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2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버림받은 도성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62장은 누군가가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6절에는 밤낮으로 잠잠하지 않는 파수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루살렘을 기억하시라고 외치며, 그분에게도 쉼을 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누군가는 계속 말하고, 누군가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장이 보여 주는 회복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좋은 일을 기다리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가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을 때, 그 약속을 붙들고 침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더 놀라운 발견은 회복된 예루살렘이 무엇을 얻느냐보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어떻게 바라보시는가에 있습니다.
시온을 위해 나는 잠잠하지 않겠다
「예루살렘의 의가 밝은 빛처럼 드러나고, 그 도성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시온을 위해 나는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을 위해 나는 가만히 있지 않겠다.」이사야 62:1 · 본디새김
화자는 자신을 ‘나’라고 부르지만 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이 목소리를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언자의 목소리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이 선언의 목적은 같습니다.
시온의 의와 구원이 드러나기 전에는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에서 ‘의’는 사람들의 올바른 삶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정의롭게 행동하시어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사야 46:13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와 구원을 가까이 가져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2:1에서도 의와 구원이 나란히 놓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의가 드러난다는 말은 시온이 정당함을 인정받고, 하나님이 이루시는 정의로운 회복이 세상에 나타나는 일까지 포괄합니다.
그런데 그 의와 구원은 조용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의는 밝은 빛처럼 나타납니다.
구원은 횃불처럼 타오릅니다.
횃불은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불빛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0:1–3에서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시온 위에 떠오르자 민족들이 그 빛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62장에서는 그 빛의 이미지가 의와 구원의 공개적인 드러남으로 이어집니다.
「민족들이 네 의를 보고, 모든 왕이 네 영광을 볼 것이다. 너는 새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입이 정할 이름이다.」이사야 62:2 · 본디새김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개인이나 장소를 식별하기 위한 표지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존재의 성격과 지위, 그 존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판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이전과 다른 존재로 알려지게 된다는 뜻을 담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그 이름을 정하십니다.
이 장의 회복은 사람들이 시온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가 바뀌는 과정으로도 전개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목소리를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을 온전히 회복시키실 때까지 멈추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예언자의 목소리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바로 앞 장인 이사야 61:1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고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보냄받은 화자가 등장했습니다. 62:1도 그 사명을 이어받아 시온의 구원이 나타날 때까지 외치겠다는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본문에서 분명하게 확정되지 않습니다. 특히 6절에서도 파수꾼들을 세웠다고 말하는 ‘나’가 등장하므로, 두 구절의 화자가 같은지에 따라서도 해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 손에 들린 면류관
「너는 여호와야훼의 손에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바닥에 있는 왕의 머리쓰개가 될 것이다.」이사야 62:3 · 본디새김
면류관은 왕의 권위와 존귀함을 나타내는 물건입니다. 시온은 면류관을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온 자신이 면류관입니다.
더구나 그 면류관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먼저 시온의 존귀함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이 그 도성을 귀한 면류관처럼 다루시는 장면입니다.
49장에서 시온은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을 자신의 손바닥에 새겨 두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제 62장에서는 시온이 그 손바닥에 놓인 왕의 머리쓰개로 묘사됩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도성이 하나님께 귀하게 여겨지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버림받은 이에서 헵시바로
4절에서 하나님은 시온이 이전에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를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이라 부르지 않고, 네 땅을 다시는 황무지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너는 헵시바라 불리고, 네 땅은 브울라라 불릴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너를 기뻐하고, 네 땅이 혼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62:4 · 본디새김
‘버림받은 이’라는 이름에는 관계의 상실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속해 있었지만 이제는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황무지’라는 이름에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현실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이 살고 경작해야 할 땅이 황폐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이름을 모두 바꾸십니다.
새 이름은 ‘헵시바’입니다. ‘내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시온을 다시 받아들이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시온을 기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받아들이는 것과 기뻐하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누군가를 다시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여전히 그와 함께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기쁨이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시온은 겨우 버림받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다시 불립니다.
