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2장
이 장의 자리 · 40–48장 · 새 성전 환상
거룩함을 지키는 방과 경계
에스겔 42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옷을 갈아입는 방에 있습니다.
안내자는 에스겔에게 북쪽과 남쪽에 있는 방들을 보여 주면서, 그곳에서 제사장들이 거룩한 제물을 먹고 예배할 때 입는 옷을 벗어 두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뜻밖입니다.
「그 옷들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섬기는 옷이 제사장과 백성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할까요? 왜 거룩한 제물은 지정된 방에서만 먹어야 할까요?
앞부분의 방들과 마지막의 담은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방에서는 거룩한 것들이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가 드러나고, 담에서는 성전 전체가 무엇을 위해 구별되어 있는지가 밝혀집니다. 이 장의 핵심은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부터 무조건 멀리 떼어 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과 일상에 속한 것이 각각 제자리에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성전 바깥쪽에 있는, 아직 용도를 알 수 없는 방들
42장은 에스겔의 이동으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는 성소와 지성소, 성전 본체의 주변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안내자는 에스겔을 바깥뜰 쪽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에는 분리된 구역과 서쪽 건물을 마주한 방들이 있습니다.
2절은 길이가 백 규빗인 면과 너비 쉰 규빗을 언급합니다. 이어 3절에서는 안뜰에 속한 스무 규빗 구역과 바깥뜰의 포장 바닥을 마주한 회랑들이 세 층에 걸쳐 서로 대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치수들을 하나의 평면도에 정확히 배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특히 7–8절에서 쉰 규빗과 백 규빗이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방들의 서로 다른 부분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방들은 성전 내부의 가장 깊은 곳에 있지 않습니다. 안뜰과 바깥뜰 사이에 놓인 건물군에 속하며, 길과 회랑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전에서 수행되는 활동들이 서로 다른 공간과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4절에서는 방들 앞에 열 규빗 너비의 통로가 있고, 방의 입구들이 북쪽으로 나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 이 방들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안내자는 먼저 구조를 보여 줍니다. 건물의 의미는 나중에 설명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규빗의 길이 있었다」는 표현은 건축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실제로 데레크 암마 에하트, 곧 ‘한 규빗의 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통로의 너비가 열 규빗이라고 한 직후에 길이가 한 규빗이라고 하면 자연스러운 건축 설명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어 번역에는 백 규빗의 길이를 명시하는 표현도 나타납니다. 그 번역은 ‘한 규빗의 길’ 대신 ‘길이 백 규빗’으로 읽어, 히브리어 본문과 다른 수치를 전합니다.
위층이 좁아지는 방들과 서로 마주 보는 건물들
5절에서는 방들의 구조에 특이한 점이 나타납니다.
위층 방들은 더 짧았다. 회랑들이 아래층과 중간층 방들에서보다 위층 방들에서 건물 부분을 더 많이 차지했기 때문이다.에스겔 42:5 · 본디새김
6절은 그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합니다. 이 건물은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뜰에 있는 다른 구조물처럼 기둥들이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건물의 일부가 뒤로 물러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회랑과 지지 구조가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건물이 단순히 동일한 크기의 방들을 세 층으로 쌓아 올린 구조는 아니라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7–9절은 바깥뜰 쪽에 있는 담과 방들의 길이, 동쪽에서 들어오는 통로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동쪽 방향의 방들이 등장합니다.
그 방들 앞에는 길이 나 있었다. 그 방들의 모습은 북쪽 방향에 있는 방들의 모습과 같았다. 길이도 너비도 같았으며, 모든 출구와 배치와 입구도 같았다.에스겔 42:11 · 본디새김
이 대칭은 성전의 모습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특정한 한쪽에만 특별한 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양쪽에 유사한 시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중요한 치수와 출입 방향을 알려 주지만, 모든 연결 부위와 건축 방식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건물들의 정확한 모습을 완전히 그리지 못해도, 다음 단락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13절에서 안내자가 비로소 이 방들의 용도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에서는 남쪽 방들의 입구와 동쪽 통로가 설명되면서 ‘하기나’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 하기나는 이 자리에서 의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담과 관련된 구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확한 형태와 위치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거룩한 방에서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다
안내자는 북쪽과 남쪽의 방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분리된 구역을 마주한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이다. 여호와야훼 가까이에 있는 제사장들이 거기에서 가장 거룩한 제물들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 가장 거룩한 제물들과 곡식 제물과 속죄 제물과 속건 제물을 놓아둘 것이다. 그곳은 거룩하기 때문이다.」에스겔 42:13 · 본디새김
가장 거룩한 제물이라고 해서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정된 거룩한 방에서 다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룩함에는 서로 다른 정도와 그에 따른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제물을 먹는 일이 거룩한 행위일까?
