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4–24장 · 예루살렘 심판 예고
아무도 서지 않은 무너진 틈
예루살렘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습니다. 성벽은 외부의 적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고, 성읍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성벽 밖의 적들만이 아닙니다. 성벽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빼앗고,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도시를 안에서부터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도시를 세 가지 모습으로 보여 주십니다. 처음에는 피로 더럽혀진 성읍으로, 다음에는 금속을 녹이는 용광로로, 마지막에는 아무도 무너진 틈을 막지 않는 땅으로 그려집니다. 세 장면은 서로 다른 비유이지만, 하나의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성읍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왜 그 파멸을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까?
성읍이 스스로 자기 날을 앞당기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 번 물으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심판하겠느냐? 피의 성읍을 심판하겠느냐? 그 성읍에게 그 모든 역겨운 짓을 알려 주어라.」에스겔 22:2 · 본디새김
반복되는 질문은 예루살렘을 법정에 세우는 엄숙한 소환처럼 들립니다. 에스겔은 단순히 앞으로 닥칠 재앙을 예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성읍이 저지른 일을 그 성읍 자신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도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곳에 머물도록 선택된 도시였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 도시를 성전이나 제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안에서 흘린 피로 규정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자기 안에서 피를 쏟아 자기 때를 불러들이고, 자신을 더럽히려고 우상들을 만든 성읍아.』」에스겔 22:3 · 본디새김
성읍은 단지 정해진 심판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행동으로 그때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너는 네가 쏟은 피로 죄를 지었고, 네가 만든 우상들로 부정해졌다. 너는 네 날들을 앞당겼고 네 햇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민족들의 모욕거리로, 모든 나라의 조롱거리로 만들었다.』」에스겔 22:4 · 본디새김
또한 피를 흘리는 행위와 우상 제작이 함께 등장합니다. 둘은 서로 무관한 죄목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대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과, 하나님이 보호하라고 명령하신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같은 도시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네게 가까운 나라들과 먼 나라들이 너를 비웃을 것이다. 이름이 더럽고 혼란이 가득한 성읍아.』」에스겔 22:5 · 본디새김
하나님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던 도시는 이제 더럽혀진 이름으로 불립니다. 성읍이 누리던 특별한 지위가 그 행실을 감추어 주지 못합니다.
「네 안에서」 — 도시의 내부를 드러내는 반복
6절부터 12절까지 읽으면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네 안에서」, 「네 한가운데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도시의 경계를 넘어 외부의 적을 살피시는 대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 주십니다.
먼저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보아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저마다 자기 팔의 힘을 믿고 네 안에서 피를 쏟으려 했다.』」에스겔 22:6 · 본디새김
여기서 「자기 팔의 힘」은 지도자들이 가진 권력과 능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도자들에게는 사람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생명을 보호하는 대신 빼앗는 데 사용했습니다.
도시의 문제는 보호할 힘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그 힘을 폭력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7절은 시선을 가정과 사회의 가장 약한 자리로 옮깁니다.
「『네 안에서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업신여겼고, 네 한가운데서 나그네를 억압했으며, 네 안에서 고아와 과부를 학대했다.』」에스겔 22:7 · 본디새김
이 배열에는 이스라엘의 율법이 지켜야 할 관계들이 담겨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십계명에 있으며(출애굽기 20:12),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말라는 명령도 율법에서 거듭 강조됩니다(출애굽기 22:21–24; 신명기 24:17–18).
특히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가족과 재산, 법적 보호의 기반이 취약해지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공동체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냅니다. 이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 거룩한 것들을 멸시했고, 내 안식일들을 더럽혔다.』」에스겔 22:8 · 본디새김
7절에서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행동이, 8절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과 안식일을 더럽히는 행동이 고발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사회윤리와 종교생활이라는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이 둘을 하나의 고발 안에 놓습니다.
레위기 19:3에서도 부모를 경외하는 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나란히 명령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함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9절부터는 더욱 구체적인 행동들이 드러납니다.
남을 헐뜯어 피를 흘리게 하는 사람들, 산 위에서 먹는 사람들, 성적으로 다른 사람을 침해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산 위에서 먹었고」라는 표현은 에스겔 18:6과 18:11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의 다른 본문에서 산 위의 제의 행위가 우상숭배와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역시 부적절한 제의적 식사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22:9 자체는 무엇을 먹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10–11절에 열거된 성적 행위들은 레위기 18장에서 금지하는 관계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버지의 알몸을 드러냈고」라는 표현도 레위기 18:7–8의 금지 규정과 연결됩니다. 이 목록은 모든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안의 경계와 이웃의 관계까지 침해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이 모든 고발은 12절에서 경제적 착취로 이어집니다.
