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3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피 묻은 옷의 하나님께 부르짖다
이사야 63장은 낯선 인물을 바라보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을 의와 구원의 능력을 지닌 존재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신 일은 여러 민족을 분노로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구원과 피 흘리는 심판이 한 장면에 함께 나타날 수 있을까요?
7절부터는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고난을 함께 겪으시고, 그들을 들어 올려 품어 나르셨다고 노래합니다.
이사야 63장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이 장면들을 서로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강력한 구원자가 자기 힘으로 승리를 이루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께 구원받아야 할 백성이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힘이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의 백성은 아직도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 질문이 장의 후반부를 이끌어 갑니다.
에돔에서 오는 붉은 옷의 전사
본문의 첫 장면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집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보스라에서 붉어진 옷을 입고 오는 이, 차림새가 위엄 있고 큰 힘으로 몸을 기울이며 나아오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의로 말하며, 구원할 큰 힘을 지니고 있다.」이사야 63:1 · 본디새김
이처럼 대화 형식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는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의 모습을 먼저 보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차례로 알게 됩니다.
왜 하필 에돔과 보스라인가
에돔은 사해 남동쪽 일대와 관련된 고대 왕국입니다. 보스라는 에돔의 중요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창세기 25:25–30은 에서와 에돔이라는 이름을 연결하고, 창세기 36:1은 에서를 에돔이라고 밝힙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친족적인 연결을 가진 민족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두 민족의 관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적대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오바댜 10–14절은 예루살렘이 재난을 당할 때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넘겨주는 행위에 가담했다고 고발합니다. 시편 137:7도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기억합니다. 이사야 34:5–6에서는 에돔과 보스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로 등장합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적대와 폭력, 그리고 그러한 악에 대한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사야 63장의 사건을 에돔에서 실제로 벌어진 특정한 전투의 역사적 기록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날짜나 군대의 이름, 전투의 경과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전사의 귀환이라는 시적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줍니다.
또한 그 심판은 에돔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3절과 6절에서는 ‘여러 민족’이 등장합니다. 에돔과 보스라는 심판의 장면을 여는 구체적인 장소이지만,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행동은 더 넓은 민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위엄 있는 모습과 붉게 더러워진 옷
1절에서는 그 인물이 ‘차림새가 위엄 있고’ 큰 힘으로 나아온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옷에는 붉은 흔적이 있습니다.
「어째서 당신의 옷은 붉고, 당신의 옷가지는 포도즙 틀을 밟는 사람의 옷과 같습니까?」이사야 63:2 · 본디새김
포도즙 틀에서는 포도를 밟아 즙을 짜냅니다. 포도를 밟는 사람의 옷에는 붉은 포도즙이 튈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그 모습에 비유하여 전사의 옷을 설명합니다.
다음 절에서 이 이미지의 의미가 밝혀집니다.
아무도 함께하지 않은 포도즙 틀
「나는 혼자 포도즙 틀을 밟았다. 여러 민족 가운데 나와 함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고, 격노로 그들을 짓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가지에 튀었고, 나는 내 옷을 온통 더럽혔다.」이사야 63:3 · 본디새김
그는 다른 민족들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승리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심판을 이루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심판을 수행하는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피로 물든 옷이 말하는 것
이사야는 포도즙 틀이라는 비유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그 붉은 흔적이 실제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드러냅니다. 본문은 분노와 격노, 짓밟음과 피를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는 강대국의 폭력과 민족들의 억압,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적대가 반복해서 고발됩니다. 63장의 전사는 그러한 악에 심판을 행하시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쟁과 포도즙 틀의 언어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해방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긴장을 간단한 말로 해소하기보다 본문이 두 사실을 함께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복수의 날과 되찾을 해
「복수의 날이 내 마음속에 있었고, 내가 되찾을 해가 왔기 때문이다.」이사야 63: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이사야 61:2의 ‘여호와야훼의 호의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복수의 날’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앞서 선포된 구원과 심판의 약속이 여기서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에서 구속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되찾고 회복시키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되찾으시는 일이 그들을 억압한 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구원이 반드시 누군가의 피 흘림을 필요로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63장은 특정한 예언적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보응과 구속을 함께 보여 줍니다.
