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1–4장 · 아들을 통해 하신 말씀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나아가기

히브리서 4장에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령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그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합시다」라는 명령입니다(1절). 그런데 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은혜의 왕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갑시다」라는 정반대의 명령이 나옵니다(16절).

그 사이에서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하나님이 달라지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자는 두 명령 사이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아시는 분인지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고 들어가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께서 지으신 어떤 것도 자신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지나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의 약함을 함께 아파하시고 시험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장은 하나님의 안식에 관한 논증에서 시작하여 이 대제사장에게 도달합니다. 안식과 대제사장은 처음에는 별개의 주제처럼 보이지만, 저자의 논증을 따라가면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믿음과 불순종이 모두 드러나는 인간이, 어떻게 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까?

이 장은 네 번의 권면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안식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는 권면(1절),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권면(11절),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권면(14절), 그리고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라는 권면(16절)입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104장 본문 읽기 →

아직 남아 있는 약속

히브리서 4:1–2 본문 →

히브리서 3장은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이 믿지 않음 때문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결론으로 끝났습니다. 4장은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뜻밖의 사실을 밝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으니, 여러분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그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날까 두려워합시다.히브리서 4:1 · 두루새김

과거의 실패보다 앞에 놓인 것은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현재의 사실입니다. 광야 세대가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워하라

1절의 「두려워합시다」는 언뜻 복음의 기쁨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요구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언제 마음을 바꾸어 구원을 취소하실지 모르니 불안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의 이유는 약속이 믿을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약속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목적지에 이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앞 장에서 확인한 광야의 역사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지만,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독자들의 미래와 연결합니다.

「이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날까」(δοκέω)에 쓰인 원문의 낱말은 ‘~인 듯하다’, ‘~로 보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다」라는 의미를 살릴 수도 있고, 단순히 「이르지 못할까」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안식에 이르지 못한 상태가 드러나는 데 초점을 두어 「이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날까」로 옮겼습니다.

‘보이다’의 의미로 읽으면, 약속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만한 상태 자체를 심각하게 여기라는 권면이 됩니다. 다만 이 표현에서 공동체가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겉으로 판정해야 한다는 뜻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저자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목적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같은 복음을 듣고도 다른 결과를 맞다

우리도 그들처럼 기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말씀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믿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2 · 두루새김

과거의 이스라엘에게도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신약의 복음을 우리와 똑같은 형태로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좋은 소식, 곧 약속하신 구원과 안식의 소식이라는 넓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광야 세대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에게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길이 열렸다는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두 시대의 상황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같은 좋은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같은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들이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믿음으로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4장에서 문법적으로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본에 따라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고도, 말씀 자체가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결합되지 못했다고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저자의 주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었다는 사실과 그 말씀을 믿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자동으로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말씀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머리로 인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삶에서 신뢰하고 그 약속을 따라 나아가는 태도입니다.

약속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듣는 사람이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안식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저자는 이제 광야를 벗어나 창조의 처음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하나가 되다」로 옮긴 말은 함께 섞이거나 결합된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 수동 분사입니다. 본문이 따른 대격 복수형은 앞의 「그들」과 연결되어, 말씀을 들었지만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두루새김은 그 사람들을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풀어 옮겼고,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이 그 이름을 직접 밝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본에는 단수 주격 분사 형태가 나타나, 말씀 자체가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결합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고대 사본의 증거에서는 대격 복수형이 강하게 지지되지만, 문법과 해석에서 두 읽기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안식은 약속의 땅보다 오래되었다

히브리서 4:3–5 본문 →

실제로 믿은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될 때 이미 일을 마치셨는데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분노하여 이렇게 맹세했다.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일을 마치셨다는 것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 일곱째 날에 대해 하신 이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하시던 모든 일을 멈추고 쉬셨다.」히브리서 4:3–4 · 두루새김

여기서 저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성경 본문을 연결합니다. 하나는 광야 세대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시편 95:11의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하시던 모든 일을 멈추고 쉬셨다는 창세기 2:2의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을 연결하는 순간 안식의 의미가 크게 넓어집니다.