「『네 안에서 사람들은 피를 쏟으려고 뇌물을 받았다. 너는 이자와 늘어난 몫을 받아 챙겼고, 네 이웃들을 억압하여 부당한 이익을 얻었으며, 나를 잊었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22:12 · 본디새김
「나를 잊었다」는 말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정보를 잃어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성전과 제사와 종교적 지도자들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방식을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의 경고와도 연결됩니다. 신명기 8:11–18은 풍요를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고, 자기 힘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위험을 경고합니다. 에스겔 22장에서는 그 망각이 더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웃을 희생시키면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이 귀하게 여기시는 생명과 정의를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강한 팔을 믿던 사람들에게 던져진 질문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폭력과 부당한 이익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네가 얻은 부당한 이익과 네 한가운데 있던 피 때문에 내가 손바닥을 쳤다.』」에스겔 22:13 · 본디새김
손바닥을 치는 행동은 여기서 박수나 환영이 아닙니다. 심판을 향한 강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에스겔 21:14, 17에서도 손뼉을 치는 행동은 칼과 심판의 문맥에 나타납니다.
「『내가 너를 다루는 날들에 네 마음이 버틸 수 있겠느냐? 네 두 손이 힘을 지닐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야훼가 말했고, 내가 실행하겠다.』」에스겔 22:14 · 본디새김
6절에서 지도자들은 「자기 팔의 힘」을 믿고 피를 흘렸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힘이 남아 있을지를 물으십니다.
남을 억압할 때 그토록 강했던 팔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강할 수 있겠습니까?
에스겔은 권력의 한계를 이 대비를 통해 드러냅니다.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특히 그 힘을 자신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해치는 데 사용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민족들 사이로 흩어 버리고, 여러 나라에 흩뿌리며, 네 부정함을 네게서 없애 버리겠다.』」에스겔 22:15 · 본디새김
흩어 버리는 심판과 부정함을 없애는 일이 같은 문장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분노를 발산하시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더럽혀진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겠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곧바로 백성이 온전히 정결하게 회복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선언된 것은 흩어짐을 통한 심판이며, 어떤 방식으로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질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습니다.
16절의 「너 자신 때문에 더럽혀질 것이며」 역시 원문의 짧은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지에 따라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성읍 자신의 행위가 더럽혀짐의 원인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고, 그 더럽혀짐이 성읍 자신 안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 무게를 둘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성읍의 수치가 그 자신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앞에서는 예루살렘을 피로 더럽혀진 도시로 고발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도시 자체를 거대한 용광로로 묘사하십니다.
피난처라고 생각한 성읍이 용광로가 되다
두 번째 말씀이 시작됩니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은 내게 찌꺼기가 되었다. 그들 모두는 용광로 안의 구리와 주석과 철과 납이다. 그들은 은의 찌꺼기가 되었다.」에스겔 22:18 · 본디새김
금속을 제련할 때 용광로는 금속을 녹이고 불순물을 분리하는 곳입니다. 본문은 불 속에서 순수한 은이 남는 장면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찌꺼기가 되었다는 평가와, 그들이 하나님의 분노 속에서 녹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 중심입니다.
따라서 이 용광로를 곧장 아름다운 성품을 만들어 내는 연단의 과정으로 이해하면 본문의 무게를 놓치게 됩니다.
여기서 불은 우선적으로 심판의 불입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 모두가 찌꺼기가 되었으니, 보아라,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한가운데로 모으겠다.』」에스겔 22:19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전쟁이 다가올 때 성벽이 있는 도시는 피난처가 됩니다. 바깥 지역의 주민들은 성벽 안으로 모여들어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모이는 예루살렘 자체를 용광로로 묘사하십니다.
그들이 안전을 기대하며 모이는 곳이 오히려 그들을 녹이는 장소가 됩니다.
이 모습은 에스겔 11:3의 비유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곳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성읍을 가마솥에, 자신들을 그 안의 고기에 비유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성읍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안전의 근거로 여기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안전을 부정하십니다(11:7–11).
