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풀어 읽기 · 50장
이 장의 자리 · 37–50장 · 요셉과 이집트
이집트에 남겨진 관과 끝나지 않은 약속
창세기는 한 사람이 죽어 관에 놓이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 사람은 요셉입니다. 형제들에게 팔려 이집트에 끌려갔지만, 마침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살려 낸 인물입니다. 아버지와 다시 만났고, 형제들과 화해했으며, 자손들이 자라는 모습까지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마지막을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인데, 창세기는 왜 이집트에 남겨진 관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야곱이 죽었을 때 아들들은 그의 시신을 가나안으로 옮겨 묻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었을 때에는 시신을 곧바로 옮기지 않습니다. 그는 언젠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그 땅으로 데려가실 때 자신의 뼈도 함께 가져가라고 명령합니다.
아버지는 약속의 땅에 묻히고, 아들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집트에 남습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그가 자신들에게 복수할까 두려워합니다. 이미 요셉에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은 두 가지 미완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형제들의 관계는 정말 회복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땅에 관한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입니까?
아버지를 가나안에 묻기까지 — 이집트의 애도와 가족의 약속
죽은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린 요셉
49장에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50장은 그 직후의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얼굴 위로 엎드려 아버지를 두고 울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창세기 50:1 · 본디새김
창세기 46장에서 요셉은 살아 있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을 때 그 목을 끌어안고 오래 울었습니다(46:29). 이제 그는 죽은 아버지의 얼굴 위로 엎드려 웁니다.
요셉은 한때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재회하여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이제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요셉은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던 일이 떠오릅니다(창세기 46:4). 50장은 요셉이 실제로 아버지의 눈을 감기는 동작을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의 죽음 곁에 있으며 마지막 사랑과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집트의 높은 관리이며 나라의 중요한 일을 책임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50장 첫 절에서는 그런 지위를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잃은 아들로 나타납니다.
왜 이집트 방식으로 방부 처리했는가
요셉은 자기를 섬기는 의사들에게 아버지의 몸을 방부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의사들은 이스라엘의 몸을 방부 처리했다.창세기 50:2 · 본디새김
방부 처리는 고대 이집트에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시행했던 장례 관습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집트 사람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 살아온 사람이고, 자신을 조상들의 무덤에 묻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왜 이집트 방식의 방부 처리가 시행되었을까요?
본문은 요셉이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시신을 가나안까지 운구해야 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몸을 보존하기 위한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요셉은 이집트의 높은 관리였으므로 이집트에서 통용되는 장례 기술과 인력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부 처리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야곱이나 요셉이 이집트의 사후 세계관을 받아들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는 그런 종교적 해석이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집트 방식으로 시신을 보존하지만, 매장 장소는 야곱이 명령한 가나안입니다.
방부 처리에는 사십 일이 걸렸고, 이집트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야곱을 위해 울었습니다. 본문은 방부 처리에 필요한 기간과 애도의 기간을 각각 기록하며, 두 기간이 서로 어떻게 겹쳤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이집트 왕도 아니었고, 이집트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의 아버지로서 큰 규모의 애도를 받습니다.
오랫동안 나그네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던 사람이 이집트의 공식적인 애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요셉은 왜 파라오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가
그를 위해 우는 기간이 지나자 요셉은 파라오의 집안 사람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저를 좋게 여기신다면, 부디 파라오께 다음 말을 전해 주십시오.」창세기 50:4 · 본디새김
그 이유가 궁정의 정해진 절차 때문인지, 애도와 관련된 관습 때문인지 본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요청을 전하면서 자신이 맹세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제 아버지께서 제게 맹세하게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나는 이제 죽는다. 내가 가나안 땅에 나를 위해 파 놓은 내 무덤에, 바로 거기에 나를 묻어 다오.』 이제 부디 제가 올라가 아버지를 묻게 해 주십시오. 그런 다음 돌아오겠습니다.」창세기 50:5 · 본디새김
파라오는 그 요청을 허락합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묻기 위해 왕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는 여전히 이집트의 권력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왜 이집트 사람들의 애도라고 생각했을까
야곱의 장례 행렬은 매우 큽니다.
파라오의 신하들과 집안의 장로들, 이집트의 장로들이 동행합니다. 요셉의 가족과 형제들도 함께 갑니다. 병거와 기병까지 따릅니다.
이 행렬은 야곱 개인의 장례이면서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참여하는 큰 행사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과 가축들은 고센 땅에 남겨 두었습니다. 이것은 온 가족이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행렬이 아니라 장례를 위한 방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족은 가나안으로 향하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여전히 이집트에 있습니다.
행렬은 아닷의 타작마당에 이르러 이레 동안 애도합니다.
