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29장
이 장의 자리 · 25–32장 · 여러 민족을 향한 선언
나일강의 주인과 꺾인 갈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을 나일강 한가운데 누워 있는 거대한 괴물처럼 여깁니다. 누구도 그를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없고, 그가 지배하는 강은 영원히 그의 것일 듯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야훼는 그 괴물의 턱에 갈고리를 걸어 물 밖으로 끌어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물속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괴물이, 물 밖에서는 스스로 목숨조차 지킬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 장에는 이집트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겹쳐 있습니다. 파라오 자신에게 이집트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이집트는 기대기만 하면 부러져 버리는 갈대 지팡이입니다. 한쪽에서는 지나치게 강하다고 자랑하고, 다른 쪽에서는 믿을 만큼 강하지 못하다고 고발당합니다.
이집트의 문제는 힘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기 힘의 근원을 잊고 다른 민족에게까지 그 힘을 의지하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심판은 이 두 가지 착각을 함께 무너뜨립니다.
이처럼 에스겔 29장은 강대한 제국이 어떻게 무너지는가뿐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무너뜨리시고 무엇을 다시 일으키시는가를 보여 줍니다.
나일강 한가운데 누운 괴물 — 소유의 확신이 창조자의 자리로 올라갈 때
29장의 첫 예언은 열째 해 열째 달 열이튿날에 주어집니다. 에스겔의 연대 체계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587년 1월입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포위 아래 있었고, 유다는 외부의 군사적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이집트의 왕은 일반적으로 예레미야 44:30에 등장하는 파라오 호브라와 동일시됩니다. 유다가 이집트의 군사력을 기대했다는 사실은 예레미야 37:5–10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집트 군대가 출동하자 바벨론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지만, 예레미야는 이집트 군대가 돌아가고 바벨론 군대가 다시 올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이집트 왕을 향해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파라오를 왕좌에 앉은 통치자로 묘사하지 않으십니다.
「말하여라.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이집트 왕 파라오야, 내가 너를 대적한다. 자기 강줄기들 가운데 드러누운 큰 괴물아, 너는 『내 나일강은 내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 하고 말했다.」에스겔 29:3 · 본디새김
이 괴물은 날뛰거나 사냥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강줄기들 가운데 ‘드러누워’ 있습니다. 그곳이 자기 영역이고, 누구도 그 자리를 빼앗지 못한다고 확신하는 자세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며 농경지에 물과 비옥한 흙을 공급했고, 교통과 물자 운송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나일강을 빼놓고는 이집트의 경제와 권력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파라오가 「내 나일강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영토 주장을 넘어섭니다. 그는 이집트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까지 자기 소유라고 선언합니다.
이어지는 「나는 나 자신을 만들었다」는 더 놀라운 말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립니다.
여호와야훼의 대답은 논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나는 네 두 턱에 갈고리들을 걸고, 네 강줄기들의 물고기들을 네 비늘에 달라붙게 하겠다. 나는 너를 네 강줄기들 가운데서 끌어 올리겠다. 네 강줄기들의 모든 물고기가 네 비늘에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에스겔 29:4 · 본디새김
강의 주인이라고 자처했던 존재가 이제 남의 손에 끌려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를 지켜 주던 강물은 더 이상 그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이 물고기들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파라오에게 속하거나 그의 권력에 의존하는 존재들이 통치자의 몰락에 함께 휘말리는 모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호와야훼는 그들을 광야에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나일강의 괴물에게 광야는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장소입니다. 물속에서는 거대함이 힘이었지만, 물 밖에서는 그 거대한 몸이 오히려 무력함을 드러냅니다.
「거두어지지도 모아지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쓰러진 몸이 방치되어 짐승과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은 고대의 전쟁과 심판 언어에서 철저한 패배와 수치를 나타냅니다. 특히 장례와 무덤을 중요하게 여긴 이집트의 왕권을 생각하면, 왕이 들판에 버려지는 모습은 더욱 강렬합니다.
여호와야훼는 파라오보다 더 큰 괴물이 되어 그를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를 강물 밖으로 끌어내십니다. 그러자 자신이 무엇인지를 잊었던 존재의 실제 모습이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괴물은 나일강의 거대한 악어를 떠올리게 하지만, 단순히 크고 위험한 동물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표현은 바다의 거대한 생물이나 인간의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존재를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히브리어 아시티니는 본디새김의 번역처럼 ‘내가 나를 만들었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가 나를 위해 만들었다’, 곧 앞서 말한 나일강을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뜻으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뒤의 9절에는 ‘나 자신을’에 해당하는 접미사가 없고 단순히 「내가 만들었다」라고 되어 있어, 이 두 읽기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21에서는 거대한 바다 생물들까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등장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괴물이라도 결국은 창조된 생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자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부러지는 갈대 지팡이 — 이집트의 또 다른 얼굴
이제 예언은 뜻밖의 방향으로 전환됩니다.
