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환상과 부르심
달콤한 두루마리와 닫힌 입
에스겔 3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한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애가와 탄식과 통곡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는 꿀처럼 답니다. 말씀을 받은 에스겔은 이스라엘에게 보내지지만, 기쁨에 넘쳐 달려가지 않습니다.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파수꾼의 책임을 맡기십니다. 경고해야 할 사람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은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겠다.」 반드시 경고해야 하는 사람의 입을 하나님이 직접 닫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일까요? 아니면 예언자의 사명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무언가를 보여 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세 번 다루십니다. 먼저 두루마리를 먹이시고, 경고의 말을 맡기시며, 마지막에는 그 입을 닫으셨다가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열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슬픔의 두루마리가 꿀처럼 달았다
왜 하나님은 말씀을 읽으라고 하지 않고 먹으라고 하시는가
2장 끝에서 에스겔이 본 두루마리에는 앞면과 뒷면에 애가와 탄식과 통곡이 적혀 있었습니다. 3장은 하나님이 그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찾은 것을 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해라.」에스겔 3:1 · 본디새김
두루마리는 본래 읽고 보관하고 전달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것을 자신의 몸 안으로 들여야 합니다. 말씀이 입에 잠깐 머물렀다가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입을 벌리자 그가 내게 이 두루마리를 먹였다.에스겔 3:2 · 본디새김
두루마리를 먹는 일도, 말씀을 전하는 일도, 입이 열리는 일도 모두 하나님의 행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말씀이 달콤할 수 있는가
두루마리를 먹은 에스겔은 뜻밖의 맛을 경험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어 네 배와 속을 채워라.」 내가 먹으니 그것은 내 입에서 꿀처럼 달았다.에스겔 3:3 · 본디새김
두루마리가 달았다는 말은 그 안에 적힌 심판이 즐겁다는 뜻이 아닙니다. 에스겔이 백성에게 닥칠 재앙을 기뻐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시편 19:10은 여호와야훼의 법도가 꿀보다 달다고 말하고, 시편 119:103도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꿀보다 달다고 고백합니다. 그곳에서 달콤함은 말씀이 주는 기쁨과 귀중함을 나타냅니다.
에스겔의 경험도 이런 전통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의 내용이 고통스럽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그 내용이 가져올 고통과 다른 차원에서 달콤할 수 있습니다.
잠시 뒤 에스겔은 「마음이 쓰라리고 내 영에 분노가 타오른 채」 유배민들에게 갑니다(14절).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는 달콤함을 경험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갈 때는 쓰라림을 경험합니다.
이 두 감정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고 귀하다는 사실과, 그 말씀이 드러내는 현실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할 수 있습니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졌지만, 그들은 듣지 않는다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듣기를 거부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스라엘 집안으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말이 낯설고 말씨가 어려운 백성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 집안에게 보냄받기 때문이다.」에스겔 3:5 · 본디새김
얼핏 보면 에스겔의 사명이 외국 민족에게 가는 일보다 쉽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에스겔은 자기가 아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보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바로 예상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말이 낯설고 말씨가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많은 민족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더라면, 그들은 네 말을 들었을 것이다.」에스겔 3:6 · 본디새김
여기서 「그들」은 에스겔이 보냄받지 않은 여러 민족을 가리킵니다. 보내지 않은 상황을 가정하여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드러내는 대조입니다.
이 대조가 드러내는 것은 언어적 이해와 영적 순종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안은 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이마가 단단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다.」에스겔 3:7 · 본디새김
그들은 에스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듣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듣지 않을 때 더 뛰어난 표현이나 설득 기술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을 분명히 전달해야 하지만, 사람들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완고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더 단단한 예언자를 보내신다
「보아라, 내가 네 얼굴을 그들의 얼굴에 맞서 단단하게 했고, 네 이마를 그들의 이마에 맞서 단단하게 했다.」에스겔 3:8 · 본디새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신 표현을 에스겔에게도 사용하십니다. 백성의 단단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완고함입니다. 반면 에스겔의 단단함은 그 거절 앞에서 무너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견고함입니다.
