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5장
이 장의 자리 · 5–8장 · 대제사장이신 예수
들으심을 받은 아들과 듣는 데 굼떠진 사람들
히브리서 5장에는 뜻밖의 대조가 숨어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간구하셨고, 하나님은 그분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장의 뒷부분에 이르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왔지만, 이제 듣는 데 굼떠진 사람들입니다.
이 대조는 우연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5장은 예수님께서 어떤 대제사장이신지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이라면 누구보다 강하고, 흔들리지 않으며, 인간의 연약함을 초월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먼저 대제사장이 인간의 약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겪으시고 순종을 배우셨다고 선언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순종을 배우실 수 있습니까? 그분은 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옵니까?
이것이 히브리서 5장의 중심 질문입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하늘을 지나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시므로 은혜의 왕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5장은 그 대제사장이 어떤 자격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는지를 밝힙니다.
논증은 세 부분으로 진행됩니다. 먼저 대제사장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자격을 설명하고(1–4절), 그 조건을 예수님께 적용하면서 그분의 독특한 사역을 드러냅니다(5–10절). 그런데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순간, 저자는 논증을 멈추고 독자들의 듣는 태도를 책망합니다(11–14절).
대제사장은 왜 약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대제사장은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과 관련된 일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말입니다.히브리서 5:1 · 본디새김
대제사장의 직분은 두 방향으로 설명됩니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서」 뽑히고, 「사람들을 위해」 세워집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과 관련된 일을 맡는 사람입니다.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 관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제물을 바치고, 죄와 정결의 문제를 다루는 일을 맡았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은 속죄일의 예식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레위기 16장에 따르면 아론은 먼저 자신과 자기 집을 위해 속죄의 제물을 바친 뒤, 백성을 위한 속죄의 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레 16:6, 11–17). 그는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사람이었지만, 죄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과 같은 인간이었고, 그들이 겪는 약함을 자기 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대제사장의 자격을 설명하면서 그의 약함을 강조합니다.
그는 자기도 약함을 두르고 있으므로 모르는 이들과 헤매는 이들을 헤아려 알맞게 대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5:2 · 본디새김
보통 어떤 직분의 자격을 설명할 때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점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약함이 중요한 자격으로 등장합니다.
약함을 두르고 있다는 표현
「약함을 두르고 있으므로」라는 표현은 약함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약함은 가끔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손님이 아니라, 그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연약함을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약함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쉽게 무지와 잘못에 빠질 수 있는지 압니다.
저자는 이 이해를 「헤아려 알맞게 대할 수 있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낱말은 감정이나 반응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무조건 불쌍히 여기는 태도보다, 잘못한 사람을 지나치게 가혹하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관대하지도 않게 대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그는 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지은 사람을 너무 쉽게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연약함을 함께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율법은 알지 못하고 지은 죄와 고의적이고 완강하게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를 구별합니다(민 15:22–31). 여기서도 저자는 「모르는 이들과 헤매는 이들」을 대제사장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둡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잘못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제사장은 바로 그런 죄를 다루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참된 제사장적 자비는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죄지은 사람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약함을 두르고 있다」의 그리스어 표현(페리케이타이 아스테네이안)은 약함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그립니다. 「헤아려 알맞게 대하다」(메트리오파테오)는 고대 그리스 윤리학에서 감정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이상과 적절하게 조절하려는 이상이 논의될 때 후자의 의미 영역과 연결되는 낱말입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도 제물을 바친다
그리고 그 약함 때문에 백성을 두고 그러하듯 자기를 두고도 죄를 위해 바쳐야 합니다.히브리서 5:3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약함이 자비로운 태도의 근거였습니다. 그런데 3절에 이르면 같은 약함이 대제사장 자신의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한 이유로 등장합니다.
