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3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피 묻은 옷의 하나님께 부르짖다

이사야 63장은 낯선 인물을 바라보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을 의롭게 말하며 구원할 큰 힘을 지닌 존재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그가 행하신 일은 여러 민족을 분노로 짓밟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구원과 피 흘리는 심판이 한 장면에 함께 나타날 수 있을까요?

특히 1–6절과 7–19절 사이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앞에서는 강력한 구원자가 자기 힘으로 승리를 이루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뒤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께 구원받아야 할 백성이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힘이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분의 백성은 아직도 버림받은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을까요?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63장 본문 읽기 →

에돔에서 오는 붉은 옷의 전사

이사야 63:1–2 본문 →

본문의 첫 장면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에돔에서 오는 이는 누구입니까? 보스라에서 붉게 물든 옷을 입고 오는 이, 위엄 있는 옷차림으로 힘차게 걸어오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나는 의롭게 말하며, 구원할 큰 힘을 지닌 이다.」이사야 63:1 · 두루새김

이처럼 대화 형식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독자는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의 모습을 먼저 보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차례로 알게 됩니다.

왜 하필 에돔과 보스라인가

에돔은 사해 남동쪽 일대와 관련된 고대 왕국입니다. 보스라는 에돔의 중요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성경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창세기 25:25–30은 에서와 에돔이라는 이름을 연결하고, 창세기 36:1은 에서를 에돔이라고 밝힙니다. 야곱과 에서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친족으로 연결된 민족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두 민족의 관계는 성경에서 여러 차례 적대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오바댜 10–14절은 예루살렘이 재난을 당할 때 에돔이 형제 야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도망하는 사람들을 넘겨주는 일에 가담했다고 고발합니다. 시편 137:7도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에돔이 보인 적대적인 태도를 기억합니다. 이사야 34:5–6에서는 에돔과 보스라가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로 등장합니다.

에돔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적대와 폭력, 그리고 그러한 악에 대한 심판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돔과 보스라는 심판의 장면을 여는 구체적인 장소이지만,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행동은 더 넓은 민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위엄 있는 모습과 붉게 더러워진 옷

1절에서는 그 인물을 「위엄 있는 옷차림으로 힘차게 걸어오는 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의 옷에는 붉은 흔적이 있습니다.

묻던 이가 다시 말합니다. 「어째서 당신의 옷은 붉습니까? 왜 포도즙 틀을 밟는 사람의 옷과 같습니까?」이사야 63:2 · 두루새김

포도즙 틀에서는 포도를 밟아 즙을 짜냅니다. 포도를 밟는 사람의 옷에는 붉은 포도즙이 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즙 틀은 풍성한 수확과 축제의 장소가 아니라 심판의 이미지로 사용됩니다.

이사야 5:1–7에서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신 정의의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발했습니다. 63장에서도 포도와 관련된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 성격은 다릅니다. 이제 포도즙 틀에서 붉게 튀는 것은 심판받는 민족들의 피를 나타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사야 63장의 사건을 에돔에서 실제로 벌어진 특정한 전투의 역사적 기록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날짜나 군대의 이름, 전투가 진행된 과정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전사가 돌아오는 시적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줍니다.

아무도 함께하지 않은 포도즙 틀

이사야 63:3–6 본문 →

붉은 옷을 입은 이가 대답합니다. 「나는 혼자 포도즙 틀을 밟았다. 여러 민족 가운데 나와 함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분노하여 그들을 밟고, 크게 노하여 그들을 짓밟았다. 그들의 피가 묻어 내 옷이 온통 더러워졌다.」이사야 63:3 · 두루새김

그는 다른 민족들의 군사적 도움을 받아 승리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심판을 이루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피로 물든 옷이 말하는 것