특히 19–22절에는 「모으겠다」는 말과 「그 성읍 안에서」라는 표현이 거듭 나타납니다. 도시 안으로 모이는 일이 생존의 기회가 아니라 심판의 과정이 됩니다.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격노의 불로 너희에게 불어 대겠다. 너희는 그 성읍 안에서 녹을 것이다.』」에스겔 22:21 · 본디새김
금속을 녹이는 사람은 불의 열기를 높이기 위해 바람을 불어 넣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련자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의 몰락이 단순히 국제정세의 불행한 결과만은 아니라는 예언자의 신학적 해석을 보여 줍니다. 바벨론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사건 뒤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처럼 완전히 무너지는 지경까지 왔습니까? 지도자들과 제사장들, 예언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세 번째 말씀이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을 거꾸로 수행하다
세 번째 말씀이 시작되면서 심판의 대상은 성읍에서 땅 전체로 넓어집니다.
「사람의 아들아, 그 땅에게 말하여라. 『너는 깨끗해지지 않은 땅, 진노의 날에 비가 없는 땅이다.』」에스겔 22:24 · 본디새김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복이 끊어진 상태를 떠올리게 합니다. 율법에서 때에 맞는 비는 언약의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레위기 26:4; 신명기 11:14). 동시에 깨끗해지지 않았다는 말과 연결하면, 땅을 씻을 비조차 없다는 이미지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본문은 이 두 진술의 정확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원인을 밝히시면서 하나님은 사회의 여러 집단을 차례로 고발하십니다.
예언자들 — 생명을 살려야 할 사람들이 생명을 집어삼키다
「『그 땅 한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의 음모는 먹이를 찢으며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다. 그들은 생명을 집어삼켰고, 재물과 귀한 것들을 빼앗으며, 그 땅 한가운데 과부들을 많아지게 했다.』」에스겔 22:25 · 본디새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이런 사자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설교를 잘못하거나 미래에 대해 부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정도의 비판이 아닙니다. 그들이 생명을 파괴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과부들을 많아지게 했다는 고발입니다.
제사장들 — 구별해야 할 것을 구별하지 않다
「『그 땅의 제사장들은 내 가르침을 짓밟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혔다.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를 알려 주지 않았으며, 내 안식일들에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다.』」에스겔 22:26 · 본디새김
레위기 10:10–11에 따르면 제사장은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백성에게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바로 그 책임이 무너졌다고 고발합니다.
여기서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을 구별한다는 말은 일상생활 자체를 악하다고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구별된 것들을 그에 합당하게 다루고,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는 역할을 말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다」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본성이 실제로 더럽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함이 그들 가운데서 존중받지 못하고 모욕당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고관들 — 보호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 먹이를 찢다
「『그 땅 안의 고관들은 먹이를 찢는 이리들 같다.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 피를 쏟고 생명을 없애려 한다.』」에스겔 22:27 · 본디새김
고관들도 포식자로 묘사됩니다. 앞에서는 사자였고, 여기서는 이리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특히 「부당한 이익을 얻으려고」라는 목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폭력은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 이익을 얻기 위한 방법이 되었습니다. 6절에서 지도자들이 자기 팔의 힘을 믿고 피를 흘렸다는 고발이 여기서 더욱 구체화됩니다.
다시 예언자들 — 무너지는 곳에 회칠을 하다
「『그 땅의 예언자들은 그들을 위해 회칠을 했다. 헛된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거짓 점을 치면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말하지 않았다.』」에스겔 22:28 · 본디새김
회칠은 표면을 덮어 그 아래의 상태가 보이지 않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무엇에 회칠했는지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3:10–15에는 이와 매우 가까운 비유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거짓 예언자들은 백성이 평안하지 않은데도 평안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부실한 담을 쌓으면 그들은 회칠을 합니다. 담 자체가 튼튼해진 것은 아니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입니다.
22장에서는 이 이미지가 고관들의 악행과 연결됩니다.
거짓 예언은 단순히 사실과 다른 미래를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권력자의 잘못을 덮고, 그들의 행동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말하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무너지는 공동체를 고치지 않았습니다. 그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백성들 — 지도자들의 죄가 사회 전체로 퍼지다
「『그 땅의 백성은 억압을 일삼고 약탈을 저질렀다. 가난한 이와 궁핍한 이를 학대했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억압했다.』」에스겔 22:29 · 본디새김
이 구절을 지도자들의 잘못과 백성의 잘못이 언제나 똑같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가 지도자들의 권력 남용을 특별히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무너지는 책임을 소수의 지도자들에게만 돌릴 수도 없습니다. 사회 전체에 억압의 행동이 퍼져 있습니다.
