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

하나님의 집과 광야의 경고

히브리서 3장은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됩니까?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을 보았고, 바다가 갈라지는 일을 경험했으며, 광야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이유를 마지막 절에서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 문장으로 밝힙니다. 믿지 않는 외부인이 아니라, 모세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지속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보장하며, 무엇을 요구합니까?

저자는 이 질문을 다루기 위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모세는 그 집에서 충실하게 섬겼고,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맡으신 아들로서 충실하십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집이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광야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도 마음을 굳게 닫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광야의 백성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 이것이 히브리서 3장을 움직이는 긴장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독자들을 두렵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처음의 확신을 붙들며,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 서로 격려하라고 알려 줍니다. 그리고 이 장의 중심에는 인간의 결심보다 먼저 예수님의 충실하심이 놓여 있습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83장 본문 읽기 →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히브리서 3:1–2 본문 →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여러분,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십니다.히브리서 3:1 · 두루새김

히브리서 2장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하면서 끝났습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권합니다. 그런데 그 명령에 앞서 독자들을 부르는 두 호칭은 저자가 그들을 어떤 사람들로 이해하는지 보여 줍니다.

경고를 듣는 사람들은 이미 부르심을 함께 받은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형제자매」라는 말에는 앞 장의 논증이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서 2:11에서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해지는 사람들이 연결되었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형제자매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하늘의 부르심」도 단순히 죽은 다음 하늘로 가라는 초청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그분의 영광을 향하는 부르심이며, 많은 아들을 영광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히 2:10).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경고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받은 부르심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도이자 대제사장

신약에서 예수님을 직접 「사도」라고 부르는 곳은 히브리서 3:1뿐입니다. 사도는 사명을 맡아 보냄을 받은 사람을 뜻합니다. 반면 대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며, 앞 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비롭고 충실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신다고 했습니다(히 2:17).

사도로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아 사람들에게 오십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길과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안에서 만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훌륭한 인물이셨다는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며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일하시는 분이라는 인정입니다. 저자가 「깊이 생각하십시오」라고 할 때, 그것은 잠깐 시선을 돌려 보는 것보다 깊은 주의를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무엇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까? 다음 절에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께 충실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독자들이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저자는 먼저 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께서 충실하신 분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충실함을 설명하기 위해 모세를 불러옵니다.

모세를 낮추지 않고 예수님을 높이다

히브리서 3:3–6 본문 →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께 충실하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실했습니다.히브리서 3:2 · 두루새김

예수님과 모세의 비교는 의외로 두 사람의 공통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 모두 충실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신 모세의 신실함

「모세도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실했습니다」라는 표현은 민수기 12:7을 떠올리게 합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특별한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모세를 변호하십니다. 다른 예언자들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시지만, 모세와는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며, 그가 자신의 온 집에서 충실한 종이라고 선언하십니다(민 12:6–8).

모세의 충실함은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신 충실함이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 평가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더 뛰어나신 분임을 밝히기 위해 모세의 역할을 축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는 실제로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자리와 예수님께서 맡으신 자리는 같지 않았습니다.

집보다 집을 지은 이가 더 큰 존귀를 지닙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그분께서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받기에 마땅한 분으로 인정되셨기 때문입니다.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더 큰 존경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집이든 누군가가 짓고,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3:3–4 · 두루새김

건물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세운 사람과 같은 지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집」은 성막이나 성전 건물만이 아니라 그 집에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는 말이고, 곧이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모세는 그 백성을 인도했지만, 자신 역시 그 백성 가운데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은 집을 지은 사람이 더 큰 존경을 받는다고 말한 직후,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밝힙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시대들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히 1:2), 저자가 예수님을 집에 속한 구성원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비유가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집을 지은 분과 연결하는지는 해석상 논의가 있지만, 모세와 아들을 구별하는 논증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집에서 섬기는 이와 집을 맡은 아들

모세는 앞으로 전해질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실하십니다. 우리가 담대함을 지키고 소망을 자랑하는 마음을 굳게 붙든다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히브리서 3:5–6 · 두루새김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드는 말은 「종」과 「아들」입니다. 모세에게 쓰인 테라폰은 주인에게 매인 노예와 달리, 명예롭고 신뢰받는 섬김을 뜻합니다. 그러니 「종」을 모세에 대한 경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에서도 모세는 집 안에서 충실했고, 예수님께서는 집 위에, 곧 집을 맡으신 아들로 나타나십니다. 누가 더 많은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관계와 맡은 권위가 다릅니다.