이사야는 포도즙 틀이라는 비유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그 붉은 흔적이 실제로 무엇을 상징하는지 드러냅니다. 본문은 「분노하여」, 「크게 노하여」라는 말과 짓밟음과 피를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는 강대국의 폭력과 민족들의 억압,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적대가 반복해서 고발됩니다. 63장의 전사는 그러한 악에 심판을 행하시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쟁과 포도즙 틀의 언어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해방의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다른 사람들에게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 긴장을 간단한 말로 해소하기보다 본문이 두 사실을 함께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원수를 갚을 날과 백성을 구해 낼 해

「원수를 갚을 날을 마음에 품었고, 내가 백성을 구해 낼 해가 왔기 때문이다.」이사야 63:4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이사야 61:2에서 여호와야훼께서 호의를 베푸실 해와 우리 하나님께서 복수하실 날을 함께 말한 대목을 직접 떠올리게 합니다. 앞서 선포된 구원과 심판의 약속이 여기서 전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에서 구속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되찾고 회복시키시는 행동을 나타냅니다. 두루새김은 이 자리를 하나님이 백성을 구해 내실 때라는 뜻으로 풀어 옮겼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해 내시는 일이 그들을 억압한 악에 대한 심판과 함께 묘사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구원이 반드시 누군가의 피 흘림을 필요로 한다는 보편적인 원리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사야 63장은 특정한 예언적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악을 갚으시는 일과 백성을 구해 내시는 일을 함께 보여 줍니다.

왜 하나님은 돕는 이가 없는 것을 보고 놀라시는가

「둘러보아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붙들어 주는 사람도 없어 나는 놀랐다. 그래서 내 팔로 승리를 이루었고, 내 분노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이사야 63: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이사야 59:16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없고 나서는 이가 없다는 사실을 보시고, 자신의 팔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언의 표현은 하나님의 행동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과 행동의 언어로 묘사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놀라움은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냅니다.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서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행동하십니다.

하나님의 팔은 그분의 능력과 행동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이 다른 세력의 도움이나 허락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나는 분노하여 민족들을 짓밟고, 내 거센 분노로 그들을 취하게 했으며, 그들의 피를 땅에 쏟았다.」이사야 63:6 · 두루새김

「취하게 했으며」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민족들이 스스로를 다스릴 힘을 잃고 무너지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사야 51:17에서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분노의 잔을 마시고 비틀거리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63장에서는 그 심판이 여러 민족을 향합니다.

피 묻은 옷의 전사는 하나님 자신이 심판의 주체로 나타나는 예언적 이미지입니다. 이를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기 적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인간에게 포도즙 틀을 대신 밟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피 묻은 옷을 입은 전사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신약의 요한계시록 19:13–15에서도 피 묻은 옷과 포도즙 틀을 밟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이는 이사야 63:1–6의 심판 이미지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뒤에 기록된 성경과의 연결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63장의 본래 문맥에서는 먼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고 구해 내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피 묻은 전사의 이야기에서 사랑의 기억으로

이사야 63:7–9 본문 →

7절은 이 장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입니다.

나는 여호와야훼의 사랑과 그분께서 찬양받으실 일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여호와야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일, 그분의 자비와 풍성한 사랑으로 이스라엘 집안에 베푸신 크나큰 은혜를 이야기하겠습니다.이사야 63:7 · 두루새김

여기서부터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그분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이야기합니다. 특히 7절에는 「이야기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 속에 간직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지금 백성이 처한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절 이후에서 드러나듯,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가 어디에 있는지 질문할 만큼 깊은 어려움에 놓여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근거로 현재의 하나님께 호소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자비」와 「풍성한 사랑」, 「크나큰 은혜」가 함께 등장합니다. 이 표현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여러 방향에서 보여 줍니다. 특히 「자비」는 다음 절에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그들은 내 백성이다. 거짓되게 행동하지 않을 자녀들이다.」 그분은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이사야 63:8 · 두루새김

이것은 자신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말인 동시에 관계를 선언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10절에서는 그들이 거역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신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보인 행동 사이에 깊은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이사야 1:2에서도 하나님은 자녀들을 기르셨지만 그들이 자신을 거역했다고 고발하십니다. 63장은 그 문제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거역은 단순한 규칙 위반보다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배신입니다.