그런데 왜 땅이 혼인한다고 하는가
그 땅은 ‘브울라’가 됩니다. 혼인한 여자처럼 다시 관계 안에 놓인 땅입니다.
혼인은 두 사람이 관계를 맺고 공동생활을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이사야는 그 이미지를 황폐했던 땅의 회복에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살고, 그곳에 속하며, 삶의 터전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가 처녀와 혼인하듯, 네 아들들이 너와 혼인할 것이다. 신랑이 신부를 두고 기뻐하듯, 네 하나님이 너를 두고 기뻐할 것이다.」이사야 62:5 · 본디새김
그러나 본문은 실제 가족 간의 혼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이라는 도성과 그곳에 속한 자녀들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5절 후반에서 비유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시온의 자녀들이 자기 땅과 다시 연결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시온을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신랑의 기쁨은 억지로 맡은 책임을 수행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상대방과 함께하게 된 것을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야말로 새 이름 ‘헵시바’의 뜻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혼인하다’로 옮긴 동사 바알(bāʿal)은 혼인 관계를 나타내면서 소유하거나 차지한다는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시온의 자녀들이 다시 그 땅에 속하여 살아가고, 그 땅을 자신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는 모습을 혼인의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에는 다른 읽기도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네 아들들’이라는 자음 배열을 다르게 발음하여 ‘너를 세우는 이들’ 또는 ‘너를 지으신 이’와 연결하는 해석입니다. 그러면 혼인하는 주체가 아들들이 아니라 건축자 또는 창조주가 됩니다. 그러나 본디새김이 따른 히브리어 모음 전통은 ‘네 아들들’이며, 칠십인역 역시 아들들이 시온과 함께 거주한다는 방향으로 옮깁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현을 곧바로 다른 말로 바꾸기보다, 도시와 땅의 회복을 혼인에 비유한 대담한 시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사야 54:5–8에서는 하나님이 시온을 회복시키시는 일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잠시 버림받은 것처럼 보였던 시온을 하나님이 큰 긍휼로 다시 모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65:18–19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기쁨으로 만드시고, 자신의 백성을 기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21:2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단장되어 나타나고, 21:9–10에서도 어린양의 신부와 거룩한 도성이 연결됩니다. 이는 시온을 혼인과 도성의 이미지로 묘사했던 이사야의 언어가 후대에 새롭게 사용되는 사례입니다. 다만 이사야 62장에서는 먼저 황폐했던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본래의 문맥을 읽어야 합니다. 신약에서 그 이미지가 발전한다고 해서 이사야가 말한 성벽과 곡식, 포도주와 귀환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벽 위에 세워진 잠들지 않는 파수꾼들
6절에서 장면이 갑자기 바뀝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네 성벽들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온종일, 밤새도록, 언제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께 예루살렘을 기억하게 하는 이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 「그가 예루살렘을 굳게 세울 때까지, 예루살렘을 땅에서 찬양거리가 되게 할 때까지 그에게도 쉼을 주지 마라.」이사야 62:6–7 · 본디새김
고대 도시의 파수꾼은 성벽이나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피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의 접근이나 위험을 발견하면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62장의 파수꾼들에게는 독특한 임무가 주어집니다.
이 파수꾼들은 단순히 적을 감시하는 군사적인 역할만을 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 예루살렘을 기억하시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
성경에서 ‘기억하다’는 말은 단지 과거의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에 따라 행동하시는 일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2:24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62장에서도 파수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그분이 행동하시기를 요청합니다.
왜 하나님에게도 쉼을 주지 말라고 하는가
7절의 명령은 더욱 대담합니다.
‘그에게도 쉼을 주지 마라.’ 이것은 간구의 지속성과 간절함을 강조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굳게 세우실 때까지 요청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 충분히 오래 기도하면 결국 그분이 원하지 않으시던 일도 억지로 이루어 주신다는 공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파수꾼들이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시온의 회복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1절에서는 누군가가 시온을 위해 잠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6절에서는 파수꾼들이 밤낮으로 잠잠하지 않습니다.
