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풀어 읽기 · 46장

이 장의 자리 · 40–48장 · 새 성전 환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과 삶의 자리

에스겔 46장은 성전의 문이 언제 열리는지에 관한 규정으로 시작하여, 제물을 삶는 작은 뜰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사이에는 통치자의 제물, 예배자들의 출입 경로, 날마다 드리는 번제, 그리고 통치자의 상속 재산에 관한 규정이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왔다면, 그분의 백성은 이제 어떤 질서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에스겔 43장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만으로 회복의 모든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습니다. 그분이 다시 거하시는 곳에서 누가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통치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백성의 삶은 어떻게 보호받아야 하는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 문제는 포로 생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성전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땅과 집, 공동체를 지탱하던 질서도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성전의 모습은 단순히 예배 시설을 다시 갖추는 문제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읽는 시간 17분소단락 746장 본문 읽기 →

열리는 동쪽 대문 — 통치자도 문턱에서 경배한다

에스겔 46:1–3 본문 →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동쪽을 향한 안뜰 대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 닫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열려야 하고, 초하루에도 열려야 한다.』」에스겔 46:1 · 본디새김

에스겔 44:1–2에서는 동쪽을 향한 바깥 대문이 닫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그 문을 통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게 하는 특별한 경계로 남습니다.

그러나 46:1에서 말하는 것은 동쪽을 향한 안뜰 대문입니다. 두 대문은 서로 다릅니다. 여기서 문이 닫힌다는 말은 성전 전체에 출입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특정 대문의 개폐가 예배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고, 초하루는 달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둘은 각각 한 주와 한 달의 리듬을 이룹니다. 백성은 단지 자신들의 일과 계절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가는 날을 중심으로 시간을 구별합니다.

그런데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통치자입니다.

「『통치자는 바깥에서 대문의 현관을 거쳐 들어와 대문 문설주 곁에 서야 한다. 제사장들은 그의 번제물과 화목 제물을 바쳐야 한다. 그는 대문 문턱에서 엎드려 경배한 뒤 나가야 한다. 대문은 저녁까지 닫혀서는 안 된다.』」에스겔 46:2 · 본디새김

통치자는 보통 백성보다 문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권한은 제사장의 직무를 차지하거나 제단 앞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권한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가 대문의 어느 지점까지 접근하는지를 건축학적으로 모두 분명히 밝히지는 않지만, 제사를 집행하는 제사장과 경배하는 통치자를 확실히 구별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왕권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왕이 종교적 권위를 자신의 권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위험은 이전 역사에서도 드러났습니다. 역대하 26:16–21에서는 웃시야가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하려다 심판받습니다.

그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여기서는 먼저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통치자가 경배를 마치고 나갔다고 문을 닫지 않습니다. 이 대문의 개방은 통치자 한 사람을 위한 행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땅의 백성은 안식일과 초하루에 그 대문 입구에서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한다.』」에스겔 46:3 · 본디새김

통치자와 백성이 같은 날, 같은 여호와야훼 앞에 엎드립니다. 접근하는 위치에는 차이가 있어도 경배의 대상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야훼의 문은 통치자가 떠난 뒤에도 열려 있습니다.

통치자가 마련하는 제물 — 높은 지위는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

에스겔 46:4–7 본문 →

안식일과 초하루에 통치자가 바쳐야 할 제물이 구체적으로 규정됩니다.

안식일에는 흠 없는 어린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초하루에는 여기에 어린 수소 한 마리가 더해집니다. 각 제물에 딸린 곡식과 기름의 양도 정해져 있습니다.

「『곡식 제물은 숫양 한 마리에 한 에바이고, 어린양들에게 딸린 곡식 제물은 그의 형편이 닿는 만큼이어야 한다. 기름은 한 에바마다 한 힌이어야 한다.』」에스겔 46:5 · 본디새김

7절에서도 같은 원칙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모든 제물을 자발적으로 원하는 만큼 바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정해진 최소 규정이 있는 부분과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구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앞 장인 에스겔 45:17을 보면, 통치자는 절기와 초하루와 안식일에 드릴 제물을 마련할 책임을 맡습니다. 백성의 예배가 지속되도록 필요한 제물을 제공하는 것이 그의 직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에스겔 34:2–4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만 먹이고 양 떼를 돌보지 않는 목자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양의 젖을 먹고 털을 입으면서도 약한 양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병든 양을 고치거나 잃어버린 양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회복된 성전의 통치자는 백성에게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보다, 백성의 예배를 위해 무엇을 마련해야 하는가를 먼저 듣습니다.