앞에서는 이집트가 너무 강하고 교만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집트가 너무 약해서 문제라고 하십니다.
「이집트에 사는 모든 이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 집안에 갈대 지팡이가 되었기 때문이다.」에스겔 29:6 · 본디새김
이 두 비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이집트가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서 실제로 경험하는 모습입니다.
먼저 사람이 지팡이를 손으로 붙잡습니다. 그런데 지팡이가 부서져 어깨를 찢습니다. 다시 사람이 지팡이에 기대자 지팡이는 부러지고, 기대던 사람의 허리를 곧추세우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대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잡은 사람까지 다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유는 이사야 36:6과 열왕기하 18:21에서도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사신이 유다 왕 히스기야를 조롱하며, 이집트를 의지하는 사람의 손을 찌르는 부러진 갈대 지팡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이 말은 아시리아가 유다의 저항을 꺾기 위해 사용한 조롱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29장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직접 이집트의 신뢰할 수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같은 비유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사용되지만, 이집트의 보호를 믿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는 이어집니다.
에스겔 17:15–17은 이 문제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유다의 왕이 바벨론에 반역하며 이집트에 사절을 보내 말과 군대를 요청하지만, 이집트의 큰 군대가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유다는 이집트의 군사력을 전혀 근거 없이 평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집트는 실제로 오랫동안 강대한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문제는 그 힘이 유다를 구원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유다는 여호와야훼와 맺은 관계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르게 살피기보다, 외부의 군사력이 자기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심판은 이집트만을 향하지 않습니다. 갈대 지팡이가 부러지는 순간, 그것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의 잘못된 판단도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갈대는 나일강 주변에서 흔히 자라는 식물입니다. 겉보기에는 길고 곧아서 지팡이처럼 사용할 수 있을 듯하지만, 몸의 무게를 지탱할 만큼 단단하지는 않습니다. 7절의 마지막 표현은 해석이 갈립니다. 본디새김은 히브리어의 ‘세우다’라는 형태를 살려 「그들의 허리를 모두 곧추세웠다」라고 옮겼습니다. 다른 읽기에서는 비틀거리게 하거나 허리를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어느 쪽이든 지팡이에 몸을 맡긴 사람이 더 이상 그 지팡이에 기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흔 해의 황폐함 — 강대한 나라의 질서를 해체하다
8절부터는 괴물과 지팡이의 비유가 구체적인 전쟁과 황폐함의 언어로 바뀝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 칼을 가져오시고, 사람과 가축을 끊어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이유를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집트 땅은 황무지와 폐허가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 그가 『나일강은 내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하고 말했으므로,」에스겔 29:9 · 본디새김
이 반복은 이집트의 몰락이 단순히 바벨론과의 군사적 대결에서 누가 이기느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언은 이집트가 자신의 권력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심판의 이유로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너와 네 강줄기들을 대적한다. 나는 이집트 땅을 믹돌에서 스웨네까지, 쿠시의 경계까지 폐허로, 황무지로, 황폐한 곳으로 만들겠다.」에스겔 29:10 · 본디새김
믹돌은 이집트 북부의 지명이고, 스웨네는 남부의 아스완과 연결됩니다. 쿠시는 이집트 남쪽의 누비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이집트의 일부 지역만이 아니라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는 나라 전체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파라오는 나일강의 강줄기들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그 강줄기들이 흐르는 나라 전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파라오의 소유 주장과 여호와야훼의 심판 범위가 맞물려 있습니다.
11–12절에서는 그 땅이 마흔 해 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며, 이집트 사람들이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파라오는 자기 나라의 번영이 자기 힘으로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는 그 나라가 황무지가 되는 기간뿐 아니라, 다시 사람들이 모이게 될 시점도 자신의 결정 아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의 미래를 결정하는 분은 나일강을 소유했다고 주장한 파라오가 아니라, 그 나라를 흩으시고 다시 모으시는 여호와야훼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이집트가 장기간 황폐해지고, 주민들이 흩어진 뒤,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다시 모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흔 해가 정확히 어느 역사적 기간에 해당하는지, 이집트 전역이 문자 그대로 사십 년 동안 완전히 무인 지대였는지는 현재 확인할 수 없습니다. 마흔이라는 수는 성경에서 한 세대에 해당하는 긴 기간, 심판과 시험의 기간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민수기 14:33–34). 그렇다고 에스겔의 마흔 해가 반드시 상징적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다시 모이지만 높아지지 않는다 — 심판의 목적이 드러나다
13절에서 예언의 방향이 바뀝니다.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사십 년이 끝나면, 나는 이집트 사람들을 그들이 흩어져 간 민족들 가운데서 모으겠다.」에스겔 29:13 · 본디새김
에스겔서에서 흩어진 사람들을 모으시는 행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설명할 때도 사용됩니다. 에스겔 11:17에서 여호와야훼는 여러 나라에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겠다고 하셨고, 36:24에서도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9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오랜 압제자였던 이집트에게도 흩어짐 이후의 귀환이 약속됩니다.
