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6장

이 장의 자리 · 5–8장 · 대제사장이신 예수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고와 변하지 않는 약속

히브리서 6장에는 두 가지 불가능한 일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예수님에게서 돌아서는 사람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일」은 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6:4–6). 이 불가능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 그분이 약속하고 맹세하신 뜻은 변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6:18). 이 불가능은 소망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선언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토록 확실하다면 왜 믿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패를 경고합니까? 반대로 인간이 그렇게 심각하게 실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이 질문에 간단한 공식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예수님에 관한 처음 가르침에서 더 깊은 성숙으로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저버리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설명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독자들이 보여 준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변하지 않는 뜻을 소망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들리지만, 마지막에는 흔들리는 사람을 붙드는 「목숨의 닻」이 나타납니다.

읽는 시간 28분소단락 86장 본문 읽기 →

처음 말을 뒤에 두고 온전함으로 나아갑시다

히브리서 6:1–3 본문 →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두고 하는 처음 말을 뒤에 두고 온전함으로 나아갑시다. 죽은 일들에서 돌이키는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터를 다시 놓는 일 없이 말입니다.히브리서 6:1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문제를 이어받습니다. 5장 마지막에서 저자는 오랫동안 말씀을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젖을 먹는 어린아이처럼 기초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성숙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명령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뒤에 두라니, 마치 예수님을 넘어 더 높은 단계의 가르침으로 나아가라는 뜻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터를 다시 놓는 일 없이」라는 표현이 그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기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저자는 건축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건물을 세우려면 먼저 터를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터가 마련되었다면 계속 같은 터를 다시 놓는 일만 반복해서는 건물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기초는 필요합니다. 기초가 없으면 건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초만으로 건물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처음 말을 뒤에 두고」라는 표현은 그 가르침을 폐기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을 토대로 더 깊은 이해와 성숙에 이르라는 뜻입니다. 「온전함」은 완성이나 성숙을 가리키며, 여기서는 독자들이 신앙의 이해와 분별에서 성숙해야 한다는 의미가 중심입니다.

여섯 가지 기초적인 가르침

1–2절에는 기초적인 가르침들이 등장합니다. 죽은 일들에서 돌이키는 회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씻음, 손 얹음, 죽은 이들의 부활, 영원한 심판입니다. 모두 기독교 신앙의 시작에 중요한 내용이지만, 동시에 제2성전기 유대교의 신앙과도 깊이 연결되는 주제들입니다.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오래전부터 선포했던 메시지입니다. 부활과 심판 역시 예수님의 부활 이전부터 일부 유대교 전승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단 12:2; 요 11:24). 「씻음」은 유대교의 여러 정결 예식에 관한 가르침으로도, 세례에 관한 가르침으로도 읽힐 수 있고, 「손 얹음」도 성경의 여러 맥락에 등장하므로 특정한 의식 하나만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 목록은 예수님에 관한 신앙의 기초를 이루면서도, 유대교에서 익숙했던 종교적 언어와 실천에 연결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그 기초 위에서 예수님의 독특한 대제사장 직분과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려 합니다. 회개와 믿음, 정결과 심판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에 머무르지 말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결정적인 의미를 얻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숙은 처음 배운 복음을 졸업하는 일이 아니라, 그 복음이 얼마나 깊은 의미를 지니는지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만 하면 우리는 이렇게 할 것입니다.히브리서 6:3 · 본디새김

저자는 성숙을 명령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숙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1절의 권면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 성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래의 계획 앞에 덧붙이는 경건한 표현이 아닙니다. 다음 절에서 저자는 사람이 다시 회개에 이르도록 새롭게 하는 일조차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회를 당연하게 여길 수 없습니다.

성숙을 향한 초청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은혜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함」은 앞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고 할 때의 어휘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나아갑시다」는 수동형 또는 중간태 형태이므로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끌립시다」라는 의미의 여지도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누가 이끄는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3절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한다는 말이 이어진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씻음」에 해당하는 밥티스모스(βαπτισμός)는 여기서 복수형이며,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가리키는 밥티스마와 구별되는 낱말입니다. 히브리서 9:10에서는 같은 낱말이 여러 가지 씻는 예식과 관계되어 사용되므로, 여기서도 유대교의 여러 정결 예식에 관한 가르침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의 세례와 다른 씻음들의 관계를 가르치는 내용을 뜻하거나, 세례에 관한 기초 교육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복수형이라는 사실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손 얹음」은 축복, 직무의 위임, 성령과 관련된 행위 등에 사용됩니다(민 27:18–23; 행 8:17; 13:3).

