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벽돌 위의 예루살렘, 저울에 달린 빵

에스겔 4장은 뜻밖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벽돌에 도시를 새기고, 그 둘레에 포위벽을 세우고, 공성추를 배치하라고 하십니다. 이어 한쪽 옆구리를 대고 수백 일 동안 누워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의 양까지 정해 주시고, 사람의 똥을 땔감으로 삼아 빵을 구우라고 하십니다.

앞 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제한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열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에스겔에게 맡겨지는 것은 말로 하는 설교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보여 주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예루살렘이 무너진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될 것인가 하는 현실입니다.

더욱 뜻밖인 것은 이런 엄중한 명령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에스겔의 항변을 들으시고 한 가지를 바꾸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심판을 전해야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지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요?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64장 본문 읽기 →

벽돌 위에 새겨진 예루살렘 — 포위가 이미 시작되다

에스겔 4:1–3 본문 →

왜 실제 도시가 아니라 벽돌인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벽돌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 사람의 아들아, 벽돌 하나를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그 위에 도시 하나, 곧 예루살렘을 새겨라.」에스겔 4:1 · 본디새김

에스겔이 있는 바빌로니아에서는 진흙을 빚어 만든 벽돌과 점토판이 건축과 기록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벽돌은 에스겔이 사는 환경에서 낯설지 않은 물건입니다. 하나님은 거창한 재료가 아니라 일상의 물건으로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여 주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벽돌에는 단순히 도시 이름을 적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시를 포위해라. 그 도시에 맞서 포위벽을 세우고 흙 언덕을 쌓아라. 그 도시에 맞서 진영들을 두고, 그 둘레에 공성추들을 배치해라.」에스겔 4:2 · 본디새김

고대 성읍의 성벽을 공격할 때 포위군은 성읍으로 드나드는 길을 차단하고, 흙을 쌓아 공격로를 만들고, 공성추를 이용해 성벽이나 성문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런 공격의 요소들을 예루살렘 주위에 배치해야 합니다.

포위벽도 예루살렘을 향하고, 흙 언덕도 예루살렘을 향하며, 군영과 공성추도 그곳을 둘러쌉니다. 모든 것이 한 도시를 향해 집중됩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성전이 있었습니다. 성벽도 있었습니다. 유다의 왕국은 약화되었지만, 도시는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예루살렘은 안전하게 보호되는 성읍이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받는 성읍입니다.

후에 열왕기하 25:1–3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성읍 안에 심각한 기근이 닥친 일을 기록합니다. 에스겔 4장은 그와 같은 재앙을 유배민들 앞에 미리 보여 주는 예언적 행동으로 읽힙니다.

쇠 번철은 무엇을 가로막는가

3절에서 새로운 물건이 등장합니다.

「너는 쇠 번철을 가져다가 너와 그 도시 사이에 쇠벽으로 세워라. 그 도시를 향해 네 얼굴을 고정해라. 그 도시는 포위될 것이고, 너는 그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집안에게 주는 표징이다.」에스겔 4:3 · 본디새김

번철은 빵이나 음식을 굽는 데 사용하는 납작한 철제 조리 기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조리 도구가 아니라 벽으로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한 가지 해석은 포위의 견고함과 돌파하기 어려운 차단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포위가 쇠처럼 단단하여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여 보여 준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에스겔과 예루살렘 사이에 놓인 쇠벽은 하나님과 도성 사이의 단절, 곧 더 이상 이전처럼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를 상징한다고 이해합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의 배치에서 근거를 얻습니다. 쇠벽은 도시와 에스겔 사이에 놓이고, 에스겔은 그 도시를 향해 얼굴을 고정한 채 포위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다만 본문은 쇠벽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별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선언으로까지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쇠벽이 피할 수 없는 포위의 엄중함을 강화한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12:13에서는 문에 바른 피가 표징이 되고, 이사야 20:3에서는 예언자의 특이한 행동이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에스겔의 행동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앞으로 닥칠 일을 눈앞에 보이도록 나타내는 표징입니다.

말로 들은 경고는 듣는 사람이 마음속에서 멀리 밀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벽돌 위에 새겨진 예루살렘과 그 도시를 둘러싼 공성추들은 피하고 싶은 현실을 눈앞에 놓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도시를 향한 공격에서 예언자 자신의 몸으로 시선을 옮기십니다.

삼백구십 일과 사십 일 — 몸에 얹힌 죄악의 시간

에스겔 4:4–8 본문 →

왜 옆구리를 대고 누워야 하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왼쪽 옆구리를 대고 누우라고 하십니다.

