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

영광의 관을 쓰신 분의 고난

히브리서 2장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모습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맛보시고, 고난을 겪으시고, 시험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일부 왕의 영광은 고난에서 벗어나는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대신해 싸우게 하고, 자신은 안전한 자리에 머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보여 주는 왕은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은 어쩔 수 없는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지니셨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힘을 지닌 자를 무력하게 하셨습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처럼 약해지셔야 했습니까? 왜 구원의 길은 고난을 통과해야 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은 지금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히브리서 2장은 이 질문들을 하나의 논증으로 연결합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는 바로 예수님께서 천사들보다 낮아지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선 주장을 취소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를 밝힌 뒤 왜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장의 흐름은 네 부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들은 말씀에서 떠내려가지 말라는 경고가 나옵니다(1–4절). 이어서 인간에게 약속된 영광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줍니다(5–9절). 그다음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사람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이유를 밝힙니다(10–13절).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피와 살을 지니시고 죽음을 겪으신 목적이 죽음의 공포에서 사람들을 해방하고, 그들의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데 있음을 설명합니다(14–18절).

읽는 시간 30분소단락 82장 본문 읽기 →

믿음은 어떻게 떠내려가는가

히브리서 2:1–4 본문 →

이 때문에 우리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들은 것에 더욱 마음을 붙들어 매야 합니다.히브리서 2:1 · 본디새김

히브리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본격적인 권면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하나님을 거부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멀어지려고 하지 않아도 멀어질 수 있다

「떠내려가다」는 흘러가거나 미끄러져 지나가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강물의 흐름에 실려 목적지를 지나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본문이 반드시 배나 항해를 직접 묘사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굳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기준점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편에는 「마음을 붙들어 매다」, 곧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향하게 한다는 표현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들은 말씀에 주의를 집중하는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씀에서 벗어나 흘러가는 움직임입니다.

믿음에서 멀어지는 일이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극적인 배신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들은 말씀이 점차 중요하지 않게 되고, 그것에 기울이던 주의가 사라지는 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들은 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나 종교적인 정보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주어진 말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입니다. 믿음의 위기를 해결하는 첫 번째 행동은 새로운 가르침을 계속 찾아다니는 일이 아니라 이미 들은 구원에 다시 주의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또한 저자는 「여러분은」이 아니라 「우리는」이라고 말합니다. 권면하는 사람 자신도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공동체 안에 서 있습니다.

큰 구원을 소홀히 한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이 굳게 섰고 모든 어김과 듣고도 따르지 않음이 마땅한 갚음을 받았다면, 이토록 큰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나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했고, 들은 이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굳혀 주었습니다.히브리서 2:2–3 · 본디새김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저자의 논증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갑니다. 천사들을 통해 주어진 말씀에도 책임이 따랐다면,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을 소홀히 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책임이 따르겠습니까?

옛 말씀의 경우에는 「어김」과 「듣고도 따르지 않음」이 등장하지만, 새로운 구원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서」라는 표현이 쓰입니다. 소홀히 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것이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일이 아니라,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마땅히 기울여야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들었음에도 그것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염려입니다.

경고의 엄중함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구원이 「이토록 큰」 구원이라는 사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 알았다면, 그것을 하찮게 여길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어떻게 증언하셨는가

3절 후반에서 4절까지는 이 구원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해졌는지를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다음 예수님에게서 직접 들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전하여 굳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표징과 이적과 여러 능력, 거룩한 영의 나누어 주심으로 그 증언에 함께하셨습니다.

구원의 소식은 불확실한 소문이나 개인적인 체험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 선포되었고, 사람들이 듣고 전했으며, 하나님이 그 증언에 함께하셨습니다.