「내가 네 이마를 부싯돌보다 단단한 금강석처럼 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 앞에서 기가 꺾이지 마라.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스겔 3:9 · 본디새김
본문은 그 물질이 부싯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표현함으로써 강도를 강조합니다. 이 비유는 에스겔에게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백성처럼 완고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의 거절 때문에 자신이 받은 말씀을 버리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노나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할 만큼 완고해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받아들이고 귀로 들으라
10절은 다시 말씀을 받아들이는 에스겔 자신의 태도로 돌아갑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네게 하는 모든 말을 네 마음에 받아들이고 네 귀로 들어라.」에스겔 3:10 · 본디새김
말씀을 먹는 행동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던 일이 이제 직접적인 명령으로 설명됩니다. 에스겔은 전할 말씀을 충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은 「모든 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 전할 수 없습니다. 환영받을 만한 말은 받아들이고 거절당할 만한 말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메시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유배된 이들, 네 백성」에게 보내십니다. 그는 자기가 속한 백성에게 보내집니다.
하나님이 반역하는 집안이라고 부르신 사람들이 에스겔에게는 여전히 자기 백성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거절은 단순히 사역의 실패가 아니라 자기 공동체 안에서 겪는 아픔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에스겔은 그들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결코 평온하지 않습니다.
달콤했던 말씀을 품고 쓰라린 마음으로 가다
영광의 소리와 예언자의 분노
12절에서 에스겔은 다시 영에 의해 움직입니다.
영이 나를 들어 올렸다. 나는 내 뒤에서 크게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의 자리에서 찬양받기를.」에스겔 3:12 · 본디새김
이어 생물들의 날개와 바퀴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에스겔이 앞서 보았던 환상의 광경이 소리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서 예언자의 감정이 갑자기 드러납니다.
영이 나를 들어 올려 데려갔다. 나는 마음이 쓰라리고 내 영에 분노가 타오른 채 갔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내 위에 강하게 놓여 있었다.에스겔 3:14 · 본디새김
에스겔은 이 사명을 감정적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그의 복잡한 감정을 곧바로 없애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에스겔은 그 감정을 안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갑니다.
이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에스겔은 마침내 크발 강가의 델아빕에 도착합니다.
나는 크발 강가 델아빕에 사는 유배된 이들에게 갔다. 나는 그들이 사는 그곳에 앉았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충격에 휩싸인 채 이레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에스겔 3:1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앞부분의 강렬한 움직임과 대조됩니다. 영이 그를 들어 올렸고, 생물들의 날개와 바퀴들이 크게 울렸으며, 하나님의 손이 강하게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움직임의 끝에서 에스겔은 앉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심판의 말씀을 받았지만, 유배민들을 멀리서 판단하는 관찰자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도 유배민인 에스겔이 그들 가운데 앉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재앙이 닥칠지를 알게 된 사람과, 자신들의 앞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에스겔은 백성 위에 서서 그들을 향해 말하기 전에, 먼저 백성 가운데 앉아 그들과 같은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 충격의 이레가 끝난 뒤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사명을 설명하십니다.
파수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의 자리에서 찬양받기를」이라는 말을 누가 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생물들이 외쳤을 수도 있고, 환상 속 다른 목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의 자리」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특정한 장소에 머무른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에스겔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분노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고통스러운 사명 때문에 괴로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감정이 함께 얽혀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상과 원인을 확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하나님께 반항했다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그가 하나님의 분노를 온전히 공유했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델아빕은 고대 바벨론 유배민의 거주지 이름으로, 현대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와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절만으로 그 고대 거주지의 정확한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고통을 보고 이레 동안 함께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장면(욥기 2:13)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창세기 50:10에도 이레 동안 애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이레를 깊은 충격이나 애도의 분위기와 연결해 읽을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에스겔이 장례 의식을 수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레의 의미를 특정한 의식으로 확정할 근거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경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피의 책임을 묻겠다
파수꾼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내게서 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에스겔 3:17 · 본디새김
고대 성읍에서 파수꾼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면 경고해야 했습니다. 파수꾼이 위험을 보고도 알리지 않는다면, 성읍 사람들은 대비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에스겔의 파수꾼 역할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파수꾼은 자기 눈으로 보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경고를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미래를 마음대로 예측하거나 자기 판단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을 선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경고를 전해야 합니다.