이것은 권력의 방향이 달라진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규정하는 안식일과 초하루의 제물 수량은 민수기 28:9–15의 규정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에스겔의 환상은 이전 제사 규정을 그저 반복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만으로 실제 어느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제도가 변경될 것인지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들어온 문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백성 —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통치자

에스겔 46:8–12 본문 →

제물에 관한 규정이 잠시 멈추고, 이번에는 예배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합니다.

「『통치자가 들어올 때에는 대문의 현관을 거쳐 들어오고, 들어온 길로 나가야 한다.』」에스겔 46:8 · 본디새김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백성에게 다른 규칙이 주어집니다.

「『그 땅의 백성이 정한 때에 여호와야훼 앞으로 들어올 때, 경배하려고 북쪽 대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쪽 대문으로 나가고, 남쪽 대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쪽 대문으로 나가야 한다. 들어온 대문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되고, 맞은편으로 나가야 한다.』」에스겔 46:9 · 본디새김

언뜻 서로 반대되는 명령처럼 들리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출입 경로를 다룹니다. 8절은 동쪽을 향한 대문을 사용하는 통치자의 경배 동선을 설명하고, 9절은 정한 절기에 북쪽과 남쪽 대문으로 드나드는 백성의 이동을 규정합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예배하러 모일 때 출입의 방향을 정해 주면 이동의 혼잡을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규정의 명시적인 이유라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들어올 때와 다른 문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두고, 예배자는 반드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자체는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여호와야훼 앞에 모인 백성의 이동까지 공동체의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통치자는 그들 가운데서 그들이 들어올 때 들어와야 하고, 그들이 나갈 때에는 함께 나가야 한다.』」에스겔 46:10 · 본디새김

앞에서는 통치자가 백성과 구별되는 접근 권한을 가졌지만, 여기서는 백성의 움직임에 함께 참여합니다. 에스겔 34장에서는 목자들이 양 떼를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제 회복된 공동체의 통치자는 백성 가운데서 함께 움직입니다.

11절에서 절기에 바칠 곡식 제물의 분량을 다시 밝힌 뒤, 12절에서는 자원 제물에 관한 특별한 규정을 제시합니다.

「『통치자가 자원하여 번제물이나 화목 제물을 여호와야훼에게 자원 제물로 바칠 때에는, 그를 위해 동쪽을 향한 대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는 안식일에 하는 것처럼 자기 번제물과 화목 제물을 바치고 나가야 한다. 그가 나간 뒤에는 대문을 닫아야 한다.』」에스겔 46:12 · 본디새김

안식일과 초하루에는 저녁까지 열어 두는 것과 다릅니다. 자원 제물을 바치는 통치자를 위해 특별히 문을 열어 줄 수 있지만, 그에게 문을 계속 열어 둘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자발적인 헌신은 허용되지만, 정해진 질서를 없애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통치자를 가리키는 단수 표현과 백성을 가리키는 복수 표현이 이어집니다. 이 수의 전환 때문에 마지막 동사를 통치자의 행동에 맞추어 이해할지, 함께 나가는 무리 전체에 맞추어 이해할지 번역상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장면의 중심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통치자는 백성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백성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아침마다 드리는 어린양 — 예배는 특별한 날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에스겔 46:13–15 본문 →

여기서 예배의 시간이 크게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안식일과 초하루, 절기와 자원 제물을 다루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야훼는 날마다 반복되는 제사를 명하십니다.

「『너는 날마다 흠 없는 한 살 된 어린양 한 마리를 여호와야훼에게 번제물로 바쳐야 한다. 아침마다 그것을 바쳐야 한다.』」에스겔 46:13 · 본디새김

특별한 절기에는 많은 사람이 성전에 모이고 여러 제물이 바쳐집니다. 그러나 그런 날들이 지나도 예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13–15절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아침마다」라는 표현의 반복입니다.

13절과 14절에 이 표현이 나타나고, 15절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14절은 이것을 「영원한 규례에 따라 끊임없이」 바쳐야 한다고 하며, 15절은 「늘 드리는 번제」라고 부릅니다.

