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5–8장 · 대제사장이신 예수
죽음 때문에 끝나지 않는 제사장
히브리서 7장에는 한 가지 이상한 논증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보다, 성경이 그 사람에 관해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지를 살핍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태어난 날도 죽은 날도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멜기세덱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읽어 보면 멜기세덱이 실제로 부모 없이 태어났다거나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부모와 죽음에 관한 기록이 없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그 기록의 침묵에 주목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가 설명하려는 것은 신비로운 고대 인물의 정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왜 아론의 후손이 아니면서도 제사장이실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왜 영원한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고 아론의 후손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왜 또 다른 제사장이 필요한가요? 새로운 제사장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전의 제사장 제도에 무엇이 부족했다는 뜻인가요?
히브리서 7장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레위 계열의 제사장 직분이 인간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소망이 들어왔으며, 우리는 그 소망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의 의미가 「그래서 그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7:25)라는 한 문장으로 드러납니다.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단순히 종교 제도의 교체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과 관계됩니다.
이 장의 논증은 세 번 방향을 바꿉니다. 먼저 아브라함보다 높은 지위를 지녔던 멜기세덱을 살핍니다(1–10절). 그다음 아론 계열과 다른 제사장이 등장해야 했던 이유를 밝힙니다(11–19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맹세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 단번에 이루신 희생을 통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의 확실성을 설명합니다(20–28절).
처음에는 족보와 십일조처럼 낯선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마지막에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에 도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 갈 제사장은 어떤 분이어야 하나요?
아브라함의 길을 가로질러 나타난 왕이자 제사장
그도 그럴 것이, 이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이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마주 나가 그에게 복을 준 이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나누어 준 이도 그입니다. 먼저 그 이름은 「의의 왕」이라는 뜻이고, 그다음으로 그는 「살렘의 왕」인데, 이는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히브리서 7:1–2 · 본디새김
멜기세덱은 창세기 14:18–20에 짧게 등장합니다.
여러 왕의 전쟁으로 아브람의 조카 롯이 사로잡히자, 아브람은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롯과 빼앗긴 사람들을 구출합니다. 그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두 왕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소돔 왕이고, 다른 하나는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맞이하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줍니다.
창세기는 이 인물을 미리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언제 왕이 되었는지, 어떻게 제사장 직분을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전쟁 이야기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고, 다시 이야기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그가 맡고 있는 두 직분은 분명합니다. 왕이자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왕권과 제사장 직분은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가문과 직무에 속했습니다. 왕권은 다윗의 가문과 관계되었고, 율법에 따른 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후손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가 성립하기 이전에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으로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아론의 족보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인정된 인물이 이미 등장합니다.
의의 왕이며 평화의 왕
저자는 멜기세덱의 이름과 도시 이름도 「의의 왕」, 「평화의 왕」으로 풀어 줍니다. 멜기세덱은 단순히 옛날에 존재했던 특별한 제사장이라는 이유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과 직분이 예수님의 통치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합니다.
의와 평화는 구약에서 이상적인 왕의 통치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시편 72편은 왕이 정의롭게 판단할 때 의인들이 번성하고 평화가 풍성할 것을 노래합니다(시 72:1–7). 이사야 32:17은 의의 결과가 평화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가 그 구절들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통치와 평화를 연결하는 구약의 더 넓은 주제 속에서 멜기세덱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의의 왕」이 먼저 나오고 「평화의 왕」이 나중에 나온다는 순서를, 반드시 의로움을 얻은 다음에만 평화를 얻는다는 독립적인 구원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목적은 멜기세덱의 이름과 지위가 예수님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이름 말키체데크에는 왕을 가리키는 요소와 의로움 또는 정의를 가리키는 요소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름의 고대 형성 배경을 두고는 다른 어원적 가능성도 논의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이를 명시적으로 「의의 왕」으로 해석합니다. 「살렘」은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샬롬과 연결되어 「평화의 왕」이라는 의미로 설명됩니다. 살렘을 예루살렘과 동일시하는 전통도 오래되었고, 시편 76:2에서는 살렘과 시온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4장만으로 이 도시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독립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족보에서 무엇을 읽는가
이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으며, 날의 처음도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져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남아 있습니다.히브리서 7:3 · 본디새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읽으면 멜기세덱이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자료는 창세기 14장의 짧은 이야기와 시편 110:4의 제사장 선언입니다. 창세기는 멜기세덱의 부모를 언급하지 않고, 그의 출생도 기록하지 않으며, 그가 죽었다거나 후손에게 제사장 직분을 물려주었다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그 기록의 특징을 신학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족보가 없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스라엘의 제사장 제도에서는 누가 아론의 후손인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족보가 특별히 중요했습니다. 에스라 2:61–63과 느헤미야 7:63–65에는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제사장 가문 가운데 족보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하여 제사장 직무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그가 어느 제사장 가문의 후손인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도 그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단순히 정보가 부족하다는 문제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아론 계열의 혈통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특징으로 사용됩니다.