하나님은 이미 안식하고 계셨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에게 안식은 우선 약속의 땅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광야를 떠도는 생활이 끝나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땅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보다 훨씬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창세기 2:2–3은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며,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지쳐서 더 이상 일하실 수 없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루시려던 창조의 일을 마치셨다고 말합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이 아니라, 일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시편 95편의 「내 안식」은 이스라엘이 어떤 땅에 들어가는 일만을 가리키기에는 더 큰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인간이 들어가도록 초청받은 안식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별도의 휴식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의 완성과 함께 누리시는 안식에 참여하는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은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미 완성된 안식과 아직 들어가야 할 안식

그런데 여기에는 시간적인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될 때 이미 자신의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미 이루어진 일인데 어떻게 아직 남아 있는 약속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쉬신다는 사실과 인간이 그 안식에 참여한다는 사실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광야 세대의 실패가 바로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 주고, 아직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은 믿음으로 계속 응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3절의 「실제로 믿은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갑니다」도 같은 긴장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안식을 순전히 현재의 마음속 평안으로 좁히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먼 미래의 보상으로만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그 안식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그 약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조금 더 깊이

3절의 「들어갑니다」는 현재형 동사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9절과 11절에서 안식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확실한 현재로 표현하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다면 왜 다시 「오늘」이라고 말씀하셨을까

히브리서 4:6–8 본문 →

그러므로 그 안식에는 아직 들어갈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날을 정해 「오늘」이라고 하십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윗을 통해,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굳게 닫지 마라.」히브리서 4:6–7 · 두루새김

저자는 서로 다른 시대에 주어진 말씀들을 시간 순서대로 놓고, 그 순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창조의 일곱째 날에 쉬셨습니다. 그다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경고를 들었습니다. 이후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시편 95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굳게 닫지 말라고 권합니다.

다윗 시대에도 안식은 끝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편 95편의 「오늘」은 히브리서의 논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 말씀이 광야 세대보다 오랜 세월 뒤에 주어졌다면, 광야 세대가 들어가지 못한 안식은 가나안 입성만으로 완전히 끝난 약속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의 전부였다면, 그 이후에 다시 「오늘」이라는 시간을 정하여 그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씀하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히브리서 4:8 · 두루새김

이 논증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역사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여호수아 21:44는 여호와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사방의 원수로부터 안식을 주셨다고 말하고, 여호수아 23:1에서도 이스라엘이 원수들로부터 안식을 얻은 뒤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안식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역사적 안식이 하나님의 안식 전체를 완전히 실현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은 실제로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은 그 후에도 계속 들렸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떠도는 생활이 끝나는 일이나 전쟁이 멎는 상태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과거에 주어진 선물로 끝나지 않고,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아직 들어가야 할 현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자는 9절에서 지금까지의 논증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여호수아」는 그리스어로 신약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적을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이름입니다. 문맥상 8절의 인물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이며,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전체의 흐름에서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백성을 더 깊은 안식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역할이 비교될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4:8 자체가 이름이 같다는 사실을 논증에 사용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저자가 직접 근거로 삼는 것은 여호수아 시대 이후에도 하나님의 안식에 관한 말씀이 주어졌다는 시간적 사실입니다.

안식일의 쉼이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서 4:9–11 본문 →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일의 쉼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히브리서 4:9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지금까지 반복되던 「안식」이라는 낱말이 여기서 바뀝니다. 앞에서는 쉬는 상태나 안식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쓰였지만, 9절에서는 삽바티스모스가 사용됩니다. 두루새김이 「안식일의 쉼」이라고 옮긴 표현입니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안식일의 성격을 지닌 쉼

이 낱말은 신약에서 여기 한 번 등장하며, 안식일을 지키거나 안식일에 쉬는 일을 가리키는 표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이 낱말을 고른 것은 앞에서 창세기 2:2를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창조의 일을 마치고 쉬신 사건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는 쉼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에게 특정 요일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직접 명령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안식에 참여하는 일을 안식일의 언어로 표현하는지는 해석상 논쟁이 있습니다. 일부 고대 기독교 해석자들은 이 구절을 장차 누릴 완전한 쉼으로 이해했고, 다른 전승에서는 안식일을 실제로 지키는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본문에서는 9절 바로 다음에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멈추고 쉬신 사건이 다시 등장하므로, 창조의 안식에 참여하는 의미가 중심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쉼의 의미를 바꿉니다.

