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37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형들을 찾으러 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고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형들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하자 낯선 사람에게 길을 묻고, 마침내 도단까지 찾아갑니다.
그러나 형들은 그를 반기지 않습니다. 멀리서 요셉을 발견하자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그들은 동생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습니다. 그리고 그 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보냅니다.
이 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형들이 요셉을 미워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형제 사이의 증오가 되고, 형제의 증오는 거짓 소식을 만들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가족을 하나로 묶어야 할 관계들이 오히려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통로가 됩니다.
창세기 37장은 흔히 요셉의 꿈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는 이야기로 읽힙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요셉의 성공을 알고 읽으면 이 장이 지닌 불편함을 너무 빨리 지나치게 됩니다.
야곱의 내력은 왜 요셉으로 시작되는가
앞장에서 창세기는 에서의 후손들이 세일 산지에서 여러 씨족과 왕들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다시 야곱의 집안으로 돌아옵니다.
야곱은 자기 아버지가 나그네로 머물던 땅, 곧 가나안 땅에 살았다.창세기 37:1 · 본디새김
에서는 이미 여러 왕을 배출한 민족의 조상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살지만, 그곳의 왕도 통치자도 아닙니다.
다음은 야곱의 내력이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 형들과 함께 양과 염소 떼를 쳤다. 그는 아직 소년이었고, 아버지의 아내들인 빌하와 질파의 아들들과 함께 있었다. 요셉은 그들에 관한 나쁜 말을 그들의 아버지에게 전했다.창세기 37:2 · 본디새김
창세기에서 내력은 반드시 그 사람 자신의 생애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이어지는 후손들과 그 후손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포함합니다.
이제 창세기의 관심은 야곱이 무엇을 얻었는가에서 그의 아들들이 어떤 가족을 이루어 가는가로 옮겨 갑니다.
빌하와 질파는 각각 라헬과 레아의 여종이었고, 야곱에게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요셉이 서로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형들이 실제로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과장하여 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떤 동기로 그 말을 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처음부터 고자질하는 나쁜 동생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문제도 없는 모범적인 소년으로 소개되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성경은 독자가 그를 쉽게 평가할 수 없도록 그의 행동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에서는 형제들의 관계가 나빠진 더 근본적인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아들 가운데 요셉을 가장 사랑했다. 요셉이 그에게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요셉에게 긴소매 옷을 만들어 주었다.창세기 37:3 · 본디새김
야곱이 마음속으로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랑을 다른 아들들도 볼 수 있는 특별한 옷으로 드러내는 것은 다릅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추측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느 아들을 특별하게 여기는지 그 옷이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정 역시 부모의 편애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창세기 25:28). 그 편애는 장자의 권리와 축복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가족을 찢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 자신이 한 아들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합니다.
과거에 형제 사이의 편애로 고통과 갈등을 겪었던 사람이, 이제 자기 자녀들 사이에서 비슷한 갈등의 조건을 만들고 있습니다. 부모의 편애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편애가 갈등의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사실 역시 지울 수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다른 어느 형제보다 요셉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했다. 그들은 그에게 좋게 말할 수 없었다.창세기 37:4 · 본디새김
히브리어는 형들이 요셉에게 평화롭게 말할 수 없었다고 표현합니다. 아직 살인 계획도 없고 구덩이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의 관계는 이미 심각하게 망가져 있습니다.
이 장의 폭력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평안하게 말할 수 없게 된 자리에서 자라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나쁜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디바 라아는 좋지 않은 보고나 평판을 뜻합니다. 문맥에 따라 비난이나 악평의 뉘앙스를 가질 수 있지만, 이 표현만으로 그 말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긴소매 옷으로 옮긴 히브리어 케토네트 파심은 정확한 형태가 불확실합니다. ‘여러 색깔의 옷’으로 이해하는 오래된 번역 전통도 있고,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으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같은 표현은 사무엘하 13:18에서 왕의 딸 다말이 입었던 옷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평범한 작업복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옷이었다고 이해할 근거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양과 색깔을 정확히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개의 꿈 — 형들이 미워한 것은 요셉인가, 요셉의 미래인가
요셉은 꿈을 꿉니다.
