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8장 · 대제사장이신 예수
들으심을 받은 아들과 듣는 데 굼떠진 사람들
히브리서 5장에는 뜻밖의 대조가 숨어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장의 뒷부분에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왔지만, 이제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둔해진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제사장이신지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라면 누구보다 강하고, 인간의 약함을 뛰어넘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먼저 대제사장이 인간의 약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겪으시고 순종을 배우셨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을 배우실 수 있습니까? 그분은 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옵니까?
이것이 히브리서 5장의 중심 질문입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시므로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5장은 먼저 대제사장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자격을 설명하고(1–4절), 그 조건을 예수님께 적용하면서 그분만의 특별한 사역을 드러냅니다(5–10절). 그런데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순간, 저자는 논증을 멈추고 독자들의 듣는 태도를 책망합니다(11–14절).
대제사장은 왜 약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대제사장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 때문입니다.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드리는 것이 그의 일입니다.히브리서 5:1 · 두루새김
대제사장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히고, 「사람들을 위해」 일을 맡습니다. 그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된 사람이며, 그의 사역은 자신이 속한 인간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진행하는 관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제물을 드리고 죄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는 일을 맡았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따르면 속죄일에 아론은 먼저 자신과 자기 집을 위해 속죄의 제물을 드린 뒤, 백성을 위한 속죄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레 16:6, 11–17).
그는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사람이었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었고, 그들이 겪는 약함을 자기 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대제사장의 자격을 설명하면서 그의 약함을 강조합니다.
그 자신도 약한 사람이므로,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사람들과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5:2 · 두루새김
보통 어떤 직분의 자격을 설명할 때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닌 약함이 중요한 자격으로 등장합니다.
약함을 두르고 있다는 표현
두루새김이 「그 자신도 약한 사람이므로」(περίκειμαι)라고 옮긴 자리에서 원문은 약함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다는 생생한 표현을 씁니다. 약함은 가끔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손님이 아니라, 그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약함을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지와 잘못에 빠질 수 있는지 압니다.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다」(μετριοπαθέω)로 옮긴 낱말은 감정이나 반응을 알맞게 조절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잘못한 사람을 지나치게 가혹하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관대하지도 않게 대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지만, 죄지은 사람을 너무 쉽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약함을 함께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은 알지 못하고 지은 죄와 일부러 완강하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구별합니다(민 15:22–31). 여기서도 저자는 「무엇이 옳은지 모르는 사람들과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을 대제사장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대제사장은 바로 그런 죄를 다루기 위해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지만, 죄를 다룬다는 것은 죄지은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참된 제사장적 자비는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지은 사람의 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도 제물을 바친다
백성의 죄를 위해 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그 약함 때문에 자기 죄를 위해서도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히브리서 5:3 · 두루새김
2절에서는 약함이 자비로운 태도의 근거였습니다. 3절에서는 같은 약함이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한 이유가 됩니다. 하나의 약함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하지만, 자신도 속죄가 필요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아론 계열 대제사장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저자가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죄를 위해 제물을 드리셔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죄 없이 시험받으신 분이라고 선언되셨고(히 4:15), 뒤에서도 자신의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하지 않은 분으로 나타나십니다(히 7:26–27). 대제사장의 약함에 관한 설명은 예수님께서 아론 계열 대제사장과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르신지를 이해하도록 준비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과 고난을 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참여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약함을 설명한 뒤 대제사장의 또 다른 자격을 제시합니다. 그 직분은 누구도 스스로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약함을 두르고 있다」는 원문은 약함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너그럽게 대하다」로 옮긴 낱말은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감정을 완전히 없애려는 이상과 알맞게 조절하려는 이상이 논의될 때 뒤의 생각과 의미가 연결됩니다.
