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5–8장 · 대제사장이신 예수
하늘의 왕좌에서 사람의 마음까지
히브리서 8장은 놀라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왕좌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다른 하나는 성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대제사장으로서 섬기고 계십니다.
왕좌에 앉는 것은 권위와 영광의 모습이고, 성소에서 섬기는 것은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이 둘을 「위엄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분」이자 「성소와 참 장막을 받드는 이」, 곧 한 사람에게서 발견합니다.
여기에는 질문이 숨어 있습니다. 왕좌에 앉으실 만큼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께 왜 아직 제사장의 일이 필요합니까?
이 질문을 따라가면 8장의 뜻밖의 전개가 보입니다. 처음에는 하늘의 성소를 이야기하고, 이어서 땅의 장막과 하늘의 참 장막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장의 중간에 이르자 갑자기 예레미야의 예언을 길게 인용하며, 하나님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자신의 법을 새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성소에서 시작한 논증이 사람의 마음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제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어 주는 제사장의 일이 완성되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만 마련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 역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8장은 이 두 일을 예수님의 제사장직과 새 언약이라는 하나의 이야기로 엮습니다.
본문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먼저 1–5절에서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어떤 제사장으로 섬기시는지 밝힙니다. 이어 6절에서 그 섬김이 더 나은 언약과 연결됨을 선언합니다. 마지막으로 7–13절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통해 그 새 언약이 왜 필요하고 무엇을 약속하는지 설명합니다.
논증의 방향도 그렇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필요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미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보여 주고, 예수님의 사역에 비추어 하나님이 오래전에 약속하신 언약의 의미를 다시 읽습니다.
참 장막을 받드시는 대제사장
8장은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요점은 이렇습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앞 장에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세워진 제사장의 독특함을 설명한 저자는 이제 그 논증의 핵심을 압축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제사장은 단순히 옛 제사장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아예 다른 위치에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요점은 이렇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는 하늘에서 위엄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분이고, 성소와 참 장막을 받드는 이입니다. 그 장막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것입니다.히브리서 8:1–2 · 본디새김
저자는 하늘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라는 말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심을 선언합니다.
「위엄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분」이라는 문장은 히브리서 1:3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첫머리에서는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심을 설명하면서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앉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같은 장면이 다시 등장하지만, 강조점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데 있습니다. 왕좌에 앉으셨다는 표현에는 시편 110:1의 왕적 이미지가 놓여 있지만, 히브리서에서 그 왕좌는 제사장직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2절은 예수님을 「성소와 참 장막을 받드는 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참」은 단순히 거짓의 반대만을 뜻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땅에 있던 장막은 거짓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땅의 장막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세워졌고, 실제로 이스라엘의 예배와 제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다만 히브리서의 관점에서는 그 장막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최종적인 실현은 아니었습니다.
땅의 장막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세우라고 명하신 장소였습니다. 참 장막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그 차이는 건축 재료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상의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속한 궁극적인 성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왕좌에 앉으셨지만, 여전히 성소를 받드시는 분이십니다.
앉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높아지심과 확립된 지위를 나타냅니다. 성소를 받드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우리를 위해 유효하게 수행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왕으로 높아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섬기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좌에 앉으신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인간과의 거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높아지심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근거로 제시합니다.
땅에서는 제사장이 아니셨을 분
그런데 이제 예상 밖의 문장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땅 위에 계셨다면 제사장도 아니셨을 것입니다. 율법을 따라 예물을 바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8: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던 저자가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3절을 보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은 누구나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분도 무엇인가 바칠 것을 지녀야 합니다.히브리서 8:3 · 본디새김
제사장은 단순히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나 백성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저자는 제사장직의 핵심을 제물을 바치는 일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시라면 바치실 것이 있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땅에는 이미 율법을 따라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들이 있고, 이들의 자격과 직무는 모세 율법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앞 장의 논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나셨습니다(7:13–14). 따라서 모세 율법이 정한 지상의 제사장직에 그대로 들어갈 수 없으셨습니다.