모든 것을 맛본 뒤에 빗나가 쓰러진 사람들

히브리서 6:4–6 본문 →

다음과 같은 일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거룩한 영에 참여한 이들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좋은 말과 오는 시대의 능력들을 맛보고,히브리서 6:4–5 · 본디새김

히브리서 전체에서 가장 해석이 어려운 경고 가운데 하나가 시작됩니다.

먼저 볼 것은 「될 수 없다」라는 선언보다 그 뒤에 길게 이어지는 사람들의 묘사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단지 복음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표현들은 가볍지 않습니다.

경험의 깊이를 점점 더 선명하게 그리다

「빛을 받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되는 경험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2에서도 독자들이 빛을 받은 뒤 고난을 견뎠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맛보다」를 무언가를 아주 조금 맛만 보고 실제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 2:9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셨다」는 말은 실제로 죽음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6장의 「맛보고」도 하늘의 선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강한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참여한 이들」(μέτοχος)은 히브리서 3:1에서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사람들, 3:14에서 예수님에게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킬 때도 쓰인 낱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지 기독교 공동체 근처에 잠시 머물렀다는 뜻으로 약화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는 시대의 능력들」은 장차 하나님이 이루실 구원의 시대와 관계된 능력이 이미 독자들의 시대에 나타났다는 이해를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2:4에서 하나님이 표징과 이적과 여러 능력으로 복음의 증언을 확증하셨다고 한 말씀과 연결됩니다. 저자가 묘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선물과 능력을 풍성하게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갑자기 상황이 뒤집힙니다.

경험한 은혜의 크기만큼 심각해지는 거부

그러고서 빗나가 쓰러진 이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일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들에게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고 있습니다.히브리서 6:6 · 본디새김

「빗나가 쓰러지다」는 길에서 벗어나거나 떨어져 나가는 일을 나타냅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소한 실수나 일시적인 의심보다 훨씬 심각한 이탈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뒤따르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도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는 수준의 경고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받아들였던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예수님을 수치스러운 대상으로 취급하는 행위와 관계됩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극도의 수치와 치욕을 동반한 처형이었습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버리는 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만든 사람들의 태도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거부하는 분은 자신들의 구원을 이루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다시 회개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한가

6절의 가장 어려운 표현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선언입니다. 4절의 「될 수 없다」는 강한 불가능의 표현이므로, 이를 단순히 매우 어렵다는 뜻으로 약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 불가능을 두고 해석은 세 갈래로 갈립니다. 실제로 구원에 참여했던 사람도 예수님을 결정적으로 배반할 수 있고 그 뒤에는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읽기, 구원의 은혜를 깊이 경험했지만 참된 구원의 믿음에 끝까지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을 묘사한다는 읽기, 예수님을 계속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상태에서는 회개로 새롭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읽기입니다. 이 세 읽기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는 체계라기보다 본문의 서로 다른 특징에 무게를 두는 해석들이지만, 회복의 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명시하지 않은 회복의 조건이나 시점을 단정하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이 경고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해석이 갈리는 부분을 인정하더라도 분명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평범한 신앙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의심과 실수, 넘어짐을 이 구절의 배교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경험하고도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수치스럽게 하는 결정적인 이탈을 묘사합니다.

또한 이 구절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판정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저자 자신도 곧바로 독자들을 향해 더 나은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근거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개인적인 판정은 본문이 제공하는 정보를 넘어섭니다. 그러나 반대로 경고를 단순한 가정이나 과장된 표현으로 처리해서도 안 됩니다.

이 경고의 중심에는 하나의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을 거부한다면 어디에서 다시 구원을 찾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는 다른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는 사실을 이미 선언했기 때문입니다(히 5:9).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은 단순히 여러 종교적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근원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논증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비가 내리는 밭의 이미지를 통해 은혜와 인간의 응답을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첫째 읽기는 4–5절의 강한 참여 표현과 6절의 경고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둘째 읽기는 9절에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구원에 잇닿은 것들」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셋째 읽기는 6절의 「십자가에 못 박고」와 「욕을 보이고」가 현재분사라는 사실을 근거로, 지속적인 배교 상태와 회개의 불가능성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현재분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행동을 중단하면 언제든 반드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결론이 문법적으로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이 분사들은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일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하는 기능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의 그리스어 아나스타우로오(ἀνασταυρόω)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단순히 십자가에 매단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실제로 반복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빛을 받다」는 초기 기독교에서 세례와 연결되어 사용되기도 했지만, 6:4만으로 세례 의식만을 뜻한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비를 마시고도 다른 열매를 맺는 땅

히브리서 6:7–8 본문 →

자기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마시고, 사람들을 위해 갈아져 그들에게 쓸모 있는 푸성귀를 내는 땅은 하나님에게서 복을 몫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못 쓸 것이고 저주에 가까우며, 그 끝은 불사름입니다.히브리서 6:7–8 · 본디새김

한 땅에는 비가 내리고 다른 땅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 다 비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비를 마신 뒤 나타나는 결과가 다릅니다.

