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3–27장 · 민족들에 관한 말씀

세상을 떨게 하던 제국이 떨기 시작할 때

이사야 13장에는 이상한 역전이 일어납니다.

한때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바벨론이 이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나라의 재물을 빼앗던 도시가 약탈당하고, 사람들을 쫓아내던 제국의 주민들이 자기 땅을 찾아 달아납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궁전과 거리에는 마침내 들짐승들의 울음소리만 남습니다.

이 장은 독자를 불편한 질문 앞에 세웁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심판하신다는 말은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의 잔혹함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제국의 교만을 꺾는 심판 속에서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사야는 제국의 멸망을 통해,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덧없는지를 드러냅니다.

앞선 12장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의 찬양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13장부터는 여러 민족을 향한 심판 선언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 백성의 회복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고 세계의 질서를 좌우하는 제국들에게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13장 본문 읽기 →

바벨론을 향한 신탁은 왜 이름 없는 군대에서 시작하는가

이사야 13:1–5 본문 →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본 바벨론에 관한 신탁이다.이사야 13:1 · 본디새김

그러나 이어지는 다섯 절에서는 바벨론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누군가 군대를 소집하고, 여러 민족이 모여들며, 먼 곳에서 엄청난 군사력이 움직이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독자는 바벨론을 향한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누가 그 심판을 수행할 것인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13:17에 이르러서야 메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동안 예언자는 군대의 정체보다 그 군대를 소집하는 분의 정체를 강조합니다.

그분은 만군의 여호와야훼이십니다.

민둥산 위에 세워지는 깃발

「민둥산 위에 깃발을 들어라.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라. 손을 흔들어 그들이 귀족들의 문들로 들어오게 하여라.」이사야 13:2 · 본디새김

깃발은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입니다. 군대를 소집하거나 모여야 할 장소를 알리는 표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민둥산’이 등장합니다. 나무가 우거져 시야를 가리는 곳이 아니라, 깃발이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는 높은 장소입니다.

보이는 신호와 들리는 신호가 함께 사용됩니다. 마치 여러 방향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움직이도록 부르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귀족들의 문들’로 들어오도록 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표현이 정확히 어떤 성문이나 궁전의 입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실과 지배계층의 공간으로 침입하는 군대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벨론의 권력자들에게 안전과 위엄을 상징하던 문이 이제 적군의 진입로가 됩니다.

이사야 11:10–12에서는 여러 민족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통치자를 찾고, 흩어진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깃발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13장에서는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으는 깃발이 등장합니다. 깃발이라는 이미지는 같지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목적은 다릅니다.

앞에서는 회복을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심판을 위한 소집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이들’은 누구인가

「내가 내게 거룩하게 구별된 이들에게 명령했다. 또 내 분노를 위해 나의 용사들, 곧 나의 위엄을 기뻐하는 이들을 불렀다.」이사야 13:3 · 본디새김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거룩한 구별은 반드시 그들의 인격이 의롭다거나 행동이 선하다는 평가를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심판을 위해 그들을 특별한 임무에 소집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쓰인다는 사실과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사야 10:5–15에서 앗시리아도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도구로 묘사되었지만, 그 왕은 자신의 교만과 파괴적인 의도 때문에 심판받았습니다. 13장은 그와 연결되는 신학적 문제를 다시 제기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앗시리아가 아니라 바벨론을 향한 군대가 등장합니다.

산들에서 무리가 웅성거리는 소리, 수많은 백성이 내는 듯한 소리다. 왕국들, 곧 모여드는 민족들이 떠들썩한 소리를 낸다. 만군의 여호와야훼가 전쟁에 나설 군대를 소집하고 있다.이사야 13:4 · 본디새김

예언자는 군대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 주기 전에 그들이 내는 소리부터 들려줍니다. 산들을 가득 채우는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바벨론을 향한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야훼와 그의 격노의 도구들이 먼 땅에서, 하늘 끝에서 온 땅을 파괴하러 온다.이사야 13:5 · 본디새김

‘하늘 끝’은 하늘과 땅이 맞닿아 보이는 아득히 먼 곳을 떠올리게 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이 군대는 바벨론이 평소 통제하던 범위 밖에서 밀려옵니다. 본문은 인간 군대가 전쟁을 수행하는 역사적 장면과, 그 전쟁을 심판으로 해석하는 예언자의 신학적 시선을 겹쳐 놓습니다.