4절의 가정은 예수님께서 땅에서 제사장적 의미를 지닌 일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을 지상의 레위 제사장 제도 안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바치십니까? 3절은 의도적으로 「무엇인가 바칠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그 제물이 무엇인지는 9:12–14와 10:10에서 예수님 자신의 희생으로 더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8장의 관심은 우선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성소와 그 제사장직의 성격에 있습니다.
그림자는 거짓이 아니다
5절은 땅의 제사장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에서 예배합니다」라고 말하고, 출애굽기 25:40을 인용합니다. 「산에서 너에게 보인 본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출애굽기의 본래 문맥에서 이 명령은 성막과 기구들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양식대로 제작하라는 지시입니다. 모세가 자기 생각에 따라 성막을 설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며, 오히려 성막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모세가 받은 양식이 있었다면, 그가 만든 장막은 궁극적인 원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반영하는 지상의 표현이라고 읽습니다. 이것이 「본보기와 그림자」라는 설명입니다.
그림자라는 단어가 반드시 부정적인 평가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자는 그것이 가리키는 실재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림자 자체가 그 실재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옛 장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하도록 백성을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정해진 장소와 제사장, 제사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질서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시는 제사장이 아니라, 그 질서가 가리키던 궁극적인 실재에 속한 제사장이십니다.
따라서 옛 제도를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이 과거에 주신 것을 부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제도가 지향하던 목적이 어디에서 실현되는지를 보여 주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런 하늘 성소의 이해는 고대 유대교의 성전·하늘 세계에 관한 사유와도 연결됩니다. 다만 히브리서가 어떤 철학적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출애굽기의 장막 지시와 당시의 하늘 성소 관념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장직은 왜 더 나은 언약을 요구하는가
여기까지는 성소와 제사장직의 비교였습니다. 그런데 6절에 이르면 논증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더 나은 언약의 중개자이신 그만큼 더 뛰어난 받드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더 나은 약속들 위에 법으로 세워져 있습니다.히브리서 8: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장 전체의 중심축입니다.
왜 언약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입니까? 제사장직은 그 자체로 독립된 종교적 직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의 질서 안에서 일했고, 성소와 제사, 정결 규정은 모두 그 언약 관계에 속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새로운 방식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신다는 주장은 제사장의 자격이 바뀌었다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언약 자체에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됩니다.
「중개자」는 서로 다른 두 당사자 사이를 잇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새 언약의 중개자이시며,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그 관계가 실제로 성립하고 유지되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언약이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더 낫습니까? 7절만 읽으면 아직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첫째 언약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면 둘째 언약을 위한 자리를 찾을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8:7 · 본디새김
첫째 언약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 문제가 하나님이 주신 법 자체에 있었습니까? 아니면 언약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곧바로 예레미야를 인용합니다. 그는 자기 논리만으로 첫째 언약의 한계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성경 안에서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합니다. 첫째 언약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새 언약을 말씀하셨다면, 처음 언약이 최종적인 형태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손을 잡아 이끄셨지만 머물지 않았던 사람들
8–12절은 예레미야 31:31–34를 길게 인용합니다. 히브리서에서 가장 긴 구약 인용입니다. 저자는 새 언약이 자신이 만들어 낸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경 속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먼저 그 약속이 처음 선포되었던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30–33장은 심판과 포로 생활의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말하는 부분이고, 31장의 새 언약 약속은 민족적 분열과 언약 파기의 역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함께 부르시는 것은 흩어지고 나뉜 백성의 회복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원래 추상적인 개인 구원론으로 주어진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그들의 실패 이후에도 어떻게 새롭게 하실 것인가에 관한 선언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약속을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비추어 읽습니다.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않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려고 그들의 손을 잡던 날에 맺은 그 언약 말이다. 이는 그들이 내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고 나도 그들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이다. 주가 말한다.」히브리서 8:9 · 본디새김
출애굽은 강력한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 사건은 힘 있는 왕이 적을 물리치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아 이끄는 모습으로 회상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7절은 첫째 언약에 흠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8절은 하나님이 「그들을 나무라며」 말씀하셨다고 밝힙니다. 이 둘은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짓되었거나 그분의 법이 악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언약을 받은 백성이 그 관계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진단입니다.