태어난 날과 죽은 날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비슷하게 기능합니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은 사람으로 태어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다가 죽고,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이어받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멜기세덱에게는 그러한 시작과 끝, 직분의 계승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문학적 특징을 사용하여 끝나지 않는 제사장 직분의 모형을 발견합니다.
히브리서 7:3과 7:8의 묘사는 기록의 침묵에 근거한 논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표현들이 실제로 초인간적인 존재를 묘사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에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역사적으로 부모 없이 태어났으며 실제로 죽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읽을 경우 오히려 다음 표현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을 닮으신 것이 아니다
3절의 마지막 부분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져」에서 닮음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과 같아지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졌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서는 멜기세덱이 예수님에 관한 설명의 최종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기준이 되십니다. 창세기의 멜기세덱은 예수님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고대부터 멜기세덱을 천상적 존재로 이해하는 전승들이 있었고, 그를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으로 읽는 기독교 해석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져」라는 표현은 두 인물을 구별하면서 유사성을 밝히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은 멜기세덱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멜기세덱이 누구였는가라는 역사적 수수께끼보다, 그의 제사장 직분이 성경에 기록된 모습 자체로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어떻게 비추어 주는가에 있습니다. 구약의 인물에게서 후대에 예수님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역의 특징을 발견하지만, 두 인물의 삶에서 모든 것이 일대일로 같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유형론적인 읽기입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은 아론 계열보다 어떤 점에서 더 큰가요? 저자는 이제 아브라함이 했던 두 행동에 집중합니다.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복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같아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포모이오메노스(ἀφομοιόω)는 닮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완료 수동 분사입니다.
아브라함도 복을 받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큰지 보십시오. 조상 아브라함이 가장 좋은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습니다.히브리서 7:4 · 본디새김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볼 사람은 멜기세덱 자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주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고, 그에게 후손과 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6장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인내하며 기다린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가장 좋은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이 행동의 핵심은 현대적인 의미의 십일조 제도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직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사건이기 때문에, 저자는 아브라함이 어떤 율법을 지켰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관심은 아브라함이 자신보다 큰 제사장적 지위를 인정하는 행동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십분의 일을 받는 사람보다 십분의 일을 준 조상이 더 앞선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일을 맡는 이들은 율법을 따라 백성에게서, 곧 자기 형제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거두라는 계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형제들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는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족보에 들지 않은 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거두었고, 약속을 지닌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습니다.히브리서 7:5–6 · 본디새김
이 비교에는 뜻밖의 역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레위 제사장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레위인들도, 십분의 일을 내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 족보에 속하지 않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나중에 제사장 직분을 맡아 십분의 일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의 조상은 이미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 역사적 선후 관계를 사용하여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 계열의 직분보다 더 높은 존귀를 지닌다고 논증합니다.
복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데 십분의 일보다 더 중요한 행동이 하나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낮은 쪽이 더 나은 쪽에게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툴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히브리서 7:7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모든 축복 행위에는 언제나 축복하는 사람의 절대적인 우월성이 전제된다는 일반 법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축복하거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경우도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다는 장면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멜기세덱에게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위대한 조상인데도 멜기세덱에게 복을 받습니다.
그만큼 멜기세덱의 위치가 높다는 것입니다.