앞에서 에스겔은 두루마리를 먹으며 자신의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파수꾼이 된 그는 먼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에스겔의 입은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는 독립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도록 맡겨진 입입니다.
경고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악한 사람에게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할 때,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고, 그를 살리려고 악한 길에서 떠나라는 경고의 말을 그 악한 사람에게 하지 않으면, 그 악한 사람은 자기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을 네게 묻겠다.」에스겔 3:18 · 본디새김
하나님이 경고를 맡기시는 목적은 악한 사람이 죽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경고는 심판의 선언이지만, 동시에 돌아설 가능성을 열어 주는 행동입니다.
파수꾼은 사람들의 죄를 찾아내어 정죄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위험을 알리는 것은 그들이 위험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네가 악한 사람에게 경고했는데도 그가 자기 악과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에스겔 3:19 · 본디새김
다른 사람이 말씀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가 예언자의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마땅히 전해야 할 경고를 하지 않았다면 그 침묵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말을 전하지 않는 선택은 할 수 있으며, 그 선택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파수꾼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경고하지만, 자신이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주인은 아닙니다.
왜 의로운 사람에게도 경고해야 하는가
18–19절이 악한 사람에 관한 말씀이라면, 20–21절은 의로운 사람에 관한 말씀입니다.
「또 의로운 사람이 자기 의로움에서 돌아서 불의를 행하면, 내가 그의 앞에 걸림돌을 놓을 것이고 그는 죽을 것이다. 네가 그에게 경고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을 것이며, 그가 행한 의로운 일들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에 대한 책임을 네게 묻겠다.」에스겔 3:20 · 본디새김
에스겔 18:21–24에서는 악한 사람이 자기 죄에서 돌이키는 경우와 의로운 사람이 자기 의로움에서 돌아서는 경우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때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20절은 그가 이전에 행했던 의로운 일들이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의로운 행동이 현재의 불의를 무조건 면제해 주는 보증서가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적합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걸림돌을 놓으신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하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본문의 순서를 보면 의로운 사람이 먼저 자기 의로움에서 돌아서 불의를 행하고, 이어 하나님이 걸림돌을 놓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걸림돌을 그 사람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하여 읽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나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는 3장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이 심판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지만, 죄의 발생과 하나님의 심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단락의 「죽음」과 「삶」을 오직 사후의 구원과 멸망에 관한 선언으로 옮겨 읽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돌이키는 일과, 경고를 거절하거나 받지 못한 채 죄의 결과를 맞는 일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의미는 에스겔 18장과 33장의 설명까지 함께 읽을 때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가지 경우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관심
18–21절은 네 가지 상황을 다룹니다.
악한 사람이 경고받지 못하는 경우, 경고받고도 돌아서지 않는 경우, 의로운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데 경고받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의로운 사람이 경고를 받아들여 죄를 짓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단지 악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라는 고정된 두 집단으로 나누어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악한 사람에게는 돌아설 기회를 열어 두십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죄를 경계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로움은 과거에 얻은 지위를 붙잡고 안심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악인을 꾸짖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 전체가 생명의 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본문은 다시 방향을 바꿉니다.
그토록 경고의 책임을 강조하신 하나님이, 에스겔의 입을 직접 닫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파수꾼의 입을 닫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다
22절에서 여호와야훼의 손이 다시 에스겔 위에 놓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벌판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에스겔이 나가 보니 그곳에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서 있습니다. 그는 그것이 크발 강가에서 보았던 영광과 같다고 말합니다.
