 않겠느냐? 그것은 마를 것이다. 새로 돋은 잎이 모두 말라 버릴 것이다. 그것을 뿌리째 들어 올리는 데 힘센 팔이나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17:9 · 본디새김

이 질문은 10절에서도 반복되고, 역사적 해설이 이어지는 15절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반복되는 물음은 단순히 포도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것이 택한 방식으로 번영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처음에 큰 독수리가 긴 날개와 빽빽한 깃털을 자랑했던 것과 대조적입니다. 포도나무를 쓰러뜨리는 데에는 그만큼 거대한 힘조차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동풍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그것이 옮겨 심겨 있지만 잘되겠느냐? 동풍이 그것에 닿으면 아주 말라 버리지 않겠느냐? 그것이 돋아난 두둑에서 말라 버릴 것이다.』」에스겔 17:10 · 본디새김

포도나무는 다른 독수리의 땅에 도착한 뒤 말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심겨 자라던 바로 그곳에서 말라 버립니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다른 후원자에게 뿌리를 뻗었지만, 결국 원래 있던 자리에서조차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수수께끼를 직접 풀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동풍은 이 지역에서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의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1:6에서도 동풍에 마른 이삭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동풍을 반드시 특정한 군대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문맥상 바벨론의 공격이 포도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역사적 현실이지만, 비유에서는 마르게 하는 바람 자체가 강조됩니다.

수수께끼가 가리키는 왕들

에스겔 17:11–14 본문 →

「자, 반역하는 집안에 말해라. 『너희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말해라. 『보아라,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 성읍의 왕과 고관들을 붙잡아 자기 곁으로, 바벨론으로 데려갔다.』」에스겔 17:12 · 본디새김

수수께끼는 단지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독수리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입니다.

열왕기하 24:10–17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 여호야긴과 왕실 사람들, 관리들, 군인들과 기술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597년의 사건으로 알려진 첫 대규모 포로 이주입니다. 여호야긴은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석 달 남짓 다스린 뒤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백향나무 꼭대기에서 꺾여 나간 어린 가지는 여호야긴을 중심으로 한 유다 왕실의 지도층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독수리가 새로 심은 씨앗은 누구인가요?

「『그는 왕가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데려다가 그와 계약을 맺고 그를 맹세로 묶었다. 그 땅의 지도자들도 붙잡아 갔다.』」에스겔 17:13 · 본디새김

그는 시드기야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끌고 간 뒤 여호야긴의 삼촌인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그의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꾸었습니다(열왕기하 24:17). 시드기야는 다윗 왕가에 속했지만, 바벨론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허락된 통치의 범위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나라가 낮은 나라로 남아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고, 그의 계약을 지켜 존속하게 하려는 것이었다.』」에스겔 17:14 · 본디새김

느부갓네살이 기대한 것은 강한 독립 왕국이 아니라 자신에게 복종하는 종속 왕국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한때 주변 나라들 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윗 왕조가 다른 나라 왕의 허락 아래 존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설명은 그 굴욕적인 조건 아래에서도 나라가 존속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 남아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 수 있나요?

에스겔 17장은 이 문제에 추상적인 정치 원리로 답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는 당시 유다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무엇이 생존의 길이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도 비슷한 시기에 바벨론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남을 것을 권고했습니다(예레미야 27:8–12). 그 권고는 바벨론의 모든 행동이 옳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심판 아래 놓인 유다가 무리한 반란으로 파멸을 더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시드기야에게 주어진 낮은 자리는 영광스럽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거부하는 것이 반드시 더 나은 미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가 드러납니다.

두 번째 독수리의 이름은 이집트

에스겔 17:15–18 본문 →

「『그러나 그는 그 왕에게 반역하여, 말과 많은 군사를 받으려고 자기 사절들을 이집트로 보냈다. 그가 잘되겠느냐? 이런 일을 하는 자가 빠져나가겠느냐? 계약을 깨뜨리고도 빠져나가겠느냐?』」에스겔 17:15 · 본디새김

두 번째 독수리는 이집트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포도나무가 다른 독수리에게 뿌리와 가지를 뻗었던 행동은 시드기야가 이집트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일을 가리킵니다. 고대 전쟁에서 말과 전차는 중요한 군사적 자원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맞서기 위해 이집트의 군사력을 기대했습니다.