그런데 5절은 단순히 바벨론을 파괴하러 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온 땅을 파괴하러 온다.’

여기서 ‘땅’은 구체적인 영토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하늘과 땅의 흔들림을 고려하면 더 넓은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바벨론이라는 특정 제국을 향한 심판이 이제 세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언어로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야훼의 날'은 왜 기쁨이 아니라 울부짖음으로 시작하는가

이사야 13:6–8 본문 →

울부짖어라. 여호와야훼의 날이 가깝기 때문이다. 샤다이에게서 오는 파괴처럼 그날이 올 것이다.이사야 13:6 · 본디새김

구약에서 여호와야훼의 날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시는 때를 가리키는 예언적 표현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과 회복을 의미할 수 있지만, 불의와 교만에 빠진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됩니다. 아모스 5:18–20도 여호와야훼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그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사람들은 무너진다

그러므로 모든 손이 힘없이 늘어지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녹아내릴 것이다.이사야 13:7 · 본디새김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진통과 고통이 그들을 붙잡고, 아이 낳는 여자처럼 그들이 몸부림칠 것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할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불꽃 같은 얼굴일 것이다.이사야 13:8 · 본디새김

손은 전쟁을 수행하고 성을 방어하며 도구를 사용하는 신체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 손이 힘없이 늘어집니다. 마음은 고대 히브리어 표현에서 감정뿐 아니라 생각과 의지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녹아내립니다.

몸과 정신이 함께 무너지는 것입니다.

출산의 고통은 시작되면 마음대로 멈추거나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는 그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의 모습을 통해 닥쳐오는 재난 앞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를 그립니다.

‘불꽃 같은 얼굴’은 두려움과 고통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원문은 이 이미지의 생리적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것인지 다른 모습인지 하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국은 거대한 건축물과 군대, 재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국을 이루는 사람들도 결국 두려워하고 고통받는 인간입니다.

세계를 두렵게 만들던 권력이 무너질 때, 이사야는 먼저 그 권력 아래 숨어 있던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샤다이(⁨שַׁדַּי⁩)에게서 오는 파괴’라는 표현에는 히브리어의 소리 효과가 담겨 있습니다. ‘파괴’를 뜻하는 쇼드와 ‘샤다이’라는 이름의 소리가 닮았습니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이 반복을 완전히 살리기 어렵습니다. 샤다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므로, 이 말장난을 근거로 샤다이의 이름 자체가 ‘파괴자’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바벨론이 무너질 때 해와 달까지 어두워지는 이유

이사야 13:9–13 본문 →

보라, 여호와야훼의 날이 온다. 잔혹하며 격분과 타오르는 분노가 가득한 날이, 땅을 폐허로 만들려고 온다. 그 땅의 죄인들을 거기에서 없애 버릴 것이다.이사야 13:9 · 본디새김

여기서는 그날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존재처럼 묘사됩니다.

본문은 그날을 ‘잔혹하다’고까지 표현합니다. 심판의 혹독함을 완곡하게 감추지 않는 말입니다.

하늘의 별들과 그 오리온자리들이 제 빛을 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는 떠오를 때 어두워지고, 달은 제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3:10 · 본디새김

왜 바벨론이 무너지는 일을 설명하면서 하늘의 빛까지 사라진다고 말합니까?

제국의 멸망이 세계의 붕괴처럼 묘사된다

고대 세계에서 해와 달, 별들의 규칙적인 움직임은 세상의 안정된 질서를 보여 주는 현상이었습니다.

밤이 지나면 해가 떠오르고, 저녁이 되면 다시 달과 별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질서가 멈추는 듯한 광경을 보여 줍니다.