왜 하나님은 돕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시는가
「내가 둘러보았으나 돕는 이가 없었다. 받쳐 주는 이가 없어 나는 놀랐다. 그래서 내 팔이 나를 위해 구원을 이루었고, 내 격노가 바로 나를 받쳐 주었다.」이사야 63:5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59:16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없고 나서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보시고, 자신의 팔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언적 표현은 하나님의 행동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행동의 언어로 묘사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움은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팔은 그분의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이 다른 세력의 도움이나 허락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는 분노로 여러 민족을 짓밟고, 격노로 그들을 취하게 했으며, 그들의 피를 땅으로 쏟아 내렸다.」이사야 63:6 · 본디새김
취하게 했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민족들이 통제력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63장에서는 그 심판이 여러 민족을 향합니다.
피 묻은 옷의 전사는 하나님 자신이 심판의 주체로 나타나는 예언적 이미지입니다. 이를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 적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포도즙 틀을 대신 밟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전사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피’로 옮긴 히브리어 네차흐(nēṣaḥ)는 이 문맥에서 포도즙을 연상시키는 액체와 피의 의미가 겹치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 19:13–15에서도 피 묻은 옷과 포도즙 틀을 밟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는 이사야 63:1–6의 심판 이미지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후대의 정경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63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여호와야훼가 직접 심판하시고 구속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피 묻은 전사의 이야기에서 사랑의 기억으로
7절은 이 장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입니다.
나는 여호와야훼의 한결같은 사랑을 이야기하겠다. 여호와야훼가 우리에게 베푼 모든 것에 따라 여호와야훼의 찬양받을 일들을 이야기하겠다. 그의 자비와 풍성한 한결같은 사랑을 따라 이스라엘 집안에 베푼 크나큰 선함을 이야기하겠다.이사야 63:7 · 본디새김
본문은 이 전환을 설명하는 연결 문장을 길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장면을 바꾸고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화자가 그분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이야기합니다.
특히 7절에는 ‘이야기하겠다’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 속에 간직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지금 백성이 처한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절 이후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가 어디에 있는지 질문할 만큼 깊은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근거로 현재의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한결같은 사랑은 단순히 상대방을 향해 좋은 감정을 품는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관계 안에서 충실하게 사랑을 베풀고 신의를 지키는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사야 63장에서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실제로 구원하셨던 역사와 연결됩니다.
자비와 풍성한 사랑, 크나큰 선함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 표현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그가 말했다. 「분명 그들은 내 백성이다. 거짓되게 행동하지 않을 자녀들이다.」 그는 그들을 구원하는 이가 되었다.이사야 63:8 · 본디새김
‘내 백성’, ‘자녀들’은 소유를 주장하는 말인 동시에 관계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그들이 반역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신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보인 행동 사이에 깊은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이사야 1:2에서도 하나님은 자녀들을 기르셨지만 그들이 자신을 거역했다고 고발하십니다. 63장은 그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반역은 단순한 규칙 위반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배신입니다.