제사장의 존귀는 스스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귀한 자리는 스스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맡는 것입니다.히브리서 5:4 · 두루새김
대제사장의 「귀한 자리」는 개인의 능력이나 야망으로 얻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임명하지 않는다
출애굽기 28:1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불러 제사장 직분을 맡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아론이 스스로 자신에게 제사장의 권위를 준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6장에서는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공동체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가까이 나아갈 권리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은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차지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저자는 이 원칙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스스로를 높여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높여 주신 분은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히브리서 5:5 · 두루새김
저자는 예수님의 존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이미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자신의 권위로 그 직분을 차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말씀이 제사장의 근거가 되다
그런데 그 근거로 인용되는 말씀은 뜻밖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시편 2:7에서 왔습니다. 본래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시온에 세우신 왕에게 아들이라는 지위를 선언하시는 왕권의 시이며, 시편 2:7 자체에는 제사장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인용은 우선 예수님을 아들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힙니다. 하지만 아들이라는 선언만으로 대제사장 직분의 성격까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곧바로 다른 시편을 인용합니다.
또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다.」히브리서 5:6 · 두루새김
이번에는 시편 110:4입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들이라고 말하고, 시편 110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지위가 주어진다고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두 말씀을 함께 읽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 직분도 받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왕권과 제사장 직분이 한 인물 안에서 만납니다.
시편 2편은 다윗 왕권의 언어를 사용하고, 시편 110편도 왕의 통치를 중심에 두면서 그 왕에게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적 지위를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왕권의 말씀들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읽습니다.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종교적 직분의 창시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왜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인가
창세기 14:18–20에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에 등장하며, 아론의 후손도 레위 계열 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불립니다.
시편 110편은 바로 이 인물을 불러와, 아론의 혈통을 통해 이어지는 제사장 제도와 다른 근거를 지닌 왕의 제사장 직분을 설명합니다. 「멜기세덱의 계열」은 멜기세덱의 후손들이 조직한 별도의 제사장 집단이 아니라, 아론의 혈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제사장 직분이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멜기세덱의 특징은 7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지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 「너는 … 영원한 제사장이다」입니다. 아론 계열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0편의 선언에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고, 히브리서는 이 약속을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이해하는 핵심 본문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밝힌 직후, 저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임명식이 아닙니다.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계열」로 옮긴 원어는 질서나 배열뿐 아니라 어떤 직분의 방식과 성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하신 아들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시던 때에,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셨기에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히브리서 5:7 · 두루새김
히브리서 5장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읽어야 할 구절입니다.
앞에서는 대제사장이라면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받아야 하며 인간의 약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조건을 어떻게 갖추셨는지 보여 줍니다. 병을 고치시거나 귀신을 내쫓으시는 장면도,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장면도 아닙니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크게 부르짖으시며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기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간구를 바치시는 분
두루새김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로 쉽게 풀어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간구와 애원을 바치셨다고 표현합니다. 이 「바친다」(προσφέρω)는 동사는 1절에서 대제사장이 예물과 제물을 드리는 일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기도를 제사장 직분에 관한 설명 안에 놓습니다.
