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환상과 부르심

듣지 않는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

에스겔 2장에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예언자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그가 맡게 될 사명에는 처음부터 이상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보내시면서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보내십니까?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장은 세 장면으로 전개됩니다. 쓰러진 사람이 일어서고(1–2절), 그에게 반역하는 백성에게 전할 사명이 주어지며(3–7절), 마지막으로 그가 전해야 할 말씀이 두루마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8–10절).

그 흐름을 이끄는 중요한 동사가 있습니다. 바로 ‘듣다’입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듣고 일어서지만, 그가 찾아갈 백성은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의 반역을 경고하신 뒤 에스겔에게도 다시 들으라고 명하십니다.

읽는 시간 15분소단락 62장 본문 읽기 →

일어서라는 명령과 일어서게 하는 영

에스겔 2:1–2 본문 →

앞 장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네 생물과 바퀴들, 그 위에 펼쳐진 궁창과 보좌, 그리고 그 위에 나타난 사람 같은 형상까지, 환상은 땅에서 하늘로 시선을 끌어올렸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광경이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임을 깨달은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1:28).

2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네 두 발로 서라. 내가 너에게 말하겠다.」에스겔 2:1 · 본디새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아들’이지만, 이 문맥에서는 인간, 곧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호칭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이 호칭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특징적인 방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사실이 에스겔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내게 말할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내 두 발로 서게 했다. 나는 내게 말하는 이의 말을 들었다.에스겔 2:2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영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던 생물들을 보았던 에스겔이 이제 자신도 영의 움직임을 경험합니다. 하늘의 환상이 그저 바라보는 광경으로 끝나지 않고, 그 환상을 바라보던 사람의 몸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이 장면에는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일어서라고 명하시면서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에스겔의 소명은 처음부터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행하시는 일 위에 세워집니다.

그 결과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의 첫 번째 사명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영’은 히브리어 루아흐로, 문맥에 따라 바람이나 숨, 영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앞 장에서는 생물들을 움직이는 영이 등장했습니다(1:12, 20). 이제 같은 낱말이 에스겔 자신에게 사용됩니다. 다만 2절 자체는 이 영의 정체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 장과의 연결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는 장면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본문이 직접 밝히는 사실은 영이 에스겔 안으로 들어와 그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입니다.

반역하는 백성에게 보내시는 하나님

에스겔 2:3–5 본문 →

일어선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한 그 반역하는 민족들에게 보낸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은 바로 오늘까지 나를 거슬러 죄를 지었다.」에스겔 2:3 · 본디새김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배민 가운데 있었습니다. 1장 1–3절은 그가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고 전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포로로 끌려온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다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십니다. 에스겔이 보냄을 받는 대상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이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백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백성을 부르시는 표현이 낯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하시면서 곧이어 ‘반역하는 민족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도 ‘민족들’에 해당하는 말은 복수형입니다.

그 복수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열된 역사를 떠올릴 수도 있고,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에 준하는 반역 집단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매우 강하게 규정하신다는 점입니다.

‘반역’은 본래 마땅히 인정해야 할 권위에 대항하는 행동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셨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그들에게 살아갈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반역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가 없는 신에게 순종하지 않은 문제가 아닙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시고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 등을 돌린 문제입니다.

더욱이 그 반역은 한 세대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은 바로 오늘까지 나를 거슬러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상들의 죄에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반역의 연속성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유배라는 재난을 경험했지만, 그것만으로 백성의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자손들은 얼굴이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해야 한다.」에스겔 2:4 · 본디새김

얼굴은 다른 사람을 마주할 때 드러나는 태도를, 마음은 판단과 의지가 형성되는 내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구약에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만을 담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얼굴이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는 표현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부터 내면의 의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라는 이 선언은 예언자의 말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밝힙니다. 에스겔이 말하지만 그 메시지의 근원은 에스겔 자신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생각이나 정치적 판단을 전할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까요?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니,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2:5 · 본디새김

여기서 ‘듣든 듣지 않든’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문제를 넘어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반응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듣다’와 ‘그만두다’에 해당하는 말이 짝을 이루는데, 문맥에서는 말씀을 듣는 경우와 듣기를 거부하는 경우를 함께 포괄합니다.

예언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백성은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부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이나 예언의 성취를 통해 알아보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지만, 5절만으로 그 과정을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의 의미가 사람들의 즉각적인 반응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부름받지만, 그가 전할 말씀을 백성이 제대로 듣거나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이사야 6:9–10). 에스겔의 경우에도 백성의 반응은 예언자의 소명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이 아닙니다. 에스겔서 전반부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시고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 하나님은 더러운 백성을 정결하게 하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며, 새로운 마음과 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36:25–27). 2장의 ‘마음이 완고한’ 백성과 36장의 ‘새로운 마음’을 받을 백성 사이에는 긴 이야기가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스겔 2장에 아직 그 회복의 약속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시와 전갈 사이에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에스겔 2:6–7 본문 →

하나님은 이제 에스겔이 마주할 현실을 설명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마라. 네 곁에 가시덤불과 가시들이 있고 네가 전갈들 사이에서 살더라도,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 앞에서 기가 꺾이지 마라.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스겔 2:6 · 본디새김

특히 4절에서 언급된 ‘얼굴이 뻣뻣한’ 백성이 이제 에스겔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그들의 완고함이 더 이상 성격에 관한 설명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예언자가 직접 마주해야 할 적대적인 태도가 됩니다.