그들의 고난 속에서 하나님도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들이 온갖 고난을 겪을 때 그분도 괴로워하셨고, 그분 앞에 있는 천사가 그들을 구원했습니다. 그분께서 사랑과 연민으로 직접 그들을 구해 내셨고, 옛날 내내 그들을 들어 올려 안고 다니셨습니다.이사야 63:9 · 두루새김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서 백성의 고통을 관찰하셨다는 표현보다 강합니다. 백성이 겪는 고통이 하나님께도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전사의 팔과 백성을 품는 팔

여기서 1–6절의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돌아옵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팔이 심판을 이루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들어 올려 안고 다니십니다.

이사야 46:3–4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태어날 때부터 품고 나르셨으며, 늙을 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63:9의 이미지는 그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특히 「옛날 내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신 뒤 백성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4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자신에게로 데려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기억은 곧바로 거역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의 기록된 자음은 로(lōʾ), 곧 부정을 나타내는 말로 읽힙니다. 반면 전통적으로 제시된 난외 읽기는 로(lô), 곧 「그에게」라는 뜻입니다. 난외 읽기를 따르면 두루새김처럼 하나님도 백성의 고난 속에서 괴로워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기록된 자음을 따르면 하나님이 고난을 겪지 않으셨다는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 문장의 정확한 의미를 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칠십인역은 또 다른 문장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곳에서는 보통의 사절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구원하셨다는 의미가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고난을 함께 겪으셨다는 읽기는 중요한 전통적 해석이지만, 모든 고대 본문이 동일한 문장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 절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연민이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다

이사야 63:10 본문 →

그러나 그들은 거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원수로 돌아서시고, 직접 그들과 싸우셨습니다.이사야 63:10 · 두루새김

이 구절의 첫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기억한 바로 다음에 그들의 거역을 고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서 거역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받은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하나님의 영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이끄시는 일에 거역하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바로 그 관계를 거슬러 행동했습니다.

시편 78:40에서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을 근심하게 했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3:10은 그러한 광야의 거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의 원수로 돌아서시고, 직접 그들과 싸우셨습니다.」 그들의 거역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제로 파괴적인 상태로 몰아갔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1:24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가운데 있는 대적들에게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의 모든 행동을 무조건 옳다고 인정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이 안고 다니신 백성의 거역에도 맞서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긴장 때문에 다음 절에서 백성은 과거를 기억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만 이 구절을 신약에서 발전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의 모든 내용을 이미 완성된 형태로 설명하는 구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의 문맥에서 먼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백성 가운데 계시며, 그들의 거역이 그 관계를 해친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의 시절을 기억하며 묻다 — 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이사야 63:11–14 본문 →

11절에서 화자는 출애굽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그분의 백성은 모세가 있던 옛날을 기억하며 말했습니다. 「자기 양 떼의 목자들과 함께 그들을 바다에서 이끌어 올리신 분은 어디에 계신가? 그들 가운데 자신의 거룩한 영을 두신 분은 어디에 계신가?」이사야 63:11 · 두루새김

그들은 하나님이 과거에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나 잘 기억하기 때문에 묻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라기보다,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구원과 현재의 고통스러운 현실 사이에서 나오는 탄식입니다.

왜 모세와 목자들이 등장하는가

출애굽기 1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손을 바다 위로 내밀지만,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63장에서 돌아보는 구원의 주체도 하나님입니다.