하나의 약함이 두 가지 결과를 낳습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하지만, 자신도 속죄가 필요한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아론 계열 대제사장의 한계입니다. 그는 백성보다 거룩한 직분을 맡았지만,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자신을 위해서도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셔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죄 없이 시험받으신 분이라고 선언되셨고(히 4:15), 뒤에서도 다른 대제사장들과 달리 자신의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하지 않은 분으로 나타나십니다(히 7:26–27). 그러므로 대제사장의 약함에 관한 설명은 예수님께 그대로 복사할 수 있는 조건들의 목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무엇을 공유하시고 무엇에서 구별되시는지를 이해하도록 준비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약함과 고난을 아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 참여하신 분은 아니십니다.
그런데 저자는 약함을 설명한 뒤 대제사장의 또 다른 자격을 제시합니다. 그 직분은 누구도 스스로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존귀는 스스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 존귀를 스스로 취하지 않고, 도리어 아론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취합니다.히브리서 5:4 · 본디새김
대제사장의 직분은 「존귀」라고 불리지만, 개인의 능력이나 야망으로 획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제사장은 자신을 임명하지 않는다
출애굽기 28:1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불러 제사장 직분을 맡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아론이 스스로 자신에게 제사장의 권위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6장에서는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그 사건의 중심에는 공동체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접근할 권리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제사장 직분의 권위는 종교적인 열심이나 개인적인 주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은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차지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저자는 이 원칙을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그리스도도 그와 같이 스스로를 높여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히브리서 5:5 · 본디새김
저자는 예수님의 존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이미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자신이 가지신 권위를 이용해 그 직분을 차지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주어진 말씀이 제사장의 근거가 되다
그런데 그 근거로 인용되는 말씀은 뜻밖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시편 2:7에서 왔습니다. 본래 시편 2편은 여호와야훼께서 시온에 세우신 왕에게 아들이라는 지위를 선언하시는 왕권의 시이며, 시편 2:7 자체에는 제사장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인용은 우선 예수님을 아들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밝혀, 대제사장의 직분을 스스로 차지하지 않으셨다는 주장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아들이라는 선언만으로 대제사장 직분의 성격까지 모두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곧바로 다른 시편을 인용합니다.
다른 자리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다.」히브리서 5:6 · 본디새김
이번에는 시편 110:4입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아들이라고 말하고, 시편 110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지위가 주어진다고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두 말씀을 함께 읽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 직분도 받으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왕권과 제사장 직분이 한 인물 안에서 만납니다.
시편 2편은 다윗 왕권의 언어를 사용하고, 시편 110편도 왕의 통치를 중심에 두면서 그 왕에게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적 지위를 선언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왕권의 말씀들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읽습니다.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종교적 직분의 창시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우신 분이십니다.
왜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인가
여기서 처음으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14:18–20에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자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소개됩니다. 그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줍니다.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가 성립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합니다. 그는 아론의 후손도 아니고, 레위 계열 제사장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불립니다.
시편 110편은 바로 이 인물을 불러와 왕의 제사장 직분을 설명합니다. 그 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혈통을 통해 이어지는 제사장 제도와 다른 근거를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멜기세덱의 계열」을 멜기세덱의 후손들이 조직한 별도의 제사장 집단이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론의 혈통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제사장 직분이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멜기세덱의 특징은 7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지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언, 「너는 … 영원한 제사장이다」입니다. 아론 계열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그 직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지만, 시편 110편의 선언에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영원한」이라는 말은 뒤따르는 논증 전체를 예고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계열」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탁시스는 질서나 배열뿐 아니라 어떤 직분의 방식과 성격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밝힌 직후, 저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독자를 데려갑니다.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임명식이 아닙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하신 아들
그는 육을 지니고 사시던 날들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해 내실 수 있는 분에게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간구와 애원을 바치셨고, 경외함 때문에 들으심을 받으셨는데,히브리서 5:7 · 본디새김
히브리서 5장에서 가장 오래 머물러 읽어야 할 구절입니다.
