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
하나님의 집과 광야의 경고
히브리서 3장은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됩니까?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을 보았고, 바다가 갈라지는 일을 경험했으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이유를 마지막 절에서 한 문장으로 밝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은 믿지 않는 외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고 모세의 인도를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지속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장하며, 무엇을 요구합니까?
저자는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모세는 그 집에서 믿음직하게 섬겼고,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맡으신 아들로서 믿음직하십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집이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광야의 백성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 이것이 히브리서 3장을 움직이는 긴장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눈여겨보고, 처음의 확신을 붙들며,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 서로 권하라고 알려 줍니다. 이 장의 중심에는 인간의 결심보다 먼저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눈여겨보십시오
그래서 거룩한 형제 여러분,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여러분, 우리 고백의 사도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눈여겨보십시오.히브리서 3:1 · 본디새김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하면서 끝났습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권합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앞서 독자들을 부르는 두 호칭, 「거룩한 형제 여러분」과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여러분」은 저자가 독자들을 어떤 사람들로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줍니다.
경고를 듣는 사람들은 이미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형제」라는 말에는 앞 장의 논증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서 2:11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해지는 사람들이 연결되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늘의 부르심」도 단순히 죽은 다음 하늘로 가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그분의 영광을 향하는 부르심을 나타냅니다. 앞 장에서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히 2:10).
그러므로 저자는 이미 예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경고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받은 부르심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도이자 대제사장
신약에서 예수님을 직접 「사도」라고 부르는 곳은 히브리서 3:1뿐입니다. 이 낱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 어떤 사명을 위임받아 파견된 사람을 뜻합니다. 반면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신다고 말했습니다(히 2:17).
사도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길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 고백」은 예수님께서 훌륭한 인물이셨다는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며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인정입니다. 저자가 쓴 「눈여겨보십시오」는 대상을 주의 깊게 살피고 생각하라는 명령으로, 잠깐 시선을 돌려 보는 것보다 깊은 주의를 요구합니다.
무엇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까? 다음 절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한 가지 성품에 집중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믿음직하십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신실하게 수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독자들이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저자는 먼저 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신실하신 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신실함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를 불러옵니다.
모세를 낮추지 않고 예수님을 높이다
예수는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믿음직하십니다. 모세가 그분의 온 집에서 믿음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히브리서 3:2 · 본디새김
예수님과 모세의 비교는 의외로 두 사람의 공통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 모두 믿음직합니다.
저자는 모세가 부족하고 실패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먼저 내세워 예수님을 높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의 신실함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신 모세의 신실함
「그분의 온 집에서 믿음직했던」이라는 표현은 민수기 12:7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수기 12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모세의 특별한 지위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시지만 모세와는 분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씀하신다고 하시고, 모세가 자신의 온 집에서 신실한 종이라고 선언하십니다(민 12:6–8).
모세의 신실함은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신 신실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평가를 취소하지 않고, 바로 그 사실을 토대로 예수님의 더 큰 영광을 설명합니다. 모세는 실제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자리와 예수님께서 맡으신 자리는 같지 않았습니다.
집보다 집을 지은 이가 더 큰 존귀를 지닙니다
집을 지은 이가 그 집보다 더 큰 존귀를 지니는 만큼, 이분은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마땅하다고 여겨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은 모두 누군가가 짓고,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히브리서 3:3–4 · 본디새김
건물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설계하고 세운 사람의 역할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은 건물로서의 집뿐 아니라 그 집에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곧바로 「그 집이 곧 우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모세는 그 백성을 인도했지만, 자신 역시 그 백성 가운데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집을 지은 이의 존귀에 연결되십니다.