유다는 바벨론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독립을 되찾으려면 다른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을 것입니다. 이집트는 바벨론에 맞설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시드기야의 선택이 전략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만 묻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성공 가능성을 묻습니다. 다음에는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마지막에는 계약을 깨뜨린 책임을 피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질문이 진행될수록 초점은 군사적 성공에서 도덕적 책임으로 이동합니다.

「『그는 맹세를 업신여겨 계약을 깨뜨렸다. 보아라, 그는 손을 내밀어 약속하고도 이 모든 일을 했으니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17:18 · 본디새김

「손을 내밀어 약속하고도」라는 표현은 손을 내미는 행동이 약속이나 합의의 표시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시드기야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바벨론에 협력하기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맹세로 결속된 계약을 맺었습니다.

에스겔은 억압적인 제국에 저항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강대국의 요구에는 언제나 복종해야 한다는 정치 원칙을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시드기야가 실제로 맺은 계약과 그가 그 계약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많은 목숨을 끊기 위해 포위용 흙둔덕이 쌓이고 포위벽이 세워질 때, 파라오는 큰 군대와 많은 무리로도 전쟁에서 그를 돕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17:17 · 본디새김

9절에서는 포도나무를 뽑는 데 힘센 팔이나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힘이 없어도 무너질 나무와, 큰 힘을 가지고도 구하지 못할 왕국이 나란히 놓입니다.

예레미야 37:5–10에는 이집트 군대가 진군하자 예루살렘을 포위하던 바벨론 군대가 일시적으로 철수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불태울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집트의 움직임은 일시적인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예루살렘을 끝까지 지켜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바벨론 왕의 계약이 어떻게 여호와야훼의 계약이 되는가

에스겔 17:19–21 본문 →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한다. 그가 업신여긴 내 맹세와 그가 깨뜨린 내 계약, 그 일을 반드시 그의 머리 위로 돌려주겠다.』」에스겔 17:19 · 본디새김

16절에서는 「그 왕의 맹세」와 「그 왕의 계약」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서도 시드기야가 맹세와 계약을 깨뜨렸다고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것을 「내 맹세」와 「내 계약」이라고 부르십니다.

어째서 바벨론 왕과 맺은 계약이 여호와야훼의 계약이 되나요?

고대의 정치적 계약은 단순히 두 나라가 서로 이익을 계산하여 합의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맹세는 신적인 권위를 증인으로 불러 약속을 확증하는 행위였습니다. 약속을 어기는 것은 상대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일 뿐 아니라, 맹세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을 두고 맹세했습니다(역대하 36:13). 따라서 여호와야훼는 그 맹세를 단지 바벨론 왕과 시드기야 사이의 사적인 약속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두고 이루어진 약속이기 때문에 그 약속을 깨뜨리는 일이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내 그물을 그의 위에 펼치겠다. 그는 내 사냥 그물에 붙잡힐 것이다. 나는 그를 바벨론으로 데려가, 그가 나를 배신한 그 배신 행위를 두고 거기서 그와 재판을 벌이겠다.』」에스겔 17:20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예루살렘은 여호와야훼와 직접 맺은 계약을 깨뜨렸다고 고발받았습니다(에스겔 16:59). 그런데 이 장에서는 외국 왕과 맺은 계약을 깨뜨린 행위까지 여호와야훼를 배신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은 종교적인 약속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한 현실의 관계와 행동까지 포함합니다.

16절은 그가 바벨론 한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열왕기하 25:6–7과 예레미야 52:10–11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붙잡혔고, 아들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본 뒤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 52:11은 그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전합니다.