그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도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들이 겪는 모든 고난 속에서 그도 고난을 겪었고, 그의 임재의 사자가 그들을 구원했다. 그의 사랑과 연민으로 그가 친히 그들을 되찾았고, 옛날 내내 그들을 들어 올리고 품어 날랐다.이사야 63:9 · 본디새김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서 백성의 고통을 관찰하셨다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백성이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도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전사의 팔과 백성을 품는 팔
여기서 1–6절의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돌아옵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힘이 원수를 짓밟는 행동으로 묘사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그 힘이 연약한 사람을 들어 올리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46:3–4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태어날 때부터 품고 나르셨으며, 늙을 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3:9의 이미지는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옛날 내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신 뒤 백성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한순간 위험에서 꺼내 주는 행동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품고 계속 나르셨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4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로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기억은 곧바로 반역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기록된 자음은 로(lōʾ), 곧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 읽힙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제시된 난외 읽기는 로(lô), 곧 ‘그에게’라는 뜻입니다. 난외 읽기를 따르면 본디새김처럼 하나님도 백성의 고난을 함께 겪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기록된 자음을 따르면 하나님이 고난을 겪지 않으셨다는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또 다른 문장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곳에서는 보통의 사절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구원하셨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고난을 함께 겪으셨다는 읽기는 중요한 전통적 해석이지만, 모든 고대 본문이 동일한 문장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절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이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다
그러나 그들은 반역했고, 그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원수로 돌아섰고, 그가 친히 그들과 싸웠다.이사야 63:10 · 본디새김
이 구절의 첫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기억한 바로 다음에 그들의 반역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서 반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받은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63장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백성 가운데 계셨으며, 그들의 반역으로 슬픔을 겪으시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에 반역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시편 78:40에서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을 근심하게 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3:10은 그러한 광야의 반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이 구절을 신약에서 발전한 성령론의 모든 내용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설명하는 구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들의 반역이 그 관계를 손상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십니다. 그들의 반역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제로 파괴적인 상태로 몰아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1:24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있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셨다는 표현은 이사야의 예언적 고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품어 나르신 백성의 반역에도 맞서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긴장 때문에 다음 절에서 백성은 과거를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시절을 기억하며 묻다 —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11절에서 화자는 출애굽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그의 백성은 모세의 옛 시절을 기억했다. 「자기 양 떼의 목자들과 함께 그들을 바다에서 이끌어 올린 이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의 거룩한 영을 그들 가운데 둔 이는 어디에 있는가?」이사야 63:11 · 본디새김
그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기억하기 때문에 묻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하나님의 구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를 이끄셨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 사이에서 발생한 탄식입니다.
왜 모세와 목자들이 등장하는가
질문의 중심은 모세 자신이 아닙니다. ‘그들을 바다에서 이끌어 올린 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손을 바다 위로 내밀지만,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야훼입니다.
‘목자들’이라는 복수형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또는 공동체의 다른 지도자들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들의 명단을 밝히지 않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출애굽의 역사에서는 바로 그 영이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과거의 정치적 자유나 군사적 안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누리던 관계입니다.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의 팔
「모세의 오른편에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팔을 이끈 이, 자기에게 영원한 이름을 내려고 그들 앞에서 물을 가른 이,」 「그들을 깊은 물속으로 이끈 이는? 그들은 광야의 말처럼 넘어지지 않았다.」이사야 63:12–13 · 본디새김
1–6절에서는 하나님의 팔이 심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그 팔이 바다를 가르는 출애굽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본문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과거에 어떻게 백성의 길을 열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에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출애굽기 14:9–12). 그런데 하나님이 길을 여시자 그들은 그곳을 통과했습니다. 말이 넓은 곳을 달리듯, 백성이 쓰러지지 않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하나님이 길이 없는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
광야의 말에서 골짜기의 가축으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처럼, 여호와야훼의 영이 그 백성을 쉬게 했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의 백성을 이끄셨습니다. 당신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내시려고.」이사야 63:14 · 본디새김
목자가 가축을 이끌고 골짜기로 내려가면 물과 풀이 있는 곳에서 쉴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평온한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쉴 곳을 얻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백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14절에서는 그 영이 백성을 쉬게 하십니다. 그 영은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안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연결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났습니다. 백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야기가 현재의 기도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모세의 오른편에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팔을 이끈 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문장 구조에 따라 읽는 방법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팔을 모세 곁에서 움직이게 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그 팔이 모세를 이끄는 능력으로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본문의 중심은 모세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팔입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15절에서 화자는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십시오.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처소에서 보십시오. 당신의 열정과 당신의 힘찬 행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당신의 창자에서 이는 울림과 당신의 자비가 저를 향해서는 억눌려 있습니다.」이사야 63:15 · 본디새김
화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백성을 사랑하시고,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품어 나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억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자에서 이는 울림
화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단순한 추상적 성품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향해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연민으로 표현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연민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왜 지금은 그 연민이 자신들에게 나타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시편의 탄식에서도 발견됩니다. 시편 44:23–26에서는 하나님께 일어나시고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시편 74:1–11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성소의 파괴를 바라보며 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가 언제나 평온한 확신의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조상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해도
「당신이 저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저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저희를 알아보지 않지만, 여호와야훼, 당신이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희를 되찾는 이, 이것이 옛적부터 당신의 이름입니다.」이사야 63:16 · 본디새김
이사야 63장에서 ‘이스라엘’은 여기서 야곱이라는 조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조상들입니다.