앞에서는 대제사장이라면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받아야 하며 인간의 약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 조건을 어떻게 충족하셨는지 보여 줍니다. 병을 고치시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장면이 아니라,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내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며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기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간구를 바치시는 분
「간구와 애원을 바치셨고」의 「바치다」(προσφέρω)는 1절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일을 설명할 때 쓰인 동사와 같습니다. 1절의 대제사장은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고, 7절의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구와 애원을 바치십니다. 이 반복은 예수님의 기도를 제사장 직분에 관한 설명 안에 놓습니다.
물론 이 반복만으로 예수님의 기도 자체가 죄를 속죄하는 희생 제물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뒤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바치신 일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히 7:27; 9:14).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사역은 그분의 고난받는 인간됨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을 다루기 전에 자신도 인간의 연약함을 실제로 겪으십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죽음 앞에서 간구하셨습니다.
큰 부르짖음과 눈물
그분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시지 않는 사람처럼 묘사되지 않으십니다. 두려움과 고통을 초월한 존재가 겉으로만 인간의 기도를 흉내 내는 모습도 아닙니다. 「육을 지니고 사시던 날들」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넘어, 죽음과 고난을 겪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놓여 계셨던 때를 가리킵니다.
이 장면은 복음서의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마가복음 14:35–36에서 예수님은 가능하다면 그 시간이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시면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시는 분이 되신 것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채 그 위에 군림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셨는데,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내실 수 있는 분에게 간구하셨고, 그 간구는 들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이 세 사실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은 하나님이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들으심을 받으셨다」를 예수님께서 요청하신 대로 죽음을 피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한 해석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부활을 그 응답으로 보고, 다른 해석은 죽음을 통과하는 순종의 길에서 하나님이 그분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는 뜻으로 봅니다. 두 해석 모두 신약의 수난과 부활 전승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히브리서 5:7 자체가 그 응답의 구체적인 방식을 하나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경외함 때문에」도 예수님의 경외하는 태도 때문에 들으셨다는 읽기와,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시던 것에서 건짐받으셨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이런 갈림을 인정하더라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인 간구였고, 그분의 고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무의미한 사건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셨고, 저자는 그 기도가 들으심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이라는 지위와 이처럼 간절한 기도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바로 다음 절이 그 긴장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22:41–44에도 고뇌 속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22:43–44는 중요한 사본 간 차이가 있는 구절입니다. 히브리서 5:7은 이러한 수난 전 기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복음서의 한 장면만을 정확히 묘사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고, 십자가 위의 부르짖음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부활로 보는 해석은 「죽음에서」(엑 타나투)라는 표현에 기댑니다. 이 표현은 죽음을 겪지 않도록 구한다는 뜻으로도, 죽음의 상태에서 건져 낸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후자라면 부활이 간구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다른 해석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이루시기를 구하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경외함 때문에」는 이 본문이 채택한 읽기이고, 그리스어의 전치사와 명사의 관계를 달리 이해하면 「두려워하시던 것에서」 건짐받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경외와 순종을 강조하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다른 가능성까지 문법적으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순종을 배우셨다
아들이시면서도 겪으신 고난에서 순종을 배우셨고,히브리서 5:8 · 본디새김
짧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장입니다.
보통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이전에는 순종하지 못했지만 훈련을 통해 순종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불순종하셨지만 고난을 겪은 뒤 순종하게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순종과 실제로 겪는 순종
「배우셨고」는 경험을 통해 무엇을 익히거나 알게 되는 일을 가리킬 수 있고, 문장 자체가 그 방식을 「겪으신 고난에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그분에게 이전에 도덕적인 결함이 있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고통을 요구하는지 인간의 삶 안에서 경험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셨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그 뜻을 발견하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이루는 순종의 길을 몸소 걸으셨습니다. 그분의 배움은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는 과정이라기보다, 순종의 요구를 실제로 끝까지 감당하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간구하셨지만,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을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순종을 배우셨다」는 말은 고난에 아무런 감정 없이 굴복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길을 걸으셨다는 뜻입니다.