동시에 히브리서는 그 사실을 인간의 책임으로만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언약 안에 지속해서 머물지 못했다면, 새로운 언약은 그 실패를 어떻게 넘어섭니까?
언약이 깨졌는데도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약속하십니다.
새 언약은 인간이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안한 새로운 계약이 아닙니다.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먼저 하신 약속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나도 그들을 소홀히 여겼다」에는 실제로 중요한 본문 차이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31:32의 전승된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이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에게도 남편이셨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반면 히브리서 8:9는 그리스어 계열을 따라 「나도 그들을 소홀히 여겼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언약을 깨뜨린 백성 앞에서도 유지된 하나님의 관계를 강조하고, 그리스어 인용은 언약 파기에 따른 하나님의 외면 또는 심판을 더욱 두드러지게 합니다. 정확한 번역 차이는 양쪽 본문에서 확인됩니다. 두 전승은 강조점이 다르지만, 모두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히브리서는 이 차이를 특별히 해설하지 않습니다.
돌판에서 마음으로
「이것이 그날들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이기 때문이다. 주가 말한다.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 위에 새겨 두겠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될 것이다.」히브리서 8:10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없애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법들을 사람 안에 넣고 마음 위에 새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언약에서 하나님의 법은 돌판에 기록되었습니다(출애굽기 31:18; 신명기 9:10).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법을 기록할 새로운 장소를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입니다.
「생각」과 「마음」은 각각 사고와 내면을 가리키지만, 이를 현대적인 지성과 감정의 엄격한 분리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원래 예레미야의 히브리어 문맥에서 마음은 생각과 의지, 결단을 포괄하는 인간의 내면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하나님의 명령을 더 잘 암기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일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는다는 것입니다.
차이는 하나님의 법이 외부에서 주어지는가 내부에 존재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법을 주신 하나님이 그 법을 사람 안에 새기는 일까지 직접 하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6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라고 명령했으므로, 마음과 율법의 관계 자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옛 언약의 백성에게는 말씀을 마음에 두라는 명령이 주어졌고,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법을 사람의 마음에 새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응답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근본적인 가능성이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신명기 30:6에서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겠다고 하신 말씀, 에스겔 36:26–27에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어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게 하시겠다는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 본문들은 표현과 역사적 상황이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질문을 공유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 온 백성은 어떻게 마침내 하나님께 충실한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예언자들이 내다본 답은 더 많은 명령을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의 내면에서 새로운 일을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약속이 예수님의 새 언약 사역과 연결된다고 봅니다.
새 언약의 중심에는 여전히 같은 관계가 있다
10절은 법을 마음에 새기는 약속으로 끝나지 않고,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에게 백성이 될 것이다」로 닫힙니다. 비슷한 선언은 이미 출애굽기 6:7과 레위기 26:12에 등장합니다.
새 언약에서도 목표는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은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관계의 목적이 아니라, 그 관계를 실제로 이루고 지속시키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백성을 얻기 위해 다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를 새롭게 이루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새 언약의 중개자가 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과 무관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셨다는 뜻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새 단계에 이르렀다고 이해합니다.
다만 예레미야가 본래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약속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서가 이 약속을 예수님의 공동체에 적용한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유다라는 이름을 단순히 무의미한 과거의 명칭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주를 알아라"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11절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약속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고을 사람에게, 저마다 자기 형제에게 『주를 알아라』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작은 이부터 큰 이까지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8:11 · 본디새김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시면 더 이상 서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히브리서 자체가 이상한 편지가 됩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독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5:12에서는 그들이 마땅히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새 언약 아래에서는 교사나 성경 교육이 불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선언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핵심은 가르침이라는 활동 자체보다 그 가르침의 목적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하나님께 충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었습니다. 새 언약의 약속은 이 관계가 달라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알다」는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습득한다는 뜻만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문맥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과 언약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과 깊이 연결됩니다.
「작은 이부터 큰 이까지」라는 표현은 나이만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지위와 중요성의 차이까지 포괄합니다. 누군가가 특별한 지식을 독점하여 다른 사람을 하나님께 이어 주는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 모두에게 알려지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언제, 어느 범위에서 완전히 실현되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된 새 언약의 현실로 이해할 수도 있고, 그 약속의 완전한 실현까지 아직 남아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8장은 이 시간적 문제를 자세히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새 언약의 목표는 더 정확한 종교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가장 깊은 근거는 다음 절에 등장합니다.