바벨론은 단순히 많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이 신탁에서 바벨론은 여러 왕국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의 힘과 영광을 자랑하는 제국입니다. 그런 제국이 무너진다는 것은 제국의 지배를 당연한 질서로 여기던 사람들에게 세계 자체가 뒤집히는 사건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시는 바벨론의 관점에서만 이 일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조차 창조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바벨론은 자신들의 영광을 영원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영광이 의지하던 세계의 질서마저 흔드실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무엇을 심판하시는가

「내가 세상의 악을 벌하고, 악한 자들의 죄악을 벌하겠다. 거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내고, 난폭한 자들의 오만을 낮추겠다.」이사야 13:11 · 본디새김

바벨론에서 드러난 교만과 폭력이 세계 전체의 악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교만은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심리적 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난폭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행동과 연결됩니다.

강력한 제국의 교만은 단지 왕이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계를 침범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사람들의 삶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권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은 바벨론이라는 이름 자체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드러난 악과 오만을 향합니다.

이사야 앞부분에서 하나님은 이미 유다와 이스라엘의 불의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로 심판에서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벨론도 세계적인 제국이라는 이유로 심판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느 나라의 국경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금보다 귀해지는 사람들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드물게 하고, 인간을 오피르의 금보다 드물게 하겠다.」이사야 13:12 · 본디새김

그런데 사람의 존엄성이 금보다 크다는 윤리적 교훈을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상 사람의 수가 그만큼 드물어진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전쟁과 파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이 귀한 금을 발견하기보다 어려울 정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국은 정복을 통해 재물을 모았습니다. 금과 은은 강력한 왕국의 부와 위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임하면 그 모든 재물 속에서 가장 찾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 됩니다.

전쟁의 결과로 재물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늘을 떨게 하겠고, 땅은 제자리에서 흔들릴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야훼의 격분으로, 그의 분노가 타오르는 날에 그렇게 될 것이다.」이사야 13:13 · 본디새김

바벨론이 구축한 정치적 질서만 아니라,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기초까지 흔들리는 광경입니다. 이사야는 실제 제국의 멸망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 아래에서 해석합니다.

세상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던 권력이 참된 주권자 앞에서 무너지는 사건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창세기 1:14–18에서는 하나님이 해와 달과 별들을 낮과 밤을 구분하고 땅을 비추도록 두셨습니다. 이사야 13장에서는 그 빛들이 어두워지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두 본문을 연결하면 창조 때 세워진 질서가 심판의 장면에서 흔들리는 것 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 장의 우주적 언어를 모두 특정한 천문학적 사건의 예고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강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수사에 불과하다고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오피르는 구약에서 귀한 금의 산지와 연결되는 지명입니다. 열왕기상 9:28에서도 오피르에서 금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흩어지는 양 떼와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이사야 13:14–16 본문 →

13절까지 이사야는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거대한 장면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서는 시야가 갑자기 작아집니다.

쫓기는 가젤처럼, 모아 줄 이 없는 양 떼처럼 될 것이다. 저마다 제 백성에게 돌아서고, 저마다 제 땅으로 달아날 것이다.이사야 13:14 · 본디새김

가젤은 위협을 느끼면 빠르게 달아납니다. 양 떼는 자신들을 모으고 보호하는 목자가 없으면 흩어지기 쉽습니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바로 이런 모습으로 그립니다.

제국은 여러 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모으는 힘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심판이 닥치자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백성과 자기 땅을 찾아 달아납니다.

제국이 하나로 묶어 놓았던 세계가 흩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이 도망치는 사람들의 정확한 신분을 밝히지는 않습니다. 외국 출신의 주민이나 군사, 제국의 지배 아래 모였던 여러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연상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더 이상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양 떼가 흩어지는 모습은 앞선 이사야 11장의 회복과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땅의 네 끝으로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셨습니다. 반면 바벨론은 자기가 모아 놓은 사람들조차 지키지 못합니다.

전쟁의 실제 모습은 영광스럽지 않다

15–16절에서는 장면이 더욱 참혹해집니다.