특히 7절에서 억압받던 나그네가 29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계속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들을 통해 예루살렘의 죄가 추상적인 종교적 잘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실제 삶을 파괴하는 행동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을 찾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25절에는 본문 전승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본디새김처럼 「예언자들의 음모」라고 읽히지만, 칠십인역은 이 자리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후자를 따르면 이 구절은 지도층의 폭력을 묘사하며, 예언자들의 죄는 28절에서 따로 다루어집니다. 두 읽기 모두 이어지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고발과 연결되지만, 어느 집단이 25절의 직접적인 대상인지는 달라집니다. 본디새김이 따르는 히브리어 본문대로 읽으면 예언자들의 타락이 두 차례 나타납니다. 25절에서는 그들이 직접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모습이, 28절에서는 다른 이들의 악행을 거짓말로 덮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찾으신 사람은 누구였는가?
「『나는 그들 가운데서 담을 쌓고, 내가 그 땅을 멸하지 않도록 그 땅을 위해 내 앞에서 무너진 틈에 설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에스겔 22:30 · 본디새김
앞에서 하나님은 계속 죄를 찾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것을 찾으십니다.
그 땅을 위해 무너진 틈에 설 사람입니다.
담을 쌓는 일, 그리고 그 땅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틈에 서는 일입니다. 첫 번째 행동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행동에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재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이 찾으시는 사람은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동시에 그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들은 담에 회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너진 담을 다시 세울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표면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몰두했고, 하나님은 실제로 무너진 곳을 보고 계셨습니다.
무너진 틈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간구했습니다(출애굽기 32:11–14). 시편 106:23은 그 사건을 돌아보면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무너진 틈에 서서 하나님의 분노가 백성을 멸하지 않도록 했다고 묘사합니다.
모세는 백성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를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죄를 죄로 인정하면서도 백성의 파멸을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문제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따라서 무너진 틈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무조건 백성 편을 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반대하면서도, 그 죄를 지은 사람들이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한 사람의 기도만 있으면 반드시 공동체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보편적 약속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 14:12–20에서는 의로운 사람들의 존재만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따른 심판이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강조됩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는 예루살렘에 양심적인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인구조사 결과가 아닙니다. 에스겔 9:4에는 예루살렘에서 저질러지는 악행을 보고 탄식하는 사람들도 등장합니다. 22장의 강조점은 공동체를 위해 무너진 틈에 서서 파멸을 막는 역할을 감당할 사람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처럼 많은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이미지는 에스겔 13:5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거짓 예언자들을 향해 그들이 무너진 틈에 올라서지도 않았고, 이스라엘 집안을 위해 담을 쌓지도 않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13장에서는 예언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고발이었습니다. 22장에서는 그 실패가 더 넓어집니다.
「그들의 행실을 그들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마지막 말씀은 단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 위에 내 진노를 쏟았고, 내 격노의 불로 그들을 없애 버렸다. 그들의 행실을 그들 자신의 머리 위에 얹었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22:31 · 본디새김
앞에서 용광로의 불이 등장했고, 이제 마지막에도 격노의 불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은 불 자체보다 그들의 행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문장은 심판이 그들의 삶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덮친 불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선택하고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에스겔 18장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행실에 따라 책임을 진다는 원칙을 반복해서 강조하셨습니다(18:20, 30). 22장은 그 원칙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삶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은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들, 고아와 과부들이 겪은 일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쏟은 피와 부당하게 얻은 이익은 모두 하나님 앞에 드러났습니다.
조금 더 깊이
22장은 심판을 이미 실행된 일처럼 표현하며 끝납니다. 이것을 읽을 때 이 예언을 듣던 바로 그 순간에 도시의 멸망이 이미 완료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언은 앞으로 닥칠 심판을 확정적인 사건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심판의 확실성과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맺음말 — 회칠한 담과 무너진 틈
하나님이 찾으신 것은 또 하나의 그럴듯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읍의 무너짐을 외면하지 않고, 그 땅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예언자들도,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많았지만 그 자리에 설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 비극은 단순히 성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성벽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것을 덮어 가릴 사람은 있었지만, 무너진 틈에 서서 그 땅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은 없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2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모습이 남습니다. 겉면은 회칠로 덮인 담, 그리고 아무도 서 있지 않은 무너진 틈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