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1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애도하는 사람에게 새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이사야 61장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들은 왕이나 제사장도, 힘 있는 지도자들도 아닙니다. 억눌린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부서진 사람들, 포로가 된 사람들, 갇힌 사람들, 애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사야 61장에서 기쁜 소식은 불행한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식만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자신들이 살던 무너진 세상을 다시 세우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처음에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받고 말씀을 전합니다. 마지막에는 노래의 화자가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옷을 기뻐하며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포하는 사람의 입에서 시작하여, 그 소식을 받은 사람들의 삶과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1061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이사야 61:1 본문 →

61장 첫 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라는 말입니다.

「주 여호와야훼의 영이 내 위에 있다. 여호와야훼가 억눌린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내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보낸 것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고, 포로들에게 자유를, 갇힌 이들에게 풀려남을 선포하며,」이사야 61:1 · 본디새김

이 ‘나’는 누구일까요? 본문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왕이나 제사장의 직무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사무엘상 16:13에서는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에게 임합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표현만으로 61장의 화자를 반드시 왕이나 제사장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45:1에서는 페르시아의 고레스도 여호와야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불립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의 핵심은 특정한 신분이나 의식의 형태보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특별한 일을 위해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세워진 예언자 자신의 목소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종과 관련된 인물로 읽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왕적인 구원자의 모습까지 함께 떠올릴 수도 있지만, 61장 자체는 그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인물의 정확한 정체를 한 사람으로 확정하기보다, 먼저 본문이 명시하는 그의 사명에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사명의 첫 번째 내용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단지 위로의 말인가

이사야 52:7에서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평화를 알리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을 향해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외칩니다. 따라서 61장의 기쁜 소식도 단순히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삶의 형편이 바뀌게 될 것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의 첫 수신자는 ‘억눌린 이들’입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윔(ʿănāwîm)(⁨עָנָו⁩)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뿐 아니라 낮아지고 겸손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사야 61장의 문맥에는 실제로 포로와 갇힌 사람들, 슬픔과 황폐함을 경험한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억눌린 이들을 오직 마음이 겸손한 사람이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힘과 자원이 부족하여 고통받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폭넓게 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먼저 좋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나를 보냈다’는 표현과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이 이러한 예언자의 목소리로 보는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사야 42:1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종, 49:1–6에서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종의 모습과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바로 앞의 이사야 59:21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과 말씀을 백성 가운데 두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61장 첫 절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화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문맥과 연결됩니다. 다만 두 구절의 대상이 반드시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포로에게 자유를, 애도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이사야 61:2 본문 →

1절 후반에서는 사명이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여기서 먼저 등장하는 것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입니다. 이 표현은 마음을 실제로 부서질 수 있는 물건처럼 묘사합니다.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상처가 더 이상 방치되지 않도록 돌보는 행동입니다.

이어서 자유와 풀려남이 선포됩니다.

레위기의 희년 규정에서는 자유의 선포가 단순히 감옥 문을 여는 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 돌아가며, 가난과 경제적 종속 때문에 잃어버린 삶의 기반을 회복하는 일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사야 61장이 희년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지는 않지만, ‘자유를 선포한다’는 표현과 뒤이어 나오는 기업의 회복, 땅에서 누리는 기쁨은 희년의 언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포로로 끌려가고 자유를 잃은 사람들에게 자유는 실제 삶의 조건과 관계가 바뀌는 일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풀려남’으로 옮긴 히브리어 페카흐코아흐(pəqaḥ-qôaḥ)(⁨פְּקַח־קוֹחַ⁩)에는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열다’와 연결되는 표현이어서 눈을 뜨게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되며, 칠십인역은 이 대목을 눈먼 사람의 시력 회복으로 표현합니다. 반면 히브리어 문맥에서는 앞에 나오는 포로의 자유와 나란히 놓이므로 갇힌 사람의 풀려남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닫히고 묶여 있던 삶이 열립니다.