가시덤불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찌르고, 전갈은 가까이 있으면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시덤불이 사라질 것이라는 약속도, 전갈이 더 이상 쏘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 사이에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위험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너는 내 말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은 반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에스겔 2:7 · 본디새김

5절과 거의 같은 표현이 반복되지만,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5절에서는 백성이 듣든 듣지 않든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7절에서는 그들이 듣든 듣지 않든 에스겔이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백성의 반응이 불확실하다는 동일한 상황이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다른 쪽에서는 예언자의 책임을 강조합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는 두 종류의 말이 마주 서 있습니다.

사람들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이 그의 입을 닫게 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 더 깊이

‘가시덤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빔은 해석이 쉽지 않은 낱말입니다. 가시덤불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지만, 반역하거나 대항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뒤에 나오는 가시와 전갈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가시덤불이라는 번역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적대적인 행동을 직접 가리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앞에서는 계속 ‘반역하는 집안’이라고 부르셨지만, 7절에서는 ‘반역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히브리어 문장에서도 이 절에는 ‘집안’이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큰 의미 차이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반복되는 문구가 완전히 기계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가 부름받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보내시는 곳으로 가고 명하시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으며, 사람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예레미야 1:7–8, 17). 에스겔 2장의 명령은 이와 매우 가깝습니다.

예언자 자신도 반역자가 될 수 있다

에스겔 2:8 본문 →

8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뜻밖의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그 반역하는 집안처럼 반역하지 마라.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어라.」에스겔 2:8 · 본디새김

에스겔은 반역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받았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반역할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구별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절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5절과 7절에서는 백성이 듣든 듣지 않든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 이르러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백성에게 말씀을 전할 자격은 백성보다 자신이 낫다는 사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도 먼저 그 말씀 아래 서 있어야 한다는 데서 나옵니다.

에스겔이 백성을 꾸짖는 동안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면, 그는 자신이 책망해야 할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구별점은 죄를 지을 수 없는 특별한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입니다.

이 경고는 오늘날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일과 자신이 그 말씀을 듣는 일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 다른 사람의 불순종을 분명하게 지적하면서 자기 자신의 불순종에는 눈을 감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단순히 말씀을 잘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먹은 것은 몸 안으로 들어갑니다. 바깥에 있던 것이 자기 안에 받아들여집니다. 말씀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일을 형상화합니다.

에스겔은 말씀의 내용이 자기 마음에 드는지 판단해서 골라 전하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스겔의 소명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그가 받아야 할 것이 어떤 것인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또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는 이미지로 자신이 경험한 말씀의 기쁨을 표현합니다(예레미야 15:16). 에스겔에서는 이 이미지가 환상 속에서 실제로 두루마리를 먹는 행위로 나타납니다(에스겔 3:1–3). 두 본문 모두 예언자가 말씀을 단순히 전달하기 전에 먼저 자기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제를 드러냅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10:8–11에도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는 경험이 기록되며, 그 뒤에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명령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에스겔의 환상을 떠올리게 하는 뚜렷한 문학적 연결입니다. 다만 요한계시록의 두루마리와 에스겔의 두루마리가 모든 세부 의미에서 같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뒤에 모두 적힌 슬픔의 두루마리

에스겔 2:9–10 본문 →

하나님의 명령에 이어 에스겔은 또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

내가 보니 손 하나가 내 쪽으로 뻗어 있었고, 또 보니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다.에스겔 2:9 · 본디새김

1장에서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는 듯한 장엄한 환상이 펼쳐졌습니다. 생물들과 바퀴들, 빛과 불, 보좌와 영광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에스겔의 시선은 자기 앞에 뻗어 있는 손 하나로 모입니다.

9절은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먹으라고 하셨으므로, 독자는 그 손에 들린 두루마리가 에스겔에게 주어질 말씀과 연결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펼쳤다. 두루마리의 앞면과 뒷면에 글이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적힌 것은 애가들과 탄식과 통곡이었다.에스겔 2:10 · 본디새김

에스겔이 전해야 할 말씀에는 죄와 그 결과를 드러내는 심판의 선포가 포함되어야 했습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애가와 탄식과 통곡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펼쳐질 재난과 심판의 메시지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슬픔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에스겔에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재난을 바깥에서 구경하며 비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재난을 알리는 말씀을 자신의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마리는 일반적으로 한쪽 면에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보는 두루마리는 앞면과 뒷면에 모두 글이 적혀 있습니다. 양면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판의 완전성이나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글이 양면에 가득 기록되어 있다는 시각적 특징을 인정하면서도 그 상징을 지나치게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세 단어의 미세한 의미 차이를 모두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함께 놓인 효과는 분명합니다. 두루마리에는 슬픔과 재난을 알리는 말들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에게 어떤 감정적 부담을 안겼는지는 2장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3장을 보면 그는 실제로 그 두루마리를 먹게 되고(3:1–3), 이후 마음의 쓰라림과 격앙된 상태를 경험합니다(3:14). 특히 3장에서는 그 두루마리가 그의 입에서 꿀처럼 달았다고 기록합니다. 심판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인데도 그것을 먹었을 때는 달았다는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반역하는 백성에게 여전히 말씀하신다는 것

에스겔 2:1–10 본문 →

하나님은 백성의 반역을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으십니다. 동시에 그들을 아무 말씀 없이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무관심한 판결이 아닙니다.

언약을 저버린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한 손이 나타났습니다.

그 손에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습니다. 두루마리가 펼쳐지자 앞면과 뒷면에 적힌 글들이 보였습니다. 애가들과 탄식과 통곡이었습니다.

에스겔은 그 글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할 말씀을 먼저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에스겔에게 말하러 가라고만 하시지 않으십니다. 먼저 입을 벌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