그 땅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아닷의 타작마당에서 애도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집트 사람들이 이렇게 깊이 애도하는구나.」 그래서 그곳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했다. 그곳은 요단 건너편에 있다.창세기 50:11 · 본디새김
행렬에 이집트의 고위 인사들과 병거와 기병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가나안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야곱의 장례는 이집트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고, 가나안 땅의 지명에도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 긴 여정의 목적지는 따로 있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명령한 그대로 야곱을 막벨라 밭의 굴에 묻습니다.
약속을 이행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명령한 그대로 그에게 해 주었다.창세기 50:12 · 본디새김
그들은 서로 미워했고, 요셉을 팔았고,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슬픔을 안겨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마지막 명령 앞에서는 함께 움직입니다.
요셉 혼자가 아니라 아들들이 야곱을 가나안에 묻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수행했다는 사실만으로 형제들의 모든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들의 두려움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시신은 약속의 땅에 묻힙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가족은 이집트로 돌아갑니다.
가족의 장례는 마무리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이집트 생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카리티는 기본적으로 「내가 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앞 장에서는 막벨라의 밭과 굴이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사들인 소유라고 강조되었습니다(창세기 49:29–32). 다만 50:5의 동사는 ‘사다·장만하다’라는 뜻으로도 읽혀, 「사들인 내 무덤」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야곱이 그 무덤을 직접 파거나 준비한 구체적인 경위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묻힐 무덤을 이미 마련된 장소로 말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을 타작하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므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면과 어울립니다. 그러나 아닷의 타작마당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곳을 「요단 건너편」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이 정확히 강의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와 장례 행렬이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재구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장소가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불리게 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지명은 애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표현과 소리가 연결되어 있지만, 지명 자체의 정확한 형성과 어원을 모두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죽자 다시 두려워하는 형제들
요셉이 이미 용서했는데 왜 형제들은 두려워하는가
15절은 예상하지 못했던 갈등을 다시 꺼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말했다. 「요셉이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모든 악을 반드시 되갚는다면 어쩌지?」창세기 50:15 · 본디새김
형제들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에는 요셉의 보복을 어느 정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더 이상 아버지를 생각해 자신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두려워합니다.
창세기 45장에서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사건을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시는 일과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는 형제들과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습니다(45:14–15).
요셉은 형제들에게 선의를 보였지만, 형제들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악을 잊지 못합니다. 그들은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요셉을 죽이려 했고, 결국 그를 가족에게서 떼어 놓았습니다. 요셉은 그 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말해도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특히 상대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때, 그 불안은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요셉이 실제로 원한을 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두려움이 요셉의 실제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남겼다는 말은 사실이었을까
형제들은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 아버지가 남겼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창세기 50:16 · 본디새김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발 네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다오. 그들이 네게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이제 아버지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인 저희의 허물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말할 때 요셉은 울었다.창세기 50:17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허물과 죄」라고 부르고, 요셉에게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고, 아버지의 말을 앞세운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을 「아버지의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족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호소합니다. 자신들은 요셉에게 잘못한 형제들이지만, 동시에 같은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의 말을 듣고 우는 요셉
이 말을 들은 요셉은 웁니다.
요셉은 형제들과 처음 다시 만났을 때 감정을 억누르며 울었습니다(창세기 42:24). 베냐민을 만났을 때에도 울었고(43:30),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서 크게 울었습니다(45:2). 그의 눈물은 오랜 세월 쌓인 가족의 고통과 재회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이미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관계에서 두려움과 죄책감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는 가족의 화해를 한 번의 포옹으로 완성된 감정 상태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시 엎드리다
그의 형들도 가서 그의 앞에 엎드려 말했다. 「보십시오, 저희는 당신의 종입니다.」창세기 50:18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창세기 37장의 요셉의 꿈을 마지막으로 떠올리게 합니다. 어린 요셉은 형제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곡식 단에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후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요셉 앞에 엎드려 곡식을 구했습니다(42:6).
이번에는 기근 때문에 곡식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복수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요셉의 꿈은 형제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요셉이 자신들을 다스리겠다는 생각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형제들은 스스로 요셉의 종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셉의 대답은 예상 밖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절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차지할 수 없는 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야곱이 실제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앞서 창세기 47–49장은 야곱이 요셉과 아들들에게 했던 여러 유언을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형제들을 용서하라고 명령했다는 말은 그곳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모든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실제로 형제들을 용서해 달라고 부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형제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아버지의 권위를 빌려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쪽인지 판정하지 않습니다. 왜 요셉은 울었을까요? 형제들이 여전히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슬펐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오래된 기억이 되살아났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모습이 그에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울음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습니까?」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에 있습니까?」창세기 50:19 · 본디새김
형제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요셉의 힘입니다.
