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3장

이 장의 자리 · 40–48장 · 새 성전 환상

돌아오는 영광과 회복되는 관계

에스겔 43장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건의 순서입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동쪽에서 돌아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그곳을 가득 채웁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영원히 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야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규정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일은 백성이 완벽하게 예배를 준비해 놓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돌아오시고, 그 임재 앞에서 백성이 자신들의 죄를 부끄러워하며 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이 장에는 하나님의 선제적인 은혜와 인간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응답이 함께 있습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43장 본문 읽기 →

동쪽에서 돌아오는 영광 — 심판의 환상이 회복의 환상으로

에스겔 43:1–5 본문 →

에스겔은 다시 동쪽을 향한 대문으로 인도됩니다.

그런데 보니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고 있었다. 그의 소리는 많은 물이 내는 소리 같았고, 땅은 그의 영광으로 빛났다.에스겔 43:2 · 본디새김

지금까지 성전 환상에서는 안내자의 움직임이 중심이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다녔고, 그가 측량했으며, 그가 건물의 용도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면의 중심이 바뀝니다.

측량하던 사람도, 측량 장대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시선이 동쪽에서 오시는 하나님께 집중됩니다.

왜 하필 동쪽인가?

에스겔 10:18–19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을 떠나 동쪽 대문 위에 머물렀습니다. 이어 11:23에서는 성읍 한가운데서 올라와 성읍 동쪽에 있는 산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3장에서는 동쪽에서 성전을 향해 돌아옵니다.

떠날 때의 이동 경로와 돌아올 때의 이동 경로가 서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경험했던 바로 그 백성에게, 그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떠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돌아오십니다.

에스겔 36:22–23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더럽혀진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 행동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43장에서 그 약속은 눈에 보이는 장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소리는 물결 같고, 땅은 빛납니다

에스겔 1:24에서 그는 살아 있는 생명체들의 날개 소리가 많은 물소리와 같고 전능자의 소리와도 같다고 묘사했습니다. 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들었던 소리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다는 묘사가 더해집니다.

앞선 환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이 버림받는 심판의 장면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제 같은 영광이 돌아오면서 땅을 밝힙니다. 그분은 죄악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으시는 분이며, 동시에 심판 이후에도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에스겔은 왜 과거의 환상을 세 번이나 떠올릴까요?

그 모습은 내가 보았던 환상의 모습과 같았고, 내가 그 성읍을 파괴하러 왔을 때 보았던 환상과 같았다. 그 환상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환상과 같았다. 나는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엎드렸다.에스겔 43:3 · 본디새김

첫 환상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에스겔 1장).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심판과 성전에서 영광이 떠나는 장면에 연결된 환상입니다(8–11장).

그가 그발 강가에서 보았고, 예루살렘의 심판 가운데서 보았던 바로 그 영광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 환상을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에스겔 1:28). 상황은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예언자의 반응은 같습니다.

성전을 가득 채우는 영광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동쪽을 향한 대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갔다」.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보니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에스겔 43: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40:34–35에서 성막을 완성한 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그곳을 가득 채웠던 사건과 연결됩니다. 열왕기상 8:10–11에서도 솔로몬 성전에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가득 차 제사장들이 서서 섬길 수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첫 번째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보고 있는 것은 유배의 상황에서 주어진 회복의 환상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곧 성전 안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왜 돌아오셨으며, 백성이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조금 더 깊이

43:3의 히브리어 베보이는 ‘내가 왔을 때’라는 일인칭 표현입니다. 문법적으로는 에스겔 자신이 성읍을 파괴하러 왔다고 말하는 형태입니다. 에스겔 9장에서 성읍을 심판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명하신 파괴자들에게 맡겨집니다. 에스겔 자신은 그 광경을 환상 속에서 목격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9:8). 따라서 43:3의 일인칭 표현은 당시 심판의 환상에 참여했던 예언자의 경험과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다른 전승은 ‘그가 왔을 때’로 읽지만, 예언자가 실제로 성읍을 파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에스겔이 ‘파괴하러 왔다’고 표현했는지는 여전히 어려움이 남습니다.