첫 번째 꿈의 배경은 들판입니다. 요셉과 형들은 곡식단을 묶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섭니다. 다른 곡식단들은 그 주위를 둘러서서 절합니다.
꿈의 의미를 가장 먼저 해석하는 사람은 형들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말했다. 「네가 정말 우리 위에서 왕 노릇을 할 거냐? 네가 정말 우리를 다스릴 거냐?」 그들은 그의 꿈들과 그의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했다.창세기 37:8 · 본디새김
그는 곡식단들이 절하는 장면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형들은 즉시 그것을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미 요셉은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특별한 옷까지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제 꿈속에서도 그가 중심에 서고 형들이 그에게 절합니다.
형들에게 이 꿈은 단지 이상한 밤의 경험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는 동생이 앞으로 자신들까지 지배할 것이라는 위협으로 들립니다.
4절에서는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5절에서는 더욱 미워했습니다.
8절에서는 꿈들과 그의 말 때문에 더욱 미워했습니다.
그다음 요셉은 두 번째 꿈을 꿉니다.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고 형들에게 그 꿈을 이야기하며 말했다. 「보세요, 제가 또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보세요, 해와 달과 별 열하나가 제게 절하고 있었어요.」창세기 37:9 · 본디새김
첫 번째 꿈에서는 들판의 곡식단들이 등장했습니다. 두 번째 꿈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등장합니다. 땅 위의 농사 장면에서 하늘의 광대한 장면으로 바뀝니다. 절하는 이들도 형들에서 가족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확대됩니다.
요셉이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야기하자, 아버지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네가 꾼 이 꿈은 대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정말 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할 거란 말이냐?」창세기 37:10 · 본디새김
그런데 동시에 그 말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으나, 아버지는 그 말을 마음에 간직했다.창세기 37:11 · 본디새김
‘마음에 간직했다(שָׁמַר)’는 표현에는 지키거나 보존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야곱은 꿈을 무조건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지만, 무의미한 말로 버리지도 않습니다.
형들에게 꿈은 제거해야 할 위협이 됩니다.
아버지에게 꿈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계속 생각해 볼 말로 남습니다.
창세기 37장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셨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꿈을 해석해 주시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요셉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속한다고 말하게 되지만(창세기 40:8), 이 장에서는 아직 그런 신학적 설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꿈을 말한 행동을 완전한 순종으로 평가하거나, 반대로 자만심의 표현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첫 번째 꿈에는 곡식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형제들의 서열을 놓고 다투게 만드는 상징이지만, 곡식은 이후 요셉 이야기에서 생존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이집트에서 식량을 관리하게 된 요셉에게 형들이 찾아와 절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2:6, 9). 그때 요셉은 이 꿈을 기억합니다.
꿈의 의미가 밝혀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형들은 꿈을 없애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요셉의 어머니 라헬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창세기 35:19). 그런데 야곱은 ‘네 어머니’가 요셉에게 절하게 되느냐고 묻습니다. 라헬을 대신하는 가족 내 어머니 역할의 인물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있고, 꿈의 상징을 가족 구성원에 대응시키며 관용적으로 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는 이 장면이 서로 다른 이야기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그 어머니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 인물을 지목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제 형들을 찾고 있습니다」 — 평안을 묻기 위해 떠난 길
어느 날 요셉의 형들은 세겜으로 가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말했다. 「가서 네 형들이 잘 있는지, 양과 염소 떼가 잘 있는지 좀 살펴보고 내게 소식을 알려 다오.」 그는 요셉을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냈고, 요셉은 세겜에 도착했다.창세기 37:14 · 본디새김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형들의 평안(שָׁלוֹם)과 가축 떼의 평안을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앞서 형들은 요셉에게 평안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는 요셉을 보내 형들의 평안을 알아보라고 합니다.