죽는 제사장들과 살아 있다고 증언받는 이
그리고 여기서는 죽을 사람들이 십분의 일을 받지만, 거기서는 살아 있다고 증언받는 이가 받습니다.히브리서 7:8 · 본디새김
이제 비교의 중심이 족보에서 죽음으로 이동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제사장 직분을 맡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직분은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합니다. 반면 「살아 있다고 증언받는 이」라는 표현은 3절에서 보았던 성경 기록의 특징과 연결됩니다. 창세기에는 멜기세덱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저자는 그 사실을 근거로 성경의 증언 속에서 그의 제사장 직분이 죽음으로 중단되는 모습 없이 나타난다고 읽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멜기세덱이 지금도 지상 어딘가에서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확정적인 정보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멜기세덱을 어떻게 증언하는가가 논증의 핵심입니다. 레위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직분을 넘겨야 하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죽음에 의해 중단되지 않습니다. 이 차이가 23–25절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십분의 일을 냈다
말하자면,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십분의 일을 떼였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마주 나갔을 때 레위는 아직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9–10 · 본디새김
여기서 저자는 논증을 한 단계 더 밀어붙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을 때, 후손인 레위도 조상 안에서 그 행위에 참여한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을 「말하자면」, 곧 「그렇게 말해도 된다면」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레위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거나 십분의 일을 직접 건넸다는 뜻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의 관계를 통해 두 제사장 직분의 지위를 비교하는 비유적이고 논증적인 말입니다. 이 논증은 현대 독자에게 낯설 수 있지만, 조상과 후손을 깊이 연결하여 이해하던 고대의 계보적 사고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목적은 고대 제사장들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동합니다.
레위의 제사장 직분으로 인간이 온전하게 될 수 있었다면, 왜 하나님은 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요?
조금 더 깊이
4절의 「가장 좋은 전리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크로티니아(ἀκροθίνιον)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특별히 좋은 부분이나 처음 구별한 몫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20은 아브람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간결하게 기록하지만, 히브리서 저자는 그 재물을 전쟁의 전리품으로 구체화합니다. 민수기 18:21–24는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맡은 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도록 규정합니다. 다만 모든 레위인이 아론 계열 제사장인 것은 아니며,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에게 주어진 몫에는 구분이 있습니다(민 18:25–32).
온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왜 다른 제사장이 필요한가
그러므로 레위의 제사장 직분으로 온전하게 됨이 이루어졌다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고 아론의 계열을 따르지 않는다고 할 무슨 필요가 더 있었겠습니까? 백성은 그 직분을 바탕으로 율법을 받았으니 말입니다.히브리서 7:1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멜기세덱의 위대함을 설명한 것은 레위 제사장들의 명예를 떨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레위 제사장 직분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한계를 판단하는 기준을 「온전하게 됨」이라고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제사장 제도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가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와 정결의 문제를 다룹니다. 제물을 바치고, 속죄의 예식을 행하며,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맡은 일을 수행합니다.
그렇다면 그 제도를 평가하는 질문은 얼마나 화려한 예식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제도가 유지되었는지가 아닙니다. 저자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었는지를 묻습니다.
「온전하게 됨」은 완성이나 목적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이며, 히브리서에서는 특별히 사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일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인간이 도덕적으로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는 완벽한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19절에서 저자가 레위 제사장 직분의 한계를 설명한 뒤 더 나은 소망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고 말하듯, 이 장에서 온전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목적을 이루는 일과 연결됩니다.
새로운 제사장의 약속이 기존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다
레위의 제사장 직분으로 온전하게 됨이 이루어졌다면, 다른 계열의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 등장하는 시편 110:4에는 다른 제사장에 관한 약속이 있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다.」
새로운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선언 자체가 이전 제도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을 처음부터 잘못된 제도였다고 평가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우셨고, 이스라엘에게 제사와 정결에 관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라고 해서 반드시 영원히 지속되거나 그 자체로 모든 구원의 목적을 완성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이전에 잘못된 길을 가르치셨다는 뜻이 아니라, 이전에 주신 제도가 그 자체로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사장 직분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담당자가 교체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사장 직분이 바뀌면 율법도 반드시 바뀌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12 · 본디새김
제사장 직분의 변화는 율법의 변화를 요구한다
이 말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던 독자에게 매우 중대한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아론의 후손이 제사장 직무를 맡는다는 규정도 율법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법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론과 다른 계열의 제사장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 직분을 규정하던 법의 질서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하나님이 구약에서 말씀하신 모든 도덕적 요구가 아무런 의미도 없어졌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본문의 직접적인 관심은 제사장 직분을 규정하는 율법과 그것에 근거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도입니다. 히브리서는 이후 이 변화가 언약과 제사 제도 전반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욱 넓게 논증합니다(히 8–10장). 이 절만으로 율법의 모든 명령이 각각 어떤 지위를 갖게 되는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론의 후손이라는 혈통 규정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을 설명하는 최종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지파에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솟아나신 제사장
이 말이 가리키는 그분은 다른 지파에 참여하셨고, 그 지파에서는 아무도 제단에 붙어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유다에서 솟아나셨다는 것이 환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파를 두고는 모세가 제사장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히브리서 7:13–14 · 본디새김
왕의 지파와 제사장의 지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다 지파는 특별히 왕권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49:10에는 유다에게 왕의 지팡이와 통치의 권위가 연결되는 말씀이 있고, 다윗 왕조 역시 유다 지파에서 나왔습니다. 반면 모세의 율법에 따른 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의 아론 계열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왕권을 설명하는 데는 중요하지만, 제사장이실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문제가 됩니다. 율법은 유다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논증에 적극적으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의 후손이 아니시기 때문에 새로운 근거가 필요하며, 그 근거가 하나님이 다른 계열의 영원한 제사장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시편 110편에 있습니다.