4절은 만물의 건축자가 하나님이라고 밝히지만, 그 절에서 아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절을 「예수님께서 집을 지으셨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십니다」라는 하나의 삼단논법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1장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시대들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히 1:2), 저자가 예수님을 집에 속한 구성원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비유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집의 건축자와 연결하는지는 해석상 논의가 있지만, 모세와 아들의 관계를 구별하는 논증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집에서 섬기는 이와 집을 맡은 아들
모세는 앞으로 선포될 것들을 증언하려고 그분의 온 집에서 시중드는 이로 믿음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분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믿음직하십니다. 우리가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와 소망의 자랑을 굳게 붙들면, 그 집이 곧 우리입니다.히브리서 3:5–6 · 본디새김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드는 말은 「시중드는 이」와 「아들」입니다. 모세에게 쓰인 「시중드는 이」는 단순히 종속적인 노예를 가리키는 표현과 달리, 명예롭고 신뢰받는 봉사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러니 이 말을 모세에 대한 경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도 모세는 집 안에서 신실했고, 예수님께서는 집 위에, 곧 집을 맡으신 아들로 나타나십니다. 이 차이는 누가 더 오래, 더 많이 봉사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맡은 권위의 차이입니다.
5절은 또 모세가 「앞으로 선포될 것들을 증언하려고」 신실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받은 계시와 수행한 사역이 참된 하나님의 일이었으면서도, 그 이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모세의 신실함은 앞으로 주어질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지고, 예수님의 신실함은 그 말씀을 이루시는 아들의 사역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모세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권하는 이유는 모세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을 맡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집이 곧 우리입니다
지금까지 집은 비유 속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6절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 집이 독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맡으신 하나님의 집은 과거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는 두려움 없이 말하는 자유와 담대함을 나타내며, 히브리서에서는 이후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과 연결됩니다(히 4:16; 10:19, 35). 「소망의 자랑」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뽐내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확신하며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이라는 선언에 조건을 붙입니다. 「굳게 붙들면」. 이 조건이 이후 논증의 문을 엽니다.
믿음의 지속이 하나님의 집을 인간의 힘으로 세우는 조건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먼저 예수님께서 집을 맡으신 아들이시라고 말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소망을 붙들라고 권합니다. 다만 조건문의 엄중함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외적인 사실만으로 안심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져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놓칠 수 있습니까? 저자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광야의 역사로 돌아갑니다.
과거의 말씀이 오늘의 목소리가 되다
거룩한 영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 거스르던 그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히브리서 3:7–8 · 본디새김
저자는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영이 말씀하신다고, 그것도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 지금 독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결정적인 단어가 「오늘」입니다.
찬양의 시편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경고
이 인용은 시편 95:7–11에서 왔습니다. 시편 95편은 여호와야훼께 기쁨으로 노래하고 감사하며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자는 초청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위대한 왕이시며, 땅의 깊은 곳과 산들의 꼭대기가 그분의 손 안에 있고, 바다와 육지도 그분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고, 그들은 그분 손 아래 있는 양 떼입니다(시 95:7).
바로 그 뒤에 「오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시편은 경배와 순종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며 그분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은, 동시에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독자들의 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시편 95편이 처음 노래되었을 때에도 광야 사건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 사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시대 사람들에게 「오늘」이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저자도 같은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슬렀던 사람들, 시편의 청중,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를 듣는 공동체가 같은 말씀 앞에 섭니다.
모두에게 중요한 질문은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오늘」은 기회의 시간이면서 책임의 시간입니다. 들었다는 사실이 곧바로 올바른 응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광야의 역사가 경고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시험한 사람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 거스르던 그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거기서 너희 조상들이 떠보며 시험했고 마흔 해 동안 내가 한 일들을 보았다.」히브리서 3:8–9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보시는 분인지 계속 시험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 일어난 일
시편 95편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므리바와 맛사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므리바는 다툼을, 맛사는 시험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었고,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사건의 끝에는 여호와야훼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질문이 남습니다(출 17:7).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였고, 물이 없어 고통스러워한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그들이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행동을 신뢰하는 대신, 현재의 위기를 근거로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인지 자신들이 정한 조건으로 다시 증명하라고 요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믿는 사람도 고통 속에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탄식하며 질문하는 기도가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므리바와 맛사에서는 하나님의 이미 드러난 신실함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우는 태도가 문제로 나타납니다.