호의의 해와 복수의 날

2절에서는 두 가지 시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의 호의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선포하고, 애도하는 모든 이를 위로하며,」이사야 61:2 · 본디새김

이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는 일 년 동안 지속되지만 심판은 하루 동안만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실제로 정확한 시간의 비율을 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와 날의 대조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특히 ‘호의의 해’에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회복시키시는 시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복수는 그분의 백성을 억압하고 파괴한 악에 대한 심판과 연결됩니다. 이사야 34:8과 63:4에서도 보응과 구속의 언어가 함께 나타납니다.

따라서 여기서 복수는 사람이 자신의 적을 향해 보복할 수 있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회복하시기 위해 악에 응답하시는 행동입니다.

본문은 호의와 복수를 나란히 놓고, 그다음에 애도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는 사명을 말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가 찾아온다는 것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악이 아무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처리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를 약속하시면서, 그 상처를 만들어 낸 불의 역시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어지는 기쁜 소식

누가복음 4:16–21에서 예수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읽으십니다. 그 본문은 이사야 61:1–2를 중심으로 하며, 이사야 58:6의 억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누가복음의 인용에서는 눈먼 사람의 시력 회복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사야 61:1을 눈뜨게 하는 의미로 옮긴 칠십인역의 표현과 맞닿아 있습니다.

특히 누가복음 4:19에서 예수는 ‘여호와야훼의 호의의 해’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읽으시고, 이어 자신이 읽은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십니다(누가복음 4:21). 이것은 단순한 주제적 유사성이 아닙니다. 예수가 이사야 본문을 직접 읽으시고 자신의 사명과 연결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61장의 본래 장면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화자가 시온의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위로를 선포합니다. 누가복음은 그 말씀을 예수의 사명에 연결합니다. 따라서 신약의 해석을 존중하면서도, 이사야 본문이 먼저 다루는 포로의 자유와 공동체의 회복, 폐허의 재건과 하나님의 정의를 지워서는 안 됩니다.

또한 누가복음에서 복수의 날이 인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심판을 영원히 폐지하셨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은 그 장면에서 호의의 해를 강조하지만, 이사야 61:2의 원래 문장에는 호의와 복수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재 대신 머리쓰개를 — 애도의 몸짓이 바뀌다

이사야 61:3 본문 →

3절은 앞에서 선포한 기쁜 소식이 사람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보여 줍니다.

「시온에서 애도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하여 그들에게 재 대신 머리쓰개를, 애도 대신 기쁨의 기름을, 쇠약한 영 대신 찬양의 겉옷을 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의의 테레빈나무들, 여호와야훼가 영광을 얻으려고 심은 나무들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61:3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애도할 때는 재를 뒤집어쓰거나 굵은 베를 입는 등의 행동으로 슬픔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아름다운 머리쓰개와 기름, 좋은 옷은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단지 ‘이제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애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차림을 마련해 줍니다. 그의 머리와 몸,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바뀝니다.

그들은 ‘시온에서 애도하는 이들’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만을 가리킨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시온의 황폐함과 공동체의 상실을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위로만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삶과 공동체의 회복입니다.

그래서 3절은 그들에게 새 옷을 입힌 뒤, 곧바로 새로운 이름을 붙입니다.

애도하던 사람이 나무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강한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서지고 쇠약해져 애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그런 사람들을 굳게 서 있는 나무처럼 만듭니다.

‘여호와야훼가 영광을 얻으려고 심은 나무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강하게 만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으신 나무들입니다.

바로 앞 장인 이사야 60:21에서는 회복된 백성이 하나님이 심으신 싹이라고 묘사되었습니다. 61장에서는 그 이미지가 크고 튼튼한 나무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이 나무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사람의 고통을 방치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 입고 무너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 굳게 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그 자리에 굳게 서 있기만 하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하기 시작합니다.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의의 테레빈나무들’에 사용된 히브리어 표현은 크고 튼튼한 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테레빈나무는 오랫동안 자라고 굳게 서 있는 나무입니다. 황폐한 환경과 달리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위로받은 사람들이 폐허를 다시 세우다

이사야 61:4 본문 →

「그들은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고, 예부터 황폐했던 곳들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무너진 성읍들, 대대로 황폐했던 곳들을 새롭게 할 것이다.」이사야 61:4 · 본디새김

4절의 ‘그들’은 바로 앞에서 애도하다가 새 옷을 입고 의의 나무라 불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회복시키신 다음, 그들을 그저 돌봄을 받는 자리에만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직접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게 하십니다.