돌아오신 하나님은 자신을 왕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에스겔 43:6–9 본문 →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운 뒤, 에스겔은 성전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의 곁에는 앞서 성전을 안내하던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이곳은 내 왕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일 자리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다. 이스라엘 집안과 그들의 왕들은 자기들의 음행과 자기들의 산당에 있는 왕들의 시체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는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에스겔 43:7 · 본디새김

성전의 정체가 마침내 하나님의 입으로 밝혀집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왕궁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였지만, 동시에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시편 99:1은 여호와야훼가 왕이시며 크룹들 위에 앉으신다고 노래합니다. 시편 132:7은 하나님의 발이 놓이는 곳에서 예배하자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인간 왕의 궁전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여호와야훼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6–7장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일과 자기 왕궁을 건축한 일이 이어서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백성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왕들이 우상숭배를 조장하고 불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에스겔 43장에서는 무너진 나라의 왕궁을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보다 먼저, 하나님 자신의 왕좌가 어디에 있는지가 밝혀집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인간 왕의 권력을 되찾는 일이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참된 왕이심을 다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 선언은 에스겔 37:24–28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표현된 목자와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가 함께 약속되었던 말씀과도 어울립니다. 인간의 통치가 회복되더라도 그 통치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 아래 놓여야 합니다.

그런데 왕들의 시체는 왜 등장할까요?

에스겔서에서 음행은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와 언약에 대한 배신을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됩니다(에스겔 16장, 23장). 반면 왕들의 시체는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실제 왕들의 시신이나 무덤을 가리킨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왕들의 장례와 무덤이 하나님의 성소에 지나치게 가까이 놓여 거룩한 공간을 더럽혔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른 읽기는 왕들과 관련된 우상이나 죽은 우상들의 형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30에서는 하나님이 우상들의 시체와 관련된 강한 심판의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두 해석은 각각 문맥적 근거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왕들의 시체라는 표현이 실제로 있고, 동시에 우상숭배를 뜻하는 음행이라는 말이 나란히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만으로는 그 시체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어떤 모습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왕들의 무덤이 성전 바로 곁에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문지방과 문지방 사이에 벽 하나만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자기들의 문설주를 내 문설주 옆에 놓았을 때, 나와 그들 사이에는 벽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역겨운 짓들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래서 나는 분노하여 그들을 집어삼켰다.」에스겔 43:8 · 본디새김

벽은 본래 두 공간을 구분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벽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지방을 하나님의 문지방 곁에 놓았습니다.

이 표현을 실제 왕궁과 성전의 인접한 건축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왕의 공간이 하나님의 공간에 지나치게 가까이 놓였다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할 왕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비유적인 고발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정확한 건축적 상황을 재구성할 만큼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잘못은 왕궁과 성전이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 행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 곁에 왕궁이 있다는 사실이 왕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마음대로 이용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단순한 외교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에서 그 멸망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했던 백성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말씀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음행과 자기들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치워야 한다. 그러면 내가 그들 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이다.」에스겔 43:9 · 본디새김

용서는 하나님이 돌아오실 수 있다는 희망을 열어 주지만, 회복된 관계는 이전의 배신을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으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었던 이전의 행위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에서는 성전 안에서 말하는 소리와 곁에 서 있는 사람이 구별되어 등장합니다. 그런데 7절은 단지 「그가 내게 말했다」라고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직접 말하는 주체를 문법적으로 명확히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성전 안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도 있고, 곁에 서 있는 안내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어지는 내용이 하나님의 선언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본디새김의 「산당에 있는」이라는 표현도 해석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어 바모탐은 산당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지만, 왕들이 죽을 때를 가리키는 형태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왕들의 무덤이나 장례용 시설과 연결하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성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이유는 백성이 부끄러워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에스겔 43:10–12 본문 →

10절은 지금까지의 성전 환상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말씀입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 이 성전을 알려 주어라. 그들이 자기들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치수를 재어 보게 하여라.」에스겔 43:10 · 본디새김

왜 성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게 할까요?