요셉은 세겜에 도착하지만 형들을 찾지 못합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남자가 길을 헤매는 소년을 발견합니다.
요셉이 말했다. 「저는 제 형들을 찾고 있습니다. 형들이 어디서 가축을 치고 있는지 좀 알려 주십시오.」창세기 37:16 · 본디새김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평안하게 말을 나누지 못할 만큼 관계가 나쁘다는 것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형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가 두려움 없이 형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끝까지 찾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속마음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겜에서 형들을 찾지 못했다고 곧바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낯선 남자에게 길을 묻고,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말을 듣자 다시 그들을 찾아갑니다.
그는 마침내 도단에서 형들을 찾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름 모를 남자의 등장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가 알려 주지 않았다면 요셉이 형들을 찾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남자가 하나님의 사자였다고 본문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형들이 도단으로 가자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설명할 뿐입니다. 그의 정체를 신비로운 존재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꿈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
요셉은 형들을 찾았습니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을 보고, 그가 가까이 오기도 전에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창세기 37:18 · 본디새김
요셉은 아직 형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동생의 설명을 듣거나 그의 행동을 지켜본 뒤에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말도 요셉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말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온다.」창세기 37:19 · 본디새김
요셉은 더 이상 단순히 아버지가 편애하는 동생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들 위에 설 미래를 말하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형들은 그 미래를 거부합니다.
「자, 이제 그 녀석을 죽이고 구덩이 하나에 던져 넣자. 그리고 『사나운 짐승이 그 녀석을 잡아먹었다.』라고 말하자. 그 녀석의 꿈들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창세기 37:20 · 본디새김
그들은 요셉만 제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 자체를 없애려 합니다. 요셉이 죽으면 그의 꿈도 끝날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세운 계획대로 사건이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르우벤은 맏아들입니다. 그는 요셉을 죽이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광야의 구덩이에 넣자고 합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말했다. 「피를 흘리지 마라.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그를 던져 넣고, 그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이는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해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는 것이었다.창세기 37:22 · 본디새김
르우벤은 형제들을 설득해 요셉을 그대로 놓아주게 하지 못했습니다. 동생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죽이지 않도록 막는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왔을 때, 형들은 요셉의 옷, 곧 그가 입고 있던 긴소매 옷을 벗겼다.창세기 37:23 · 본디새김
이 행동은 실제로 요셉에게서 옷을 빼앗는 일인 동시에, 이야기 안에서 아버지가 부여했던 특별한 지위를 공격하는 행동으로 읽힙니다. 형들이 미워한 것은 요셉이라는 사람뿐 아니라 그가 누리고 있던 특별한 대우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요셉을 붙잡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구덩이는 비어 있었고, 그 안에는 물이 없었다.창세기 37:24 · 본디새김
요셉은 죽지 않았지만 자유를 잃었습니다.
형들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이미 동생을 살린 것은 아닙니다. 형들은 요셉의 생명을 즉시 끝내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가두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덩이는 물을 저장하는 데 사용되던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이 없는 구덩이라면 요셉이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전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는 물도 없고,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길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구덩이에는 동생이 있고, 형들은 음식을 먹는다
그들은 음식을 먹으려고 앉았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이스마엘 사람들의 행렬이 길르앗에서 오고 있었다. 그들의 낙타들은 향료와 발삼과 향기 나는 수지를 싣고 있었고, 그들은 그 짐을 이집트로 실어 내려가는 길이었다.창세기 37:25 · 본디새김
요셉이 구덩이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는 이 장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2:21에서 형들은 훗날 이 사건을 회상하며, 요셉이 괴로워하면서 자신들에게 간청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37장의 서술이 그의 간청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음식이 있습니다.
다른 쪽에는 물도 없는 구덩이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형제들이 다음 일을 의논합니다.
