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장 · 세상과 사람의 시작
이름을 세우는 사람들과 떠나는 가족
바벨탑 이야기는 흔히 인간이 하늘까지 올라가려는 교만 때문에 벌을 받은 사건으로 설명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격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탑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들은 흩어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뜻을 품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세상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힘으로 모두가 모여 살 중심지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름을 오래도록 남기려 했습니다.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 자체가 잘못일까요? 협력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그런데 창세기 11장은 바벨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려 했지만, 이야기는 곧 셈의 족보로 옮겨 가고, 마침내 아브람이라는 한 사람의 가족에게 도착합니다.
앞부분에는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고, 뒷부분에는 자녀조차 없는 부부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흩어지지 않으려고 도시를 세우지만, 뒷부분에서는 한 가족이 살던 곳을 떠납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계획 — 시날 평야에 모인 사람들
이미 여러 민족이 나왔는데, 왜 다시 하나의 언어일까?
11장은 온 땅의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10장에서는 이미 여러 민족이 저마다의 언어와 땅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10:5, 20, 31). 그렇다면 11장은 시간 순서가 뒤바뀐 것일까요?
10장은 노아의 후손들이 여러 민족과 지역으로 퍼져 나간 결과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11장은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따라서 11장은 10장 이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언어 분화 사건이라기보다, 10장에서 이미 소개한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돌아보는 이야기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들은 왜 시날에 머물렀을까?
2절에서 사람들은 이동하다가 시날 땅의 평야를 발견하고 그곳에 정착합니다.
시날은 이미 10:10에서 바벨이 속한 지역으로 등장했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지역과 연결되는 지명입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왔는지, 동쪽으로 이동했는지는 히브리어 표현상 해석이 갈리므로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했다. 「자, 벽돌을 만들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들은 벽돌을 돌로 삼았고, 역청을 회반죽으로 삼았다.창세기 11:3 · 본디새김
메소포타미아의 평야에서는 벽돌과 역청이 대규모 건축에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불에 구운 벽돌은 햇볕에 말린 벽돌보다 습기에 강해 견고한 건축물을 세우는 데 유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재료가 있었고, 기술이 있었으며, 그 기술을 함께 활용할 조직력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성격은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흩어지지 않도록」 — 도시를 세우려는 진짜 이유
그들이 말했다. 「자, 우리가 온 땅 위로 흩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성읍과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고, 우리 이름을 떨치자.」창세기 11:4 · 본디새김
흩어짐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외부의 위협 때문인지, 경제적 안정 때문인지, 집단의 결속을 유지하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앞선 창조 이야기와의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28). 홍수 이후에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같은 방향의 명령을 주셨습니다(9:1, 7).
그런데 바벨의 사람들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의식적인 반역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들이 이전 명령을 기억하고 고의로 거부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더 확실한 것은 두 방향이 서로 긴장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방향은 땅에 충만하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계획은 한곳에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탑을 세우려 합니다.
이 표현을 반드시 문자 그대로 하늘에 침입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명기 1:28에서도 성읍의 높은 성벽을 하늘까지 닿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이는 엄청난 높이를 강조하는 고대의 표현 방식입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높은 계단식 탑인 지구라트를 도시의 종교적 중심에 세우기도 했습니다. 바벨탑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건축 문화이지만, 창세기 11장은 탑의 정확한 형태나 용도를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지구라트와 동일시하거나, 그들이 탑으로 하나님의 거처를 침범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흩어짐을 막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미래를 붙들어 두려 합니다.
탑은 바로 그 열망이 눈에 보이는 형태를 얻은 것입니다.
높이 쌓은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는 하나님
하늘에 닿는 탑이 왜 하나님께는 내려와야 보이는가?
여호와야훼가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왔다.창세기 11:5 · 본디새김
사람들의 눈에는 그 건축물이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속 하나님은 내려오셔야 할 만큼 그 위에 계십니다. 자신들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거대한 건축물이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작아집니다.