아들이시면서도
「아들이시면서도」는 아들이라는 지위가 고난과 순종의 경험을 면제해 주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인 기대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에서 보호받으셔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아들이라는 사실이 고난받지 않아도 되는 특권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아들 됨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는 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순종 안에서 드러나는 관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빌립보서 2:6–8 역시 예수님의 높으신 지위와 낮아지심, 죽음에 이르는 순종을 연결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직접 인용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예수님의 정체와 순종을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온전하게 되셔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온전하게 되셔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5:9 · 본디새김
「온전하게 되셔서」라는 말은 2:10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이번에는 그것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는 선언과 직접 연결됩니다.
「온전하게 되다」는 목적을 이루거나 맡은 역할을 완수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도 예수님께 도덕적 결함이 있었으며 고난을 통해 그것을 제거하셨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고난을 겪으셨고, 순종하셨으며, 그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근원」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나 책임 있는 근거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셨다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되셨다는 선언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분의 순종을 본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적용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분처럼 순종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신 분과 그분에게 순종하는 사람들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셨고, 9절에서는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순종과 믿는 이들의 순종이 이웃한 두 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두 순종의 역할은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구원의 근원이 되는 사역과 연결되고, 믿는 이들의 순종은 그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관계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이」를 인간이 일정 수준의 도덕적 성취를 이루어야 구원을 얻을 자격을 확보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거부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히브리서는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앞서 광야 세대에 관해서도 듣고 따르지 않은 일과 믿지 않은 일을 긴밀하게 연결했습니다(히 3:18–19).
그분이 주시는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앞에서 등장한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선언과 이어지며, 저자는 그 연결을 다음 절에서 분명히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제사장을 직무에 합당하게 세우는 일에는 정결하게 하고 성별하는 의식이 따랐습니다(출 29장; 레 8장). 히브리서의 「온전하게 되다」를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완성되는 일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는 일을 구약의 제사장 임직 의식과 완전히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대제사장이라 불리셨습니다.히브리서 5:10 · 본디새김
여기서 제사장에 관한 논증이 처음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5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지 않으셨고, 6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선언하셨으며, 7–9절에서 그분은 고난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제사장 직분은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나온 권력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오는 사역입니다.
이제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이 본격적으로 이어질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갑자기 말을 멈춥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까닭은 듣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를 두고 우리가 할 말이 많은데 풀어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듣는 데 굼떠졌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5:11 · 본디새김
설명이 어려운 이유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의 정체가 신비롭기 때문도, 구약의 본문이 지나치게 복잡해서도 아닙니다. 저자는 듣는 사람들의 상태를 지적합니다.
문제는 어려운 내용만이 아니다
「굼떠졌다」라는 말에는 변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본래부터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듣는 데 굼떠진 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낱말은 느리고 둔하며 게으른 상태를 나타내며, 히브리서 6:12에서도 다시 등장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이해하며, 그 말씀에 응답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광야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고백하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지적됩니다.
초점은 새롭습니다. 저자는 믿음을 버리지 말라고 말하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능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할 말이 많은데 설명할 수 없다
「그를 두고」의 그리스어 페리 후는 「그에 관하여」라고도, 「이것에 관하여」라고도 읽을 수 있습니다. 관계대명사의 형태가 남성과 중성에서 같기 때문입니다. 앞 절에 멜기세덱의 이름이 등장하고 7장에서 그에 관한 설명이 다시 시작된다는 점에서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읽기가 자연스럽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지금까지의 논증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자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주제는 예수님의 독특한 제사장 직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로 대제사장이 되셨는지, 왜 그 직분이 아론 계열과 다른지, 어떻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 설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깊은 가르침은 전달하는 사람의 설명 능력만으로 성립하지 않고, 듣는 사람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오랫동안 말씀을 들어 왔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한 공동체의 상태를 지적하고, 그 상태를 음식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그만한 세월이 지났으니 여러분은 선생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첫걸음이 되는 가르침들을 누군가 여러분에게 다시 가르쳐야 할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히브리서 5:12 · 본디새김
시간은 충분히 흘렀지만, 그 시간에 걸맞은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저절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식적인 교사의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규정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배우고 이해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야 한다는 기대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입니다.