문제는 비의 부족이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비는 땅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리는 선물입니다. 앞의 사람들은 빛을 받았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았으며, 거룩한 영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좋은 말씀과 오는 시대의 능력들을 경험했습니다. 비를 충분히 받은 땅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비가 내렸느냐가 아니라, 비를 받은 땅이 무엇을 내었느냐에 있습니다.

은혜는 먼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는 무의미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7절의 땅은 「사람들을 위해 갈아져」 푸성귀를 냅니다. 이 땅의 열매는 땅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고, 그 땅을 갈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습니다. 저자는 아름다운 꽃이나 탐스러운 열매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에게 유익한 작물을 내는 땅을 말하며, 그런 땅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습니다.

반면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쓸모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죄 이후 땅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낸다는 창세기 3:17–18의 언어가 떠오릅니다.

8절은 저주가 완전히 확정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저주에 가까우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불사름입니다」라는 말이 뒤따르므로 경고의 심각성을 약화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비유가 매우 냉혹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저자는 이 모든 경고를 들려준 독자들에 대해서는 더 나은 것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서가 창세기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시나무와 엉겅퀴라는 이미지는 죄와 저주가 관계되는 구약의 언어를 연상시킵니다. 이사야 5:1–7의 포도원 노래 역시 돌봄을 받은 땅이 기대한 열매를 내지 못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불사름이 잡초를 제거하는 농사 방식인지, 저주와 심판의 파괴를 가리키는지에 관해서는 해석이 나뉩니다. 다만 이 문맥에서는 쓸모없는 열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의 이미지라는 점이 분명하므로, 불을 정화의 과정으로만 설명하여 경고의 의미를 없애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에게 더 나은 것을 확신합니다

히브리서 6:9–12 본문 →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는 더 나은 것들, 곧 구원에 잇닿은 것들을 확신합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해도 그렇습니다.히브리서 6:9 · 본디새김

저자는 방금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을 다시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는 땅의 끝이 불사름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독자들을 부르는 말이 달라집니다.

히브리서에서 「사랑하는 여러분」처럼 직접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며 독자들을 부르는 장면은 드뭅니다. 이 호칭은 엄중한 책망 뒤에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수사적인 장치가 아니라, 저자가 독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드러냅니다. 그는 독자들이 예수님에게서 이미 돌아선 사람들이라고 판정하지 않습니다.

경고는 이미 실패했다고 선언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자는 같은 공동체를 향해 가장 엄중한 경고를 전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구원에 잇닿은 것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는 앞의 경고가 독자들의 배교를 이미 확정한 선언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경고는 미래의 실패를 필연적으로 예언하는 말이 아닙니다. 실패의 심각성을 밝힘으로써 독자들이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붙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자의 확신은 단순한 낙관이 아닙니다. 그는 왜 독자들에게 더 나은 것을 기대하는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과,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위해 보여 준 사랑을 잊으실 만큼 불의한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고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히브리서 6:10 · 본디새김

이 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독자들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계산하여 그만큼 구원을 받아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들이 구원을 얻을 만한 공로를 충분히 쌓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기억하는 것은 추상적인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실제로 다른 사람들을 돌본 일입니다. 「섬겼고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라는 두 시제가 보여 주듯, 저자는 그들이 오래전에 한 번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확신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계속되는 사랑의 실천을 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앞의 밭 비유가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7절에서 비를 받은 좋은 땅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푸성귀를 냈습니다. 10절에서 독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로서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신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신앙생활에 덧붙이는 선택적인 미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삶에 어떤 열매를 맺는지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입니다.