다른 쪽에서는 동생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살던 지역을 지나던 그 행렬은 곧 요셉의 삶을 완전히 다른 세계로 옮기게 됩니다. 그때 유다가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 피를 덮어 감춘들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창세기 37:26 · 본디새김
유다는 형제들에게 동생을 죽이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이유에는 경제적인 계산이 들어 있습니다. 죽여서 피를 감추는 것보다 상인들에게 팔자는 것입니다.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우리가 그에게 손을 대지는 말자. 그는 우리 동생이고 우리 살붙이니까.」 형제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창세기 37:27 · 본디새김
형제라는 사실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는 그것을 이유로 직접 죽이지 말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안하는 행동은 동생을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기는 일입니다.
유다의 말에는 일부 생명을 보존하는 효과가 있으면서도, 여전히 심각한 폭력이 담겨 있습니다.
르우벤은 요셉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유다는 그를 상인들에게 넘기자고 합니다. 둘 다 동생을 직접 죽이는 데 반대했지만, 동생의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은 같지 않았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갔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은 스무 셰켈에 팔았다.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로 데려갔다.창세기 37:28 · 본디새김
요셉은 이제 가족 안의 한 사람이 아니라 값을 매길 수 있는 거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구덩이로 돌아오자 요셉이 없습니다.
르우벤은 자기 옷을 찢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돌아가 말했다. 「그 애가 없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창세기 37:30 · 본디새김
그런데 그는 동생이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 대신,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맏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요셉을 죽이지 않으려 했던 형도 결국 요셉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은 요셉이 아니라 그의 옷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앞에서는 유다가 형제들에게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갔다고 한 뒤, 요셉을 끌어 올리고 판 행동이 이어집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이 행동들의 주어가 반복해서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형제들이 유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셉을 끌어 올리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미디안 상인들의 등장은 상인 집단에 대한 추가 설명이나 다른 거래 참여자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미디안 상인들이 요셉을 발견해 끌어 올린 뒤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는 읽기입니다. 이 경우 르우벤이 나중에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이 사라진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본문에는 이스마엘 사람들, 미디안 사람들, 마지막 절의 므단 사람들까지 서로 다른 명칭이 등장합니다. 이들을 동일하거나 연관된 교역 집단을 가리키는 여러 명칭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전승이 결합되면서 남은 차이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읽기가 정확한 역사적 과정을 재구성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문법적으로도 주어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은 스무 개 또는 스무 단위를 말하며, 셰켈이라는 단위는 문맥에 따라 보충된 것입니다. 이를 현대 화폐 가치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이 다시 옷에 속다
형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잡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 한 마리를 잡고, 그 옷을 피에 담갔다.창세기 37:31 · 본디새김
오래전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얻기 위해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때 리브가는 어린 염소들을 가져오게 했고, 야곱은 형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의 팔과 목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이 덮였습니다(창세기 27:9–16).
이번에도 염소가 등장합니다.
이번에도 옷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버지는 눈앞에 놓인 증거를 보고 잘못된 결론에 이릅니다.
이삭을 속일 때 야곱은 형의 옷을 자기 몸에 입었습니다. 이번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동생의 옷을 벗겨 피를 묻힙니다. 과거에는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얻으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를 속여 자신들의 범행을 숨기려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창세기가 야곱이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벌을 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신학적 인과관계를 직접 설명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들은 긴소매 옷을 보내 아버지에게 전달하고 말했다. 「이것을 저희가 찾았습니다. 아버지 아들의 옷인지 아닌지 좀 알아보십시오.」창세기 37:32 · 본디새김
형들은 요셉이 죽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죽였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이라는 실제 물건을 제시합니다. 그 옷에 피가 묻어 있다는 사실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요셉의 피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사실은 감춥니다.
그들은 일부의 진실을 이용해 전체적으로 거짓된 결론을 유도합니다.