이 반복은 제사의 양보다 그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온 성전이라고 해서 언제나 크고 놀라운 사건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는 다음 날 아침도 있고, 그다음 날 아침도 있습니다. 제물을 마련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고, 그것을 정해진 방식으로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별한 순간에만 경험하는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날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인정되고 기억되어야 할 현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출애굽기 29:38–42와 민수기 28:3–8에서도 일상적인 번제가 규정됩니다. 다만 모세오경의 해당 규정에는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가 함께 나오지만, 에스겔 46:13–15에서는 아침 제물만 명시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이 저녁 제사를 없애도록 명령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아침마다 바치는 제사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을 자기 땅에서 몰아내지 말라 — 거룩한 성전과 정의로운 땅

에스겔 46:16–18 본문 →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한다. 『통치자가 자기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면, 그것은 그의 상속 재산이며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상속 재산으로서 그들의 소유다.』」에스겔 46:16 · 본디새김

제사의 규정이 끝나자 갑자기 통치자의 재산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전에서 무엇을 바쳐야 하는지 이야기하다가 왜 가족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방법을 규정하는 것일까요?

원문에서는 「그의」라는 대명사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호하여, 받은 아들의 후손에게까지 이어지는 권리를 강조하는 것인지, 통치자 자신의 아들들이 누리는 상속권을 가리키는 것인지 해석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아들에게 주어진 재산이 정당한 상속 재산이 된다는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상속 재산에서 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면, 그것은 해방의 해까지 그 종의 것이 되었다가 통치자에게 돌아와야 한다. 다만 그의 상속 재산은 그의 아들들, 바로 그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에스겔 46:17 · 본디새김

아들에게 주는 선물과 종에게 주는 선물은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통치자의 가문에 속한 상속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영구히 이전하는 데 제한을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이르면 이 규정의 진짜 무게가 드러납니다.

「『통치자는 백성의 상속 재산을 빼앗아 그들을 소유지에서 몰아내서는 안 된다. 그는 자기 소유지에서 아들들에게 상속해 주어야 한다. 내 백성이 저마다 자기 소유지에서 흩어지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에스겔 46:18 · 본디새김

앞의 두 절에서는 통치자가 자기 재산을 누구에게 줄 수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그 재산을 어디에서 얻어야 하는지까지 규정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속 절차가 아니라 권력의 남용을 제한하는 명령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의 권력이 백성의 토지를 빼앗는 문제는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열왕기상 21:1–16에서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원했지만, 나봇은 그것이 조상의 상속 재산이라는 이유로 넘기기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이세벨의 계략으로 나봇은 죽임을 당하고, 왕은 그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에스겔도 같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45:8–9에서 여호와야훼는 통치자들이 더 이상 백성을 억압하지 말아야 하며, 폭력과 강탈을 버리고 백성을 소유지에서 몰아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6:18은 그 명령을 상속과 증여라는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합니다.

여기에는 「내 백성」이라는 표현과 「자기 소유지」라는 표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백성은 여호와야훼의 백성이고, 그들에게는 각자 살아갈 소유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잃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야훼께서는 그들이 각자의 땅에서 쫓겨나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통치자의 권한을 제한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땅을 잃었고,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에스겔 34:5–6에서 흩어진 양들은 돌보는 목자가 없어 온 산과 높은 언덕을 떠돌았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여호와야훼는 단순히 성전이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통치자의 압제 때문에 소유지에서 쫓겨나지 않는 질서를 말씀하십니다.

성전 안에서는 통치자가 제사장의 직무를 침범하지 못합니다. 성전 밖에서는 백성의 상속 재산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두 명령은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지만, 같은 원칙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권력을 맡은 사람도 자기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상속 재산에 관한 규정은 성전 예배의 이야기에서 벗어난 삽입물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임재가 회복된 공동체에서 정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의 해방의 해는 희년 제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에스겔 46장은 그 해가 몇 년마다 돌아오는지 따로 규정하지 않으므로, 레위기의 모든 세부 규정이 여기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시행되는지까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그리는 통치자를 어떤 인물로 이해할 것인지는 별도의 해석 문제입니다. 에스겔 34:23–24와 37:24–25에서 약속되는 다윗 계열의 통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46:16–18은 통치자의 아들들과 상속 재산을 현실적인 법률 관계로 다루고, 45:22에는 통치자 자신을 위한 속죄 제물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통치자의 모든 세부 묘사를 장차 오실 한 인물에게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기는 어렵습니다. 환상이 실제로 회복될 성전과 사회의 규정을 제시한다고 읽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이상을 성전의 모습으로 표현한다고 읽든, 이 장에서 드러나는 권력의 책임과 거룩함의 질서는 중요하게 남습니다.