유다에서 솟아나셨다
14절의 「솟아나셨다」는 해가 떠오르거나 식물이 싹트는 모습에 쓰일 수 있는 말로, 단순히 어느 지파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보다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지닙니다. 다만 저자의 논증은 유다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찾아내는 방식이 아닙니다. 유다 지파에 속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따로 맹세하신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밝히는 방식입니다.
혈통의 계명인가, 깨뜨릴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인가
그리고 멜기세덱과 같은 모습을 따라 다른 제사장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더욱 또렷해집니다. 그는 육에 속한 계명을 담은 율법을 따라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니라, 깨뜨릴 수 없는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셨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증언받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15–17 · 본디새김
「육에 속한」은 반드시 죄악되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문맥에서는 육체적인 혈통과 인간의 유한한 조건에 관계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 직분은 아론의 후손이라는 혈통의 기준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혈통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고, 제사장이 아무리 신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더라도 직분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없는 생명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른 제사장보다 오래 사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제사장 계승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음을 겪으셨지만, 그 생명은 죽음에 의해 최종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부활과 제사장 직분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아론 계열의 제사장 직분은 죽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어졌지만,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죽음을 넘어 살아 계시는 한 분 안에서 지속됩니다.
율법이 이루지 못한 것과 더 나은 소망
앞서 있던 계명이 약하고 도움이 되지 않아 그 계명을 물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나은 소망이 들어왔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갑니다.히브리서 7:18–19 · 본디새김
이 문장을 율법은 아무런 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으면 구약에 관한 저자의 이해를 왜곡하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었고, 제사장 제도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워졌습니다. 히브리서의 논증에서 율법의 한계는 인간을 온전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목적을 완성하는 데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반복해서 제물을 바쳤지만, 그 직무 자체가 인간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이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무의미하거나 거짓이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그 제도가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을 가져오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9절은 부정적인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옛 제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소망이 들어왔습니다. 더 나은 제사장이 필요한 이유는 새로운 종교 제도의 위대함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과 제사장 제도에 관한 긴 논증의 목적지가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앞서 4:16에서 저자는 은혜의 왕좌 앞으로 거리낌 없이 나아가라고 권했습니다. 이제 7장은 그 길이 죽음 때문에 중단되는 제사장 직분이 아니라, 깨뜨릴 수 없는 생명의 능력에 근거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 위에 놓여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직 그 확실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맹세를 다시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솟아나셨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아나텔로(ἀνατέλλω)는 떠오르거나 솟아나는 일을 나타냅니다. 낱말 하나만으로 저자가 반드시 특정한 메시아 예언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레미야 23:5의 다윗에게서 일으키실 의로운 가지, 스가랴 6:12의 싹에 관한 말씀은 메시아적 왕권과 연결되는 주제적인 배경으로 살펴볼 수 있고, 특히 스가랴 6:13에는 왕권과 제사장 직분의 조화에 관한 논의가 가능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7장의 명시적인 근거는 그 본문들이 아니라 시편 110:4입니다. 16절의 「육에 속한」은 사르키노스, 「깨뜨릴 수 없는 생명」은 조에스 아카탈뤼투입니다.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제사장
그리고 이분이 맹세의 말 없이 제사장이 되신 것이 아닌 만큼(저들은 맹세의 말 없이 제사장이 되었지만, 이분은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를 통해 맹세의 말과 함께 세워지셨으니 말입니다. 「주께서 맹세하셨고 뉘우치지 않으실 것이다. 『너는 영원한 제사장이다.』」), 그만큼 예수는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히브리서 7:20–22 · 본디새김
저자는 시편 110:4를 다시 인용하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5:6과 7:17에서는 「영원한 제사장」이라는 선언이 중심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선언에 앞서 나오는 「주께서 맹세하셨고 뉘우치지 않으실 것이다」가 중요해집니다.