시드기야는 강력한 두 독수리 사이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를 붙잡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가 역사 속에서 그를 사로잡지만, 여호와야훼는 그 사건을 자신의 그물에 붙잡히는 일로 설명하십니다.

21절에서 남은 군대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은 시드기야 개인의 실패가 왕국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의 선택은 혼자 감당할 위험이 아니었습니다. 왕의 외교적 결단은 백성의 생명과 삶의 터전까지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야기는 끝난 듯 보입니다.

독수리가 가져간 가지는 바벨론에 있습니다. 새로 심은 포도나무는 말라 버릴 것입니다. 왕은 붙잡히고 군대는 흩어집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가와 예루살렘의 미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일까요?

22절에서 전혀 새로운 말씀이 시작됩니다.

「내가 직접」 — 백향나무 꼭대기로 다시 돌아가다

에스겔 17:22 본문 →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백향나무의 높은 꼭대기에서 가지를 가져다가 놓겠다. 그 어린 가지들의 맨 끝에서 연한 것을 꺾어, 내가 직접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옮겨 심겠다.』」에스겔 17:22 · 본디새김

여기서 17장 전체의 방향이 바뀝니다.

처음에는 큰 독수리가 백향나무 꼭대기를 꺾어 갔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가 백향나무 꼭대기에서 가지를 가져오십니다. 행동은 매우 비슷합니다. 가지를 가져오고, 꺾고, 옮겨 심으십니다.

그러나 행동의 주체가 달라졌습니다.

바벨론 왕은 유다의 왕을 데려갔습니다. 그가 새로운 왕을 세웠습니다. 시드기야는 이집트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유다의 왕실은 강대국들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야훼는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시거나, 다른 독수리가 나무를 심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직접 가져오십니다.

직접 옮겨 심으십니다.

유다 왕실의 미래를 여는 주체가 제국의 왕에게서 여호와야훼 자신으로 바뀝니다.

연하다는 것은 아직 단단한 거목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자체로 강력한 왕권이나 군사력을 나타내는 이미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연한 가지를 높은 산에 심으십니다.

앞에서는 시드기야가 스스로 높아지려다가 무너졌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작은 가지를 높이 올리십니다.

왕실이 무너져 가는 상황에서도 여호와야훼는 그 왕실의 미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약속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본문에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백향나무의 꼭대기가 앞에서 다윗 왕실을 가리켰으므로, 여기서 가져오는 연한 가지도 그 왕실의 계승과 회복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한편 앞서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의 왕통을 염두에 둔 약속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야긴은 바벨론 포로 생활 가운데 살아남았으며, 열왕기하 25:27–30은 훗날 그가 바벨론 왕에게서 호의를 받은 일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22절이 여호야긴 자신을 다시 왕위에 세우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연한 가지의 정확한 신원을 이 구절만으로 특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과 그의 왕국에 관해 약속하셨습니다. 왕조가 심판받는 상황에서도 여호와야훼가 직접 새로운 통치의 미래를 열어 주시겠다는 에스겔의 말씀은 그러한 약속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1:1에서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싹이 나온다는 이미지와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본문 모두 무너진 왕실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희망을 나무의 성장으로 표현합니다. 다만 에스겔 17장은 그 가지를 특정한 이름이나 직함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본문 자체가 말하는 것과 후대에 발전한 메시아적 해석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에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백향나무다

에스겔 17:23 본문 →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 그것을 옮겨 심겠다. 그것은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어 장엄한 백향나무가 될 것이다. 온갖 새, 날개 달린 모든 것이 그 아래에 깃들이고, 그 가지들의 그늘에 깃들 것이다.』」에스겔 17:23 · 본디새김

바벨론 왕이 심은 씨앗은 키 작은 포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가 심으시는 연한 가지는 장엄한 백향나무가 됩니다. 처음 비유에서 백향나무는 꼭대기가 꺾여 나가는 나무였습니다. 그 나무의 영광은 훼손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백향나무의 이미지가 회복됩니다.