젖이 필요하다는 말은 기초적인 진리가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젖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음식이고, 단단한 음식은 성장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입니다. 이 비유를 성경의 기초적인 가르침은 수준이 낮아서 쓸모없고 어려운 가르침만 가치 있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젖은 잘못된 음식이 아니라 젖먹이에게 꼭 필요한 음식입니다.
문제는 성장했어야 할 사람이 계속 젖만 먹을 수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저자가 기대하는 성숙은 새로운 지식을 많이 습득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 말씀이 자신의 판단과 삶을 형성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무엇을 다르게 하는가
그도 그럴 것이, 젖을 먹는 이는 누구나 의의 말씀에 서투릅니다. 아직 젖먹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온전한 이들, 곧 익히고 익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도록 단련된 감각을 지닌 이들의 것입니다.히브리서 5:13–14 · 본디새김
저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을 많은 지식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형성됩니다.
의의 말씀에 서투르다는 것
13절의 「의의 말씀」은 「의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의미를 하나로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해석이 있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의로움이나 구원의 진리에 관한 말씀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의의 말씀에 서투릅니다」는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여 무엇이 참되고 올바른지 판단하는 데 미숙한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젖먹이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듯,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은 깊은 가르침을 자신의 판단으로 소화할 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감각은 사용하면서 단련된다
14절의 「익히고 익혀」는 반복적인 사용을 통해 형성된 습관이나 익숙한 상태를, 「단련된」은 신체를 훈련하는 활동을 연상시키는 표현을, 「감각」은 감각 기관이나 지각 능력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감각은 무엇이 적절한지 분별하는 능력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능숙하게 분별하는 능력을 가진 채 태어나지 않습니다. 음악을 배우는 사람은 처음에는 음정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지만, 반복해서 듣고 연습하면 알아차리게 됩니다. 운동선수도 충분히 훈련하면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감각이 발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도 이와 비슷한 성숙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제로 적용하면서 분별하는 능력이 자라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낸다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도덕적인 선악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선과 악을 분별한다는 말은 성숙한 판단 능력과 관계됩니다(신 1:39; 왕상 3:9; 사 7:15–16).
그러나 직접적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이 문제입니다.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깊은 설명을 시작하려다가 독자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분별은 적절한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을 구별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읽기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과 올바른 삶을 판단하는 능력은 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어려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복잡한 내용을 자기 지식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이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참된 것과 그릇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과 믿는 이들의 성숙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온전하게 되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고, 14절에서는 단단한 음식이 「온전한 이들」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표현은 같은 그리스어 어휘 계열에 속하지만, 의미를 똑같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전자는 고난과 순종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되고, 후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을 배우며 성장하는 일과 관계됩니다.
예수님의 온전함과 믿는 이들의 성숙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과 그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성숙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더욱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눈물의 기도에서 단단한 음식까지
마지막 네 절은 갑작스러운 주제 전환처럼 느껴지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대제사장이신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향한 믿음도 쉽게 피상적인 상태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셨고, 뒷부분에서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구원의 근원이 된다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순종은 그 구원에 참여하는 삶으로 나타나며, 그 순종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일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분이 하나님과 멀어지셨다는 증거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눈물만을 근거로 믿음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고난이 자동으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구원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젖에서 단단한 음식으로 나아간다는 것도 기초적인 복음을 떠나 더 높은 종교적 지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들은 복음이 얼마나 크고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의 책망은 독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말씀을 배우고 성숙하도록 깨우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요?
히브리서 5장은 멜기세덱에 관한 긴 설명을 시작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저자는 설명할 말이 많다고 했지만, 아직 그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대신 독자들 앞에 젖과 단단한 음식이라는 두 가지를 놓습니다.
그들 앞에는 여전히 단단한 음식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은 다름 아닌,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하시고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