맹세는 왜 중요한가
레위의 제사장 직분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아론의 후손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110편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제사장을 세우시며 직접 맹세하시고, 그 뜻을 돌이키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사람이 어떤 직분에 임명되면 그 직분은 임명한 사람의 판단이나 제도의 변화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제사장 직분은 그분의 변하지 않는 뜻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의 확실성은 인간의 제도적인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사실에 달려 있으며, 그 맹세는 철회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22절에서 처음으로 「더 나은 언약」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언약의 내용을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설명하지만, 지금은 그 언약이 어떤 근거로 확실한지를 먼저 밝힙니다. 예수님께서 그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보증」은 어떤 약속이나 의무의 이행을 보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며, 신약에서는 이 절에만 등장합니다. 8:6에서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로 불리시지만, 중보자는 관계를 이어 주는 역할에, 보증은 약속의 확실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에 초점을 둡니다.
그 언약의 확실성은 어떤 문서나 제도의 안정성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맹세로 세우신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이제 저자는 그 확고함을, 제사장들이 왜 계속 바뀌어야 했는지를 통해 설명합니다.
죽음이 가로막지 못하는 제사장 직분
그리고 저들은 죽음에 막혀 계속 머무를 수 없었기에 여럿이 제사장이 되었지만, 이분은 영원히 남아 계시므로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는 제사장 직분을 지니십니다.히브리서 7:23–24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에서 시작된 모든 비교를 하나의 현실로 모읍니다. 죽음입니다.
제사장 직분이 여럿에게 이어진 이유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이 여럿이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 직분이 많은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제사장 직분은 계속되더라도 그것을 맡은 사람은 계속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인간 제사장들의 도덕적인 실패보다 먼저 그들의 유한성을 지적합니다. 아무리 신실한 제사장이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었고, 그 직분에는 계속 후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그분은 죽음을 겪으셨지만 죽음에 붙잡혀 계시지 않으므로, 그분의 제사장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24절의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는」은 양도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어느 경우든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이 죽음이나 계승에 의해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직분이 영원하다는 사실이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밝힙니다.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대신 아뢰시려고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25 · 본디새김
왜 멜기세덱이 중요합니까? 왜 아론과 다른 계열의 제사장이 필요합니까? 왜 하나님의 맹세가 중요합니까? 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절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는 시간적으로 끝까지라는 뜻으로도, 정도에서 완전히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정 기간에만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는 분도, 어느 정도까지만 구원하실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하든 저자는 예수님의 구원을 「자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이들」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7:19의 「더 나은 소망」의 목적과 같습니다. 구원의 목표는 단순히 어떤 죄의 벌을 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죄와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입니다.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의 구원과 예수님의 생명이 직접 연결됩니다. 인간 제사장은 죽음 때문에 자신의 사역을 중단해야 했지만, 예수님께는 그런 중단이 없습니다. 그분은 계속 살아 계시고, 사람들을 위해 대신 아뢰십니다.
「대신 아뢰다」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하거나 중재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8:34에서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마지못해 인간을 용서하시게 만드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뜻으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셨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중보는 자비를 베풀기 싫어하시는 하나님과 자비로운 예수님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으로서 계속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이 언제나 대신 아뢰신다는 사실은 그분이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계속 반복하셔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 문제는 바로 다음 절에서 분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는」에 해당하는 아파라바토스(ἀπαράβατος)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의미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넘겨줄 수 없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변하지 않고 침해되거나 어겨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앞 절에서 제사장들이 죽음 때문에 여럿이 되었다고 말한 직후에 등장하므로 「다른 이에게 넘어가지 않는」이라는 읽기는 문맥에 잘 어울리지만, 그 직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도 이 낱말의 중요한 가능성입니다. 25절의 「끝까지」에 해당하는 에이스 토 판텔레스(παντελής)는 바로 뒤의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에 무게를 두면 시간적인 「끝까지」로 읽을 수 있지만, 「완전히」라는 의미 역시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분의 구원은 시간적인 지속성과 완전성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신 아뢰다」는 엔튕카노입니다.
