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4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무너진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다시 손을 내밀다
이사야 64장은 불로 시작해서 불로 끝납니다. 처음의 불은 덤불을 태우고 물을 끓게 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자연이 요동하고 민족들이 떨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불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성전이 불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기를 바랐던 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것을 잃었다는 증거로 남은 불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구원하지 못하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그분의 얼굴이 가려진 현실 앞에서 무엇을 붙들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산들이 떨 것입니다
1절은 앞 장에서 시작된 간청을 이어받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내려오시기를 바라며, 그 내려오심이 어떤 모습일지를 불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불이 덤불을 태우듯, 불이 물을 끓게 하듯 내려오십시오. 주님의 원수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리셔서, 민족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해 주십시오.이사야 64:1 · 두루새김
불 앞에서 물질의 상태가 달라지듯, 하나님께서 오시면 민족들의 상태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힘과 권세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떨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원수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리셔서」라는 말이 중심에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실제 역사 속에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억누르는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심을 드러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어서 2절은 과거를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저희가 예상하지 못한 두려운 일들을 하셨을 때, 내려오셨고 산들은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이사야 64:2 · 두루새김
이 장면은 출애굽기 19:18의 시내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산에 내려오실 때 산 전체가 크게 흔들립니다. 출애굽과 광야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이 기도의 배경에 함께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습니다. 과거에 그러셨다면 지금도 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이 이 기도의 희망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일하십니다. 오래전부터 누구도 주님 말고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거나 귀 기울여 들은 적이 없고, 눈으로 본 적도 없습니다.이사야 64:3 · 두루새김
고대 근동의 여러 민족은 자기 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거나 땅에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분의 행동을 특별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40:31과도 통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습니다. 기다림이 중요한 것은 인간의 끈기가 하나님의 행동을 강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다리는 대상이 어떤 분이신지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고백 바로 다음에 기도의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기도하는 사람들은 과연 그런 사람들입니까?
의로운 사람들을 만나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4절의 첫 문장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 주시는지 설명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뻐하며 의로운 일을 하고, 주님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분노하셨고 저희는 죄를 지었습니다. 저희는 오랫동안 죄 속에 있었습니다. 이런 저희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이사야 64:4 · 두루새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만 묘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또한 이 사람들은 단지 마지못해 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기뻐하며 의로운 일을 하고, 하나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을 기억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관한 정보를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현재의 행동 속에서 그분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죄를 지었고, 그것도 오랫동안 죄 속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들이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 살아왔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5절은 공동체의 형편을 두 가지 이미지로 드러냅니다.
저희는 모두 부정한 사람처럼 되었고, 저희가 한 모든 의로운 일은 월경 피가 묻은 옷과 같았습니다. 저희는 모두 잎사귀처럼 시들었고, 저희 죄가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갑니다.이사야 64:5 · 두루새김
고대 이스라엘의 정결 규례에서 월경은 일정 기간 의례적으로 부정한 상태와 관련되었습니다(레위기 15:19–24). 이것은 월경 자체가 도덕적인 잘못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당시의 정결 관념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말은 「저희가 한 모든 의로운 일」입니다. 이 표현을 모든 선행이 언제나 아무 가치도 없다는 일반적인 주장으로 읽으면 이사야서 전체의 메시지와 충돌합니다. 이사야 1:16–17에서 하나님은 악을 그치고 정의를 구하며 억눌린 사람을 도우라고 명령하십니다. 64:4에서도 기뻐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5절은 의로운 행동의 가치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죄에 깊이 물든 공동체가 자신들의 의로운 행동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결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더 적절합니다.
두 번째 이미지는 시든 잎사귀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잎은 나무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시든 잎은 떨어져 바람에 휩쓸려 갑니다. 어디로 갈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바람에 해당하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단지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끌고 가는 힘처럼 묘사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힘을 내어 주님을 붙드는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희에게 얼굴을 숨기시고, 저희를 저희 죄의 손아귀에서 무너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이사야 64:6 · 두루새김
1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원수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6절에서는 정작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그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민족들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그 이름을 아는 자신들의 영적 상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는 표현은 지금 실제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한 사람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통계적 진술보다는 공동체에 널리 퍼진 무기력과 신앙적 실패를 고백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이 함께하심과 관계를 나타내는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은혜와 호의의 표현이고(민수기 6:25),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관계의 단절과 심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신명기 31:17–18).