표징과 이적은 구원 자체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구원이 참되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붙들어야 할 것은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다는 기억만이 아니라, 그 모든 증언이 가리키고 있는 구원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이 왜 그렇게 큽니까? 저자는 다음 절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의 출애굽 이야기 자체는 천사들의 중재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신명기 33:2의 그리스어 전승 및 사도행전 7:53, 갈라디아서 3:19에는 율법과 천사들을 연결하는 전통이 나타납니다. 2절의 「굳게 섰고」와 3절의 「굳혀 주었습니다」는 같은 그리스어 어근을 사용합니다. 옛 말씀도 확고한 효력을 지녔고, 새로운 구원의 소식도 들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4절의 「거룩한 영을 나누어 주심으로」에는 번역상의 여지가 있습니다. 원문의 속격 관계에 따라 하나님이 성령을 나누어 주신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성령과 관계된 다양한 나누어 주심이나 은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증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영광은 어디에 있는가

히브리서 2:5–8 본문 →

장차 올 사람 사는 땅, 곧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땅을 천사들에게 복종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5 · 본디새김

여기서 다시 천사들이 등장하지만 논점은 달라졌습니다. 앞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가 문제였다면, 이제는 장차 올 세계를 누가 다스리게 되는가가 문제입니다. 「장차 올 사람 사는 땅」은 단순히 죽은 뒤에 사람들이 가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앞으로 온전히 드러날 세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세계를 누구에게 복종시키셨습니까? 대답을 위해 시편 8편이 등장합니다.

작디작은 인간에게 씌워진 관

그런데 어디선가 누군가 이렇게 힘주어 증언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이 그를 기억하십니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당신이 그를 돌보십니까?」 「당신은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셨고, 영광과 존귀로 그에게 관을 씌우셨습니다.」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모든 것을 복종시키셨을 때에 그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해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합니다.히브리서 2:6–8 · 본디새김

인용은 시편 8:4–6에서 왔습니다. 시편 8편의 시인은 하늘과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인간의 작음을 생각합니다. 광대한 창조 세계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보이는 바로 그 인간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이 시편에서 「사람의 아들」은 우선 예수님의 특별한 호칭이 아니라 인간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 서로 대응하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인간이 작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말합니다. 관은 왕권의 이미지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서 특별한 책임과 통치의 지위를 부여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광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선물입니다. 시편의 질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행동을 향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돌보십니까?

인간의 존귀함은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기억하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은 분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8절의 마지막 문장 「그런데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그에게 복종해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합니다」는 히브리서 2장의 결정적인 전환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다고 말한 직후, 그것이 이루어진 현실을 아직 보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 저자는 시편의 약속과 인간의 경험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감추지 않습니다.

인간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며, 자연의 위험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무엇보다 죽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시편 8편에서 인간은 영광의 관을 쓴 존재로 노래되지만, 현실의 인간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세계 안에서 끊임없이 한계를 경험합니다.

저자는 이 간격을 해결하기 위해 시편의 약속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이 실제로는 일부만을 뜻한다고 설명하지도 않고, 오히려 복종시키지 않으신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크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은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패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온전히 실현된 모습을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서로 어긋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간격 한가운데서 독자의 시선을 다른 대상으로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천사들보다 조금 낮추셨고」에는 본문 전승의 차이가 있습니다. 시편 8:5의 히브리어에는 엘로힘이 사용되어, 일반적으로 「하나님」 또는 문맥에 따라 「신적 존재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따르는 그리스어 시편은 이를 「천사들」로 옮겼습니다. 저자는 이 표현으로 천사와 인간을 단순히 서열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보다 낮은 존재로 묘사된 인간이 영광과 존귀를 받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또한 시편 8편의 뒤쪽에는 가축과 들짐승, 새와 물고기가 등장하므로(시 8:7–8), 그 시편의 통치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주셨다는 창세기 1:26–28과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2장은 인간의 현재 모습과 그 목적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드러내고, 예수님에게서 그 목적의 성취를 바라봅니다.