우리에게 마땅한 대제사장은 어떤 분인가
이런 대제사장이야말로 우리에게 마땅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으며, 죄인들에게서 갈라져 하늘보다 높아지신 분입니다.히브리서 7:26 · 본디새김
저자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가장 뛰어난 대제사장이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이런 대제사장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일하시지만 죄에 속하지 않으신 분
26절에 연이어 등장하는 표현들은 예수님께서 죄와 어떤 관계에 계신지를 보여 줍니다. 그분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시는 분이지만, 자신도 죄에 매여 계신 분은 아닙니다.
이것이 아론 계열 대제사장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해 죄를 다루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기에 그런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에게서 갈라져」라는 표현을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으셨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을 부르시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십니다(막 2:15–17; 눅 15:1–2). 히브리서 4:15 역시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시험에 참여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구별은 죄에 참여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며, 동시에 높임받으신 그분의 지위를 나타냅니다. 그분은 죄인들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실제로 겪으셨지만 죄에 굴복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날마다 바치는 제사와 단번에 이루어진 제사
저 대제사장들은 날마다 먼저 자기 죄를 위해, 그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해 제물을 올려 드려야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를 올려 드림으로 그 일을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27 · 본디새김
이 절에는 세 가지 대조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옛 제사장들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도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런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옛 제사 제도에서는 제물이 반복해서 바쳐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셋째, 옛 제사장들은 자신과 구별되는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보통 대제사장은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고, 제물은 그가 바치는 대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대제사장이신 그분 자신이 바쳐지는 제물이 되십니다. 그분은 죄를 다루는 일을 다른 희생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단번에」는 한 번 이루어진 일이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제사는 반복적인 제사의 연속에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제시됩니다. 「날마다」라는 표현에는 역사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만, 저자가 옛 제사의 반복성과 예수님의 제사의 단회성을 대조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장 직분과 단번에 이루어진 제사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히 대제사장으로 계시지만,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반복해서 바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이미 이루신 제사의 효력이 계속되며, 그분은 그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아뢰십니다.
약함을 지닌 사람들과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
율법은 약함을 지닌 사람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지만, 율법 뒤에 온 맹세의 말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7:28 · 본디새김
「율법 뒤에 온 맹세의 말」에서 저자는 단순히 법적인 규정보다 맹세라는 형식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뒤에 시편 110편에서 다른 제사장에 관한 하나님의 맹세가 등장했다는 구약 내부의 시간적 순서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이끌고 가신 목적지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 직분이 끝없이 반복되는 상태가 아니라,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의 제사장 직분입니다.
「온전하게 되신」은 5:9에서 예수님께 사용되었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순종을 배우셨고, 온전하게 되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온전함은 단순히 예수님께 도덕적인 결함이 없다는 뜻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고난과 순종을 통해 맡으신 구원 사역을 완수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이전 제사장들이 하던 일을 조금 더 잘 수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전 제사장 제도가 궁극적으로 이루지 못했던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단번에」는 에파팍스입니다. 27절의 「날마다」에 관해서는,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일상적인 제사는 매일 드려졌지만, 대제사장이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의 특별한 예식은 일 년에 한 번 이루어졌습니다(레 16장). 따라서 27절을 대제사장이 매일 속죄일의 예식을 반복했다는 정확한 역사적 서술로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구절은 매일 반복되는 제사장적 봉사와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을 함께 대조하거나, 반복적인 제사 체계 전체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가 예수님의 제사가 반복될 필요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구문적 해석도 제시됩니다.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는 분
히브리서 7장은 제사장의 지위를 비교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만, 정작 관심은 제사장의 명예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논증은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에게 가까이 갑니다」(7:19)와 「그는 자기를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이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7:25)라는 두 문장을 향합니다. 레위의 제사장 직분이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기에 다른 제사장이 필요했고, 우리에게 마땅한 제사장은 죄 없이 자신을 단번에 바치시고,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지시고, 죽음을 넘어 살아 계셔서 대신 아뢰시는 분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균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는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분의 중보는 계속됩니다. 구원의 토대는 계속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이루셨지만, 그분과 구원받는 사람들의 관계는 과거의 사건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살아 계신 예수님의 중보 안에서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주는 확신은 인간에게 완벽한 믿음이나 완전한 순종의 능력이 이미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시며 무엇을 이루셨는지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지속을 하찮게 만드는 근거가 아니라, 왜 예수님을 계속 신뢰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이 장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멜기세덱의 신비가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대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제사장들이 죽고 다른 제사장이 그 자리를 이어받던 역사는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제사장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아뢰시며, 그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언제나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