「너는 왼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라. 그 위에 이스라엘 집안의 죄악을 얹어라. 네가 그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는 날수만큼 그들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에스겔 4:4 · 본디새김

히브리어 나사(⁨נָשָׂא⁩)는 무엇을 들거나 운반하거나 짊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목적어가 아본, 곧 ‘죄악’일 때는 문맥에 따라 죄의 책임을 지거나 죄로 인한 결과를 감당한다는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레위기 5:1에는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가 있고, 레위기 16:22에서는 속죄일의 염소가 백성의 죄악을 짊어지고 광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속죄일의 염소는 죄를 제거하는 의식의 일부이지만, 이 장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를 없애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는 죄악을 짊어지는 행동을 통해 그 죄악의 무게와 결과를 보여 주도록 명령받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행동을 속죄의 행위로 볼 것인지, 죄책과 심판의 무게를 나타내는 행위로 볼 것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예루살렘에 닥칠 심판을 나타내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벽돌에 포위된 도시를 새기는 동안에는 에스겔이 모형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누워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앞에서는 도시가 포위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언자의 몸도 제한됩니다.

도시의 포위와 몸의 구속이 서로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삼백구십 년과 사십 년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이 누워 있을 날수를 정해 주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의 햇수를 네게 날수로 정해 주었다. 곧 삼백구십 일이다. 너는 이스라엘 집안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에스겔 4:5 · 본디새김
「그 날들을 마치면 두 번째로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누워, 사십 일 동안 유다 집안의 죄악을 짊어져야 한다. 내가 네게 그 기간을 하루가 일 년을, 하루가 일 년을 나타내도록 정해 주었다.」에스겔 4:6 · 본디새김

이 표현은 민수기 14:34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십 일에 대응하여 사십 년 동안 죄악을 짊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 본문의 상황은 다르지만, 하루와 일 년을 대응시키는 상징적 계산이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언어적 연결이 있습니다.

벽돌에 새겨진 예루살렘은 한순간에 공격받는 도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누워 있어야 하는 긴 시간은 그 포위가 하루아침에 생긴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의 위기는 갑자기 닥친 불행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된 불순종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드러낸 팔과 움직일 수 없는 몸

7절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다시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고정하라고 하십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을 향해 네 얼굴을 고정하고, 네 팔을 드러낸 채 그 도시를 거슬러 예언해라.」에스겔 4:7 · 본디새김

팔을 드러내는 행동은 전투에 나서는 준비나 힘을 행사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예언자가 도시를 향해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팔을 드러내는 동작 자체가 정확히 어떤 의례적 의미를 가졌는지 이 구절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 다시 결박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내가 네게 밧줄을 걸겠다. 네 포위 기간을 다 채울 때까지 너는 한쪽 옆구리에서 다른 쪽 옆구리로 몸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에스겔 4:8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누가 에스겔을 묶는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3:25).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직접 「내가 네게 밧줄을 걸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모형을 만들었지만, 이제 그 포위의 기간이 자기 몸에 적용됩니다. 포위된 도시의 사람들은 성벽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습니다. 에스겔도 마음대로 몸을 돌리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자기가 보여 주는 재앙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표징이 그의 몸과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포위가 길어지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일상의 먹고 마시는 질서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무엇을 먹고 얼마나 마실 것인지까지 정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먼저,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을 각각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왕국이 분열된 역사와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열왕기상 12장은 왕국이 나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집안」은 북왕국만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장에서도 예루살렘 포위를 보여 주는 표징은 「이스라엘 집안」에게 주어집니다(3절). 따라서 삼백구십 일을 반드시 북왕국만의 역사로 제한하기는 어렵습니다. 왕국 분열에서 계산할 것인지, 북왕국의 멸망에서 계산할 것인지, 유배나 회복의 시점과 연결할 것인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이 장은 계산을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삼백구십과 사십을 합하면 사백삼십입니다. 이 숫자가 출애굽기 12:40–41의 사백삼십 년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이집트 체류와 새로운 속박의 기간을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이 직접 그 관계를 명시하지는 않습니다. 고대 본문 전승의 차이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삼백구십 일이 나오지만, 칠십인역의 전승에는 4절의 백오십 일, 5절의 백구십 일이라는 다른 수치가 등장하며, 사십 일은 유지됩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하나의 정확한 연대표로 재구성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행동과 그 상징적 기간을 기록하지만, 그 기간의 구체적인 일과나 실행 방식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곡식으로 만든 빵 — 풍성함이 아니라 결핍의 표시