물론 이 반복만으로 예수님의 기도 자체가 죄를 속죄하는 희생 제물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뒤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리신 일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히 7:27; 9:14). 그러나 여기서 이미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이 그분이 고난받는 인간으로 사신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정말로 죽음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큰 부르짖음과 눈물
그분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시지 않는 사람처럼, 또는 두려움과 고통을 뛰어넘은 존재가 겉으로만 인간의 기도를 흉내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시던 때」는 죽음과 고난을 겪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놓여 계셨던 때를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14:35–36에서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그 시간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시는 분이 되신 것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채 그 위에서 다스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셨는데,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하나님을 경외하셨기에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이 세 사실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은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셨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말을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죽음을 피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그 응답을 부활과 연결합니다. 「죽음에서」(엑 타나투)라는 표현은 죽음을 겪지 않도록 구한다는 뜻으로도, 죽음의 상태에서 건져 낸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후자라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일이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시기를 구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경우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말은 죽음을 통과하는 순종의 길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이 됩니다. 두 해석 모두 신약에 전해지는 수난과 부활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히브리서 5:7 자체가 그 응답의 구체적인 방식을 하나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해석의 갈림을 인정하더라도,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간구였고 그분의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무의미한 사건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지닌 아들이시지만, 인간으로 살아가시는 동안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기도하시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들이라는 지위와 이처럼 간절한 기도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바로 다음 절이 그 긴장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2:41–44에도 괴로움 속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22:43–44는 중요한 사본 간 차이가 있는 구절입니다. 히브리서 5:7을 복음서의 한 장면만을 정확히 묘사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으며, 십자가 위의 부르짖음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셨기에」에도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셨기 때문에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는 뜻으로 옮겼고, 반면 그리스어의 전치사와 명사의 관계를 달리 이해하여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시던 것에서 건짐받으셨다는 의미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문맥에서는 경외와 순종을 강조하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다른 가능성을 문법적으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순종을 배우셨다
예수께서는 아들이시면서도 겪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리서 5:8 · 두루새김
보통 사람에게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이전에는 순종하지 못했지만 훈련을 통해 순종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불순종하셨지만 고난을 겪은 뒤 순종하게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순종과 실제로 겪는 순종
「배우셨습니다」는 경험을 통해 무엇을 익히는 일을 가리킬 수 있고, 문장 자체가 그 방식을 「겪으신 고난을 통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그분에게 이전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고통을 요구하는지 인간의 삶 안에서 경험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고통스러운 길을 실제로 걷는 것은 구별됩니다. 그분의 배움은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기보다, 순종의 요구를 실제로 끝까지 감당하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지만,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는 고난에 아무런 감정 없이 굴복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걸으셨다는 뜻입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시면서도」라는 표현은 아들이라는 지위가 고난과 순종의 경험을 면제해 주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인 기대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에서 보호받으셔야 할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분은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들 됨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자기 뜻을 밀어붙이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 안에서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5장은 그 순종을 한 단계 더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되셔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그리고 온전하게 되셔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9 · 두루새김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은 2:10에서 이미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그분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는 선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온전하게 되셔서」는 목적을 이루거나 맡은 역할을 완수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 도덕적 결함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고난의 길을 통과하시어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셨다는 뜻입니다.
「근원」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나 책임 있는 근거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예수님께서 구원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셨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되셨다는 선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분의 순종을 본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적용이지만, 인간이 그분처럼 순종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신 분과 그분에게 순종하는 사람들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셨고, 9절에서는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두 순종의 역할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구원의 근원이 되는 사역과, 믿는 이들의 순종은 그 근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관계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인간이 일정 수준의 도덕적 성취를 이루어야 구원을 얻을 자격을 갖춘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거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히브리서는 광야 세대에 관해서도 듣고 따르지 않은 일과 믿지 않은 일을 긴밀하게 연결했습니다(히 3:18–19).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이는 6절의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선언과 연결되며, 저자는 그 연결을 다음 절에서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부르셨습니다.히브리서 5:10 · 두루새김
여기서 제사장에 관한 논증이 처음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으셨고, 6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셨으며, 7–9절에서 그분은 고난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제사장 직분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오는 사역입니다.
이제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이 본격적으로 이어질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말을 멈춥니다.
조금 더 깊이
빌립보서 2:6–8 역시 예수님의 높으신 지위와 낮아지심, 죽음에 이르는 순종을 연결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직접 인용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와 그분의 순종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을 직무에 알맞게 세우는 일에는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식이 따랐습니다(출 29장; 레 8장). 온전하게 되셨다는 말을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완성되는 일과 연결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지만, 구약의 제사장 임직 의식과 완전히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은 듣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이 많지만,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둔해졌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5:11 · 두루새김
설명이 어려운 이유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이 신비롭기 때문도, 구약의 본문이 지나치게 복잡해서도 아닙니다. 듣는 사람들의 상태 때문입니다.