처음의 열심이 아니라 끝까지 이어지는 열심

그런데 우리는 여러분 하나하나가 소망에 대한 온전한 확신에 이르도록 끝까지 같은 열심을 보여 주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굼떠지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물려받는 이들을 본받는 이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히브리서 6:11–12 · 본디새김

10절에서 저자는 독자들의 현재 모습을 긍정했습니다. 이제 관심은 과거의 사랑을 증명하는 데서 미래의 인내로 이동합니다. 새로운 종류의 놀라운 업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여 주고 있는 사랑과 섬김을 끝까지 이어 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확신을 얻으려면 먼저 모든 불안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랑을 계속하면서 소망에 대한 확신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확신은 현실에서의 믿음과 사랑의 지속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굼떠지지 않고」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5:11에서 독자들은 듣는 데 굼떠졌다고 지적받았는데, 6:12에서는 굼떠지지 말라는 권면이 믿음과 오래 참음에 연결됩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굼떠지는 문제와 믿음의 삶을 지속하는 데 굼떠지는 문제가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숙은 어려운 신학적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 이해가 믿음과 사랑과 인내의 삶으로 이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물려받는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음 절에서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왜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는가

히브리서 6:13–16 본문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이를 두고 맹세할 데가 없었으므로 자기를 두고 맹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복을 주겠고, 너를 불리고 또 불리겠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오래 참고서 그 약속을 얻었습니다.히브리서 6:13–15 · 본디새김

이 단락에서 저자는 갑자기 아주 오래전의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아브라함보다 하나님께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내는 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합니다.

이삭을 바친 사건 뒤에 주어진 맹세

히브리서가 인용하는 말씀은 창세기 22:17에서 왔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가 아니라,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모리아 땅으로 갔던 사건 이후에 주어졌습니다.

이삭은 평범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자녀였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은 바로 그 이삭을 통해 이어질 예정이었습니다(창 21:12).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약속의 자녀를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처지에서 이것은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사건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도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맹세로 확증하십니다. 단순히 복을 주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반드시 복을 주고 반드시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강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약속의 내용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더 높은 보증인이 없다

16절은 인간 사회에서 맹세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자신의 말만으로는 상대방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호소하여 약속의 확실성을 보증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맹세는 법적 분쟁이나 약속의 확증과 관계된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출애굽기 22:10–11에는 분쟁의 상황에서 여호와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두고 맹세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보다 더 큰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습니다.

인간의 맹세는 자신보다 높은 권위에 기대어 확실성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맹세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근거합니다.

그분의 약속을 보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얻었는가?

15절은 아브라함이 오래 참고서 그 약속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13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들을 받지 못한 채 죽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약속을 받는 일과 약속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일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얻었고,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맹세로 약속을 확증하시는 말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는 일과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복의 성취는 그의 생애를 넘어 이어질 일이었습니다. 6:15는 아브라함이 인내 가운데 약속의 성취와 확증을 경험했다는 사실에, 11:13은 그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더 큰 약속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사실을 경험했지만, 그 약속의 모든 결과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일이 현재 눈앞에 완전히 드러나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 있어도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또 복을 주겠고」에서 반복되는 동사는 히브리어의 강조 표현을 반영합니다. 창세기 22:17의 히브리어는 같은 동사 어근을 겹쳐 확실성을 강조하는 형식을 사용합니다. 그리스어 칠십인역도 이 반복을 살렸고, 히브리서 역시 이 반복을 따릅니다.

하나님은 왜 이미 확실한 약속에 맹세를 더하셨는가

히브리서 6:17–18 본문 →

그래서 하나님은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자기가 정하신 뜻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똑똑히 보이려고 맹세로 그 사이에 서 주셨습니다.히브리서 6:17 · 본디새김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맹세하셨을까요? 인간은 자신의 말이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맹세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맹세가 더해진다고 해서 하나님이 갑자기 더 정직해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맹세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고 약속을 받는 사람을 돕는다

17절이 밝히는 맹세의 목적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뜻을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더욱 똑똑히 보이려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 자신의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이 참되다는 사실을 선언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약속을 받는 사람들이 그 약속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맹세까지 더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자신의 성품을 바꾸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자신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실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확실함 앞에서 자신의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의 변하지 않는 뜻을 더욱 분명하게 알려 주십니다.

약속의 상속자들은 누구인가

17절에서 저자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선을 옮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생애가 끝났다고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물려받는 사람들이 있고, 히브리서는 그 약속을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의 소망과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적은 오래전 믿음의 조상을 칭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지금 독자들이 의지하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변하지 않는 두 가지

바뀌지 않는 두 가지, 곧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 두 가지를 통해,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해 들어온 우리가 힘 있는 격려를 가지도록 말입니다.히브리서 6:18 · 본디새김

문맥에서 「바뀌지 않는 두 가지」의 가장 자연스러운 대답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종류의 보증처럼 보이지만, 그 확실성의 근거는 같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거짓말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만 읽으면 약해집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그분의 성품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이 장의 앞부분에 등장한 또 하나의 불가능과 대조를 이룹니다. 4절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버린 사람들을 다시 회개로 새롭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경고했고, 18절에서는 하나님이 거짓말하시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일이 얼마나 확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보여 줍니다.