본문은 조상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알고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조상들의 인식 상태에 관한 교리를 제시하는 구절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들이 현재의 백성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과거의 영광을 잃었고, 자신들이 조상들에게 약속된 복을 누리는 백성인지 의심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일반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돌보셨던 언약 관계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신명기 32:6에서도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3장의 화자는 바로 그 관계를 근거로 호소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면서 구속자이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해 책임과 신의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 따라 다시 행동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더욱 어려운 질문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에서 몸의 내부, 특히 창자와 내장은 깊은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어에서는 마음이나 가슴이 아프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내장이 움직이거나 울리는 이미지로 깊은 연민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31:20에서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기억하시며 자신의 내장이 그를 향해 움직인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그 문맥에서도 깊은 자비와 연민이 뒤따릅니다.
어찌하여 저희를 헤매게 하십니까
「여호와야훼,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 헤매게 하시며,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까? 당신의 종들을 위해 돌아오십시오. 당신의 소유인 지파들을 위해 돌아오십시오.」이사야 63:17 · 본디새김
앞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반역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서는 하나님께 왜 자신들을 헤매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헤매게 하셨다는 말을 약화시켜야 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리적인 설명보다 탄원의 성격이 더 중요합니다. 화자는 왜 이 상황이 일어났는지를 차분하게 분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묻고 있습니다.
돌아오라는 요청의 방향
보통 예언서에서 돌아오라는 요청은 죄를 지은 백성을 향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3:17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시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이 자신들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자신들을 찾아와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언어는 시편 90:13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시고 자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합니다.
화자는 하나님께 그분의 종들과 소유인 지파들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백성이 붙드는 근거는 자신들이 완벽하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것은 죄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회복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시면 그 죄로 무너진 삶을 온전히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63장의 기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헤매게 하시며(תָּעָה)’,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קָשַׁח)’ 두 동사는 사역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그 상태에 관여하시는 주체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처음부터 단순히 하나님이 백성이 잘못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으로만 바꾸는 것은 원문의 표현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백성에게 죄를 강제로 저지르게 하셨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 전체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백성의 반역이 분명하게 고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9–10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무겁게 하며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과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이 연결됩니다. 이사야 63:17 역시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완고함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성소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이름마저 잃은 것 같은 백성
18절에서 화자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차지하고 있던 기간은 짧았습니다. 저희의 적들이 당신의 성소를 짓밟았습니다.」이사야 63:18 · 본디새김
특히 성소가 적들에게 짓밟혔다는 말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보다 깊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와 백성의 예배가 연결되는 장소였습니다. 그런 곳이 적들의 발에 짓밟혔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소가 짓밟혔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됩니까?
「저희는 당신이 한 번도 다스리지 않은 자들처럼, 당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아, 당신이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떨게 되면 좋겠습니다.」이사야 63:19 · 본디새김
그런데 이 말은 앞의 16절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이며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오히려 그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만한 구원의 징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고통입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
백성은 단순히 조금 더 좋은 상황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려오시기를 구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영역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거리가 사라질 만큼 강력하게 임재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산들이 떨기를 바랍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 때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는 여호와야훼가 불 가운데 산에 내려오시자 온 산이 크게 진동합니다. 사사기 5:4–5에서도 여호와야훼가 나아오실 때 땅이 떨고 산들이 그분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과거에 바다를 가르시고 산을 떨게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그렇게 행동해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차지했다(יָרַשׁ)’는 동사에는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뒤에 나오는 성소와 연결하여 거룩한 장소를 차지했던 기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하나를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성소가 짓밟힌 장면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열왕기하 25:8–10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을 파괴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3장의 탄원이 반드시 그 사건 직후 어느 특정한 날에 작성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파괴의 기억을 배경으로 읽기에 적합하지만, 작성 시점과 당시 상황을 확정할 만한 세부 정보까지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이 아직 열리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과 지금 백성이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이 기도가 나옵니다. 이사야 63장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그분 앞에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하늘은 아직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산들은 아직 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도 그분을 구속자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자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바로 그 자비를 구합니다.
이사야 63장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목소리로 끝납니다.
붉은 옷의 전사가 지나간 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늘을 향한 백성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다시 행동하시기를 구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