문제는 어려운 내용만이 아니다
「둔해졌기」라는 말에는 변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본래부터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 둔해진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낱말은 느리고 둔하며 게으른 상태를 나타내며, 히브리서 6:12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말씀에 응답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광야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지적되며,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할 말이 많은데 설명할 수 없다
「이에 대해」(페리 후)는 「그에 관하여」라고도, 「이것에 관하여」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앞 절에 멜기세덱의 이름이 등장하고 7장에서 그에 관한 설명이 다시 시작된다는 점을 보면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자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주제는 예수님의 독특한 제사장 직분입니다.
이 주제는 종교적인 호기심을 채우는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로 대제사장이 되셨는지, 어떻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 설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깊은 가르침은 전달하는 사람의 설명 능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시간이 그만큼 지났으니 여러분은 이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가르침부터 누군가에게 다시 배워야 할 형편입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히브리서 5:12 · 두루새김
시간은 충분히 흘렀지만, 그 시간에 걸맞은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식적인 교사의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규정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젖이 필요하다는 말은 기초적인 진리가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젖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음식이고, 단단한 음식은 성장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이 비유를 기초적인 가르침은 쓸모없고 어려운 가르침만 가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젖은 아기에게 꼭 필요한 음식입니다.
문제는 성장했어야 할 사람이 계속 젖만 먹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가 기대하는 성숙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이 자신의 판단과 삶을 형성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엇을 다르게 하는가
젖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아직 아기여서, 의로움에 관한 말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다 자란 사람들의 것입니다. 이들은 꾸준한 훈련으로 판단력을 길러 선과 악을 가려내는 사람들입니다.히브리서 5:13–14 · 두루새김
저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을 많은 지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과 악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길러집니다.
의로움에 관한 말씀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13절의 「의로움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해석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의로움이나 구원의 진리에 관한 말씀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지 판단하는 데 미숙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아직 단단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듯이,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깊은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판단으로 소화할 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숙한 사람이 되는가요?
감각은 사용하면서 단련된다
「꾸준한 훈련으로」는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형성된 습관을, 「길러」는 몸을 훈련하는 활동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며, 「판단력」은 본래 감각 기관이나 알아차리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들은 하나의 그림을 만듭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능숙하게 분별하는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나지 않고, 훈련을 통해 그 능력을 익힙니다.
음악을 배우는 사람은 처음에는 음정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반복해서 듣고 연습하면 그 차이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운동선수도 충분히 훈련하면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감각이 발달합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제로 적용하면서 분별하는 능력이 자라납니다.
선과 악을 가려낸다는 것
「선과 악」은 도덕적인 선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선과 악을 분별한다는 말은 성숙한 판단 능력과 관계됩니다(신 1:39; 왕상 3:9; 사 7:15–16). 그러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문제이므로, 적절한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을 구별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하나만 골라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과 올바른 삶을 판단하는 능력은 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도, 성경 지식을 자기 우월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별력은 계속 배우고, 생각하고, 순종하는 과정에서 자랍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과 믿는 이들의 성숙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되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14절에서 단단한 음식은 「다 자란 사람들」의 것입니다. 두루새김에서는 서로 다른 말로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두 표현이 같은 낱말 계열에 속합니다. 앞의 표현은 고난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일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뒤의 표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는 일과 관계됩니다.
예수님의 온전함과 믿는 이들의 성숙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과 그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성숙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더욱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에서 단단한 음식까지
히브리서 5장을 처음 읽으면 마지막 네 절이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뒷부분에서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대제사장이신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겉모습에만 머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깊은 가르침을 전달하기 전에 독자들의 듣는 태도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이 하나님과 멀어지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고난을 겪으시며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순종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눈물만을 근거로 믿음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난이 자동으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기초적인 복음을 떠나 더 높은 종교적 지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들은 복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책망은 독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말씀을 배우고 성숙하도록 깨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요?
히브리서 5장은 멜기세덱에 관한 긴 설명을 시작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저자는 설명할 말이 많다고 했지만, 아직 그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들 앞에 젖과 단단한 음식이라는 두 가지를 놓습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단단한 음식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다름 아닌, 크게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고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