아직 모든 것을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을 봅니다

히브리서 2:9 본문 →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 때문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봅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이를 위해 죽음을 맛보시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리서 2:9 · 본디새김

앞 절에서는 「아직 보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히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이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 아닙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시편의 인간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난다

9절에 이르러 저자는 방금 인용한 시편의 두 표현,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을 그대로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이제 그 대상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는 시편 8편의 인간을 예수님 안에서 영광에 이르는 인류로 읽습니다. 시편이 말하는 인간의 지위와 영광을 먼저 제시하고, 그 영광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인정한 뒤, 예수님을 통해 그 약속의 성취를 바라봅니다. 인간을 위한 창조의 목적이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는 유형론적 읽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 등장하시어 인간을 대신해 영광을 독점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인간에게 주어진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여십니다.

그래서 9절의 낮아지심은 실패나 우연한 굴욕이 아닙니다. 인간을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 인간의 처지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낮아지신 기간인가, 낮아지신 정도인가

「조금 낮아지셨다가」는 정도를 나타내는 「조금 낮게」로도, 시간을 나타내는 「잠깐 동안」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핵심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낮은 자리로 들어오셨으며, 죽음의 고난과 영광의 관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을 쓰신 이유가 죽음의 고난이었다

9절의 가장 뜻밖인 표현은 「죽음의 고난 때문에」입니다. 고대의 일부 승리 이야기에서 죽음은 패배의 표시이고,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낸 왕이 승리자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피하셨기 때문에 관을 쓰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습니다.

「죽음을 맛본다」는 것은 죽음을 멀리서 관찰하거나 죽음에 대해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모든 이를 위해」 이루어집니다. 「모든 이」는 구원 사역의 폭넓은 지향을 드러냅니다. 다만 이 한 표현만으로 모든 사람이 어떤 조건이나 관계 없이 결국 구원받는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의 뒤이은 문맥은 구원을 받는 이들과 믿음과 인내의 문제를 계속 다룹니다.

본문은 이 죽음을 「하나님의 은혜로」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겪으시는 일로도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은 그 길을 택하셨습니까? 저자는 바로 다음 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보지 못합니다」와 9절의 「봅니다」는 서로 다른 그리스어 동사입니다. 둘 다 본다는 뜻이지만 9절의 동사는 문맥에 따라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행위를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전적 의미 차이만으로 이 구절의 신학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 낮아지셨다가」(브라퀴 티)의 경우, 시편 8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인간이 천사들 또는 천상의 존재들보다 조금 낮은 지위를 지녔다는 정도의 의미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2:9에서는 낮아지심과 영광을 받으심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일정 기간 낮아지셨다가 높임받으셨다는 시간적인 읽기도 가능합니다. 이 번역은 시편의 표현과 9절의 표현을 똑같이 「조금」으로 옮겨 인용문과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구절의 연결을 드러냈습니다. 또 본문비평상의 갈림도 있습니다. 본문이 채택한 「하나님의 은혜로」는 카리티 테우이며, 다른 전승에는 코리스 테우, 곧 「하나님 없이」라는 읽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는 이른 시기의 여러 그리스어 사본에서 폭넓게 증언되지만, 대안도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두 표현은 의미가 다르므로 단순한 번역상의 차이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신 구원의 선구자

히브리서 2:10 본문 →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만물이 그분을 위해 있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있으니, 그분이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면서 그들의 구원을 여는 이를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그분에게 마땅했습니다.히브리서 2:10 · 본디새김

이 절은 9절의 역설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고난의 길로 이끄신 일이 하나님의 목적과 어울리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분을 위해 있고 만물이 그분을 통해 있으니」의 「그분」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목적이자 근원이시며,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의 중심에는 「구원을 여는 이」가 있습니다.

앞장서서 길을 여는 사람

「구원을 여는 이」(ἀρχηγός)는 어떤 일의 창시자나 지도자, 다른 이들보다 먼저 길을 여는 선구자를 가리킬 수 있는 낱말입니다.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면서」와 이어지므로, 앞서 길을 여는 사람의 이미지가 특히 중요합니다. 이 표현을 단순히 구원의 방법을 알려 주는 선생이라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로 가는 길을 설명하기만 하시는 사람이 아니십니다. 실제로 그 길을 먼저 지나가셔서 다른 이들이 그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하시는 사람이십니다.