이 사실만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회복이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은 두 나라의 미래를 분명히 구별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통치가 이스라엘의 국경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집트의 심판과 존속까지도 그분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의 사로잡힌 이들을 돌아오게 하고, 그들을 파트로스 땅, 곧 그들이 비롯된 땅으로 돌려보내겠다. 그들은 거기서 낮은 왕국이 될 것이다.」에스겔 29:14 · 본디새김
14절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돌아갈 곳은 파트로스입니다. 이 이름은 이집트 남부, 곧 상이집트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집트는 자기 민족의 시작과 연결되는 땅으로 돌아갑니다. 거대한 제국으로 확장되었던 나라가 자신의 근원과 연결된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뒤의 이집트는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왕국들 가운데 가장 낮아져, 다시는 민족들 위로 자신을 높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줄여 민족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겠다.」에스겔 29:15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 이집트의 모든 생존 가능성을 없애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집트는 여전히 하나의 나라로 남습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고 자기 권력을 과시할 수 있는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집트는 더는 이스라엘 집안의 의지할 곳, 곧 그들이 이집트 사람들에게로 돌아서 그들을 따를 때 죄악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주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29:16 · 본디새김
이집트의 힘이 줄어드는 것은 이집트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이집트를 자기 구원의 근거로 삼지 못하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집트라는 민족의 존재를 끝내시기보다, 이집트가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고 이스라엘의 신뢰를 차지하던 질서를 끝내려 하십니다.
그 나라는 살아남지만, 더는 이전처럼 행동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죄악을 떠올리게 한다’는 표현은 누구에게 그 죄악을 떠올리게 하는지 명확하게 지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게 된다는 뜻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그 잘못이 다시 문제 된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이집트를 의지하는 행동과 이스라엘의 죄악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바벨론 군대의 품삯 — 하나님은 제국의 전쟁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17절에서 독자는 갑작스러운 시간 이동을 경험합니다.
이십칠 년째 첫째 달 첫날, 여호와야훼의 말이 내게 왔다.에스겔 29:17 · 본디새김
앞의 예언은 열째 해에 주어졌지만, 이제 이십칠 년째가 되었습니다. 대략 기원전 571년으로, 첫 예언보다 약 16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연대가 명시된 말씀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는 이 예언이, 이집트에 대한 첫 예언 바로 뒤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앞 단락이 이집트가 왜 심판받는지 설명했다면, 이제는 여호와야훼께서 그 심판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집트가 아니라 두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은 자기 군대에게 두로를 상대로 고된 일을 시켰다. 모든 머리가 벗겨졌고, 모든 어깨가 닳았다. 그러나 그가 두로를 상대로 한 일에 대해, 그와 그의 군대는 두로에서 아무 품삯도 얻지 못했다.」에스겔 29:18 · 본디새김
두로는 지중해 연안의 강력한 해상 무역 도시였습니다. 에스겔 26–28장은 그 도시의 교만과 몰락을 길게 다루었습니다. 느부갓레살은 두로를 상대로 장기간 군사 작전을 벌였습니다. 본문은 이 전쟁의 결과를 전리품이나 영토의 변화보다 병사들의 몸에 남은 흔적으로 묘사합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약탈물과 전리품은 군대의 보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막대한 비용과 노동이 투입된 공성전에서 기대한 전리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는 그들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다른 곳에서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레살에게 이집트 땅을 준다. 그는 그곳의 재물을 가져가고, 전리품을 빼앗고, 약탈물을 약탈할 것이다. 이집트는 그의 군대에게 품삯이 될 것이다.」에스겔 29:19 · 본디새김
전쟁과 정복이 마치 노동과 보상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한 일의 품삯으로 내가 그에게 이집트 땅을 주었다. 그들이 나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에스겔 29:20 · 본디새김