더욱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겠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5절은 그들을 그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세우려는 이름과 하나님 앞에 놓인 그들의 실제 모습 사이에 거리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왜 그들의 가능성을 제한하실까?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보아라, 이들은 한 백성이고 모두 언어가 하나다. 이것이 그들이 하는 일의 시작이니, 이제 그들이 하려고 계획하는 일 가운데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을 것이다.」창세기 11:6 · 본디새김
여기서 「불가능한 것은 없을 것이다」는 인간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철학적 선언이 아닙니다. 지금 시작한 공동의 계획이 앞으로 더욱 확대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만 그 계획의 문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흩어짐을 막는 데 있는지, 인간의 자율적인 권력 집중과 자기 이름의 추구에 있는지, 또는 이 두 가지가 결합한 데 있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은 인간의 단합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언어와 뛰어난 협력 능력이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사람들의 「자」와 하나님의 「자」
3절에서 사람들은 「자, 벽돌을 만들어」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자, 우리가 ... 성읍과 ... 탑을 세우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7절에서 여호와야훼도 같은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뒤섞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세기 11:7 · 본디새김
사람들은 서로 같은 말을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야훼는 바로 그 소통의 기반을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셨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탑을 무너뜨리시거나 도시를 파괴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죽음이 닥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여호와야훼가 그들을 거기서 온 땅 위로 흩어 놓았다. 그들은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창세기 11:8 · 본디새김
처음에 사람들은 서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을 시작했습니다(11:3). 이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자 일을 멈춥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정확하게 맞물립니다.
더구나 8절은 탑이 아니라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세우려 했던 것은 단순한 높은 건축물이 아니라, 흩어지지 않고 살아갈 하나의 거대한 중심지였습니다.
그 중심지를 형성하려던 계획 전체가 멈춘 것입니다.
동시에 홍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심판의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도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모두 없애지 않으시고, 그들이 함께 추진하던 일을 제한하십니다.
언어가 나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일이 그들에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를 단순히 축복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더 이상 한곳에 집중되지 못하도록 막으셨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파괴만이 아니라 제한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에 남은 반전
9절은 성읍의 이름이 바벨이라고 불린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남은 이름은 그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는 이름이 아닙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에는 그들의 언어가 뒤섞이고, 흩어짐을 막으려던 계획이 실패한 사건이 담깁니다.
이름을 남기려 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읽는 바벨의 의미
바벨은 이후 성경에서 더욱 커다란 의미를 지닌 이름이 됩니다.
예레미야 50–51장에서 바벨론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강대한 제국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47장에서도 바벨론은 자기 권세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 본문들이 창세기 11장을 직접 인용하여 바벨탑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권력과 명성이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제한된다는 주제는 분명하게 연결됩니다.
신약의 사도행전 2:1–11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는 바벨의 언어 혼란과 대조하여 읽을 수 있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모든 언어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언어로 복음을 알아듣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하나님의 내면적 동기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협력할 때 얼마나 큰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앞선 4절에서 그들이 그 능력을 어디에 사용하려는지가 드러났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개입은 단순히 인간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질투하시는 행동으로 읽기 어렵습니다. 이미 드러난 인간의 계획과, 그 계획이 더욱 확장될 가능성에 대한 대응으로 읽는 편이 본문 흐름에 더 잘 맞습니다.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가」라고 말씀하시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본문에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늘 회의를 배경으로 이해하는 읽기와, 신적 자기 숙의의 표현으로 보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후대 기독교 전통에서는 삼위일체와 연결해 읽기도 하지만, 이 구절 자체가 삼위일체를 명시적으로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바벨은 바벨, 바벨론이고, 「뒤섞다」는 발랄입니다. 두 단어의 소리가 비슷합니다. 창세기는 이 소리의 유사성을 이용해 바벨이라는 지명을 설명합니다. 이는 히브리어 본문 안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유희이지, 반드시 그 도시 이름의 역사적 어원을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온 땅에서 한 계보로 — 셈의 내력
왜 갑자기 긴 족보가 등장할까?
바벨 이야기가 끝나면 창세기는 전혀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앞에서는 온 땅의 사람들이 함께 말하고 함께 일했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그 사람이 아들을 낳고, 세월이 흐르고, 다음 세대가 태어납니다.
셈의 내력은 이러했다. 홍수가 있은 지 두 해 뒤, 셈은 백 살에 아르박삿을 낳았다.창세기 11:10 · 본디새김
셈에서 아르박삿으로, 셀라에서 에벨로, 벨렉에서 르우로, 이어 스룩과 나홀을 거쳐 데라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계보의 끝에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인류 전체의 이야기에서 한 가족의 이야기로 독자를 안내하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이 세우려던 「이름」과 셈이라는 이름
11:4에서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떨치자」고 말할 때,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셈(שֵׁם), 이름입니다. 그런데 11:10에서 계보의 첫 인물로 등장하는 셈의 이름도 똑같이 셈입니다.
물론 이 동일한 철자만으로 두 단락 사이에 의도적인 말장난이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서는 분명한 대조가 생깁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크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다음 창세기는 역사에 남을 거대한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평범한 출생과 세대의 연결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12:2).
인간이 자기 이름을 세우려는 계획과 하나님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이 서로 다른 출발점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에게 주어질 약속은 그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그 약속의 범위는 땅의 모든 가족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셈의 족보는 왜 세월을 자세하게 기록할까?