발견되는 자는 누구나 찔리고, 붙잡히는 자는 누구나 칼에 쓰러질 것이다.이사야 13:15 · 본디새김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내던져져 으스러지고, 그들의 집들은 약탈당하며, 그들의 아내들은 강간당할 것이다.이사야 13:16 · 본디새김

이사야는 전쟁의 결과를 추상적인 ‘패배’나 ‘멸망’이라는 말로 감추지 않습니다. 실제로 누가 어떤 고통을 겪는지 드러냅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이 어린아이를 살해하거나 여성을 성폭행하는 행위를 선한 행동이라고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런 폭력을 인간이 따라 해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의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단순히 비유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린아이의 살해와 성폭력은 고대 전쟁에서 실제로 벌어질 수 있었던 잔혹행위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폭력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이사야 13장은 제국의 교만이 무너지는 일을 선언하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승리의 장식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국가가 무너질 때 그 아래에 살던 사람들의 삶도 파괴됩니다. 왕이 자신의 왕좌를 잃는 것과 어린아이가 목숨을 잃는 것은 같은 사건 안에 있을 수 있지만, 결코 같은 무게로 다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시는 그런 참혹함을 독자 앞에 그대로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3절에서는 하나님이 심판을 수행할 군대를 소집하셨다고 선언합니다. 15–16절에서는 그 전쟁이 어떤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읽을 때는 서로 다른 두 가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언자가 바벨론에 임할 재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심판의 역사적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잔혹한 행동이 모두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은 본문에서 직접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별은 폭력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전쟁을 자신의 심판에 사용하신다는 선언 자체가 여전히 어려운 신학적 질문을 남깁니다.

금과 은으로도 멈출 수 없는 군대

이사야 13:17–18 본문 →

17절에 이르러 마침내 침공하는 군대의 이름이 밝혀집니다.

「보라, 내가 메대 사람들을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한다. 그들은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금을 바라지도 않는다.」이사야 13:17 · 본디새김

전쟁에서 돈과 재물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적에게 공물을 바치거나 거액의 대가를 제공하여 공격을 피하려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메대 사람들이 금과 은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탐욕을 초월한 고결한 사람들이라는 찬양이 아닙니다. 18절에서 곧바로 잔혹함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금과 은으로 그들의 공격을 멈출 수 없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12절에서는 전쟁 때문에 사람이 금보다 드물어집니다. 17절에서는 침공하는 군대가 금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금은 평소 제국의 부와 영광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는 사람을 살려 낼 수도, 공격을 멈추게 할 수도 없습니다.

바벨론이 쌓아 올린 부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강한 군대의 무자비함

「활들이 젊은이들을 으스러뜨릴 것이다. 그들은 태의 열매를 가엾게 여기지 않고, 그들의 눈은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3:18 · 본디새김

무기는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등장하지만, 자비를 베풀지 않는 것은 그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벨론은 다른 나라에 두려움을 안겨 주던 제국입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도 무자비한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폭력이 역사 속에서 다른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폭력의 희생자들이 모두 이전에 같은 폭력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제국 전체의 죄에 대한 개인별 보응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가 심판하는 대상은 바벨론이라는 강력한 지배 질서이며, 그 심판의 과정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비극적으로 미칩니다.

조금 더 깊이

메대는 고대 이란 고원 서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세력입니다. 이들은 앗시리아의 몰락에도 관여했으며, 이후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메대를 제압하면서 페르시아 세력 안에 편입되었습니다. 바벨론은 기원전 539년에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세력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메대 출신 세력이 그 과정에 포함되었을 수 있으므로, 이사야가 메대를 언급한 사실을 역사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한 주도 세력이 페르시아였다는 사실과, 이사야 13장이 메대 사람들을 심판의 수행자로 지목한다는 사실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 신탁이 언제 어떤 단계로 형성되었는지를 정확히 확정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며, 본문의 표제만으로 모든 역사적 질문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18절에서는 궁수가 아니라 무기가 직접 사람을 파괴하는 것처럼 표현됩니다. 이사야는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를 앞세워 파괴의 힘을 강조합니다.