이것은 바벨론이 여호와야훼를 믿고 순종하는 나라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느부갓레살이 종교적 헌신으로 군대를 이끌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벨론 왕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군사적 이익을 위해 움직였더라도, 그 행동이 여호와야훼의 심판을 이루는 일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0:5–15에서도 아시리아는 여호와야훼의 심판에 사용되는 도구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자신을 높이고 무자비하게 행동할 때, 그 교만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에스겔 29장의 말씀을 바벨론의 모든 전쟁 행위에 대한 도덕적 승인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제국을 자신의 심판에 사용하신다는 사실과, 그 제국이 행하는 모든 일이 의롭다는 판단은 서로 다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바벨론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지만, 정작 그가 얻게 될 땅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도, 바벨론도 자기 힘의 최종 주인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머리가 벗겨지고 어깨가 닳았다는 표현은 고된 공성 작업과 물자 운반을 떠올리게 하지만, 머리가 벗겨진 구체적인 원인까지 본문이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26장에서는 느부갓레살이 두로를 공격하고 성벽을 허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런데 29장에서는 그가 두로를 상대로 큰 수고를 했어도 품삯을 얻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둘을 반드시 완전한 승리나 완전한 실패 중 하나로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29장은 앞서 선포된 심판과 실제 전쟁의 결과를 연결하면서, 바벨론 군대가 기대했던 전리품을 얻지 못했다는 사정을 드러냅니다. 역사적으로도 느부갓레살 통치 제37년에 이집트를 향한 원정이 있었음을 기록하는 바빌로니아 설형문자 점토판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자료만으로 에스겔 29장의 모든 심판 표현, 특히 마흔 해 동안의 전면적 황폐화와 귀환까지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뿔이 돋아나고 입이 열린다 — 마지막 절의 예상하지 못한 전환
마지막 절에 이르면 예언의 시선이 다시 바뀝니다.
지금까지 이집트의 몰락과 바벨론의 보상을 말씀하시던 여호와야훼께서 갑자기 이스라엘과 에스겔에게 눈을 돌리십니다.
「그날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을 위해 뿔이 돋아나게 하고, 네게는 그들 가운데서 입을 열게 해 주겠다. 그들은 내가 여호와야훼인 줄 알 것이다.」에스겔 29:21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거대한 뿔을 즉시 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식물의 새싹처럼 뿔이 돋아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에스겔 자신에게도 약속이 주어집니다.
예언자는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지 못합니다. 왕처럼 군대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이집트나 바벨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도 못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호와야훼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서 그 작은 목소리가 강대한 제국의 권력보다 오래 남습니다.
파라오는 자신의 힘을 자랑했고, 느부갓레살은 군대를 움직였습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여호와야훼께서는 바로 그 예언자의 입을 다시 열어 주십니다.
조금 더 깊이
한나의 노래에서 하나님은 자기 왕의 뿔을 높이시는 분으로 찬양받으십니다(사무엘상 2:10). 시편 132:17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을 위해 뿔이 돋아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시편 132:17과 에스겔 29:21은 ‘뿔이 돋아나게 한다’는 표현을 공유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뿔은 단순한 군사력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시는 백성의 힘과 존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에스겔 29장은 그 뿔이 구체적으로 어떤 왕이나 정치적 사건을 가리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특정 왕의 즉위나 메시아의 출현으로 곧바로 확정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에스겔서에서 예언자의 입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스겔 3:26–27에서 여호와야훼는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셨다가, 자신이 말씀하실 때 입을 열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24:27에서도 예루살렘의 소식이 도착할 때 그의 입이 열릴 것이라고 예고하셨고, 33:21–22에서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29:21을 에스겔이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되는 시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의 후반부가 33장의 사건보다 나중에 주어진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에스겔에게 다시 백성 가운데서 말할 수 있는 자리를 주시고, 그의 예언이 헛된 말이 아니었음을 드러내신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강물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새로 돋아나는 힘으로
여호와야훼는 거짓된 지팡이를 꺾으시지만, 동시에 새로운 뿔이 돋아나게 하십니다. 잘못된 의존을 무너뜨리는 것이 심판의 한 부분이라면, 새로운 힘을 주시는 것은 그 심판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에스겔 29장의 처음에는 나일강을 가득 차지한 거대한 괴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강줄기들 가운데 누워 자신을 만든 이가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아직 크지도 않고, 누구를 두렵게 할 만큼 위압적이지도 않은 뿔이 등장합니다. 그 뿔은 스스로 돋아났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그것을 돋아나게 하십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거대한 괴물은 물 밖으로 끌려 나오고, 아무것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었던 백성에게는 새로운 힘이 돋아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