5절은 모세가 「앞으로 전해질 말씀을 증언하기 위해」 일했다고 말합니다. 그의 계시와 사역은 참된 하나님의 일이었으면서도, 그 이후에 더 분명하게 드러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권하는 것은 모세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섬겼던 바로 그 집을 맡으신 분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지금까지 집은 비유 속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러 그 집이 독자들 자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맡으신 집은 과거의 성막이나 왕궁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고 부르심을 함께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담대함」은 두려움 없이 거리낌 없이 말하는 자유를 뜻하며, 히브리서에서는 이후 하나님께 나아가는 담대함과 연결됩니다(히 4:16; 10:19, 35). 「소망을 자랑하는 마음」은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뽐내는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선언에 「굳게 붙든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이 조건이 이후 논증의 문을 엽니다. 믿음의 지속이 하나님의 집을 인간의 힘으로 세우는 조건은 아닙니다. 저자는 먼저 예수님께서 집을 맡으신 아들이시라고 말하고, 그 사실을 토대로 소망을 붙들라고 권합니다. 다만 조건문의 엄중함도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겉모습만으로 안심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멀어져도 괜찮다고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을 놓칠 수 있습니까? 저자는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광야의 역사로 돌아갑니다.

과거의 말씀이 오늘의 목소리가 되다

히브리서 3:7 본문 →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히브리서 3:7–8 · 두루새김

저자는 시편 기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신다고, 그것도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과거에 기록된 말씀이 지금 독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말이 「오늘」입니다.

찬양의 시편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경고

이 인용은 시편 95:7–11에서 왔습니다. 시편 95편은 하나님께 기쁨으로 노래하고 엎드려 경배하자는 초청으로 시작합니다. 땅의 깊은 곳과 산들의 꼭대기가 그분의 손 안에 있고, 바다와 육지도 그분이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는 백성이며 그분 손 아래 있는 양 떼라고 노래합니다(시 95:7).

바로 그 뒤에 「오늘」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시편은 경배와 순종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찬양하는 일인 동시에, 그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도 이미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고백은 말씀을 듣는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시편 95편이 처음 노래되었을 때에도 광야 사건은 이미 과거였습니다. 그런데 시편은 자신의 시대 사람들에게 「오늘」이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저자도 같은 말씀을 다시 인용합니다. 광야의 세대, 시편의 청중, 그리고 이제 히브리서를 듣는 공동체가 같은 말씀 앞에 섭니다.

오늘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입니까?

「오늘」은 기회의 시간이면서 책임의 시간입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이 곧바로 올바른 응답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광야의 역사가 경고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하나님을 시험한 사람들

히브리서 3:8–11 본문 →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 「거기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떠보며 시험했고, 내가 한 일들을」히브리서 3:8–9 · 두루새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므리바와 맛사에서 일어난 일

시편 95편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다툼을 뜻하는 므리바와 시험과 관련된 맛사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17:1–7에서 백성은 마실 물이 없어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원망했고,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사건의 끝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묻는 질문이 남습니다(출 17:7).

광야에서 물이 없다는 것은 실제로 생명을 위협하는 문제였고, 고통스러워한 것 자체를 불신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인지 자신들이 정한 조건으로 다시 증명하라고 요구한 데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고통 속에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탄식하며 묻는 기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므리바와 맛사에서는 이미 드러난 하나님의 충실함을 외면하면서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우는 태도가 문제였습니다.

사십 년 동안 본 것과 알지 못한 것

백성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길을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분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광야에서 먹이셨으며,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관계를 다시 의심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현재의 믿음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빗나간다는 것

「사십 년 동안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 세대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말했다. 『그들의 마음은 늘 빗나간다. 그들은 내 길을 알지 못했다.』」 「나는 분노하여 이렇게 맹세했다.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히브리서 3:10–11 · 두루새김

하나님은 그들의 발걸음이 빗나간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마음이 빗나간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지도가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 길」은 몇 가지 도덕 규칙이 아니라, 광야에서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과 뜻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이 분노는 잠시의 어려움에 대한 변덕스러운 반응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의 일을 보고도 계속 그분을 거스른 역사에 대한 응답입니다.

「안식」은 우선 광야 세대가 들어가기를 기대했던 약속의 땅과 연결됩니다(민 14장). 그러나 「내 안식」이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문제를 제기하며, 그 의미는 4장에서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3장에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광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길의 목적지에 들어가는 일이 보장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라는 명령

히브리서 3:12–13 본문 →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히브리서 3:12 · 두루새김

저자는 방금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그 이야기가 자기 공동체와 무관한 과거가 아님을 밝힙니다. 경고의 대상은 바깥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백하는 공동체 안의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음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다

「떠나는」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멀어지는 일을 가리키고, 저자는 그 원인을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광야의 백성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철학적 결론에 이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구원을 경험했지만,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았고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의심이 떠오르는 순간마다 그 사람을 악하다고 단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서가 경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마음이 굳어지는 일입니다.

믿음은 혼자 지키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죄에 속아 마음을 굳게 닫지 않도록, 「오늘」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안 날마다 서로 격려하십시오.히브리서 3:13 · 두루새김

앞 절에서는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서로 격려하라고 합니다.