에스겔 4:9–13 본문 →

왜 여러 곡식을 한데 섞어야 하는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빵을 만들 재료를 지정하십니다.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렌틸콩과 기장과 스펠트밀을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그것들로 네가 먹을 빵을 만들어라. 네가 옆구리를 대고 누워 있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그것을 먹어라.」에스겔 4:9 · 본디새김

여섯 가지 곡식과 콩류가 등장합니다. 얼핏 보면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영양가 높은 빵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명령을 보면 이 빵은 풍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먹을 음식의 무게는 하루에 이십 세겔이다. 정해진 때마다 그것을 먹어라.」에스겔 4:10 · 본디새김
「물도 양을 재어 육분의 일 힌을 마셔라. 정해진 때마다 마셔라.」에스겔 4:11 · 본디새김

한 가지 가능성은 포위 상황에서 충분한 양의 단일 곡식을 확보하기 어려워 남아 있는 여러 종류의 곡식을 모아 빵을 만드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유일한 의미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 문맥이 극심한 식량 부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이해입니다.

평상시라면 사람은 자기가 먹을 빵의 재료를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위가 길어지면 선택의 여지가 줄어듭니다. 어떤 재료를 좋아하는가보다 무엇이 아직 남아 있는가가 중요해집니다.

먹을 수 있는 빵이 있어도 안심할 수 없다

본문은 빵을 조금씩 나누어 먹고, 물도 정해진 때에 마시라고 합니다.

평상시에는 빵이 식사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포위된 성읍에서 빵은 생존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물건이 됩니다.

이 장면의 무서움은 음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보다, 음식이 아직 조금 남아 있지만 그것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포위가 성벽 바깥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사건이라면, 식량 제한은 그 포위가 성벽 안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공성추가 성벽을 부수기 전에도 포위는 사람들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전쟁은 성벽에서 시작되지만, 그 고통은 식탁까지 들어옵니다.

왜 사람의 똥으로 빵을 구우라고 하시는가

12절에서 명령은 더욱 충격적인 수준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을 보리 납작빵 모양으로 만들어 먹어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사람의 똥 덩이를 땔감으로 삼아 그것을 구워라.」에스겔 4:12 · 본디새김

하나님은 사람의 똥을 빵에 섞어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본디새김 본문이 택한 읽기에서는 똥이 빵을 굽는 땔감으로 사용됩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내가 그들을 쫓아 보낼 민족들 가운데서 이처럼 자기들의 빵을 부정한 채로 먹을 것이다.」에스겔 4:13 · 본디새김

포위에서 시작된 심판이 유배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에서 살아갈 때 음식은 단순한 영양 공급 수단만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무엇을 먹을 수 있고 무엇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 구별했으며, 음식과 정결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의 일부였습니다(레위기 11장; 신명기 14:3–21).

이것은 유배의 고통이 거주지를 옮기는 일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전에 익숙하게 지켜 왔던 신앙적 삶의 질서마저 위협받는 환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구절을 근거로 이스라엘 땅 밖의 모든 음식이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유배 속에서 경험할 특정한 부정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들은 에스겔은 처음으로 강하게 항변합니다.

“저는 부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 하나님 앞에 항변하는 예언자

에스겔 4:14–15 본문 →

에스겔은 무엇 때문에 반대하는가

14절은 이 장에서 에스겔 자신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나는 말했다. 「아, 주 여호와야훼여, 보십시오. 저는 부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은 짐승의 고기나 맹수에게 찢긴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았고, 부정한 제물의 고기가 제 입에 들어온 적도 없습니다.」에스겔 4:14 · 본디새김

그는 제사장으로 소개된 사람입니다(에스겔 1:3). 제사장의 삶에서 정결의 문제는 사소한 취향이나 개인적인 기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이미 매우 어려운 명령들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랜 죄악을 짊어지는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몸의 움직임을 제한받고, 먹을 음식과 물의 양도 제한받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명령 앞에서는 별다른 항변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오직 부정한 빵을 굽는 명령 앞에서 그는 입을 엽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켜 온 정결함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는 호소입니다.

그는 심판의 말씀을 맡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왜 명령을 바꾸어 주시는가

15절은 예상하지 못한 응답을 기록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보아라, 내가 네게 사람의 똥 덩이 대신 쇠똥을 주었다. 그것을 땔감으로 삼아 네 빵을 만들어라.」에스겔 4:15 · 본디새김

하나님은 에스겔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는 여전히 제한된 양의 빵을 먹어야 하고, 유배의 부정함을 나타내는 표징을 수행해야 하며,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의 말씀을 맡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 자체를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 심판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를 바꾸어 주십니다.