그 길은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길을 여는 일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멀리서 평가하시며 올바른 길을 설명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놓여 있는 죽음의 현실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길을 통과하시어 영광에 이르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미 완전한 분을 왜 온전하게 하시는가

이 절에서 가장 어려운 말은 「온전하게 하시는」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고 고난을 겪으시면서 더 훌륭한 사람이 되셨다는 뜻으로 읽으면 히브리서의 논증을 오해하게 됩니다.

「온전하게 하다」는 어떤 일이나 목적을 완수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특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사역이 목적을 이루는 문제와 관련되어 반복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온전하게 되심은 사람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선구자로서 고난의 길을 실제로 통과하시어 맡으신 일을 성취하시는 것과 연결됩니다. 5:8–9는 예수님의 순종과 고난, 온전하게 되심을 다시 연결합니다.

저자는 고난을 영광과 무관한 우회로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데 이 길이 마땅하다고 여기셨을까요? 다음 절에서 예수님과 구원받는 사람들이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가 밝혀집니다.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

히브리서 2:11–13 본문 →

이 일이 마땅한 것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해지는 이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리서 2:11 · 본디새김

여기서 논증은 뜻밖의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분이셨고, 구원을 여는 선구자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분이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르신다는 말이 나옵니다. 왜 저자는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영광을 받으신 분에게 인간은 부끄러운 존재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분과 구원받는 인간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죄를 지으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아직 모든 것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유로 그들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바로 그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일을 자신의 사역으로 삼으십니다. 그분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은 인간이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과 그들이 모두 한 분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해지는 이들」을 구별합니다. 한쪽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고, 다른 쪽은 그 사역을 받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하나의 근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두 한 분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의 그리스어 표현은 엑스 헤노스(εἷς)로, 문자적으로는 「모두 하나에게서」라는 간결한 표현입니다. 이 「하나」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읽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구원받는 사람들의 공통된 근원이시라는 뜻이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유하는 인간적 기원이나 하나의 공동체적 근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원문에는 그 대상을 명시한 명사가 없으므로, 특정한 해석 하나만을 절대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논증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이 구원하시는 사람들의 관계는 단순히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저자는 그 관계를 가족의 언어로 설명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구약의 두 장면을 불러옵니다.

형제들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노래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알리고,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노래하겠습니다.」히브리서 2:12 · 본디새김

이 인용은 시편 22:22에서 왔습니다. 시편의 앞부분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는 고통과 원수들의 공격, 죽음에 가까운 위기가 묘사됩니다. 그러나 시는 그 고통에서 끝나지 않고, 화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회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히브리서가 인용한 것은 바로 그 대목입니다.

저자는 고통받는 의인의 기도가 공동체의 찬양으로 바뀌는 장면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읽습니다. 시편 22편의 본래 화자가 자신의 고난과 구원을 노래했다는 사실을 지우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에 비추어 그 말씀을 새롭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높임받으신 아들이 형제들 위에서 명령만 내리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형제들 가운데 서셔서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에 관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분인 동시에, 인간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분

또 이렇게. 「나는 그분을 의지하겠다.」 또 이렇게. 「보아라, 나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아이들이 여기 있다.」히브리서 2:13 · 본디새김

두 표현은 이사야 8:17–18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8장의 배경에는 유다 왕국이 강대국들의 위협을 받던 상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누구를 의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중대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사야는 여호와야훼를 기다리고 의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하나님이 주신 아이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표징과 징조가 된다고 말합니다. 원래의 장면에서는 예언자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는 그 표현들을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나는 그분을 의지하겠다」는 선언은 그리스도의 신뢰를, 「나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아이들」은 하나님이 그분에게 맡기신 사람들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저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인간적인 신뢰와 의존을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게 만드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길을 걸으셨으며, 그 길에서 사람들을 자신의 형제와 아이들로 연결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인용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고난에서 건짐받으셔서 형제들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시는 분,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람들과 함께 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저자는 그 관계가 실제로 무엇을 요구했는지 설명합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의 힘을 꺾으시다

히브리서 2:14–16 본문 →

그러므로 아이들이 피와 살을 함께 나누었으니 그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의 힘을 쥔 자, 곧 마귀가 힘을 쓰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고, 죽음이 두려워 한평생 노예 신세에 매여 있던 이들을 놓아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리서 2:14–15 · 본디새김

하나님이 주신 아이들은 피와 살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인간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피와 살을 지니셨습니다. 피와 살은 인간이 상처 입을 수 있고, 고통을 느끼며, 결국 죽음을 맞는 실제적인 육체적 조건을 가리킵니다.