저자는 각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하면 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에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돌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죄는 마음을 속인다

「죄에 속아」라는 표현은 사람이 죄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굳게 닫히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기보다, 속임수에 설득되는 과정에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굳게 닫다」는 단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대로 믿음의 굳건함은 귀를 닫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계속 그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속을 수 있기에, 공동체의 다른 사람이 그 위험을 일깨워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격려하는 사람 자신도 같은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므로, 교회의 격려는 우월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예수님과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왜 날마다 권해야 하는가

「오늘」이라고 할 수 있는 동안 「날마다」라는 말에는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긴박함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시편의 「오늘」을 공동체의 일상으로 가져옵니다. 강조점은 매일 형식적인 모임을 여는 제도가 아니라 계속하는 데 있습니다. 죄에 속는 일은 한 번의 경고로 해결되지 않기에, 예수님을 향한 주의는 함께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향한 주의로도 이어져야 합니다.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붙든다는 것

히브리서 3:14–15 본문 →

우리가 처음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굳게 붙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3:14 · 두루새김

이 절은 6절의 조건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6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라는 사실이 중심이었다면, 14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관계가 중심입니다. 여기서 「확신」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지녔던 굳은 신뢰입니다.

그런데 「된 것」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 지금도 이어지는 상태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끝까지 굳게 붙든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갈립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 계속 함께하는 일이 믿음을 계속 지키는 일과 실제로 맞물려 있다고 읽고(조건문을 중시), 다른 하나는 끝까지의 인내가 처음부터 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드러낸다고 읽습니다(완료형을 중시). 본문만으로 둘 가운데 하나를 최종 교리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저자가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일과 그분에 대한 신뢰를 끝까지 붙드는 일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함께하는 사람들」에 해당하는 메토코이(μέτοχος)는 어떤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3:1의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에도 같은 낱말이 쓰였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는다는 것은 높은 목표에 동의하는 일이 아니라, 그 부르심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바로 그 관계 때문에 저자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라고 권합니다.

이런 말씀이 들려오는 동안 서로 격려하십시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히브리서 3:15 · 두루새김

이번에는 하나님의 분노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언을 다시 인용하지 않고, 「오늘」과 「듣거든」과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만 남깁니다. 역사적 경고는 앞의 긴 인용으로 충분히 제시되었고, 이제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의 말씀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사람이 지금 응답해야 하는 자리를 가리킵니다.

조금 더 깊이

「확신」으로 옮긴 낱말은 히브리서 1:3에도 쓰였지만, 거기서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쓰여 두 자리의 의미가 같다고 볼 수 없습니다. 두루새김은 이 절의 문맥에 맞게 「처음 가졌던 확신」으로 옮겼습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들이 왜 들어가지 못했는가

히브리서 3:16–19 본문 →

이제 저자는 광야 세대의 실패를 세 개의 질문으로 되짚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반항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사십 년 동안 분노하셨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들, 곧 광야에서 죽어 쓰러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신 사람들은, 바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히브리서 3:16–18 · 두루새김

누가 반항했는지, 누구에게 분노하셨는지, 누구에게 맹세하셨는지. 세 질문의 답은 모두 같은 광야 세대를 가리킵니다.

구원받아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원 이야기의 시작에 함께했다고 해서 그 목적지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는 예외 없이 모든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민수기 14:30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예외로 밝히며, 히브리서의 질문은 광야 세대 대다수가 반항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예외가 경고의 무게를 줄이지는 않습니다.

광야에서 죽어 쓰러진 사람들

「광야에서 죽어 쓰러진」은 민수기 14:29의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나안 땅을 살펴보러 간 사람들은 그 땅이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강한 주민들과 튼튼한 성읍들 때문에 차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자고 했지만, 백성은 오히려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민 13–14장).

여기에서 믿지 않음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강한 성읍과 군대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으로 확인한 위협을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확실한 현실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실 목적지가 아니라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듣고도 따르지 않은 사람들

이렇게 우리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히브리서 3:19 · 두루새김

18절의 「순종하지 않은」과 19절의 「믿지 않았기 때문에」는 두 집단이 아니라 같은 세대의 실패를 두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따르지 않았고, 따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인간의 순종으로 얻어 낸다는 뜻은 아닙니다.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데서 시작됩니다. 문제는 이미 시작된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신뢰하는가에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끝나는 장

히브리서 3:1–19 본문 →

히브리서 3장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하여 광야에서 끝납니다. 처음에는 모세도 충실했고 예수님께서도 충실하시다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충실한 인도자가 있다는 사실과 그 인도를 받는 사람들이 충실하게 응답한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충실하심과 공동체의 믿음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히브리서는 두 극단을 피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을 인간의 의지와 결심의 문제로만 만들지도 않고, 예수님께서 충실하시니 인간의 응답은 의미가 없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충실하시다는 사실이 먼저 주어지고, 그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끝까지 붙들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키는 일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신하는 공로가 아니라, 막연한 낙관이나 자기 확신이 아닌 예수님의 충실하심을 계속 신뢰하며 그분에게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들을 비난하기 위해 들려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주어진 말씀입니다. 안식이 무엇인지는 아직 다 설명되지 않았고, 그 설명은 다음 장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하나의 장면이 독자의 눈앞에 남습니다.

광야에는 하나님의 일을 수없이 보고도 그분을 신뢰하지 못한 사람들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게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반항하던 때처럼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

「오늘」이라는 말씀이 아직 들리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