사십 년 동안 본 것과 알지 못한 것
백성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길들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고, 광야에서 먹이셨으며, 자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관계를 다시 의심했습니다.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함을 현재의 삶에서 신뢰하지 못하는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믿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으로 늘 헤맨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세대에 노여워하며 말했다. 『그들은 마음으로 늘 헤맨다. 그들은 내 길들을 알지 못했다.』」 「내가 노여움 가운데 맹세한 그대로다. 『그들은 내 안식에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히브리서 3:10–11 · 본디새김
하나님은 그들이 발로 헤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으로 헤맨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지도가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 길들」은 몇 가지 도덕 규칙이 아니라, 광야에서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뜻, 그분이 백성과 맺으신 관계 안에서 보여 주신 행동들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이 노여움은 잠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에 대한 변덕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계속 그분을 거스른 역사에 대한 응답입니다.
「안식」은 우선 광야 세대가 들어가기를 기대했던 약속의 땅과 연결됩니다. 민수기 14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을 거역한 세대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내 안식」이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그 의미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3장에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광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길의 목적지에 들어가는 일이 자동으로 보장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공동체에게 직접 말을 건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라는 명령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이 말씀대로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 생겨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살피십시오.히브리서 3:12 · 본디새김
저자는 방금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다시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그 이야기가 자기 공동체와 무관한 과거가 아님을 밝힙니다. 경고의 대상은 공동체 바깥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음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다
「떨어져 나가다」는 어떤 대상에게서 떠나거나 물러나는 행동으로, 여기서는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멀어지는 일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광야의 백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불신앙은 지식의 부족이나 의견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관계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은 의심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그 사람을 악하다고 정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마음이 굳어지는 일입니다.
믿음은 혼자 지키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오늘」이라 불리는 동안 날마다 서로 권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죄의 속임수로 완고해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3:13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살피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서로 권하라고 합니다.
저자는 각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잘 관리하면 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지속은 개인적인 결심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돌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죄는 마음을 속인다
죄가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과정은 언제나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떤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이유를 만들고, 자신의 불신을 신중한 판단이라고 여기면서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심리 과정이 본문에 일일이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죄의 속임수」라는 표현은 사람이 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할 수 있음을 분명히 암시합니다.
「완고하게 하다」는 단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마음에 쓰일 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믿음의 굳건함은 말씀에 귀를 닫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계속 듣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속을 수 있기에,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그 위험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다른 사람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권면하는 사람 자신도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며, 교회의 권면은 우월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관리하는 행동이 아니라 함께 예수님에게 참여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맡으신 아들이시라면, 그 집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의 신앙을 무관심하게 방치할 수 없습니다.
왜 날마다 권해야 하는가
「오늘」이라 불리는 동안 「날마다」 서로 권하라는 표현에는 시간적인 긴급성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시편의 「오늘」을 공동체의 일상적인 삶으로 가져옵니다. 「날마다」는 매일 형식적인 모임을 열라는 제도적 명령이라기보다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죄의 속임수는 한 번의 경고로 영원히 해결되지 않으니, 공동체의 권면 역시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첫 절에서 예수님을 눈여겨보라고 했던 명령과 연결됩니다. 믿음의 삶에 필요한 주의는 예수님께 향해야 할 뿐 아니라, 함께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붙든다는 것
우리가 처음에 지녔던 바탕을 끝까지 굳게 붙들기만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이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3:14 · 본디새김
이 절은 6절의 조건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6절에서는 하나님의 집에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이 중심이었다면, 14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사람이라는 관계가 중심입니다.