높은 산은 단순히 고도가 높은 장소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왕실과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높은 장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을 중심으로 회복될 하나님의 통치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두 독수리의 세계에서 새는 권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나무는 그 권력에 의해 옮겨지고 심기거나, 그 권력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는 관계가 달라집니다.

나무가 새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세우시는 통치의 영광은 단지 다른 나라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통치 아래에서 다른 생명들이 머물고 보호받을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온갖 새, 날개 달린 모든 것」이라는 표현은 그 보호의 범위가 넓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이미지에서 새들은 다양한 민족들을 떠올리게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 31:6에서도 큰 나무의 가지에 새들이 깃들고 그 그늘 아래 여러 민족이 거주하는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에스겔 31장에서 거대한 나무는 아시리아의 위세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이어서 그 교만과 몰락이 선포됩니다. 반면 에스겔 17장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심으신 나무가 생명을 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에 대한 희망을 단지 과거의 군사적 영광을 회복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회복된 통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야훼가 세우시는 나무는 다른 이들을 위한 그늘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마태복음 13:31–32에서도 새들이 가지에 깃드는 큰 나무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두 본문에는 작은 시작과 큰 성장, 새들이 깃드는 모습이라는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이 에스겔 17장을 명시적으로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의 본래 문맥에서 이 장면은 우선 무너진 왕실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약속입니다.

높은 나무를 낮추고 마른 나무에 싹이 나게 하시는 분

에스겔 17:24 본문 →

「『들의 모든 나무는 나 여호와야훼가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였으며, 싱싱한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에 싹이 나게 했음을 알 것이다. 나 여호와야훼가 말했고, 내가 이루겠다.』」에스겔 17:24 · 본디새김

이 마지막 구절은 지금까지 등장한 모든 나무를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높은 나무와 낮은 나무.

싱싱한 나무와 마른 나무.

높아지는 나무와 낮아지는 나무.

14절에서 낮음은 바벨론 왕이 유다를 종속시키기 위해 설정한 상태입니다. 24절에서 낮은 나무를 높이는 분은 여호와야훼이십니다. 같은 높고 낮음의 이미지이지만, 누가 그 상태를 결정하는지가 달라집니다.

싱싱한 나무는 생명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대로 마른 나무는 더 이상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보기에 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 반드시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게도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세상에서는 언제나 약자가 강자가 되고 강자는 약자가 된다는 일반 법칙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핵심은 모든 지위가 자동으로 뒤집힌다는 것이 아닙니다.

높아지고 낮아지는 최종적인 권한이 제국의 왕들에게 있지 않고 여호와야훼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예언은 「이스라엘 집안」을 향해 주어졌습니다(17:2). 마지막에는 들의 모든 나무가 여호와야훼의 행동을 알게 됩니다.

비유의 청중이 넓어진 것입니다.

21절에서는 유다의 멸망과 흩어짐을 통해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24절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나무를 높이고 낮추시며 다시 싹트게 하시는 일을 통해 그분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심판도 여호와야훼가 누구인지 드러냅니다. 그러나 심판이 그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을 일으키시는 일 역시 그분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약속을 다른 세력이 허락해 주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이루십니다.

두 독수리가 사라진 뒤에 남는 나무

에스겔 17:1–24 본문 →

사람이 세운 왕권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외교적 동맹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군사가 약속했던 안전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실패가 여호와야훼께서 이루실 미래까지 없애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실패한 사람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시드기야에게는 실제적인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심판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끝내는 마지막 사건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거대한 독수리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가지를 고르십니다. 가장 연한 가지를 꺾어 높은 산에 심으십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심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엄한 백향나무가 됩니다.

처음에는 독수리가 백향나무의 꼭대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마지막에는 온갖 새들이 백향나무의 가지 아래 깃듭니다.

권력에 의해 빼앗기던 나무가, 이제는 다른 생명들을 품는 나무가 됩니다.

처음에는 거대한 독수리의 날개가 하늘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지막에는 높은 산에 자란 백향나무의 가지가 넓게 펼쳐집니다. 그 가지 아래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깃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