인간의 휴식은 보통 다시 일을 시작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은 일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는 삶의 방식과는 다른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히브리서가 현대인이 지나치게 일하는 문제를 직접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안식이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일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구원을 완성할 수 없다는 신학적 의미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안식에 들어간 이는 누구인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멈추고 쉬셨듯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도 자기 일을 멈추고 쉬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4:10 · 두루새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원문에서 직접 밝혀지지 않습니다. 원문은 「들어간 사람」 또는 「들어간 이」라는 뜻의 표현일 뿐입니다.

일반적인 읽기에서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 누구나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읽으면 9절의 「하나님의 백성」과 11절의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라는 권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읽기는 이 인물을 예수님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일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셨다는 것으로, 1:3에서 죄를 깨끗하게 하신 뒤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선언과 연결됩니다.

원문이 주체를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한쪽만 문법적으로 허용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읽기에서든 이 절이 말하는 안식은 자신의 일을 멈추고 쉬신 하나님의 행동을 기준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인간의 안식을 이해하는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그러므로 그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 아무도 그들과 똑같이 순종하지 않다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히브리서 4:11 · 두루새김

쉬기 위해 애쓰라는 말입니다.

광야 세대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믿지 않음과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씁시다」는 구원을 인간의 업적으로 얻어 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안식에 참여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쓰러지는 일」은 앞 장에서 광야에 쓰러진 사람들의 주검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히 3:17). 저자는 그들의 실패를 역사적 사례로 끝내지 않고, 같은 결과가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라고 권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참으로 응답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자는 다음 절에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살피는 능력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숨은 뜻까지 가려낸다

히브리서 4:12 본문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 있게 일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어떤 양날칼보다 날카로워, 혼과 영, 관절과 골수가 나뉘는 데까지 깊이 꿰뚫고 들어갑니다. 또 마음속 생각과 의도를 가려냅니다.히브리서 4:12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성경에 관한 설명에서 자주 인용되지만, 앞의 논증에서 떼어 놓으면 저자가 왜 지금 말씀의 능력을 이야기하는지 놓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권했습니다. 광야 세대는 그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말씀은 단순히 읽히는 대상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말과 힘 있게 일한다는 말은 말씀이 지금도 활동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한번 전달되고 효력을 잃어버린 문장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에게 작용하며 그 사람의 믿음과 생각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선 지금까지 인용한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 특히 시편 95편의 「오늘」이라는 말씀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수백 년 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는 시편의 말씀이,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지금 응답해야 할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말씀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저자가 직접 펼치는 논증은 이미 들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의 문제에 놓여 있습니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나눈다는 것

양날칼은 양쪽에 날이 있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깊이 베고 들어갈 수 있는 무기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보다도 날카롭다고 말합니다.

「혼과 영」을 인간의 서로 분리된 두 실체로 보고, 말씀이 그 둘을 해부하듯 갈라놓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목적은 인간이 영과 혼과 몸이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관절과 골수가 등장한다고 해서 저자가 몸의 구조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듯, 혼과 영도 인간이 쉽게 구별하거나 다가가기 어려운 깊은 곳을 강조하는 이미지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생각조차 완전히 감출 수 없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속뜻을 가려낸다

12절의 마지막에 이르면 칼의 이미지가 향하는 목적이 드러납니다. 「가려냅니다」(κριτικός)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판단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야 할 행동을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행동을 하게 만드는 마음속 생각과 의도까지 드러냅니다.