본문은 ‘다시 세우고’, ‘일으켜 세우고’, ‘새롭게 할 것’이라는 동사를 연달아 사용합니다. 모두 폐허가 된 것을 회복시키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폐허는 최근에 잠깐 무너진 곳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래된’, ‘예부터’, ‘대대로’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만큼 황폐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무너진 도시를 보았고, 다음 세대도 그 폐허를 보았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것이 본래의 모습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이 영원히 폐허로 남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이사야 58:12와의 연결이 드러납니다. 그곳에서도 오래된 폐허를 다시 세우고 무너진 길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61장은 그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특별히 보여 줍니다.

그들은 먼저 위로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고, 애도의 차림을 벗기시고,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한 공간을 다시 세우게 하십니다.

회복의 대상이 회복의 일꾼이 됩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해야만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 61장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폐허를 다시 세우는 일은 그 회복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모습이지, 상처 입은 사람에게 부과되는 새로운 자격시험이 아닙니다.

한때 자신이 살아갈 곳을 잃었던 사람들이, 이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갈 곳을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외국인들은 밭을 갈고, 너희는 제사장이 된다

이사야 61:5–6 본문 →

5절부터는 회복된 공동체가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낯선 이들이 나서서 너희 양과 염소 떼를 먹이고, 외국인들이 너희 밭을 갈고 너희 포도밭을 가꾸는 이들이 될 것이다.」이사야 61:5 · 본디새김

양과 염소를 돌보고 밭을 갈며 포도밭을 가꾸는 일은 고대 농경 사회의 중요한 생업이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새로운 역할이 밝혀집니다.

「너희는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이라 불리고,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다. 너희는 민족들의 재물을 먹고, 그들의 영광을 자랑할 것이다.」이사야 61:6 · 본디새김

모든 백성이 제사장이라 불리는 까닭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성소의 일을 맡는 특별한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적 정체성을 가진다는 더 넓은 표현도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9:5–6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말씀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가운데 자신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61:6은 그 언어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이 레위기에서 규정한 제사장 직무를 동일하게 수행한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과 역할을 제사장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앞에서 그들은 오랫동안 수치를 겪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도시가 무너지고 삶의 기반을 잃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구별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이 됩니다.

외국인들은 왜 노동하는 사람들로 묘사되는가

외국인들이 이스라엘의 밭과 포도밭을 가꾸고, 이스라엘은 민족들의 재물을 누립니다. 이것은 모든 민족이 아무런 역할의 차이나 위계 없이 살아가는 장면이 아닙니다. 시온과 이스라엘이 높아지고 다른 민족들이 그들을 섬기는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본문이 외국인들을 구체적으로 어떤 법적 신분이나 노동 조건 아래 두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모두 노예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과 재물의 제공에서 민족 간의 비대칭적인 관계가 묘사된다는 사실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56장에서는 여호와야훼와 결합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되고 그들의 제물이 받아들여집니다. 반면 61장에서는 외국인들이 이스라엘의 생업을 맡고 이스라엘이 제사장으로 높아집니다.

한쪽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방인의 참여를 보여 줍니다. 다른 한쪽은 황폐함과 수치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지위가 회복되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 두 측면을 억지로 동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을 착취할 권리를 얻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뒤의 8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정의를 사랑하시고 약탈을 미워하신다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시온의 회복을 고대 세계의 부와 노동, 제사장적 지위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그 이미지가 지닌 위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는 8절의 선언을 통해 판단해야 합니다.

수치 대신 두 배의 몫을 받다

이사야 61:7 본문 →

「너희 수치 대신 두 배의 몫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치욕 대신 자기 몫을 두고 기뻐 외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땅에서 두 배의 몫을 차지하고, 영원한 기쁨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이사야 61:7 · 본디새김

7절에서는 ‘대신’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합니다.