7절에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도 쉼을 드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점점 확대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말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가장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굳게 세우실 때까지 부르짖습니다.
‘예루살렘을 땅에서 찬양거리가 되게 할 때까지.’ 이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이 다른 사람들의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시온을 버림받은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도성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 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파수꾼들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씨를 뿌린 사람이 그 곡식을 먹을 것이다
파수꾼들의 간구 뒤에 하나님의 맹세가 등장합니다.
여호와야훼가 자기 오른손과 힘센 팔을 걸고 맹세했다. 「나는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의 먹이로 주지 않겠다. 네가 수고하여 얻은 새 포도주를 이방인들이 마시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이사야 62:8 · 본디새김
오른손과 팔은 하나님의 능력과 행동을 표현하는 이미지입니다. 이사야 59:16에서는 하나님의 팔이 직접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62장에서는 그 능력의 팔을 걸고 회복의 약속을 보증하십니다.
앞에서는 시온이 새로운 이름을 받고, 아름다운 면류관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백성의 곡식을 누가 먹고 포도주를 누가 마시는지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삶
전쟁과 침략을 경험한 농경 사회에서 곡식을 수확하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은 언제든지 빼앗길 위험에 놓일 수 있었습니다. 사사기 6:3–6에서는 미디안 사람들과 다른 무리가 이스라엘의 농작물을 파괴하고 가축을 빼앗아 백성을 궁핍하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신명기 28:30–33에서도 언약을 저버린 백성이 자기 포도밭의 열매를 누리지 못하고, 자신이 수고한 생산물을 다른 민족이 가져가는 일이 심판의 결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의 수고가 원수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십니다.
이사야 62장의 약속은 그런 삶의 역전입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이 마시는 일’을 모든 외국인과의 음식 나눔을 금지한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문제 되는 것은 자기 백성이 수고하여 얻은 것을 원수들이 빼앗아 누리는 상황입니다.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외국인과 침략하여 약탈하는 원수를 구별해야 합니다.
「오히려 곡식을 거둔 이들이 그것을 먹고 여호와야훼를 찬양할 것이며, 포도를 거둔 이들이 내 거룩한 뜰에서 그 포도주를 마실 것이다.」이사야 62:9 · 본디새김
수고한 사람이 그 결실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은 안전과 평화가 회복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사람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던 폭력과 약탈이 사라지고, 그들이 일한 결과를 누릴 수 있는 질서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사람이 수고하여 거둔 것을 자기 손으로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곡식을 먹는 일이 왜 찬양이 되는가
여기서 먹고 마시는 일과 예배가 연결됩니다. 수확한 사람이 결실을 누리는 기쁨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신명기 12:7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먹으며 자기 손으로 이루어 낸 모든 일에 대해 기뻐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2:9의 ‘거룩한 뜰’ 역시 하나님의 성소와 연결되는 장소입니다. 본문은 회복된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백성을 기뻐하시고,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합니다.
그 관계의 회복이 실제 삶의 기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문을 지나가라, 길을 닦아라
10절에서는 여러 명령이 빠르게 이어집니다.
「지나가라, 성문들을 지나가라. 백성이 갈 길을 터라. 쌓아 올려라, 큰길을 쌓아 올려라. 돌을 치워라. 민족들 위로 깃발을 들어 올려라.」이사야 62:10 · 본디새김
모두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행동입니다. 마치 중요한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장면과 같습니다.
특히 ‘쌓아 올려라’는 명령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평탄한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마련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돌을 치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장애물을 제거하는 행동입니다.
이 길로 누가 들어오는가
본문은 명령을 받는 사람들의 정확한 신분을 밝히지 않습니다. 또한 성문을 지나가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성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인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지 모든 세부사항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12절에서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가 되찾으신 백성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따라서 10절의 길은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된 시온을 향해 나아오는 귀환의 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길을 준비하고 민족들 위에 깃발을 드는 행동에는 구원을 널리 알리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지날 길에서 돌이 치워지고, 멀리 있는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깃발이 높이 세워집니다.