성전의 네 모퉁이에 있는 부엌 — 거룩함에도 질서가 있다

에스겔 46:19–24 본문 →

18절까지 이어지던 여호와야훼의 말씀이 끝나자 장면이 바뀝니다.

에스겔을 인도하던 이가 다시 그를 데리고 성전 안을 이동합니다. 에스겔은 성전의 장엄한 중심 공간이 아니라, 제사장들의 방 뒤쪽에 있는 한 공간으로 인도됩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곳은 제사장들이 속건 제물과 속죄 제물을 삶고 곡식 제물을 굽는 곳이다. 그것들을 바깥뜰로 내어다가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에스겔 46:20 · 본디새김

보통 우리는 거룩하게 되는 것을 언제나 좋은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까요?

레위기 6:27은 속죄 제물의 고기에 닿는 것과 거룩함 사이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출애굽기 29:37에서도 거룩하게 구별된 제단에 접촉하는 것에 관하여 비슷한 원칙이 제시됩니다.

이 규정들에서 거룩함은 단지 사람의 마음속 경건이나 도덕적 순수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상태도 가리킵니다. 그리고 특정한 거룩한 대상과의 접촉은 다른 대상의 거룩한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46:20은 백성이 거룩해지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거룩한 제사에 속한 것들이 정해진 장소와 절차를 벗어나 백성에게 전달되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에스겔 44:19와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제사장들은 바깥뜰로 나갈 때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며 입었던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옷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은 거룩한 제물에 접촉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입는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을 막는다는 말씀을, 접촉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부정하게 된다는 식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에스겔이 바깥뜰로 나갑니다.

성전의 네 모퉁이에는 각각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네 뜰의 크기는 같고, 길이는 마흔, 너비는 서른입니다. 그 안쪽 둘레에는 단이 한 줄로 둘러서 있고, 그 아래에 제물을 삶는 시설이 있습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곳들은 음식을 삶는 집이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이 여기서 백성의 희생 제물을 삶을 것이다.」에스겔 46:24 · 본디새김

제물의 종류와 성격에 따라 준비하는 공간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성전은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임하는 장소인 동시에, 사람들이 실제로 찾아와 제물을 드리고 제사장들과 봉사자들이 정해진 일을 수행하는 장소입니다. 제사가 이루어지려면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희생 제물을 적절한 곳에서 다루어야 하고, 제사장들이 맡은 것과 백성을 위해 마련된 것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회복된 성전의 질서는 눈에 보이는 장엄함뿐 아니라 이런 구체적인 일들 속에서도 유지됩니다.

더욱이 네 모퉁이에 조리 공간이 있다는 묘사는 성전 뜰의 가장자리까지 백성의 제사를 위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 통치자의 예배를 위해 동쪽 대문을 열어 주었다면, 마지막 부분에서는 백성의 희생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 바깥뜰 곳곳에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통치자가 바치는 제물뿐 아니라 백성이 가져오는 제물도 제자리를 가집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둘러막힌 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드물고 형태가 특이해 정확한 건축적 의미를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23절에서 둘레의 구조물을 묘사하는 두 단어 역시 같은 구조물을 가리키는지, 서로 다른 부분을 가리키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46장이 보여 주는 회복의 질서

에스겔 46:1–24 본문 →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회복은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 경배하는 순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정당한 삶의 자리를 지키고,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며, 질서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데까지 미칩니다.

이 모든 규정에서 사람들의 역할과 권한이 무조건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통치자와 백성은 구별되고, 제사장과 다른 봉사자들의 직무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차지할 권리를 주지는 않습니다.

에스겔은 바깥뜰의 네 모퉁이를 지나갑니다. 네 곳에 같은 크기의 작은 뜰이 있고, 각각의 둘레에는 제물을 삶을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 봉사자들은 백성의 희생 제물을 준비할 것입니다.

한때 성전을 잃고 땅에서 쫓겨났던 백성에게, 이제는 다시 여호와야훼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올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통치자가 경배했던 동쪽 대문에서 시작된 이 장은 그렇게 백성의 제물을 준비하는 네 모퉁이의 작은 뜰에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