요셉은 자신들을 처벌할 수 있는 높은 지위에 있습니다. 과거에 당했던 일을 되갚을 수 있는 권한과 수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오래전 야곱도 같은 말을 했다
창세기 30:2에서 야곱은 자녀를 낳지 못해 괴로워하는 라헬에게 같은 취지의 질문을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두 구절에는 거의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창세기 30장에서는 야곱이 자신에게 자녀를 달라고 요구하는 라헬에게 화를 내며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0장에서는 요셉이 형제들의 두려움을 달래면서 같은 질문을 합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요구받았을 때 하나님의 자리를 언급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언급합니다.
이 말이 인간에게는 모든 판단이나 책임 추궁을 할 권한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관리로서 실제로 판단하고 명령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여기서는 자신에게 악을 행했던 형제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자신의 권한과 하나님의 자리를 구별합니다.
요셉은 복수할 힘이 없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형제들의 악과 하나님의 선 — 같은 사건을 향한 서로 다른 계획
「형님들은 저를 상대로 악한 일을 계획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한 일을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을 이루어 많은 사람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50:20 · 본디새김
요셉은 형제들이 저지른 악을 선한 일로 다시 이름 붙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그를 제거하려 했으며, 가족에게서 떼어 놓았습니다. 그 행동이 이후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처음부터 선한 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계획하다」가 두 번 반복되는 이유
원문의 구조는 두 주체의 의도를 뚜렷하게 대비합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향해 악을 계획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선한 일을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여기서 같은 사건을 놓고 두 종류의 의도가 병렬로 나타납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요셉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사건이 결국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결과에 이르렀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행동을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뜻과 다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형제들에게 요셉을 팔라고 지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요셉이 겪은 모든 고통이 그 자체로 선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악한 사건을 선한 목적에 사용하셨다는 고백은, 그 사건을 저지른 사람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책임을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들의 악이 최종적인 결과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려 하셨던 선은 무엇인가
여기서 하나님의 목적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에서 고위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이루신 선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의 지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창세기 45:5–8에서 요셉은 자신이 형제들보다 먼저 이집트에 오게 된 일을 하나님의 생명 보존 계획과 연결하여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선은 요셉이 높은 지위에 오른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지위를 통해 많은 사람의 생명이 보존된 데 있습니다.
요셉의 기근 대책으로 양식을 얻은 사람들에는 이집트 사람들도 있었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창세기 41:56–57; 47:13–26). 이스라엘 가족의 생존은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요셉이 말하는 생명의 보존은 그 가족을 넘어섭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땅의 여러 민족과 관계를 맺는다는 창세기 12:3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창세기 50:20이 그 약속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인 요셉을 통해 여러 사람의 생명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그 약속의 넓은 방향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이렇게 분명하게 보이는가
요셉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을 때 이집트에서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훗날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되리라는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고난에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이유가 있다는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창세기 50장은 요셉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요셉과 같은 설명을 할 수 있다고 보장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기근이 닥쳤고, 요셉은 양식을 준비했으며,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요셉은 막연히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경험한 역사 속에서 생명의 보존이라는 결과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는 이 고백을 긴 요셉 이야기의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독자가 처음부터 이어져 온 사건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형제들이 요셉을 팔았던 일, 이집트에서 겪은 고난, 기근을 위한 준비, 가족의 재회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이때 독자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셨다는 신학적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용서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요셉의 대답은 20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어린아이들을 먹여 살리겠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말을 했다.창세기 50:21 · 본디새김
과거에 자신을 해쳤던 사람들 때문에 그 자녀들까지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 살게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요셉에게 했던 일을 기준으로 앞으로 요셉이 자신들에게 할 일을 예상했습니다. 요셉은 그 예상과 다른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말을 했다」
요셉의 마음속에서 복수를 포기하는 일과, 형제들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도록 관계를 돌보는 일은 구별됩니다. 형제들의 두려움은 요셉의 한마디로 즉시 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이후 감정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의 두려움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형제들은 요셉의 꿈을 듣고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창세기 37:5–11). 마지막에 요셉은 그들의 두려움을 듣고 그들을 위로합니다.
서로에게 말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요셉은 과거의 악을 정확히 말하면서도 그 악이 앞으로의 관계를 지배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이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언제나 가해자를 아무 조건 없이 가까이 두고 보호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이미 오랜 시간에 걸친 가족의 재회와 관계의 변화가 있었고, 그가 형제들을 실제로 보호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요셉이 그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말을 했다」는 직역하면 「그들의 마음에 말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상대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거나 위로하고 설득하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요셉이 늙어 가는 동안에도 약속은 남아 있었다
형제들과의 마지막 대화가 끝나면 이야기는 긴 시간을 건너뜁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가나안에 묻혔지만, 요셉은 이집트에 남아 가족과 함께 삽니다. 그는 자신의 자녀뿐 아니라 더 먼 후손들까지 봅니다.