심판의 말씀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수행하는 예언자의 호소는 외면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모든 명령이 인간의 요구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는 일반 원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은 특정한 명령과 특정한 항변,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심판의 표징으로 사용하신다고 해서, 그를 아무런 내면과 양심도 없는 도구로 취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괴로움을 말씀드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 더 깊이

율법은 저절로 죽거나 짐승에게 찢긴 동물의 고기를 먹는 일을 제한했습니다(레위기 17:15–16; 신명기 14:21). 에스겔 44:31도 제사장들이 그러한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가 항변할 때 예로 드는 것은 부정한 고기들입니다. 사람의 똥을 땔감으로 사용하는 행위가 율법의 어떤 특정 조항을 위반하는지 직접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의 항변은 개별 규정의 적용 문제를 넘어, 부정해지는 일을 피하며 살아온 자신의 정결한 삶 전체에 관한 호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빵의 지팡이를 부러뜨리겠다” — 포위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다

에스겔 4:16–17 본문 →

빵이 왜 지팡이인가

마지막 두 절에서 하나님은 앞서 명령하신 음식 제한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십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빵의 지팡이를 부러뜨리겠다. 그들은 빵을 무게로 달아 불안 속에서 먹고, 물을 양으로 재어 공포 속에서 마실 것이다.」에스겔 4:16 · 본디새김

여기서 지팡이는 사람이 몸을 의지하여 서게 해 주는 물건입니다. 따라서 빵의 지팡이는 사람의 생명을 지탱하는 식량의 공급을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울에 달린 빵, 공포 속에서 마시는 물

음식을 무게로 다는 행위에는 「불안」이 붙어 있습니다.

물을 양으로 재는 행위에는 「공포」가 붙어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빵이 사람을 안심시키는 물건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허기를 달랠 수 있고, 내일 먹을 식량이 있다는 사실은 생활의 안정감을 줍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포위 상황에서는 그 관계가 뒤집힙니다.

빵을 앞에 두고도 불안합니다. 물을 마시면서도 공포를 느낍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우는 물건이 됩니다. 이것이 「빵의 지팡이」가 부러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그 고통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확대됩니다.

「그들에게 빵과 물이 모자라게 하고, 그들이 저마다 자기 형제와 함께 경악하며 자기들의 죄악 때문에 쇠잔해지게 하려는 것이다.」에스겔 4:17 · 본디새김

포위와 기근은 개개인의 신체만 약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전체를 공포에 빠뜨립니다.

사람은 주변 사람의 얼굴에서 같은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에게 음식이 부족하듯 형제에게도 음식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마실 물이 부족하듯 이웃에게도 물이 부족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통을 확인하는 상황입니다.

앞부분에서 에스겔이 옆구리를 대고 누워 짊어져야 했던 것도 죄악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쇠잔해지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도 죄악입니다.

에스겔의 몸에 얹힌 죄악이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쇠잔해지는 몸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에 대한 추상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오래된 불순종이 공동체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를 보여 주는 예언적 묘사입니다.

조금 더 깊이

「빵의 지팡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26:26에도 나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에게 식량 부족이 닥칠 것을 경고하시며, 빵을 지탱하는 것을 끊으시고 사람들이 빵을 무게로 달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레위기 26:25–26에는 적의 포위와 식량 부족이 함께 등장합니다. 에스겔 4장도 포위 모형으로 시작하여 무게를 달아 먹는 빵으로 끝납니다. 에스겔이 선포하는 심판은 하나님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백성을 공격하기로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경고가 역사 속에서 현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52–57도 성읍이 포위되어 먹을 것이 극도로 부족해질 때 인간관계와 가족의 질서마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에스겔 4장은 아직 그 모든 참상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은 이미 공동체가 함께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저울 위에 놓인 빵

에스겔 4:1–17 본문 →

벽돌에 새겨진 예루살렘은 작지만, 그 안에서 일어날 고통은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포위된 도시를 보여 주게 하시면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지도 보여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선포하시는 분이지만, 그 심판을 전하는 예언자의 양심과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으로도 나타나십니다.

에스겔 4장을 오늘의 삶에 적용할 때, 개인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특정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포위와 기근을 죄악에 대한 심판으로 직접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계시를 모든 시대의 모든 재난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누군가가 굶주리거나 전쟁을 겪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가 그 고통의 원인이라고 판단할 권한을 이 본문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아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표징 속에서는 이미 포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 평소처럼 먹고 마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겔에게 주어진 명령 속에서는 이미 빵과 물의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결핍을 가리켜 「빵의 지팡이를 부러뜨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지탱해야 할 것이 부러지는 순간,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성벽이 무너지는 날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빵을 앞에 놓고도 내일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들의 식탁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