오랫동안 끊어졌던 귀환의 길이 다시 열리는 장면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에는 이사야 40:3–4와 연결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광야에 여호와야훼의 길을 준비하고, 골짜기를 높이며 산과 언덕을 낮추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57:14에서도 백성의 길에서 걸림돌을 치우라는 요청이 나왔습니다. 이사야 11:12에서도 하나님이 민족들을 향해 깃발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모으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네 구원이 온다
보아라, 여호와야훼가 땅끝까지 알렸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구원이 온다. 보아라, 그의 보상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보수가 그 앞에 있다.』」이사야 62:11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이미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말과 조금 다릅니다. 구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보상’과 ‘보수’는 앞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수고와 회복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각 사람에게 반드시 특정한 액수의 재물이나 개인적인 성공이 지급된다는 뜻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40:10과 62:11에서 이 병행 표현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행동과 그 결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오시고, 그분이 이루실 일이 함께 나타납니다.
1절에서는 시온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를 때까지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1절에서는 이제 시온에게 ‘네 구원이 온다’고 알리라는 명령이 들립니다.
처음에는 회복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그 회복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선포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구원을 가리키는 말이며, 본디새김은 이를 그대로 ‘네 구원’이라고 옮겼습니다. ‘그의 보상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보수가 그 앞에 있다.’ 여기서는 남성 단수의 소유 표현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추상적인 구원이 다가온다는 의미를 넘어, 구원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행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구절을 구원자 자신이 오신다는 말로 읽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칠십인역은 이 부분을 구원자가 도착한다는 방향으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이 구원자를 특정한 인물의 이름으로 명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40:10에는 이 구절과 거의 같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곳에서는 주 여호와야훼가 능력으로 오시며, 그분의 보상과 보수가 함께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62:11도 앞선 약속을 이어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이 다가오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찾는 성읍, 버림받지 않은 성읍
「사람들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 여호와야훼가 되찾은 이들이라 부를 것이다. 너는 사람들이 찾는 이, 버림받지 않은 성읍이라 불릴 것이다.」이사야 62:12 · 본디새김
이사야 62장은 새로운 이름으로 끝납니다.
백성에게 주어지는 이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여호와야훼가 되찾은 이들’입니다. 여기서 ‘되찾다’는 구속의 언어와 연결됩니다.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신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도성의 이름은 조금 다릅니다.
‘사람들이 찾는 이.’ 이전에는 버림받았다고 불리던 도성이 이제는 찾는 대상이 됩니다.
한때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던 도시가 이제 사람들이 찾아오는 도시가 됩니다.
‘버림받지 않은 성읍.’ 이것은 4절의 ‘버림받은 이’와 직접적으로 대응합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시온을 버림받은 이라고 부르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그 약속이 새로운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62장은 시온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회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도성을 다시 찾으시고, 사람들이 그 도성을 새롭게 부르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이 찾는 이’를 하나님이 찾아 돌보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다시 그 도성을 찾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수동 표현 자체에는 누가 찾는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 전체의 흐름에서는 두 측면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시온을 회복시키시자 사람들이 그곳으로 돌아오고, 다른 민족들도 그곳을 향해 나아옵니다.
마지막에 남는 이름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다리고, 부르짖고, 준비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의 근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모습입니다.
시온은 아직 모든 회복이 완성되기 전에 ‘헵시바’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 도성을 기뻐하신다는 선언이 먼저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시온의 죄와 과거의 문제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앞에서 백성의 불의와 심판을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과거가 그들의 마지막 이름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한때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버림받았다고 불렀습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떠나고, 땅이 황폐해지고, 자신의 수고의 결실조차 지킬 수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도성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찾는 이.
버림받지 않은 성읍.
한때 버림받았다고 불리던 도성이 이제 버림받지 않은 성읍이라 불립니다. 하나님이 그 도성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