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2–24장 · 아브라함의 길

복이 되라는 부르심과 위태로운 복

창세기 12장은 놀라운 약속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실 뿐 아니라,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씨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의 개인적인 성공보다 훨씬 큰 목적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장의 끝에 이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브람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말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래는 파라오의 집으로 이끌려 가고, 아브람은 그 덕분에 재산을 얻습니다. 그리고 파라오와 그의 집안에는 큰 재앙이 닥칩니다.

땅의 모든 씨족에게 복이 되어야 할 사람 때문에, 다른 집안이 재앙을 겪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한 것일까요? 아브람이 처음에는 믿음으로 출발했지만 곧바로 믿음을 잃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은 아브람이 어떤 행동을 하든 무조건 그를 편드시는 것일까요?

이 장의 중심은 아브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는가보다, 아직 온전하지 않은 아브람과 그의 가족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하시는가에 있습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612장 본문 읽기 →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목적지보다 먼저 주어진 말씀

창세기 12:1–3 본문 →

떠나라는 명령은 세 겹으로 주어진다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에게 말했다. 「네 땅과 네 친족과 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 본디새김

아브람에게 처음 주어진 말씀은 어떤 일을 성취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지금 속해 있는 곳에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먼저 「네 땅」입니다. 자신이 살던 지역과 생활의 기반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네 친족」입니다. 혈연으로 이어진 더 넓은 사람들의 관계망입니다.

마지막은 「네 아버지의 집」입니다. 자신이 속한 가장 직접적인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세 표현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다. 떠나야 할 대상이 점점 가까워집니다.

고대의 가족과 친족 관계는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었습니다. 가문은 생계와 보호, 재산과 상속, 사회적 소속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람에게 떠나라는 말씀은 단순한 이사 명령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관계와 질서에서 벗어나,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대가로 확실한 지도를 건네주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목적지에 관한 모든 정보를 받은 다음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받고 출발합니다.

앞 장에서 데라의 가족은 이미 가나안을 향해 이동하다가 하란에 머물렀습니다(11:31). 그러므로 아브람에게 가나안이라는 지명이 전혀 낯선 곳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12장 1절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람이 지리적으로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가 아닙니다. 앞으로 어디로 가고 무엇을 얻게 될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고 보여 주시는 분이 여호와야훼라는 사실입니다.

명령 하나를 둘러싼 약속들

아브람에게 요구된 것은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둘러싸고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약속이 연이어 나옵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고 너에게 복을 주며 네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되어라.」창세기 12:2 · 본디새김

아브람은 스스로 큰 민족을 만들어 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라는 명령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바로 앞 장과 하나의 대비가 나타납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려 했지만(11:4), 아브람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독자는 이미 사래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11:30). 아브람이 어떻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할 만한 현실적인 근거는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미 가능한 일을 확대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형편만으로는 그 성취를 예상하기 어려운 일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복이 되어라」 — 약속 안에 들어 있는 명령

2절의 마지막은 앞의 약속들과 문법적으로 다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아브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아브람이 잘되고, 번성하고, 유명해지기를 약속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복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그를 큰 민족으로 만드시며, 그의 이름을 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행동에 기초하여 아브람은 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습니다.

복은 아브람에게 도착하여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어져야 합니다.

「땅의 모든 씨족」 — 한 사람을 향한 약속이 온 땅을 향한다

3절에서는 약속의 범위가 더욱 넓어집니다.

「너에게 복을 빌어 주는 이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업신여기는 자는 내가 저주하겠다. 땅의 모든 씨족이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기 12:3 · 본디새김

「업신여기는 자」에 해당하는 표현에(⁨קָלַל⁩)는 칼랄이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기본적으로 가볍게 여기거나 낮게 취급한다는 뜻을 가질 수 있고, 저주한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반면 하나님이 「저주하겠다」(⁨אָרַר⁩)고 말씀하실 때에는 아라르라는 다른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람이 아브람을 가볍게 여기거나 저주하는 행동과,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가 같은 말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문장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브람을 외부의 태도와 위협 앞에 홀로 두지 않으시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아브람을 보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10장에서 여러 민족이 씨족과 언어와 땅에 따라 나뉘어 등장했던 것을 생각하면, 「땅의 모든 씨족」이라는 표현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지만, 그 목적은 그 사람 안에 갇히지 않습니다.