「바탕」은 무엇인가
「바탕」에 해당하는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는 히브리서 1:3에서 쓰인 낱말과 같지만, 두 자리의 의미가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1:3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영광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쓰였습니다. 3:14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무엇을 가리키므로, 「확신」이나 「굳은 신뢰」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지녔던 확신과 신뢰를 끝까지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의 「되었다」(γίνομαι)는 완료형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이 현재에도 유효한 상태로 이어지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진술에 「끝까지 굳게 붙들기만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갈립니다. 한 읽기는 조건문을 무겁게 보아, 참여의 지속과 믿음의 지속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를 강조합니다. 다른 읽기는 완료형을 무겁게 보아, 끝까지 붙드는 현재의 인내가 처음의 참여가 참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고 이해합니다.
본문만으로 이 두 입장 가운데 하나를 최종적인 교리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자가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참여하는 일과 예수님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붙드는 일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이들이 되었다
「참여한 이들」은 어떤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1에서 독자들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이라 불렸고, 이제 3:14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참여한 사람들이라 불립니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다는 것은 고상한 종교적 목표에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그 부르심의 중심에 계신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바로 그 관계 때문에 저자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라고 권합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거스르던 그때처럼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라는 말씀이 전해지는 동안에 말입니다.히브리서 3:15 · 본디새김
이번에는 광야 이야기나 하나님의 노여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을 다시 인용하지 않습니다. 앞의 긴 인용으로 역사적인 경고는 충분히 제시되었고, 이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역사를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말씀 앞에 서는 일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사람이 지금 응답해야 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이 왜 들어가지 못했는가
이제 저자는 광야 세대의 실패를 세 개의 질문으로 되짚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듣고서 거스른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를 통해 이집트에서 나온 이들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마흔 해 동안 누구에게 노여워하셨습니까? 죄지은 이들, 곧 그들의 주검이 광야에 쓰러진 이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따르지 않은 이들 말고 누구에게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히브리서 3:16–18 · 본디새김
누가 거슬렀는지, 누구에게 노여워하셨는지, 누구에게 맹세하셨는지. 각 질문의 답은 같은 광야 세대를 가리킵니다.
구원받아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모세의 인도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에 참여했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목적지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는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이 거역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민수기 14:30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예외로 명시하며, 히브리서의 질문은 광야 세대 대다수가 거역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예외가 경고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습니다.
광야에 쓰러진 주검들
저자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주검이 광야에 쓰러졌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14:29의 표현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들은 그 땅이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강한 주민들과 견고한 성읍들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자고 권했지만, 백성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민 13–14장).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에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은 그 현실을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판단하지 않았고, 눈으로 확인한 위협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듣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믿지 않음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봅니다.히브리서 3:19 · 본디새김
18절의 「따르지 않음」과 19절의 「믿지 않음」은 서로 다른 두 집단의 잘못이 아니라, 같은 광야 세대의 실패를 두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고, 그들의 불순종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물론 이것이 구원을 인간의 순종으로 얻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데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미 시작된 구원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신뢰하는가에 있습니다.
광야에서 끝나는 장
히브리서 3장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여 광야에서 끝납니다.
앞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믿음직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맡으신 아들로서 믿음직하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출애굽한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신실한 인도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신실하게 응답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히브리서는 모든 것을 인간의 의지와 결심에 맡기지도, 예수님께서 신실하시므로 인간의 응답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먼저 주어지고, 그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끝까지 붙들라고 권합니다. 믿음의 지속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계속 신뢰하며 그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장의 처음 물음,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믿지 않게 되는가에 대한 답은 광야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그분의 길을 알지 못했고, 들은 말씀 앞에서 마음을 완고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맡으신 집에 속했다는 큰 선물이지만, 그 집에 속한 사람들에게 오늘 말씀을 듣고 서로 권하며 처음의 확신을 붙들 것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주어진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3장은 아직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의 장면을 독자의 눈앞에 남깁니다.
광야에는 하나님의 일을 수없이 보고도 그분을 신뢰하지 못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게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오늘」이라는 말씀이 아직 들리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