현대 독자에게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는 거룩하게 느껴져도, 제물을 먹는 행위까지 거룩하게 여겨졌다는 사실은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서 제사장은 단순히 제물을 태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부분과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부분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레위기 6:16–18에서는 곡식 제물 가운데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을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규정합니다. 속죄 제물에 관해서도 6:26에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속건 제물 역시 7:6에서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모든 제물을 제사장이 먹는 것은 아닙니다. 제물의 종류와 상황에 따라 불태워야 하는 부분과 먹을 수 있는 부분이 구별됩니다. 에스겔 42:13은 이러한 율법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 음식은 단순히 제사장이 노동의 대가로 받은 일반적인 식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야훼에게 드린 제물 가운데 규정에 따라 제사장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레위기 10:17은 특히 속죄 제물을 제사장들이 먹는 일과 회중의 죄악을 담당하고 속죄하는 직무를 연결합니다.
따라서 제물을 먹는 것은 예배가 끝난 뒤에 이루어지는 사적인 식사만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거룩한 직무 안에 포함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제사장에게 돌아온 뒤에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거룩한 방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 방은 귀중한 물건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창고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제물들이 그에 합당한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장소입니다.
제사장이 ‘여호와야훼 가까이에 있다’는 뜻
13절에서 제사장들은 특별히 「여호와야훼 가까이에 있는 제사장들」이라고 불립니다. 44:15–16에서 하나님은 사독의 자손인 레위 제사장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나아와 섬기고, 자신의 성소에 들어와 봉사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42장의 제사장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표현은 누구나 여호와야훼의 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한 직무를 맡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가까움에는 특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나아갈수록 더 주의해서 지켜야 할 규정도 있습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거룩한 옷은 왜 백성에게 가져가면 안 될까?
「제사장들은 들어온 뒤에는 거룩한 곳에서 바깥뜰로 그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섬길 때 입는 옷들을 거기에 벗어 두어야 한다. 그 옷들은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옷들을 입고 백성에게 속한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에스겔 42:14 · 본디새김
에스겔 44:19는 같은 규정을 반복하면서 그 이유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제사장들이 예배 때 입는 옷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룩함이 퍼지는 것을 좋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룩함이 정해진 절차 없이 전달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룩함은 마음의 경건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다거나 마음이 경건하다는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사람과 물건과 장소가 지니는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 29:37에서는 제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해지는 문제를 다룹니다. 출애굽기 30:29에서도 성소의 기구들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그것들과 접촉하는 대상에 관한 규정을 제시합니다. 레위기 6:27은 속죄 제물의 고기에 닿는 것과 관련하여 거룩함을 다룹니다.
이러한 규정에서 거룩함은 개인의 마음속에만 있는 추상적인 성질이 아닙니다. 사람과 물건의 접촉, 제물의 취급, 예배의 장소와 절차에 영향을 미치는 제의적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예복을 거룩하게 여겼다는 것은 그 옷에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 질서 안에서 그 옷이 특별한 용도로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옷을 입고 백성에게 나아가는 것은 단순히 복장 예절을 어기는 일이 아닙니다. 거룩한 직무를 위해 구별된 것을 그 용도 밖으로 가져가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옷을 갈아입습니다.
거룩한 것과 일상적인 것은 서로 적이 아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벗은 뒤 백성에게 나아갑니다. 거룩한 공간과 백성의 공간은 서로 단절된 두 세계가 아닙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일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이동에는 규정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예배를 섬기고, 바깥뜰에서는 백성에게 나아갑니다. 둘 다 제사장의 삶에 속합니다. 그러나 같은 옷을 입고 두 공간을 아무 구별 없이 오가지는 않습니다.
이 구별은 마지막 절에서 성전 전체의 구조를 설명하는 원리로 발전합니다.
거룩한 직무와 권위
제사장은 거룩한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 옷은 제사장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식물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거룩한 제물을 먹습니다. 그러나 그 제물은 제사장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도록 아무렇게나 사용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다른 백성들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직무를 맡습니다. 그러나 그 가까움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신의 권력으로 소유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일수록, 자신에게 맡겨진 거룩함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만 에스겔 42장이 직접 가르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일과 종교를 구분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성전의 제의적 구별을 설명합니다. 오늘의 삶에 연결할 때에는 그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성전 밖으로 나가서야 전체의 크기를 알게 된다
15절에서 새로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가 안쪽 성전을 다 재고 나서, 동쪽을 향한 대문을 통해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 사방 둘레를 쟀다.에스겔 42:15 · 본디새김
성전 안의 각 부분을 보았을 때에는 성전 전체가 바깥세상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없었습니다. 이제 에스겔은 성전 전체를 둘러싼 외곽의 경계를 보게 됩니다.