백성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얼굴을 숨기셨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욱 무기력해졌습니다. 이사야 59:1–2에서도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의 「저희 죄의 손아귀」는 히브리어로 ‘우리의 죄악의 손에’라는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죄가 마치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주인처럼 그려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기도의 방향이 다시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마지막의 「이런 저희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는 히브리어 문장이 간결하고 모호하여 해석이 갈리는 곳입니다. 두루새김처럼 오랫동안 죄 속에 머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반면 ‘그것들’이 앞의 하나님의 길을 가리킨다고 보아, 그 길에 계속 머무는 것이 구원과 연결된다고 읽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것은 이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자신들의 죄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죄의 손아귀에서, 하나님이 빚으시는 손으로
그러나 이제, 여호와야훼, 주님께서는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희는 진흙이고 주님께서는 저희를 빚으시는 분이십니다. 저희 모두가 주님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입니다.이사야 64:7 · 두루새김
「그러나 이제」라는 말은 앞의 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죄를 충분히 인정한 뒤에도 여전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붙드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든, 우리를 빚으신 분이 누구인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회개했으니 구원받을 자격이 생겼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자신들의 관계를 근거로 간구합니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드러내고, 진흙을 빚는 분이라는 표현은 백성의 존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진흙은 스스로를 빚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빚어질 가능성까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처음 만드신 하나님께 다시 호소합니다.
6절에서 사람들은 죄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7절에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이라고 고백합니다.
두 손이 대조됩니다.
죄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은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들을 빚으시는 손입니다.
물론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새롭게 빚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직접 선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붙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야훼, 너무 크게 분노하지 마시고, 저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마십시오. 부디 저희를 보아 주십시오. 저희 모두가 주님의 백성입니다.이사야 64:8 · 두루새김
요청의 초점은 분노가 계속되는 것과 죄를 영원히 기억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죄가 공동체의 마지막 운명을 영원히 결정하도록 두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 「저희는 모두」는 죄에 물든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7절에서는 「저희 모두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작품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제 8절에서는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느 한쪽의 사실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백성이 언약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던 역사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역사에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시는 폐허를 보여 드리다
9절부터 기도는 추상적인 죄와 구원에 대한 고백에서 구체적인 장소로 이동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도시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이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이 황폐한 땅이 되었습니다.이사야 64:9 · 두루새김
도시들이 광야가 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살던 곳의 질서가 무너지고 삶의 공간이 황폐해졌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잃은 것은 단순히 자신들의 도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도시가 황폐해졌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땅과 이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간청의 근거로 삼습니다.
10절에서는 그 상실이 성전으로 모입니다.
저희 조상들이 주님을 찬양하던 저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타 버렸고, 저희가 아끼던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습니다.이사야 64:10 · 두루새김
그 장소에는 여러 세대에 걸친 예배의 기억이 쌓여 있었습니다. 시온과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믿음과 깊이 연결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에게는 이것이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들 가운데 계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도시가 이렇게 황폐해질 수 있습니까?
이사야 64장은 이 질문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전이 불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이 패배했다고 결론짓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폐허를 하나님 앞에 그대로 가져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원수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리시기를 바라지만, 정작 자기 백성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구원은 단순히 원수를 물리치는 승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는 일입니다.
마지막 11절은 그 모든 고백과 간청을 하나의 질문으로 모읍니다.
여호와야훼, 이런 일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침묵하시며 저희가 이토록 심한 고통을 겪게 하시겠습니까?이사야 64:11 · 두루새김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는 침묵과, 행동하지 않으시는 자제가 그들에게는 깊은 고통이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처럼 들리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때문에 드리는 간절한 항변입니다.
이 기도는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을 기록하지 않은 채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말씀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과 성전을 불태웠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하 25:9에는 하나님의 집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주요 건물들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성전 파괴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이 장의 기도가 정확히 언제 처음 작성되었는지까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11절의 「가만히 계시겠습니까?」(אָפַק)는 원문에서 첫 번째 동사입니다. 원문에서 첫 번째 동사는 스스로를 억누르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불탄 집 앞에 남은 마지막 질문
여기서 죄의 고백과 신뢰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4장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약화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백성의 죄가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마지막 말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64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회복된 성전도, 되돌아온 영광도, 구원을 선포하는 음성도 없습니다.
시온은 황폐해졌고, 예루살렘은 무너졌습니다. 조상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던 성전은 불에 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고, 이제 자신들을 빚으신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여호와야훼, 이런 일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자신들이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던 사람들임을 알면서도, 다시 하나님께 손을 내밉니다.
그리고 그 손을 내밀 수 있는 마지막 이유는 자신들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야훼, 주님께서는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불타 버린 성전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빚으셨던 그 손이 다시 움직이기를 기다립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