에스겔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영이 그 안에 들어와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셨습니다. 이번에는 이미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에게 그의 사역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알려 주십니다.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은 이제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영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두 발로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나와 이야기하며 내게 말했다. 「들어가 네 집 안에 틀어박혀 있어라.」에스겔 3:24 · 본디새김
보내진 사람에게 왜 집 안에 있으라고 하시는가
이 명령은 지금까지의 말씀과 긴장 관계에 놓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듣든 듣지 않든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 안에 있으라고 하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보아라. 그들이 네게 밧줄을 걸고 그것으로 너를 묶을 것이다. 너는 그들 가운데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3:25 · 본디새김
그는 자기가 원한다고 언제든지 나가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26절은 그 제한을 말 자체에까지 적용합니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겠다. 너는 말문이 막혀 그들을 꾸짖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스겔 3:26 · 본디새김
그런데 이것이 앞서 주어진 파수꾼의 책임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요?
에스겔은 침묵하라는 명령과 말하라는 명령을 함께 받는다
「그러나 내가 네게 말할 때에는 네 입을 열어 주겠다. 너는 그들에게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해야 한다. 들을 사람은 듣게 두고, 듣지 않을 사람은 듣지 않게 두어라. 그들은 반역하는 집안이기 때문이다.」에스겔 3:27 · 본디새김
여기서 두 종류의 침묵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침묵입니다. 앞에서 파수꾼의 책임을 설명할 때 경고받았던 침묵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스스로 말씀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는 침묵입니다. 마지막 단락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부과하시는 침묵입니다.
둘은 같지 않습니다.
파수꾼인 에스겔은 하나님이 주신 경고를 숨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말씀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만들어 내어서도 안 됩니다.
예언자에게는 말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그것이 언제든 자기 뜻대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듣는 사람은 듣게 두고, 듣지 않는 사람은 듣지 않게 두어라
「들을 사람은 듣게 두고, 듣지 않을 사람은 듣지 않게 두어라.」 얼핏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의 반응에 관심을 두지 않으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파수꾼의 책임을 설명하실 때 하나님은 경고의 목적이 사람을 살리는 데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 반응을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받는 일에서부터 전하는 일, 그리고 그 결과를 대하는 일까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을 묶는 이들에 대해 원문은 복수 주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유배민들이 그를 실제로 체포하거나 구속한 사건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뒤에 나오는 에스겔 4:8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에스겔을 줄로 묶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문에 3장의 결박도 예언자의 상징 행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의 표현과 문맥이 완전히 같지는 않으므로, 여기서 결박의 주체와 방식까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침묵이 실제로 어느 정도 지속되고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는 에스겔서의 후속 장면들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에스겔 24:27에서는 말문이 열릴 것을 예고하고, 33:21–22에서는 예루살렘 함락 소식과 함께 그의 입이 열리는 사건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에스겔이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이에도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여러 상징 행동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3장의 침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된다는 뜻으로만 읽기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제한된 예언자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적합합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입
처음에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벌리게 하시고 두루마리를 먹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 입을 닫으시고, 직접 말씀하실 때 다시 열겠다고 하십니다. 에스겔이 자기 안에 받아들여야 할 말씀의 근원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그가 밖으로 전해야 할 말씀의 근원도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오늘의 독자가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이나 판단을 곧바로 에스겔이 받은 계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은 특정한 예언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임한 사건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기 판단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고 상대방의 반응까지 강요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화려한 환상도 없고, 움직이는 바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나타나지만, 이야기는 그 광경 자체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입에 시선이 모입니다.
그 입은 말씀을 먹었던 입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경고해야 할 입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닫으시겠다고 하신 입입니다.
그리고 그 침묵 가운데 약속이 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네게 말할 때에는 네 입을 열어 주겠다.」 에스겔은 이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실 말씀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입은 닫혀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