안내자는 동쪽을 재고, 북쪽과 남쪽을 잽니다. 마지막으로 서쪽으로 돌아가 측량합니다. 사방이 각각 오백이라는 수치로 나타납니다. 이 반복은 성전 구역의 전체적인 형태가 일정한 사각형임을 보여 줍니다.
오백 장대인가, 오백 규빗인가?
본디새김은 16–19절을 ‘오백 장대 길이’로 옮겼습니다. 17–19절에는 오백과 장대가 함께 나타나므로, 본디새김의 ‘오백 장대’는 히브리어 본문의 자연스러운 읽기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번역은 이 부분에서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히 17절에서는 오백 규빗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20절에서도 규빗이라는 단위가 명시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어 번역을 따르면 외곽의 크기를 오백 규빗으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같은 오백이라는 수치이지만, 전체 한 변의 길이가 여섯 배 차이 납니다. 오백 장대를 따르면 성전 주변에 매우 넓은 구역이 펼쳐져 있게 됩니다. 오백 규빗을 따르면 상대적으로 작은 경계 안에 성전이 위치하게 됩니다.
또한 20절 자체에는 단위가 다시 명시되지 않습니다. 단지 길이와 너비가 각각 오백이라고 할 뿐입니다. 따라서 본디새김의 번역을 따라 읽을 수는 있지만, 성전의 전체 규모에 관해서 서로 다른 고대 본문 전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담이 얼마나 큰지는 본문 전통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지만, 왜 그 담이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자음 본문에는 ‘규빗들’을 뜻하는 암모트가 있지만, 마소라의 읽는 전통에서는 ‘백들’을 뜻하는 메오트로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다섯 백’, 곧 오백이 됩니다. 에스겔 40:5에 따르면 측량 장대 하나는 여섯 긴 규빗입니다.
마지막 담이 드러내는 성전의 목적
42장의 마지막 절은 지금까지의 긴 측량 기록을 한 문장으로 묶습니다.
그가 그것의 네 면을 쟀다. 그것에는 사방 둘레를 두른 담이 있었는데, 길이는 오백, 너비는 오백이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에스겔 42:20 · 본디새김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사라졌던 구별
에스겔 22:26을 보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거룩한 것들을 더럽혔습니다. 특히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고,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의 차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제사장들은 구별해야 할 것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새로운 성전에는 그 구별을 위해 담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사실은 곧 이어지는 44:23에서도 확인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차이를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의 담은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가르쳐야 할 진리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속된 것’은 악한 것인가?
42:20의 ‘속된 것’은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것, 곧 일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일상적인 것이 반드시 죄악되거나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제의 규정에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라는 구분과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이라는 구분은 서로 관련되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10:10은 이 두 쌍의 구별을 나란히 제시합니다. 어떤 것이 일반적인 용도로 사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의적으로 깨끗하다고 해서 모두 특별히 거룩하게 구별된 것은 아닙니다.
담 바깥의 세계 전체가 악하고 담 안쪽의 세계만 선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전 안쪽은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영역입니다. 그 바깥에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일상적인 영역에서 가족을 돌보고, 농사를 짓고, 거래하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은 그들의 일상적인 삶도 정의롭고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전과 일상 공간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서 성소에는 특별한 규정이 적용되었고, 제사장들은 그 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것을 합당하게 다루기 위해서였습니다.
42장의 담은 이러한 구별의 가장 바깥쪽 경계입니다.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 거하시면서도 그들과 구별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스라엘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통제 아래 들어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5:8에서는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 성소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성막의 건축 규정들은 그 공간을 어떻게 구별하고 사용해야 하는지 세밀하게 설명합니다.
맺음말 — 담이 둘러진 성전
과거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그 구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지금 바라보는 성전에는 그 구별이 다시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거룩한 제물은 거룩한 방에 있고, 제사장들의 예복은 그 방에 남겨집니다. 백성에게 나아가는 길은 열려 있지만, 그 길을 지날 때에는 옷을 갈아입어야 합니다.
에스겔 42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에스겔은 더 이상 거룩한 방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동쪽 대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안내자는 측량 장대를 들고 성전의 외곽을 따라 움직입니다. 동쪽을 재고, 북쪽을 잽니다. 남쪽을 잰 뒤 서쪽으로 돌아갑니다.
네 방향의 측량이 끝나자 성전 전체를 둘러싼 담이 드러납니다.
길고 반복적이었던 측량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안내자가 마지막으로 알려 준 것은 담의 높이도, 담을 쌓은 재료도 아닙니다. 그 담이 존재하는 이유였습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성전을 둘러싼 담은 그렇게 에스겔의 눈앞에 남아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