죽음을 이기는 방법이 죽음이었다

죽음의 힘을 꺾기 위해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모든 인간의 힘을 끝내는 사건입니다. 가장 강한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힘을 무너뜨리는 일을 죽음 밖에서 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힘을 쓰지 못하게 하시려는」은 어떤 것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거나 무력화한다는 뜻입니다. 마귀가 그 순간 존재 자체를 잃어버렸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죽음과 관련하여 그가 행사하던 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무력화된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는 마귀를 「죽음의 힘을 쥔 자」라고 부르지만, 하나님과 마귀가 서로 대등하게 죽음의 권세를 나누어 가진 두 신적인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어떤 의미에서 죽음의 힘을 지녔습니까? 14절 자체는 그 힘이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15절이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 힘은 인간을 죽음의 두려움과 노예 상태에 묶어 두는 현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사는 사람들의 노예 상태

15절의 「죽음이 두려워 한평생 노예 신세에 매여 있던 이들」은 단순히 죽음을 생각하면 무섭다는 심리적인 현상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인간을 속박하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원히 곁에 둘 수도 없습니다. 자기 생명조차 완전히 통제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절대적인 마지막처럼 느껴질 때, 인간은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삶에 묶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인간의 모든 두려움과 죄를 죽음에 대한 의식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음의 두려움이 인간을 노예처럼 사로잡을 수 있다는 저자의 진단은 분명하고,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그 속박을 깨뜨리는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여기서 구원은 언젠가 죽지 않는 상태로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이 인간을 지배하던 힘에서 놓여나는 것도 포함합니다.

본문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향해 두려움이 부족한 믿음의 증거라고 꾸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해방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셨다고 말합니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주어진 복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힘을 꺾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시편 8편의 문제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부름받았지만, 아직 죽음조차 다스리지 못합니다. 인간의 통치를 가로막는 가장 깊은 한계 가운데 하나인 죽음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결정적으로 다루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를 붙드시는 분

두말할 것 없이 그는 천사들을 붙드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16 · 본디새김

이 절은 다시 천사들과 인간의 차이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비교의 중심은 누가 더 높은 지위를 가졌는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를 붙드시는가입니다.

「붙드시기」(ἐπιλαμβάνομαι)는 손으로 붙잡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는 낱말로, 마태복음 14:31에서 예수님께서 물에 빠지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시는 장면에 사용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16도 구원하시기 위해 붙잡아 주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천사의 본성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해석도 존재하며, 바로 앞의 피와 살에 참여하셨다는 문장이 그 근거입니다. 그러나 동사의 일반적인 의미와 15절의 해방이라는 문맥을 고려하면, 붙들어 도우시는 행동에 무게를 두는 읽기가 설득력을 지닙니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의 씨」라고 말합니까? 앞에서는 「사람」, 「사람의 아들」, 「모든 이」, 「형제들」, 「아이들」처럼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제 등장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구원이 단순히 추상적인 인류애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시작하신 약속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해 복의 역사를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고(창 12:1–3; 22:17–18), 히브리서는 이후에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과 믿음을 중요한 주제로 다룹니다(히 6:13–18; 11:8–19).