왕국들의 아름다움이 폐허가 되다

이사야 13:19–22 본문 →

왕국들의 아름다움이며, 칼데아 사람들이 자랑하는 영광인 바벨론은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었듯이 뒤엎어질 것이다.이사야 13:19 · 본디새김

바벨론은 정치적 권력의 중심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명과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성벽과 궁전, 신전과 거대한 건축물들이 그 위엄을 나타냈을 것입니다. 특히 칼데아 사람들은 신바빌로니아 왕조와 연결되는 집단으로, 바벨론의 제국적 영광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런 바벨론의 미래를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합니다.

왜 소돔과 고모라인가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진 도시들입니다.

그 멸망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도시의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파멸로 묘사됩니다. 이사야가 바벨론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는 것은 그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이 자랑하던 영광과 위엄 자체가 무너집니다.

이사야 1:9–10에서 유다와 예루살렘도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었습니다. 그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이제는 바벨론이 같은 심판의 이미지 아래 놓입니다.

어느 도시도 자신의 이름이나 역사적 영광만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곳에는 영원히 사람이 살지 않고, 대대로 아무도 거주하지 않을 것이다.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에 천막을 치지 않고, 목자들도 거기에 양 떼를 눕히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3:20 · 본디새김

이사야는 단순히 바벨론이 패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도시가 자랑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다시 거주할 수 없는 곳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궁전에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21–22절에서는 이 장의 마지막 광경이 펼쳐집니다.

사막의 들짐승들이 거기에 눕고, 바벨론 사람들의 집들에는 자칼들이 가득할 것이다. 타조들이 거기에 살고, 염소 귀신들이 거기에서 춤출 것이다.이사야 13:21 · 본디새김

이것은 인간의 공간이 다른 존재들의 공간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들짐승들이 그곳의 버려진 거처들에서 울부짖고, 자칼들이 호화로운 궁전들에서 화답할 것이다. 바벨론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고, 그 날들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13:22 · 본디새김

4절에서는 수많은 민족과 왕국이 모여드는 웅성거림이 산들을 가득 채웠습니다. 마지막에서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폐허의 궁전을 채웁니다. 두 장면 모두 소리로 가득하지만, 그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바벨론을 무너뜨리는 전쟁의 소리가 지나간 뒤, 그 도시의 영광을 증언하는 것은 왕의 찬양이 아니라 폐허에 울리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어지는 바벨론의 이미지