다만 마지막 문장은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베니브레쿠 베카는 「너를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로 읽을 수 있지만, 「사람들이 너를 본보기로 삼아 자기들에게 복을 빌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할 가능성도 논의됩니다.

전자는 아브람을 통해 실제로 복이 전해지는 것을 강조하고, 후자는 아브람이 복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되는 측면을 강조합니다. 창세기 48:20에는 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비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두 읽기의 강조점은 다르지만, 어느 경우든 아브람에게 주어진 복의 의미가 아브람 자신을 넘어선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제 독자는 한 가지 질문을 품게 됩니다. 과연 이 아브람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그 땅은 아직 그의 것이 아니다

창세기 12:4–9 본문 →

아브람은 말씀대로 떠난다

4절은 아브람의 반응을 매우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야훼가 자기에게 말한 대로 길을 떠났고, 롯도 그와 함께 갔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창세기 12:4 · 본디새김

아브람이 마음속으로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가족들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떠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지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아브람의 믿음은 감정적인 확신이나 장황한 신앙고백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삶의 자리를 옮기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이제 막 삶을 시작하는 젊은이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서는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자리에서 떠납니다.

또한 아브람은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래와 조카 롯,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 모아 놓은 재산을 모두 데리고 떠납니다. 이는 한 개인의 여행보다 훨씬 큰 이동입니다. 특히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이 어떤 지위에 있었는지, 어떤 경위로 아브람의 집안에 속하게 되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브람 개인에게 주어졌지만, 그의 응답은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까지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드러난 현실

5절은 마침내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선언합니다.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세겜이라는 곳까지, 모레의 테레빈나무까지 갔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창세기 12:6 · 본디새김

하나님이 아브람을 어떤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해서 그 땅이 곧바로 아브람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는 이미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오래된 생활의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 거리가 있습니다.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바로 그 자리에서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했다.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난 여호와야훼를 위해 거기에 제단을 쌓았다.창세기 12:7 · 본디새김

앞에서는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이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실제로 도착한 장소에서 약속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람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이미 일흔다섯 살이고, 사래에게는 아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가나안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이 자리에서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주민들과 미래의 후손 사이에 생기는 긴장은 이후 창세기와 구약 전체에서 계속 다루어질 문제로 남습니다.

아브람의 반응은 그 땅을 즉시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제단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응답입니다. 본문은 이를 땅의 소유 선언이나 경계 표시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그 땅의 주인이 되는 일이 아니라, 그곳에서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천막과 제단 — 아브람이 남긴 두 가지 흔적

8절에서 아브람은 벧엘 동쪽 산지로 옮겨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천막을 치고, 다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릅니다. 천막은 옮길 수 있는 거처입니다. 한곳에 영구적으로 정착하기보다 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방식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반면 제단은 아브람이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를 예배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브람의 삶은 아직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도 계속 이동합니다. 그럼에도 이동하는 장소마다 하나님을 향한 응답이 이어집니다.

또한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을 소리 내어 호명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문맥상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찾는 행위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4:26에서도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다시 길을 떠나 네게브 쪽으로 이동합니다.

약속의 땅에 찾아온 기근 — 믿음은 굶주림을 없애 주지 않는다

창세기 12:10 본문 →

그 땅에 기근이 들었다. 아브람은 얼마 동안 머물러 살려고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 땅의 기근이 심했기 때문이다.창세기 12:10 · 본디새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과, 그가 도착한 땅에서 심각한 기근을 겪었다는 사실이 나란히 놓입니다. 아브람이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기근이 들었다는 설명은 없습니다. 이 기근을 특별한 영적 시험으로 규정하는 말씀도 없습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의 물을 이용해 농경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강우에 크게 의존하는 가나안과 다른 식량 사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창세기 41–47장에서도 식량 부족 때문에 사람들이 이집트에 의존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는 굶주림의 위협 속에서 생존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본문은 그 이동 자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앞에서는 아브람이 여호와야훼가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하나님이 다시 지시하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차이만으로 아브람의 이동이 불순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서술의 초점이 달라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보다, 위협적인 상황을 마주한 아브람 자신의 판단과 행동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마음속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당신 덕분에 내 목숨이 살아남도록」 — 사래를 위험에 놓는 아브람

창세기 12:11–16 본문 →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무엇인가?