3절에서는 재 대신 머리쓰개, 애도 대신 기쁨의 기름, 쇠약한 영 대신 찬양의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3절이 애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바꾸는 장면이었다면, 7절은 그 사람이 차지할 몫을 회복하는 장면입니다.

구약에서 ‘몫’과 ‘기업’은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신 땅과 삶의 기반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입니다. 땅을 잃는 것은 단순히 재산 하나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가 이어 갈 생활의 터전을 잃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땅에서 다시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약속은 삶의 기반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왜 두 배인가

이사야 61장은 이 표현을 통해 수치와 상실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풍성한 회복을 얻게 된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배를 엄격한 산술 공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100만 원 잃었으면 반드시 200만 원을 돌려받는다는 식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사야 40:2에서는 예루살렘이 자기 죄로 인해 겪은 고난을 두 배라는 표현과 연결합니다. 61:7의 두 배가 그 구절을 의도적으로 뒤집는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두 구절을 나란히 읽으면 심판과 회복의 대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의 마지막에는 ‘영원한 기쁨’이 등장합니다. 이는 앞에서 받게 될 재산이나 토지보다 더 오래 지속되는 약속입니다. 회복의 핵심이 단지 잃었던 물건을 돌려받는 데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 삶을 다시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더 이상 수치가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약탈과 번제를 함께 언급하시는가

이사야 61:8–9 본문 →

8절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이 등장합니다.

「나 여호와야훼는 정의를 사랑하고, 번제에 수반된 약탈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신실하게 보상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겠다.」이사야 61: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약속된 회복이 어떤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번제인가, 불의인가

‘번제에 수반된 약탈’로 옮긴 표현은 가젤 베올라(gāzēl bəʿōlāh)(⁨גָּזֵל⁩)입니다. 전통적인 히브리어 모음 표기에 따르면 올라(ʿōlāh)(⁨עֹלָה⁩)는 번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본디새김처럼 번제와 약탈을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제물을 온전히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본문을 이처럼 읽으면 하나님은 제사라는 종교적 행위가 약탈의 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그 약탈이 거룩한 행동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1:11–17의 제사 비판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은 제사와 기도를 문제 삼으시면서 악행을 멈추고 정의를 구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반면 히브리어 자음만 놓고 보면 불의나 악행을 가리키는 말과도 연결할 수 있어, 약탈과 불의를 함께 미워하신다는 의미로 읽는 길이 있습니다. 실제로 칠십인역은 이 구절을 부정하게 얻은 약탈물을 미워하신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읽기는 약탈한 것을 제사에 사용하는 종교적 위선을 특별히 부각합니다. 두 번째 읽기는 하나님이 약탈과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일반적인 정의의 선언을 강조합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핵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며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 빼앗는 행동을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말하면서 불의하게 얻은 이익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억압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언약이 필요한 이유

하나님은 단순히 과거의 손해를 보상하시고 떠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5:3의 영원한 언약과도 연결됩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회복된 재물과 땅도 관계가 무너지면 다시 빼앗기거나 황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회복이 하나님의 신실한 관계 안에서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불의는 다른 사람의 몫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게 보상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정의에 따라 행동하십니다.

9절에서는 이 언약의 결과가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들의 자손이 민족들 사이에 알려지고, 그들의 후손이 뭇 백성 가운데 알려질 것이다. 그들을 보는 이는 모두 그들이 여호와야훼가 복을 준 자손임을 알아볼 것이다.」이사야 61:9 · 본디새김

여기서 회복의 결과를 바라보는 주체는 다른 민족들입니다. 처음에는 한때 수치를 당했던 백성의 회복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회복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고, 다른 민족들의 눈에도 드러납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과거의 치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누가 이 기쁨의 노래를 부르는가

이사야 61:10 본문 →

10절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다시 바뀝니다.