바벨론은 성경에서 단순한 지명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도시이면서, 인간의 교만과 권력의 집중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장소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창세기 11:1–9의 바벨 이야기에서는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모여 도시와 탑을 세우며 자기 이름을 내려 합니다. 이사야 13장과 창세기 11장을 동일한 사건의 반복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이름과 영광을 높이려는 욕망이 바벨론이라는 장소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제적 관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50–51장에서도 바벨론을 향한 심판 선언이 길게 이어집니다. 특히 예레미야 51:25에서는 바벨론이 온 땅을 파괴하는 산으로 불리지만, 여호와야훼께서 그 산을 무너뜨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13장에서 바벨론의 영광이 무너지고 땅이 황폐해진다는 선언과 연결되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서 안에서도 바벨론을 향한 심판은 13장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바벨론 왕을 향한 조롱의 노래가 등장하며, 47장에서는 바벨론이 자신의 안전과 영광을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고발합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17–18장에서는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제국적 권력과 부와 폭력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다시 사용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 18:2는 바벨론의 몰락과 황폐한 거처의 이미지를 이사야 13:21–22와 연결하여 읽게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처음부터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을 구체적으로 예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이 구약의 바벨론 심판 전통을 후대의 제국적 현실과 종말론적 전망에 적용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표현을 이해할 때 역사적 사실과 예언적 시의 언어를 구별해야 합니다. 바벨론이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에게 정복된 것은 역사적으로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때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모든 주민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고대의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페르시아 군대가 바벨론 시내에 큰 전투 없이 진입했다고 기록합니다.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에서도 중요한 도시로 남았고,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도 상당 기간 사람들이 거주했습니다.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쇠퇴하였습니다. 따라서 20절의 모든 표현이 기원전 539년의 정복 순간 문자 그대로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 한 가지 읽기는 예언자가 바벨론의 최종적인 몰락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대 예언서에서는 도시의 황폐함을 표현할 때 ‘영원히 사람이 살지 않는다’거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는 식의 철저한 파괴의 언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핵심은 바벨론이 다시는 이전의 제국적 영광과 위상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읽기는 이 선언을 바벨론의 정치적 몰락을 넘어, 장차 이루어질 궁극적인 심판까지 바라보는 예언으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539년의 정복은 심판의 역사적 국면이지만, 본문 전체의 모든 이미지가 그 사건 하나에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본문 자체가 이 두 읽기 중 하나를 명시적으로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21절의 ‘염소 귀신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세이림(⁨שָׂעִיר⁩)은 문자적으로 털이 많은 존재들과 연결되는 말입니다. 문맥에 따라 숫염소를 가리킬 수도 있고, 광야와 폐허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존재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 17:7에서는 이 표현이 사람들이 제사를 바치는 대상으로 등장합니다. 이사야 34:14에서도 황폐한 땅에 나타나는 존재들과 함께 언급됩니다. 따라서 13:21의 표현을 실제 들염소로 이해하는 읽기와, 황폐한 장소를 배회한다고 여겨졌던 영적 존재로 이해하는 읽기가 모두 가능합니다. 본디새김은 후자의 의미를 선택하여 ‘염소 귀신들’이라고 옮겼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귀신들이 바벨론에 거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확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22절의 ‘버려진 거처들’이라는 표현에는 원문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베알메노타브(⁨אַלְמָנָה⁩)는 글자 그대로 보면 ‘그의 과부들 가운데’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 호화로운 궁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폐허가 된 건물이나 요새를 가리키는 말로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비슷한 형태의 다른 단어를 반영한 것일 가능성도 제시됩니다. 본디새김은 문맥을 따라 ‘버려진 거처들’이라고 옮겼습니다. 이 선택은 장면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달하지만, 히브리어 표현 자체의 어려움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의 폐허가 오늘의 독자에게 묻는 것

이사야 13:1–22 본문 →

제국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계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이 13장의 우주적 이미지와 마지막 폐허의 장면을 하나로 묶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전쟁의 역사를 자신의 심판에 사용하신다고 말하면서도, 그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 줍니다. 본문은 그 긴장을 완전히 해결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심판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고통을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바벨론의 교만을 비판하지만, 그것이 다른 민족의 고통을 즐기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장을 바르게 읽는 사람은 다른 이의 멸망을 자신의 우월함의 증거로 삼기보다, 자신도 같은 하나님의 판단 아래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교만을 낮추시는 분이지만, 그분의 심판이 인간에게 교만하게 남을 심판할 권리를 넘겨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사야가 보여 준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권력이 더 겸손해져야 할 이유이지, 더 오만해져도 된다는 근거가 아닙니다.

이사야 13장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처음에 군대는 민둥산 위에 세워진 깃발을 보고 모였습니다. 여러 왕국의 백성이 떠들썩한 소리를 내며 바벨론을 향해 움직였습니다. 그 군대가 향한 곳은 귀족들의 문이었습니다.

그 문 너머에는 바벨론이 자랑하던 영광이 있었습니다. 왕과 귀족들의 거처, 화려한 궁전, 권력의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언자가 보여 주는 바벨론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왕의 명령이 울려 퍼지지 않습니다. 귀족들의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호화로운 궁전에는 들짐승들이 들어와 울부짖고, 자칼들이 그 소리에 화답합니다.

이사야는 그 도시가 얼마나 오랫동안 위대했는지 설명하며 끝내지 않습니다. 그 위대함이 사라진 뒤 무엇이 남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때 수많은 민족을 침묵하게 만들었던 바벨론의 궁전에서, 이제는 아무도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