이집트에 들어갈 무렵 아브람은 사래에게 말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면 『이 여자는 저 사람의 아내다』 하고 말할 것이오. 그리고 나를 죽이고 당신은 살려 둘 것이오.」창세기 12:12 · 본디새김

그의 생각에는 일정한 논리가 있습니다. 사래를 원하는 권력자가 있다면 남편인 자신이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집트 사람들이 실제로 아브람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뒤이어 사래가 왕궁으로 이끌려 가는 것은 그의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를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입니다.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 당신 덕분에 내 목숨이 살아남도록 부디 당신이 내 누이라고 말해 주오.」창세기 12:13 · 본디새김

아브람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감추면 아브람의 위험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사래를 원하는 사람이 그녀를 데려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아브람은 사래가 자신의 아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감추어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잘못 이해하도록 만들려 합니다.

그의 말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드러내는 기만적인 행동입니다.

사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브람은 말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은 사래를 봅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은 사래를 칭찬합니다. 파라오는 사래를 궁전으로 데려가고 아브람에게 재산을 줍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사래의 말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사래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브람의 요구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파라오의 집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녀가 파라오의 집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12:15). 사래가 상황을 주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서술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아브람에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열쇠입니다.

파라오의 신하들에게는 왕에게 소개할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파라오에게는 아내로 삼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래 자신의 의사는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 침묵을 놓치면 이집트 이야기를 아브람이 위기를 극복하고 재산까지 얻은 성공담으로 잘못 읽기 쉽습니다.

아브람이 바라던 일이 정말 이루어졌다

16절에서는 아브람의 계획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록합니다.

파라오는 그 여자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해 주었다. 아브람에게는 양과 염소 떼와 소 떼와 수나귀들과 남종들과 여종들과 암나귀들과 낙타들이 생겼다.창세기 12:16 · 본디새김

13절에서 아브람은 「당신 덕분에 내가 잘되고」라고 말했습니다. 16절에서는 파라오가 「그 여자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래는 파라오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일이 정말로 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16절은 하나님이 그 재산을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파라오가 사래 때문에 아브람에게 잘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과, 아브람이 자신의 계산으로 얻어 낸 유익을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사래를 위험에 놓은 일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바꿉니다.

조금 더 깊이

나중에 창세기 20:12에서 아브라함은 사라가 실제로 자신의 이복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단순히 혈연관계에 관한 완전한 거짓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문제의 핵심은 혈연관계의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사래의 혼인 관계를 감추려 합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 때문에」 — 하나님은 누구를 위해 행동하시는가?

창세기 12:17–20 본문 →

하나님의 행동이 시작되자 사래의 신분이 다시 드러난다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의 아내 사래 때문에 파라오와 그의 집안에 큰 재앙들을 내렸다.창세기 12:17 · 본디새김

앞에서 아브람이 감추려 했던 사실이 하나님의 행동을 서술하는 문장 안에서 다시 드러납니다. 파라오는 사래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아브람은 그 덕분에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 본문은 사래가 누구의 아내인지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아브람은 이미 목숨을 지켰습니다. 재산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위험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사래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사래의 안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확보하셨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라오의 집에 재앙이 닥치고, 그 결과 사래가 아브람에게 돌아오게 되는 흐름은 분명합니다.

파라오는 왜 재앙을 당했을까?

파라오는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적어도 파라오가 하는 말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전제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파라오와 그의 집안에 재앙이 내려졌을까요?