「목자들」이라는 복수형은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또는 공동체의 다른 지도자들까지 포함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들의 명단을 밝히지 않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억하는 출애굽의 역사에서는 바로 그 영이 그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과거의 정치적 자유나 군사적 안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이끌어 주시는 관계입니다.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의 팔

「모세의 오른편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팔로 이끄시고,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알리려고 그들 앞에서 물을 가르신 분,」 「그들을 깊은 물 사이로 이끄신 분은 어디에 계신가? 광야의 말이 넘어지지 않듯이, 그들도 넘어지지 않았다.」이사야 63:12–13 · 두루새김

본문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과거에 어떻게 백성의 길을 열었는지를 기억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에 바다가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추격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출애굽기 14:9–12). 그런데 하나님이 길을 여시자 그들은 그곳을 통과했습니다.

말이 넓은 곳을 달리듯, 백성이 쓰러지지 않고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하나님이 길이 없는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

광야의 말에서 골짜기의 가축으로

가축이 골짜기로 내려가듯, 여호와야훼의 영께서 그 백성을 쉬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의 백성을 이끄셔서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이사야 63:14 · 두루새김

목자가 가축을 이끌고 골짜기로 내려가면 물과 풀이 있는 곳에서 쉴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평온한 움직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위험에서 빠져나오는 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백성이 쉴 곳을 얻는 일로 이어졌습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의 영은 백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14절에서는 그 영이 백성을 쉬게 하십니다. 그 영은 백성 가운데 계시며, 그들을 이끄시고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과 연결됩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위험에서 벗어나는 데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화자는 바로 그 이름을 근거로 하나님께 호소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이야기가 현재의 기도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특히 「모세의 오른편에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팔로 이끄시고」라는 대목은 히브리어 문장 구조에 따라 읽는 방법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팔을 모세 곁에서 움직이게 하셨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그 팔이 모세를 이끄는 능력으로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자비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사야 63:15–16 본문 →

15절에서 화자는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말합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십시오. 주님께서 계시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에서 보십시오. 주님의 열정과 힘찬 일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저를 향한 깊은 연민과 자비를 억누르고 계십니다.이사야 63:15 · 두루새김

화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백성을 사랑하시고, 고난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들어 올려 안고 다니셨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억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자에서 이는 울림

화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단순히 어떤 성품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향해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연민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그 연민과 자비를 「억누르고 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화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의심하는 대신,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현재의 침묵에 항의합니다. 시편 44:23–26에서는 하나님께 일어나시고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합니다. 시편 74:1–11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성소의 파괴를 바라보며 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본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가 언제나 평온한 확신의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셨던 일을 기억하기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조상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저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저희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여호와야훼, 주님께서는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희를 구해 내시는 분’, 이것이 오래전부터 주님의 이름입니다.이사야 63:16 · 두루새김

이사야 63장에서 「이스라엘」은 여기서 야곱이라는 조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조상들입니다.

본문은 조상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알고 있는지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조상들의 인식 상태에 관한 교리를 제시하는 구절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의 위대한 조상들이 현재의 백성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과거의 영광을 잃었고, 자신들이 조상들에게 약속된 복을 누리는 백성인지 의심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일반적인 의미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돌보셨던 언약 관계를 가리킵니다. 출애굽기 4:2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신명기 32:6에서도 이스라엘을 지으시고 세우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면서 자기 백성을 구해 내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해 책임을 지시고 신의를 지키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16절의 호소는 단순히 하나님께 동정심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에 따라 다시 행동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깊은 연민」에는 현대 독자에게 낯선 원문의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하나님의 창자에서 이는 울림이라는 신체적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히브리어에서 몸의 내부, 특히 창자와 내장은 깊은 감정이 일어나는 자리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20에서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기억하시며 자신의 내장이 그를 향해 움직인다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사야 63:15 역시 그러한 신체적 이미지를 사용하며, 두루새김은 이를 「깊은 연민」으로 옮겼습니다.

어찌하여 저희를 헤매게 하십니까

이사야 63:17 본문 →

여호와야훼, 어찌하여 저희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헤매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을 굳게 하셔서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까? 주님의 종들, 주님의 소유인 지파들을 위해 돌아오십시오.이사야 63:17 · 두루새김

앞에서 백성은 자신들이 거역했다고 인정했습니다. 10절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헤매게 하셨다는 말을 약화시켜야 하는가

화자는 왜 이 상황이 일어났는지를 차분하게 분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즉시 덧붙입니다.