그렇다고 이 구절 하나만으로 구원의 범위를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에게 한정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신약의 다른 본문, 특히 갈라디아서 3장은 아브라함의 약속과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 사람들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2:16 자체는 그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보다 예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계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멀리서 구원을 선언하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실 사람들을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붙드시는지를 마지막 두 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

히브리서 2:17–18 본문 →

그래서 그는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서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리서 2:17 · 본디새김

이 절에서 히브리서는 처음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등장한 구원의 선구자, 형제, 죽음의 힘을 꺾으시는 분이라는 설명이 이제 제사장이라는 한 직분으로 모입니다.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 인간과 같아지셔야 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서는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죄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위해 인간과 같아지셔야 했던 것은 그분이 대표하고 구원하실 사람들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밖에서 관찰하신 다음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실제로 처한 상태에 참여하심으로 그들을 대표하십니다.

「모든 면에서」는 예수님의 인간됨이 일부 상황에서만 잠시 나타난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의 개별적인 경험을 빠짐없이 겪으셨다는 뜻으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피와 살, 고난과 시험, 죽음에 실제로 참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4:15는 그분의 시험 경험을 설명하면서 죄는 없으셨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간됨은 죄까지 공유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겪는 연약함과 시험을 아시는 분으로서 백성을 대표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비와 신실함이 함께 필요하다

「자비롭다」는 것은 도움받아야 할 사람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에서 그 자비는 추상적인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믿음직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서 맡은 일을 신실하게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백성의 연약함을 이해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맡은 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을 온전히 대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대한 직무를 정확하게 수행하지만 백성의 고난에 무관심하다면, 히브리서가 그리는 대제사장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인간을 향한 자비를 한 몸에 지니신 분이십니다.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속죄하다」는 죄를 다루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의적 사역과 연결됩니다. 이 낱말은 죄의 제거와 관계 회복, 하나님의 진노를 다루는 문제와 관련하여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한 동사의 의미만으로 히브리서의 속죄론 전체를 확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뒤에서, 특히 9–10장에서 희생 제물, 피, 성소, 죄의 정결,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자세히 논증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속죄를 이루시는 분이 어떤 분인가입니다. 그분은 인간과 같은 피와 살을 지니셨고, 죽음의 고난을 겪으셨으며, 형제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속죄는 인간의 고통과 분리된 채 멀리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처지에 참여하신 대제사장이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는 이유

그가 몸소 시험받으며 고난을 겪으셨기에,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18 · 본디새김

저자는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셨으므로 인간의 고통을 잘 이해하신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해와 도움은 같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실제로 그를 도울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도움을 줄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처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에게서 그 둘을 함께 보여 줍니다.

「시험받다」는 죄를 짓도록 유혹받는 상황뿐 아니라 믿음과 신실함이 시험대에 오르는 시련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분이 실제로 시험을 받으시며 고난을 겪으셨고, 바로 그 경험이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시는 사역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 능력을 자동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고난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논증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이 그분의 정체와 사역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구원의 선구자, 죽음을 통해 죽음의 힘을 무력하게 하신 분,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는 대제사장이 인간의 고난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도움은 단순한 위로에 머물지 않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사역에 기초합니다.

영광으로 가는 길이 왜 낮아지는 길이었는가

히브리서 2:1–18 본문 →

왜 영광의 관을 쓰실 분이 인간의 낮은 자리로 오셔야 했습니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목적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를 주셨지만, 인간은 연약하고 죄와 고난 가운데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인간을 버리고 다른 존재를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들이 인간의 자리로 들어오십니다.

아들은 사람들과 형제가 되시기 위해 피와 살에 참여하셨고, 죽음을 통해 죽음의 힘을 무력하게 하셨으며, 고난을 통과하시어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따라야 할 모범이실 뿐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말하는 구원은 인간됨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광에 이르는 일입니다.

이 장은 「떠내려가지 않도록 들은 것에 더욱 마음을 붙들어 매야 합니다」라는 경고로 시작하여 「시험받는 이들을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첫 문장만 읽으면 믿음은 인간이 어떻게든 붙들어야 하는 무거운 의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붙들어야 할 그 구원의 중심에는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저자는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척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완성된 모습을 아직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분도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을 겪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하늘의 천사들이나 모든 것이 복종하는 거대한 세계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험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도우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영광의 관을 쓰신 분이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그 고난의 길을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