백성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질서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무엇을 무너뜨렸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죄악을 저지르던 당시에도 성전은 존재했습니다. 제사장들도 있었고, 예배의식도 있었고, 거룩한 장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8장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성전 안에 우상들의 형상을 들여놓았습니다. 22:26에서 하나님이 고발하셨듯이, 제사장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성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과거의 행동을 비추어 볼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감정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배우는 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전의 치수를 재어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 성전을 막연하게 동경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구조를 살피고, 형태를 이해하고, 그 질서를 배워야 합니다.

부끄러워한다면 더 자세히 알려 줍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한다면, 성전의 형태와 배치와 출구들과 입구들과 그 모든 형태,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형태와 그 모든 법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기록하여라. 그들이 그 모든 형태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그에 따라 행하게 하여라.」에스겔 43:11 · 본디새김

10절에서는 먼저 성전의 모습을 알려 주어 백성이 부끄러워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성전의 모습을 보는 일이 죄에 대한 깨달음을 일으키고, 그 깨달음이 더 깊은 배움과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형태’, ‘배치’, ‘출구’, ‘입구’, ‘규례’, ‘법’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형태와 규례에 관한 말은 다시 반복됩니다. 이 반복을 반드시 서로 다른 건축 부재를 빠짐없이 나열한 전문 용어 목록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성전의 모습과 그곳에서 지켜야 할 질서 전체를 강조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기록된 내용을 지키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성전 환상을 건축 설계도에만 관심을 가지고 읽는다면, 하나님이 직접 밝히신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요구하는 것은 치수에 담긴 비밀을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배우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산꼭대기의 온 구역이 가장 거룩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 산꼭대기에 있는 성전의 온 구역은 사방 둘레에 걸쳐 가장 거룩하다. 보아라,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2 · 본디새김

여기서 ‘성전의 법’이라는 표현이 처음과 마지막에 반복됩니다. 그 사이에 놓인 핵심 명제는 성전의 온 구역이 가장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 안뜰과 바깥뜰, 제사장들의 방과 출입구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공간에 서로 다른 규정이 적용됩니다. 그렇다고 성전 구역 전체가 지성소와 동일한 접근 규정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에도 제사장과 백성의 출입에는 구별이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성전의 거룩함이 가장 안쪽 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전에 성전 한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다른 곳에서는 우상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집 전체가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셨고, 거룩한 집의 질서가 밝혀졌다면, 이제 그 집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지가 중요해집니다.

그 만남의 중심에 제단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36:25–27에서 하나님은 백성에게 깨끗한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고,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그분의 규례를 따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7:26–28에서는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자신의 성소를 그들 가운데 영원히 두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3장은 그러한 약속을 성전의 모습과 예배의 질서로 보여 줍니다.

높이 솟은 제단과 동쪽을 향한 계단

에스겔 43:13–17 본문 →

13절부터는 제단의 치수가 설명됩니다.

성소나 지성소의 내부가 아니라, 성전 앞 안뜰에 있는 제단입니다. 에스겔 40:47에서는 제단이 성전 앞에 놓여 있다고 이미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으로 들어가 그 안에 머무릅니다. 백성이 드리는 제물은 성전 앞의 제단에서 바쳐집니다.

아래는 넓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구조

본문은 밑받침에서 시작해 여러 단을 거쳐 제물이 불태워지는 화덕에 이르는 구조를 설명합니다. 13절에서는 기단과 밑받침의 치수가 주어집니다. 14절에서는 아래 단과 위 단 사이의 높이가 설명됩니다. 15–16절에서는 화덕과 네 뿔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화덕의 상단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열두 규빗입니다. 그 아래의 단은 각각 열네 규빗입니다. 이 때문에 제단은 단을 쌓아 올리면서 위쪽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단의 네 모퉁이에는 뿔이 있습니다. 제단의 뿔은 이스라엘의 이전 제사 제도에서도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7:2는 번제단의 네 모퉁이에 뿔을 만들도록 명하고, 레위기 4장에서는 속죄 제사를 드릴 때 피를 제단의 뿔에 바르는 규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에스겔이 본 제단의 뿔은 단순히 외관을 장식하기 위한 요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곧 이어지는 20절에서 그 뿔들에 피를 바르도록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단의 모양과 그곳에서 이루어질 예배 행위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단 화덕의 특별한 이름

이곳에는 하르엘과 아리엘이라는 형태가 등장합니다. 하르엘은 형태상 ‘하나님의 산’으로 이해할 수 있고, 아리엘은 ‘하나님의 사자’ 또는 제물이 불태워지는 화덕과 관련된 말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다만 두 표현이 제단의 서로 다른 부분을 가리키는지, 같은 부분을 달리 부르는지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제단의 구체적인 부재를 가리키는 전문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어원만으로 제단 전체의 상징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계단은 왜 동쪽을 향하는가?