「돌아오십시오.」

돌아오라는 요청의 방향

보통 예언서에서 돌아오라는 요청은 죄를 지은 백성을 향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63:17에서는 하나님께 돌아오시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백성은 아무 책임도 없고 하나님만 잘못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이 거역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구원하시는 일이 자신들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자신들을 찾아와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말은 시편 90:13에서도 나타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돌아오시고 자신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합니다. 화자는 하나님께 그분의 종들과 소유인 지파들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시라고 부르짖습니다. 그것은 죄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회복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시면 그 죄로 무너진 삶을 온전히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63장의 기도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헤매게 하십니까?」 「저희 마음을 굳게 하셔서.」 두 동사는 누군가를 그렇게 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그 상태에 관여하시는 주체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처음부터 단순히 하나님이 백성이 잘못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뜻으로만 바꾸는 것은 원문의 표현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백성에게 죄를 강제로 저지르게 하셨다고 단정하는 것도 본문 전체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백성이 거역한 일이 분명하게 고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9–10에서도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무겁게 하며 눈을 감기게 하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백성과 그들에게 닥치는 심판이 연결됩니다.

성소를 빼앗기고 하나님의 이름마저 잃은 것 같은 백성

이사야 63:18–19 본문 →

18절에서 화자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 그 땅을 차지하고 지낸 시간은 짧았습니다. 저희의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았습니다.이사야 63:18 · 두루새김

특히 성소가 원수들에게 짓밟혔다는 말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보다 깊은 문제를 드러냅니다. 성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일과 백성의 예배가 연결되는 장소였습니다. 이 장면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열왕기하 25:8–10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성전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을 파괴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소가 짓밟혔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됩니까?

저희는 주님께서 한 번도 다스리신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되었습니다. 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셔서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면 좋겠습니다.이사야 63:19 · 두루새김

그런데 이 말은 앞의 16절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백성은 하나님을 아버지이며 자신들을 구해 내시는 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는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압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사실을 확인할 만한 구원의 표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고통입니다.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

백성은 단순히 조금 더 좋은 상황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내려오시기를 구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영역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셔서」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인 거리가 사라질 만큼 강력하게 나타나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 때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애굽기 19:18에서는 하나님이 불 가운데 산에 내려오시자 온 산이 크게 진동합니다. 사사기 5:4–5에서도 하나님이 나아오실 때 땅이 떨고 산들이 그분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63장의 화자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다시 요청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은 「그 땅을 차지하고 지낸 시간은 짧았습니다」라고 옮겼습니다. 다만 원문에서는 차지했다는 동사의 목적어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고, 뒤에 나오는 성소와 연결하여 거룩한 장소를 차지했던 기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옮겼지만, 원문 자체는 어느 하나를 확정해 주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파괴의 기억을 배경으로 읽기에 적합하지만, 작성 시점과 당시 상황을 확정할 만한 세부 정보까지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이 아직 열리지 않은 자리에서

이사야 63:1–19 본문 →

하나님이 구원하실 능력이 있다는 사실과 지금 백성이 구원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이 기도가 나옵니다. 이사야 63장의 기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그분 앞에 견딜 수 없다고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들에게는 스스로 하늘을 열거나 산을 떨게 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바다를 가르시고, 백성을 들어 올려 안고 다니시고, 광야에서 쉬게 하셨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말합니다.

「아, 주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셔서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면 좋겠습니다.」

하늘은 아직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산들은 아직 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도 그분을 자신들을 구해 내시는 분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의 자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면서도 바로 그 자비를 구합니다.

이사야 63장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장면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목소리로 끝납니다.

붉은 옷의 전사가 지나간 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늘을 향한 백성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다시 행동하시기를 구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