광야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마음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명이 자신의 진짜 의도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설명을 넘어, 그 마음이 실제로 무엇을 신뢰하고 무엇을 거부하는지 드러냅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드러나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서다

히브리서 4:13 본문 →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 가운데 그분 앞에 숨겨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눈앞에 벌거벗은 채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히브리서 4:13 · 두루새김

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속까지 꿰뚫고 들어갔고,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드러납니다. 말씀은 인간의 마음 상태를 분석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숨길 수 없는 상태

13절의 원문에는 두 개의 강렬한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벌거벗은 채」이고, 다른 하나는 목이 젖혀져 드러난 모습입니다. 두루새김은 두 번째 이미지를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로 옮겼습니다.

사람은 평소 옷을 입고 자신의 모습을 가립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말과 행동, 지위와 역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장치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지으신 것의 겉모습뿐 아니라 그 존재의 깊은 곳까지 아십니다.

목이 젖혀진 모습이 정확히 어떤 장면을 가리키는지는 제물, 씨름, 억지로 들어 올린 얼굴 등 해석이 갈립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 자신을 감추거나 피할 수 없는 상태를 그립니다. 벌거벗은 채 목까지 젖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답해야 하는 분

마지막 문장 「우리는 그분께 우리가 한 일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의 원문에는 로고스(λόγος)라는 낱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던 바로 그 낱말입니다. 13절 끝의 표현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설명하거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며 두루새김도 그렇게 풀어 옮겼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두 절의 낱말을 모두 말씀의 의미로 읽어,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연결하는 해석도 제시됩니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평가하는 심판관의 자리에만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지 밝혀냅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약속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얼마나 자주 자신의 계산에 의존하는지,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도 얼마나 쉽게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는지 모두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다음 절에서 뜻밖의 권면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τραχηλίζομαι)로 옮긴 말은 목이나 목을 드러내는 동작과 관계된 동사에서 왔습니다. 희생 제물의 목을 드러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해석, 씨름에서 상대의 목을 붙잡아 젖히는 장면을 떠올리는 해석, 어떤 사람의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려 숨지 못하게 하는 모습을 생각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를 본문이 분명하게 가리킨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히브리서 4:14 본문 →

우리에게는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지킵시다.히브리서 4:14 · 두루새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 마음속 생각과 의도까지 드러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도망가야 할까요?

저자의 대답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일하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지나가셨다는 것

구약에서 대제사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통해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일을 맡았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는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 백성의 죄를 씻는 예식을 행합니다.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하늘을 지나가신」 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땅에서 하늘로 이동하셨다는 사실을 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는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뒤에서 히브리서 9:11–12는 예수님께서 손으로 만든 성소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과 관계된 사역을 이루셨다고 설명합니다. 4:14의 하늘을 지나가심은 그 하늘 성소에 관한 설명을 준비합니다. 다만 이 절 하나로 하늘이 몇 층인지, 예수님께서 실제로 어떤 길을 지나가셨는지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대제사장의 이름이 분명하게 선언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들보다 뛰어나신 분임을 밝혔습니다. 2장에서는 그 아들이 인간과 같은 피와 살을 지니시고, 고난을 겪으시며, 자비롭고 믿음직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4장에서는 그 모든 설명이 하나의 고백 안에서 만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분이 우리 편에 계십니다

13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감출 수 없는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우리에게는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히브리서의 설명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해 알려 주시는 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주어진 권면은 자신을 완전히 의롭게 만들어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을 갖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신 예수님을 고백하고 그 믿음을 굳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인정하는 신앙의 내용과 관계됩니다. 저자는 사람들의 자기 확신을 강화하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고백하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라면, 그분은 인간의 약함과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닐까요? 저자는 그 질문에 즉시 대답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함께 아파하시는 분

히브리서 4:15 본문 →

그분은 우리의 약함을 함께 아파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히브리서 4:15 · 두루새김

원문에서 이 절은 우리의 약함을 함께 아파하실 수 없는 분이 아니시라는 이중 부정으로 시작합니다. 이 형태는 앞 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높으심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습니다. 두루새김은 그 뜻을 「그분은 우리의 약함을 함께 아파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은 인간의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함께 아파한다는 것

「함께 아파하실 수 있는」(συμπαθ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낱말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가 겪는 고통에 함께 반응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지식으로만 이해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약함과 시험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몸소 시험을 받으시며 고난을 겪으셨기 때문에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히 2:18).