단은 길이가 열네 규빗이고 너비도 열네 규빗으로 네 면이 같았다. 그 둘레의 테두리는 반 규빗이고, 그 밑받침은 둘레를 따라 한 규빗이었다. 제단의 계단은 동쪽을 향했다.에스겔 43:17 · 본디새김

이 계단을 통해 올라가는 사람은 일반적인 배치상 동쪽에서 제단으로 접근하며, 성전 방향인 서쪽을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에스겔 8:16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때 성전 안뜰에 있던 사람들은 성전을 등지고 동쪽을 향해 태양에게 절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등지고 해를 향했습니다. 새로운 제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동쪽에서 성전 쪽으로 향합니다.

물론 43:17이 8:16의 태양숭배를 의도적으로 뒤집었다고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확정적인 상징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서 안에서 두 장면을 함께 읽으면, 과거의 왜곡된 예배와 앞으로 이루어질 예배의 차이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셨는데도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하는 이유

에스겔 43:18–21 본문 →

18절에서 말씀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사람의 아들아,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제단을 만드는 날, 그 위에 번제물을 올리고 그 위에 피를 뿌리기 위한 제단의 규례는 이러하다.』」에스겔 43:18 · 본디새김

여기서 제단에 관한 설명은 치수에서 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제단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서, 그 제단을 어떻게 거룩하게 구별하고 사용할 것인가로 관심이 옮겨 갑니다.

「『너는 사독의 후손인 레위 제사장들, 곧 나를 섬기려고 내게 가까이 오는 이들에게 어린 수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주어야 한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43:19 · 본디새김

사독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전통과 연결되는 인물입니다(사무엘하 8:17; 열왕기상 2:35). 에스겔 44:15에서는 사독의 후손인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의 배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직무를 지켰기 때문에 가까이 나아와 섬기는 자들로 구별됩니다. 43장의 제단 봉헌에서도 그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은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아무에게나 맡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제단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속죄가 필요한가?

「『너는 그 피를 얼마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단의 네 모퉁이와 둘레의 테두리에 발라야 한다. 그렇게 제단을 정결하게 하고 그것을 위해 속죄해야 한다.』」에스겔 43:20 · 본디새김

여기서 ‘속죄’를 개인이 저지른 죄에 대한 용서라는 의미로만 생각하면 본문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서는 사람뿐 아니라 제단과 성소도 정결하게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레위기 8:15에서 모세는 제사장의 위임식 과정에서 수소의 피를 제단 뿔들에 바르고, 제단을 정결하게 하며 속죄합니다. 레위기 16:18–19에서도 속죄일의 의식 가운데 제단에 피를 바르고,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으로부터 제단을 깨끗하게 하는 규정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에스겔 43장의 규정을 읽으면, 제단이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제단 자체를 정결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정결 의식은 서로 대체되지 않는다

성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이루어질 제사도 합당한 방식으로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제단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제단 전체가 거룩한 용도로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21절에서는 속죄 제물인 수소를 성소 밖의 지정된 곳에서 태우도록 명하십니다. 제사에 사용된 제물에는 정해진 처리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사실이 제물을 마음대로 취급할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예배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거룩함을 실제로 존중하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화해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됩니다. 요한복음 1:14의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씀과 히브리서 9–10장의 제사와 속죄에 관한 설명은 그 주제적 발전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것은 에스겔 43장의 특정 구절을 직접 인용한 관계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주제를 이어 읽는 연결입니다. 에스겔 43장 자체가 먼저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여호와야훼가 다시 돌아오시며, 백성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거룩한 예배의 질서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일곱 날 동안 이어지는 정결과 소금의 의미

에스겔 43:22–26 본문 →

둘째 날에는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바치도록 명하십니다.