아버지는 그 옷을 알아보고 말했다. 「내 아들의 옷이구나. 사나운 짐승이 그 애를 잡아먹었구나. 요셉이 틀림없이 찢겨 버렸구나.」창세기 37:33 · 본디새김
야곱은 자신이 본 증거를 알아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증거가 만들어진 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진실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추론이 전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입었던 옷에 피가 묻어 돌아왔다면 끔찍한 일을 상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증거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형들은 ‘아버지 아들의 옷’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동생의 옷’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요셉을 팔자고 제안할 때는 ‘우리 동생이고 우리 살붙이’라고 했었습니다.
이 표현의 정확한 심리적 의도까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 관계보다 아버지와 요셉의 관계를 앞세우는 말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서 이미 멀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에게는 죽은 아들이 됩니다.
위로하는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잃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믿습니다.
그는 자기 옷을 찢습니다. 거친 자루천을 허리에 두르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합니다.
형제들이 옷을 벗긴 것은 요셉에게 가한 폭력의 일부였습니다. 르우벤이 옷을 찢은 것은 놀라움과 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야곱이 옷을 찢는 것은 애도의 행동입니다.
같은 옷의 이미지가 폭력과 절망, 슬픔을 차례로 연결합니다.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딸이 일어나 그를 위로하려 했으나, 그는 위로받기를 거부하며 말했다. 「나는 슬퍼하며 내 아들에게로, 스올로 내려갈 것이다.」 요셉의 아버지는 그를 두고 울었다.창세기 37:35 · 본디새김
그 가운데는 요셉에게 일어난 일의 책임을 지닌 아들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습니다.
슬픔 자체는 진실하지만 그 슬픔을 일으킨 정보는 거짓입니다.
요셉이 사라지자 아버지의 사랑이 다른 아들들에게 온전히 돌아왔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요셉을 더욱 그리워하며 슬퍼합니다.
형제들이 없애려 했던 요셉은 집에서 사라졌지만, 아버지의 마음에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스올(셰올)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 구절에서 야곱이 강조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고 자신의 남은 생애를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요셉과의 이별이 일시적인 슬픔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스올로 내려가겠다고 하고, 요셉은 이집트로 내려간다
마지막 절은 장면을 갑자기 바꿉니다.
므단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요셉을 파라오의 관리이자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았다.창세기 37:36 · 본디새김
여기서 성경은 요셉이 이집트로 내려간 뒤 어떤 생각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도, 자신의 꿈을 기억했는지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요셉이 팔렸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문장은 이야기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지금까지 사건은 가나안 땅의 한 가족 안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요셉은 파라오의 관리에게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의 삶은 야곱의 가족을 넘어 이집트의 왕실과 연결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는 훨씬 넓어졌습니다.
이 마지막 장면을 곧바로 ‘하나님이 요셉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보내셨다’는 결론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37장은 아직 그런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 요셉을 이집트로 가게 만든 직접적인 사건은 형제들의 증오와 상인들을 통한 거래입니다.
이 시점에서 요셉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형들에게 버림받았고, 자유를 빼앗겼으며, 낯선 나라에 팔린 열일곱 살 소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경호대장’이라는 직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모두 포함했는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이 파라오의 관리이며 왕실과 관련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독자는 나중에 요셉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악한 일을 선한 결과로 이끄셨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창세기 50:20). 그러나 그 고백은 오랜 세월을 지난 뒤의 해석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 장에 너무 빨리 가져오면 형제들이 저지른 폭력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을 통해 미래를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 자신이 서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 갈 가족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은 그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모든 고통에 하나님이 미리 정해 두신 세부 목적이 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드러난 상실이 이야기 전체의 마지막 결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나안에는 아들이 죽었다고 믿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자신이 어디로 가게 될지 결정할 수 없는 아들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갈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독자는 둘 사이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야곱에게 남은 것은 요셉의 피 묻은 옷이지만, 요셉 자신은 그 옷 없이 이집트에 살아 있습니다.
창세기 37장은 그 두 장면을 나란히 놓은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