다만 본문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하면서, 곧이어 「죄는 없으셨습니다」라는 한계를 밝힙니다.

죄 없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죄는 없으셨습니다」는 죄와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죄를 지으시는 데 이르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해석상으로는 그분이 죄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시험을 겪으셨다는 뜻으로 읽거나, 모든 시험을 겪으셨지만 죄가 없으셨다는 뜻으로 읽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이 시험받으심과 죄 없으심을 나란히 연결하고 있어, 문맥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인간보다 도덕적으로 훌륭하셨다는 평가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 선언입니다. 인간은 시험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겪으시면서도 죄에 이르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사실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의 시험과 고통을 전혀 겪지 않으셨다면, 그분의 자비를 설명하는 이 구절의 의미가 약해질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도 죄에 굴복하신 분이셨다면, 죄를 씻는 대제사장으로서의 특별한 사역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분은 실제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실제로 고난을 겪으신 경험에 바탕을 두고, 그분의 대제사장 사역은 죄 없이 신실하셨다는 사실에 바탕을 둡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는 사람들에게도 나아갈 길이 있는 것은, 그들이 신뢰하는 대제사장이 바로 이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갑시다

히브리서 4:16 본문 →

그러므로 은혜의 왕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갑시다.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히브리서 4:16 · 두루새김

이 절은 히브리서 4장의 결론이자 다음 장에서 펼쳐질 제사장에 관한 설명의 출발점입니다.

왕좌가 은혜의 자리로 불리다

왕좌는 권위의 자리입니다. 왕은 그곳에서 다스리고, 판결하며, 명령합니다. 왕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친근한 사람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진 분 앞에 서는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왕좌를 「은혜의 왕좌」라고 부릅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그분 앞에 벌거벗은 채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로움을 증명하여 왕좌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받기 위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분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인간에게 자비와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인에게 은혜의 길이 열렸다고 선포합니다.

담대하게 나아간다는 것

「담대하게」는 히브리서 3:6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맡으신 하나님의 집에 속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말할 자유와 소망의 자랑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자유가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나아갑시다」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행동을 표현하며, 히브리서에서 이후에도 반복되어 예수님의 제사장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히 7:25; 10:22; 11:6).

담대하게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경외심도 없이 행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격을 지나치게 믿는 데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자유입니다.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한 은혜

저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목적을 자비와 은혜를 받아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필요한 때」(εὔκαιρος)로 옮긴 원문의 말은 적절한 때, 알맞은 시기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막연한 생각에 그치지 않고,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 나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표현을 하나님이 언제나 인간이 정한 시간표대로 원하는 결과를 주신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고난이 즉시 사라진다거나 모든 어려움이 요청한 방식으로 해결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한 자비와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2:18에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다고 한 선언의 연장입니다.

벌거벗은 채 드러난 사람을 향한 초청

히브리서 4:1–16 본문 →

히브리서 4장은 독자를 하나님의 안식으로 초청하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식에 들어가는 길을 설명하다가,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자리로 데려갑니다. 그 자리에서 누가 자신의 믿음과 순종이 조금도 흔들린 적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인간이 충분히 노력하면 된다고 대답하지 않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일은 자기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룬 뒤 얻는 상이 아니며, 그 약속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1절의 두려움과 16절의 담대함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므로 두려워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므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하지 않는 일을 가볍게 만드는 근거가 아니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절망 속에 가두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히브리서 4장의 마지막에는 더 이상 광야에 쓰러진 사람들이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세대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왕좌를 향해 나아가는 장면이 남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하나님 앞에 계신 대제사장이 누구신지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왕좌가 은혜의 왕좌이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