요셉은 에브라임의 삼 대째 자손들을 보았다.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서 태어났다.창세기 50:23 · 본디새김
그는 형제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끌려온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곁에는 자손들이 있습니다.
한때 가족에게서 끊어질 뻔했던 삶이 새로운 세대들로 이어진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후손의 번성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생애 안에서 그 약속의 일부를 실제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음을 앞두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많은 후손에 대한 자랑이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요셉의 무릎 위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이 눈에 띕니다. 이것이 실제로 요셉이 갓 태어난 아이들을 무릎에 앉혔다는 뜻인지, 친족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인지, 특별한 가족 관계를 승인하는 행동인지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창세기 48장에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품에 안고 복을 빌어 준 장면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지만, 반드시 같은 의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 돌보실 것입니다」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 돌보시고, 여러분을 이 땅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창세기 50:24 · 본디새김
「반드시 찾아 돌보시리라」는 말의 무게
요셉의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의 처지에 주의를 기울여 행동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이 단순한 관심이나 위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창세기의 맨 마지막에 조상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요셉은 자신이 그 약속의 시작도 끝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조상들에게 약속하셨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요셉은 미래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가 죽은 뒤 이집트에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억압받게 될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런 사건들을 상세하게 예고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자신의 아버지 야곱에게 주어진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결국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확신은 당장의 상황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당시 요셉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살고 있었고, 요셉은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거주지가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셉이 요구한 것은 장례가 아니라 미래의 맹세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하게 하며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 돌보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제 뼈를 이곳에서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창세기 50:25 · 본디새김
야곱은 자신이 죽으면 가나안으로 옮겨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형제들이 장례 행렬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반면 요셉은 자신이 죽으면 곧바로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는 한 가족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다녀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뼈를 옮기는 일은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이집트를 떠나는 사건과 연결됩니다.
요셉의 요청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가 요구하는 맹세는 당장 자신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뒤 다음 세대들이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가나안 전체를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그랬습니다. 이제 요셉 역시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다음 세대에 전합니다.
요셉이 자기 뼈를 옮기라고 맹세하게 하는 일은 그 약속을 후손들의 실제 행동에 연결합니다.
출애굽기는 이 말을 기억한다
출애굽기 1장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했다고 말합니다(1:6–7). 이어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억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자신이 이스라엘 자손을 찾아 돌보셨다는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출애굽기 3:16).
창세기 끝에서 요셉이 기다렸던 하나님의 돌보심이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알리는 말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더욱 직접적인 연결은 출애굽기 13:19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요셉의 뼈를 가지고 이집트를 떠납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24:32에서는 요셉의 뼈가 세겜에 묻힙니다. 그곳은 야곱이 사들였던 땅이며, 요셉 자손의 소유가 된 장소입니다(창세기 33:19). 따라서 요셉의 부탁은 출애굽기의 해방 사건과 여호수아서의 땅 정착 이야기까지 이어집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11:22는 요셉이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을 말하고 자신의 뼈에 관해 명령한 일을 믿음의 행위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0장의 사건을 직접 언급하는 후대의 정경적 읽기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자체에서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요셉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창세기 50장 자체에서는 아직 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오직 약속과 맹세만이 주어집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장례를 완성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장례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남기고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 돌보시고」는 같은 동사를 부정사 형태와 정동사 형태로 결합하여 확실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마지막 문장 — 이집트에 관이 놓이다
요셉은 백십 세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방부 처리했고, 그는 이집트에서 관에 놓였다.창세기 50:26 · 본디새김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조상들과의 연결을 확인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후손들이 장차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바라봅니다.
야곱의 장례는 이미 주어진 땅과 연결됩니다.
요셉의 관은 앞으로 이루어질 귀환과 연결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 백성을 찾아 돌보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요셉의 관은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 다음 세대가 기억해야 할 약속과 연결됩니다.
요셉이 죽은 뒤에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모두 이루어지지 않는다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신 일을 보았지만, 이스라엘의 귀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주어진 몫과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일을 구별합니다. 이 장은 첫 번째 문제에는 요셉의 말과 행동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남겨 둡니다.
이집트에서 요셉은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형제들과 화해했고, 자녀와 손자들의 세대를 보았으며, 오랫동안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부탁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을 찾아 돌보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제 뼈를 이곳에서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 말을 남긴 요셉은 백십 세에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을 방부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집트의 관에 놓았습니다.
창세기는 그 관을 그대로 남겨 둔 채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