경고는 그대로 엄중합니다.

약속은 그대로 확실합니다.

다만 그 확실한 약속이 인간의 불순종까지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인간의 실패 가능성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불확실하게 만든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두 사실을 함께 붙들고, 그 결과가 「힘 있는 격려」라고 말합니다.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해 들어온 사람들

「피해 들어오다」는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낙관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피신해 온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신했습니다.

여기서 소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와 그분이 이루시는 구원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소망을 붙잡는 사람들은 자신의 강한 의지로 안전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맹세하신 확실한 근거에 자신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이제 저자는 그 소망을 마지막 이미지로 설명합니다. 닻입니다.

조금 더 깊이

갈라디아서 3:29에서도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씨이며 약속에 따른 상속자라고 말합니다. 이는 히브리서의 직접 인용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약속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백성에게 연결된다는 신약의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피해 들어오다」는 구약의 도피성 제도를 떠올릴 수 있는 표현이지만, 본문이 민수기 35장이나 여호수아 20장의 도피성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닻이 성소의 휘장 안쪽으로 들어가다

히브리서 6:19–20 본문 →

우리는 이 소망을, 흔들리지 않고 굳으며 휘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목숨의 닻처럼 가지고 있습니다.히브리서 6:19 · 본디새김

소망을 닻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도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바람과 물결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닻을 내리면 배가 일정한 자리에서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닻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닻이 내려가는 곳이 바다가 아니다

저자는 바다에 속한 닻과 성소에 속한 휘장을 하나의 문장 안에 놓습니다. 닻을 생각하던 독자는 이제 성소의 안쪽을 바라보게 됩니다.

휘장은 구약의 성막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경계였습니다. 레위기 16장에서는 대제사장이 속죄일에 휘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일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지성소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특별하게 관계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우리의 소망이 바로 그 휘장 안쪽으로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의 상황이 안정적이기 때문에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그 소망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계된 가장 깊은 자리에 닿아 있습니다.

소망이 휘장 안쪽으로 들어간 이유

그런데 왜 우리의 소망이 휘장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20절이 대답합니다.

거기에 예수가 우리를 위해 앞서 달려간 이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들어가셨습니다.히브리서 6:20 · 본디새김

우리의 소망이 휘장 안쪽으로 들어간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곳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달려간 이」는 다른 이들보다 앞서 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단순히 먼저 도착한 사람보다 뒤따라올 이들보다 앞서 길을 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0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여는 이로 불리셨습니다.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백성을 대표하는 독특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 전체가 대제사장의 뒤를 따라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앞서 달려간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들어가심은 다른 사람들과 무관한 개인적인 영예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언젠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들어가신 예수님께 근거합니다.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

20절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하는 멜기세덱은 5:6과 5:10에서 시작한 설명으로 독자를 다시 데려갑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설명하다가 독자들의 미성숙을 책망했고, 배교의 위험을 경고했으며, 사랑과 인내를 권하고, 하나님의 맹세를 통해 소망의 확실성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그 모든 논증이 다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으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앞서 달려간 이」에 해당하는 낱말은 프로드로모스(πρόδρομος)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심이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제는 히브리서 10:19–22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는 길이라는 관점으로 더욱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그토록 엄중한 경고가 어떻게 소망으로 끝나는가

히브리서 6:1–20 본문 →

히브리서 6장은 경고와 확신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논증을 끝까지 따라가면 이 둘이 서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경고는 인간의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고, 확신은 인간의 믿음을 자기 힘에만 맡겨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했지만 아브라함은 기다려야 했고, 오히려 그 확실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소망의 최종적인 토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토대는 하나님 자신이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들어가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엄중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고를 듣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약속과 맹세로 확증하신 소망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독자는 더 이상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내는 땅을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눈앞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있습니다. 배는 자신의 힘으로 바다를 잠잠하게 할 수 없고, 바람이 불고 물결이 움직이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닻은 배 자체를 더 강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닙니다. 배가 자신보다 더 확실한 곳에 붙들려 있도록 하는 장치입니다. 소망의 닻이 확실한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단단하게 붙잡고 있는가보다, 그 닻이 어디에 닿아 있는가에 있습니다.

배는 여전히 물 위에 있고, 물결은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닻은 휘장 안쪽에 닿아 있습니다.

그곳에 우리를 위해 앞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