본문은 재앙의 이유를 「아브람의 아내 사래 때문에」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파라오가 아브람의 혼인 관계를 알면서 고의로 무시했기 때문에 재앙이 내려졌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습니다. 아브람이 문제를 만들었지만, 재앙은 파라오와 그의 집안에 닥칩니다.

본문은 그 불편함을 모두 해소해 주지 않습니다.

뜻밖에도 아브람을 책망하는 사람은 파라오다

파라오가 아브람을 불러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한 이 일이 무엇이냐? 그 여자가 네 아내라고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느냐?」창세기 12:18 · 본디새김
「왜 『그 여자는 내 누이입니다』 하고 말했느냐? 그래서 내가 그 여자를 내 아내로 삼았다. 이제 보아라,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가라.」창세기 12:19 · 본디새김

질문들은 모두 아브람의 행동을 향해 있습니다. 사래를 왕궁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은 권력자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에서 자신의 행동을 해명해야 하는 사람은 아브람입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사래에게 자기 생존 계획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물을 때에는 아무런 대답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람의 변명이나 회개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해명을 덧붙이지 않습니다.

이 침묵은 독자가 아브람을 성급하게 정당화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한 모든 행동이 옳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브람은 무엇을 가지고 이집트를 떠나는가?

파라오는 아브람에 관한 명령을 사람들에게 내렸다. 그들은 아브람과 그의 아내를 그가 가진 모든 것과 함께 떠나보냈다.창세기 12:20 · 본디새김

그러나 이 결말을 단순한 승리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위험에 빠뜨렸고, 파라오의 집안에 재앙이 닥쳤으며, 결국 파라오에게 책망을 듣고 이집트를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여호와야훼가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납니다. 끝에서는 파라오가 아브람에게 아내를 데리고 가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떠나보냅니다.

둘 다 떠나는 장면이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릅니다.

처음의 떠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마지막의 떠남은 아브람의 잘못된 판단이 드러난 뒤에 이루어진 퇴장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사건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호하는 행동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래가 파라오의 아내로 남게 되면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이어질 가족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장은 사래가 앞으로 아브람의 후손을 낳게 될 것이라고 아직 직접 밝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구체적인 후계 계획을 하나님이 이미 설명하신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 재앙을 3절의 「너를 업신여기는 자는 내가 저주하겠다」와 연결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가 처음부터 아브람을 업신여겼다고 볼 근거는 부족합니다. 실제로 그는 아브람에게 좋은 대우를 했습니다. 따라서 약속과 재앙 사이의 관계를 기계적인 보복 원리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19절에서 파라오는 사래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아내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혼인 관계가 실제로 어떤 절차를 거쳤고,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본문에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12장의 이집트 이야기는 창세기의 흐름 안에서 완결된 사건이지만, 훗날 출애굽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기근 때문에 이집트로 내려간 일은 출애굽 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창세기 46–47장). 그리고 훗날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억압을 겪습니다. 여호와야훼는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납니다(출애굽기 7–12장). 그러나 이를 동일한 사건의 반복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12장의 파라오는 아브람이 사래의 신분을 감춘 상황에서 등장하고, 출애굽기의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인물입니다. 두 사건의 도덕적 상황과 구체적인 전개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이집트의 권력에 개입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그곳에서 나오게 하신다는 큰 줄기는 연결됩니다.

맺으며 — 아브람의 손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창세기 12:1–20 본문 →

그는 더 많은 재산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후손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의 소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의 약속을 포기하셨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복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약속과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온전함을 전제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은 사람의 잘못까지 옳다고 만들어 주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사래가 단지 아브람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람의 생존과 재산만을 중심으로 사건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내 안전과 성공을 확보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파라오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람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아브람 곁에는 다시 사래가 있습니다.

처음 하란을 떠날 때에도 아브람은 사래와 함께였습니다. 이제 이집트를 떠날 때에도 두 사람은 함께입니다.

그 사이 아브람의 재산은 늘었지만, 그의 행동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늘지 않았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약속을 주신 뒤에도 이 가족의 현실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창세기 12장은 복을 받은 아브람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이 되라는 부르심에 아직 걸맞게 살아가지 못한 아브람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찾은 아내와 함께 다시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