그 뒤에는 흠 없는 어린 수소와 숫양을 바칩니다. 24절에서는 제사장들이 제물에 소금을 뿌리고, 그것들을 여호와야훼에게 번제물로 올리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레위기 2:13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는 곡식 제물에 소금을 빠뜨리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제물에 함께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민수기 18:19에서도 소금의 언약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소금은 고대에 음식의 보존과 맛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성경에서는 지속되는 언약의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하지만 에스겔 43:24는 소금을 뿌리는 이유를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금을 제물의 부패를 막는 상징이라고 단정하거나, 제사장의 충성심을 뜻한다고 확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제단은 새롭게 보이고, 성전 역시 회복의 환상으로 제시되지만,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이스라엘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언약과 제사 규정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왜 이레 동안 정결하게 해야 할까?

「『이레 동안 그들은 제단을 위해 속죄하고 그것을 깨끗하게 하며 봉헌해야 한다.』」에스겔 43:26 · 본디새김

일곱 날이라는 기간은 출애굽기 29:35–37의 제사장 위임식과 제단의 속죄 규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제단을 위해 이레 동안 속죄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구별하도록 명하십니다. 두 본문 모두 새롭게 시작되는 예배 질서에서 제단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에스겔 43장의 이레 동안의 의식은 이미 존재하는 제단에서 평소처럼 제사를 드리는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단에서 이루어질 예배를 위해 그 제단 자체를 봉헌하는 과정입니다.

26절의 ‘봉헌해야 한다’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 ‘그것의 손을 채우다’라는 관용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출애굽기 29장에서 이 표현은 제사장을 위임하는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도록 구별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에스겔 43:26에서는 이 표현이 제단에 적용됩니다.

제사장을 직무에 세우는 것처럼, 제단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하도록 정식으로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제단은 단순히 제물을 태우는 시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 백성이 그분께 나아오는 예배의 장소입니다.

여덟째 날,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것은 제물만이 아니다

에스겔 43:27 본문 →

마지막 절에서 제단의 봉헌 의식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갑니다.

「『그들이 그 날들을 다 채우면, 여덟째 날부터는 제사장들이 제단 위에서 너희의 번제물과 너희의 화목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의 말이다.』」에스겔 43:27 · 본디새김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입니다.

그런데 목적어는 제물이 아니라 ‘너희’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제물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백성 자신을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물과 화목 제물이 함께 등장하는 이유

번제물은 제물을 불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화목 제물은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표현하며, 제물의 일부를 함께 나누는 식사의 요소도 포함합니다(레위기 1장, 3장, 7:11–21).

앞부분에서는 제단을 정결하게 하는 속죄 제물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번제물과 화목 제물이 등장합니다. 이제 제단은 정결하게 구별되었고, 백성이 정상적인 예배 관계 안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화목 제물이 포함된다는 점은 회복된 관계라는 이 장의 큰 흐름과 어울립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바칩니다. 백성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들을 받아들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단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따라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의 받아들이심 안에서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8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이레 동안 위임식의 과정을 거칩니다. 9장에서는 여덟째 날에 제사를 드리는 일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백성에게 나타납니다(레위기 9:23). 레위기 9장에서는 위임식 이후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나타나지만, 에스겔 43장에서는 영광이 돌아오는 장면이 제단 봉헌보다 먼저 서술됩니다. 이 점에서 에스겔 43장은 예레미야 31:31–34의 새 언약 약속과도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두 본문은 표현과 강조점이 다르지만, 모두 이스라엘이 깨뜨린 관계를 하나님이 다시 세우시려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맺음말 — 여덟째 날의 제단

에스겔 43:1–27 본문 →

떠나셨던 하나님이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자신의 왕좌를 되찾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거하실 곳을 거룩하게 하시고, 백성이 다시 그분께 나아올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배의 형식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지만, 형식의 정확성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장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그 질서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거대한 소리도, 땅을 비추는 빛도 더 이상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 제단에는 피가 발라졌고, 이레 동안의 정결 의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에 따라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이 왔습니다.

제단은 이제 백성의 번제물과 화목 제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끝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제단은 바로 그 관계를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의 제단 위에는 이제 백성이 드리는 제물이 올라갈 것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