10–26절의 족보는 거의 일정한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누군가가 일정한 나이에 아들을 낳습니다. 그 뒤에도 여러 해를 살면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로 넘어갑니다.
5장의 족보에서는 각 인물의 생애가 끝날 때 반복해서 「죽었다」는 말이 붙습니다. 반면 11:10–26에는 각 인물이 죽었다는 말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이 차이만으로 죽음의 신학적 의미가 달라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5장의 족보는 사람이 오래 살아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환기합니다. 11장의 족보는 한 사람이 다음 사람을 낳고, 그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흐름에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삶은 계속됩니다.
다만 기록된 수명은 홍수 이전의 긴 수명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줄어듭니다. 셈은 모두 육백 년을 살지만, 뒤로 갈수록 생애의 길이가 대체로 짧아집니다. 물론 각 세대마다 일률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수명들의 정확한 역사적 의미나 계산 방식을 본문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족보의 핵심 기능은 그 수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수 이후의 세대들이 끊어지지 않고 아브람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벨렉의 이름과 흩어진 세계
족보 한가운데에는 벨렉이 있습니다(11:16–19).
그런데 벨렉은 앞선 10:25에서 이미 특별한 설명과 함께 등장했습니다. 그의 시대에 땅이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벨렉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에서 「나누다」와 관련된 말과 연결됩니다.
이 나뉨이 바벨의 언어 혼란을 직접 가리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10:25는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뉨이 인간 역사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세상에서도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새로운 세대가 이어집니다.
이 족보는 하나님이 흩어진 세계를 버리셨다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도록 합니다.
데라의 집안 — 죽음과 불임,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동
족보가 한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는 순간
데라의 내력은 이러했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다.창세기 11: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차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여기부터는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단순한 이름의 목록이 이야기가 되는 순간입니다.
하란의 죽음과 남겨진 롯
28절은 하란이 아버지 데라가 살아 있을 때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전 족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일이 등장합니다.
하란에게는 롯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롯은 아버지를 잃은 상태로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데라가 가족을 데리고 떠날 때 롯도 함께 데려갑니다.
창세기는 아브람을 처음부터 홀로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그는 상실을 경험한 가족의 일원이며, 여러 친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래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사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다.창세기 11: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세대마다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가 끊임없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가족에 이르자 그 반복이 멈춥니다.
창세기 11장은 셈에서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그 긴 계보의 끝에서 독자가 마주하는 것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아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손과 민족에 관한 약속을 주시는 창세기 12장 이후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이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 출발점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 약속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11장의 독자가 알고 있는 것은 사래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도덕적 잘못이나 하나님의 벌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약속이 시작되는 자리는 이미 자손이 풍성한 집안이 아니라, 더 이상 다음 세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부부의 현실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났지만, 하란에 머뭅니다
31절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이자 자기 손자인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이자 자기 며느리인 사래를 데리고 함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갈대아 사람들의 우르를 떠났다. 그들은 하란까지 와서 거기에 살았다.창세기 11:31 · 본디새김
우리는 흔히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나는 창세기 12장의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11장에서는 데라가 먼저 가족을 이끌고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본문은 데라가 왜 가나안에 가려고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왜 그곳에서 멈췄는지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데라가 나이가 많아서인지, 생활이 안정되었기 때문인지,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데라가 산 세월은 이백오 년이었다. 데라는 하란에서 죽었다.창세기 11:32 · 본디새김
따라서 이 가족에게는 두 가지 미완의 현실이 남아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이 끝나지 않았고, 아브람의 가문도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그 상태에서 이야기를 멈춥니다.
두 개의 미완성 — 바벨의 성읍과 데라의 여정
두 이야기에서 인간의 계획은 모두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의 의미가 같지는 않습니다. 바벨에서는 여호와야훼가 직접 개입하여 계획을 저지하십니다. 데라의 여정에서는 그렇게 멈춘 이유가 밝혀지지 않습니다.
거대한 도시를 세우려던 사람들의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반면 아무런 대단한 성취도 보여 주지 못한 한 가족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하려 합니다.
그 가족에게 아직 주어진 약속은 없습니다. 사래에게는 아이가 없고, 데라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가족은 가나안이 아닌 하란에 머물러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하늘에 닿는 탑의 꼭대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떠났지만 아직 그곳에 이르지 못한 가족, 다음 세대를 기다리지만 아직 자녀가 없는 부부가 있는 하란에서 끝납니다.
온 땅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세우려던 이야기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아브람의 가족에게 자리를 내어 줍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그 가족을 하란에 남겨 둔 채, 다음 말씀을 기다리게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