「나는 여호와야훼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내 영혼은 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신랑이 제사장처럼 머리쓰개를 두르고, 신부가 자기 장신구로 꾸미듯, 그가 내게 구원의 옷을 입히고 의의 겉옷으로 나를 감쌌기 때문이다.」이사야 61:10 · 본디새김

여기서 3절의 이미지가 돌아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애도하는 사람에게 재 대신 머리쓰개를 주셨습니다. 두 장면은 모두 새로운 차림을 통해 삶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애도의 차림이 축제의 차림으로 바뀌는 데서 나아가, 이제 혼인의 기쁨으로 묘사됩니다.

혼인은 새로운 관계와 공동생활의 시작을 나타내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회복된 사람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제사장처럼 머리쓰개를 두른 신랑

이 표현은 6절의 제사장 선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앞에서는 회복된 백성이 여호와야훼의 제사장들이라 불렸습니다. 두 구절 사이에 제사장적 이미지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0절에서 가장 중요한 옷은 머리쓰개가 아닙니다.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구원과 의를 스스로 만들어 낸 것으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선물로 노래합니다.

여기서 ‘의’는 단순히 마음속의 도덕적인 성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에서 의는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로운 회복을 함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은 하나님이 이루신 회복이 그 사람의 새로운 정체성을 감싸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사야 59:6에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자기 행위로 몸을 가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61:10에서는 하나님이 구원과 의의 옷으로 사람을 감싸 주십니다.

인간의 불의한 행위가 만들지 못했던 옷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쁨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응답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기 위해 재를 뒤집어썼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이 입혀 주신 구원의 옷을 입고 그분을 찬양합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에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화자가 다시 노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선포했던 사람이 그 사명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조가 됩니다. 그러나 회복된 시온이나 공동체를 대표하는 목소리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바로 앞에서 시온의 자손과 언약의 복이 등장했고, 이어지는 옷과 혼인의 이미지는 회복된 시온에 잘 어울립니다. 이사야 62:4–5에서는 버림받았던 시온이 새 이름을 얻고, 신랑과 신부의 기쁨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61:10은 화자의 정체를 명시하지 않으므로 한쪽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땅이 스스로 싹을 내듯 의와 찬양이 자라나다

이사야 61:11 본문 →

마지막 절에서 이사야는 다시 자연의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땅이 제 싹을 내고 동산이 그 안에 뿌려진 씨를 싹트게 하듯, 주 여호와야훼가 모든 민족 앞에서 의와 찬양을 싹트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61:11 · 본디새김

땅은 씨가 심어지면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공간입니다. 정원사는 씨를 뿌리고 땅을 가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싹이 실제로 생명을 얻고 자라나는 과정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애도하던 사람들이 폐허를 다시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절에서는 하나님이 의와 찬양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사람들은 무너진 것을 다시 세웁니다.

하나님은 의와 찬양이 자라나게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심으시고 회복시키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의와 찬양이 자라도록 하십니다.

왜 의와 찬양이 함께 싹트는가

의는 사람들의 삶과 공동체의 질서에 관계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때 공동체 안에는 의가 나타나고, 그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는 찬양이 나옵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심으신 나무들을 통해 영광을 얻으려 하셨습니다. 9절에서는 다른 민족들이 회복된 자손을 보고 하나님의 복을 알아봅니다. 11절에서는 마침내 모든 민족 앞에서 의와 찬양이 자라납니다.

시온의 회복은 자기들만 알고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보게 되는 사건입니다.

애도의 재가 떨어진 자리에 싹이 돋아나다

이사야 61:1–11 본문 →

하나님의 회복은 사람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폐허를 다시 세우며 하나님께 찬양으로 응답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변화의 중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위로하시고 새 옷을 입히셨습니다.

그분이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분이 싹트게 하십니다.

이 장은 모든 폐허가 즉시 사라지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와 찬양을 싹트게 하신다는 약속으로 끝납니다.

애도의 재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머리쓰개가 놓이고, 오래 황폐했던 땅에서 다시 생명이 돋아납니다.

그 싹은 사람들이 억지로 만들어 낸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심으시고 자라게 하시는 의와 찬양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