새 언약의 맨 마지막에 놓인 첫 번째 근거
「내가 그들의 불의에 너그러울 것이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히브리서 8:12 · 본디새김
12절은 새 언약의 여러 약속 가운데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어 문장은 「~이기 때문이다」로 시작합니다. 앞서 약속한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죄 용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백성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십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들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불의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표현은 정보의 회상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말은 그들을 위해 행동하신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출애굽기 2:24). 여기서는 반대의 방향입니다.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나님이 사실을 잊어버리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죄를 계속해서 관계를 파괴하는 근거로 삼지 않으시겠다는 용서의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12절에 걸친 약속에서 행동의 주체는 거듭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십니다. 하나님이 법을 넣으십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새기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불의를 용서하십니다.
새 언약은 인간의 능력을 낙관적으로 평가해서 등장한 약속이 아닙니다. 백성은 손을 잡아 이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도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 실패를 아시는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용서하시고 관계를 새롭게 이루신다면, 그 약속은 어떤 중개자를 통해 실현됩니까? 히브리서의 대답은 하늘의 참 장막을 받드시는 예수님이십니다. 8장은 아직 예수님의 희생과 죄 용서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그것은 이어지는 논증에서 다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직과 새 언약의 약속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구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새"라는 한마디가 첫째 언약을 낡게 한다
마지막 절에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긴 인용을 마치고, 그 가운데 단 하나의 단어를 붙잡습니다.
「새」라고 말씀하심으로 첫째 것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낡아 가고 늙어 가는 것은 사라질 때가 가깝습니다.히브리서 8:13 · 본디새김
저자는 예레미야가 첫째 언약을 직접 「낡은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또 다른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에서, 먼저 있던 언약이 최종적인 형태는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παλαιόω)」는 그리스어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말씀하심으로 첫째 언약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하셨고, 그 결과가 성립해 있다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반면 「사라질 때가 가깝습니다」는 그 질서가 최종적으로 사라지는 일을 바라보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낡은 것으로 규정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유대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논증의 대상은 첫째 언약과 그것에 속한 제사장적 질서입니다. 저자가 지금까지 비교해 온 것도 두 민족의 가치가 아니라 두 제사장직과 두 언약입니다.
더욱이 새 언약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거부함으로써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그 성경에 기록된 예레미야의 약속을 근거로 새 언약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새로움은 과거 하나님의 역사를 무가치하게 지워 버리는 새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전에 주신 질서와 약속을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이해하게 하는 새로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해석은 「사라질 때가 가깝습니다」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서기 70년이나 성전 파괴가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만으로 히브리서의 집필 시점을 확정하거나, 저자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날짜를 예고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손을 잡으셨던 하나님이 이제 마음에 새기신다
히브리서 8장의 처음에는 하늘의 성소가 있고, 끝에 이르기 전에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이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늘의 성소가 사람의 마음속으로 옮겨 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의 참 장막을 받드시는 대제사장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법을 마음에 새기시고, 모든 백성이 자신을 알게 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용서가 없다면 깨어진 관계는 회복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이전의 실패를 반복할 위험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왕좌에 앉으신 예수님께 아직 제사장의 일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약속들이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확신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완전함에 기대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의 논증은 우리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이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새 언약이 인간의 삶을 중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뜻을 품고 살아가는가에까지 미칩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과 예수님께서 맡으신 제사장직이 먼저 있고, 그 약속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에 응답하는 삶이 뒤따릅니다.
히브리서 8장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두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손을 잡고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위에 자신의 법을 새기시는 모습입니다.
그 두 장면 사이에 인간의 긴 불순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인간의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속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 위에 새겨 두겠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그 약속을 읽는 우리에게 하늘의 왕좌를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더 나은 언약의 중개자로 계시기에, 예레미야가 들었던 약속은 먼 시대의 희망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손을 잡아 이끄셨던 하나님은 이제 마음에 새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약속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가 먼저 보여 준 분은, 하늘에서 위엄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