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6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사람

이사야서는 마지막 장에서 성전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지을 집과 자신이 쉬실 곳이 어디인지 물으십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앞에서 인간이 지을 집의 한계를 드러내십니다.

그러고는 뜻밖의 사람에게 눈길을 돌리십니다.

하늘을 왕좌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대상은 웅장한 성전을 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난함과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마지막 구절은 뜻밖에도 꺼지지 않는 불과 죽은 자들의 시체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계에는 누가 들어오며, 그 세계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던 삶은 어떻게 되는가?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1066장 본문 읽기 →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는 사람

이사야 66:1–2 본문 →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내 왕좌이고, 땅은 내 발판이다. 너희가 나를 위해 지을 집은 어디 있느냐? 내가 쉴 곳은 어디 있느냐?」이사야 66:1 · 본디새김

고대 근동의 성전은 신이 거하는 장소로 이해되었습니다. 왕궁이 왕의 통치를 나타내듯, 신전은 신의 권위와 임재를 드러내는 공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에도 그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에는 처음부터 중요한 구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하시지만 성전 안에 갇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도 성전 봉헌 기도에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다 모실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열왕기상 8:27).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생겨났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 「내가 눈여겨보는 이는 가난하고 영이 꺾인 이, 내 말에 떠는 이다.」이사야 66:2 · 본디새김

성전을 짓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돌과 나무, 그들이 서 있는 땅, 그 위에 펼쳐진 하늘까지 모두 하나님의 손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린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그분 앞에 가져가는 일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거나 그분의 호의를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으셨는지 말씀하시던 장면이, 하나님께서 누구를 바라보시는지에 관한 말씀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큰 집을 지었는가보다, 자신의 말씀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가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사람은 실제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일 수도 있고, 고난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깨달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영이 꺾인」은 자신의 힘으로 당당하게 서기 어려운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특징은 가난과 상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떱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판단하고 바꿀 수 있는 권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사야 57:15에서도 하나님은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면서 동시에 영이 꺾이고 낮아진 사람과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66장은 그 주제를 성전에 관한 질문과 결합합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면서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제물을 드리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사람들

이사야 66:3–4 본문 →

3절에는 네 쌍의 행동이 등장합니다.

「소를 잡는 자는 사람을 쳐 죽이는 자와 같고, 양을 제물로 잡는 자는 개의 목을 꺾는 자와 같다. 곡식 제물을 올리는 자는 돼지 피를 바치는 자와 같고, 유향을 기념 제물로 바치는 자는 우상을 찬양하는 자와 같다. 그들도 제 길을 택했고,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혐오스러운 것들을 기뻐했다.」이사야 66:3 · 본디새김

소와 양을 바치는 일, 곡식과 유향을 드리는 일은 이스라엘의 제사 전통에서 정당하게 사용되던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살인과 부정한 제사, 우상숭배에 나란히 놓으십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예물을 바쳤지만, 마음은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것들을 기뻐했습니다.

이사야 1:11–17에서 하나님은 백성의 많은 제물과 종교적 모임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정의를 행하지 않고 억눌린 이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이 제물과 불의를 대비했다면, 이사야 66장은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를 가증한 행위와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예배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되었는지를 더욱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제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라는 사실만으로 그 제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4절에서는 3절의 「택했다」라는 말이 되돌아옵니다.

「나도 그들을 농락할 일을 택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그들에게 닥치게 하겠다.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들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눈에 악한 일을 했고,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이사야 66:4 · 본디새김

자신들의 선택으로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일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5:12와 같은 고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보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차이는 이제 같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네 쌍의 행동 사이에 ‘같다’라는 비교 표현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행위가 매우 압축적으로 나란히 놓입니다. 본디새김은 이것을 강한 동등성의 판정으로 읽었습니다. 이는 문맥상 충분히 가능한 읽기입니다. 다만 문법적으로는 정상적인 제사와 가증한 행위를 병렬로 놓아 두 종류의 행동이 한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있음을 강조한다고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여호와야훼가 영광을 받기를」이라고 말하며 형제를 쫓아내다

이사야 66:5–6 본문 →

여호와야훼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에 떠는 이들아. 「너희를 미워하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내쫓는 너희 형제들이 말했다. 『여호와야훼가 영광을 받기를. 우리가 너희의 기쁨을 보자.』 그러나 그들이 수치를 당할 것이다.」이사야 66:5 · 본디새김

하나님은 앞에서 자신이 눈여겨보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아픈 말은 「너희 형제들」입니다.

이들을 미워하고 내쫓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침입한 적들이 아닙니다. 같은 신앙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사람이 반드시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열심히 지키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다른 사람을 배척할 수 있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사람은 가난하고 영이 꺾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분의 말씀에 떠는 사람입니다. 그의 연약함이 자동으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신실함을 자동으로 증명하지도 않습니다.

성읍에서 요란한 소리, 성전에서 소리, 자기 원수들에게 보응하는 여호와야훼의 소리가 난다.이사야 66:6 · 본디새김

처음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드린다는 생각에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제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성전을 자기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장소로 삼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란한 소리 다음에 전혀 다른 소리가 이어집니다.

아이를 낳는 소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호와야훼가 영광을 받기를」이라는 이 발언을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우리가 너희의 기쁨을 보자」와 추방의 상황을 고려하면 조롱이나 도전의 의미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너희가 정말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라면, 그 하나님이 너희에게 기쁨을 주시는지 보자는 식입니다. 본문은 그 갈등의 세부적인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를 어떤 절차로 내쫓았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진통보다 먼저 태어난 아이들

이사야 66:7–9 본문 →

그녀는 산고를 겪기도 전에 아이를 낳았고, 진통이 오기도 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이사야 66:7 · 본디새김

여기서 「그녀」는 이어지는 문맥에서 시온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이 한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그 여인이 자녀를 낳습니다. 그런데 출산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고통이 먼저 오고 출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여인은 진통이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를 낳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들었느냐? 누가 이런 일들을 보았느냐? 땅이 하루 만에 태어날 수 있느냐? 한 민족이 한 번에 태어날 수 있느냐? 시온이 산고를 겪자 곧 자기 아들들을 낳았기 때문이다.이사야 66:8 · 본디새김

무너지고 흩어진 공동체가 다시 태어나는 일을 출산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사야 49:20–21에서는 자녀들을 잃고 외로워하던 시온이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자녀를 보며 놀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사야 54:1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던 여인에게 기뻐 노래하라고 명령합니다.

자녀를 잃어버리고 미래가 끊어졌던 공동체에 다시 후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산모를 해산할 때까지 이르게 하고서 낳게 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낳게 하는 내가 낳는 것을 막겠느냐?」 네 하나님이 말했다.이사야 66:9 · 본디새김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회복을 끝까지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합니다. 특히 이 절에서는 하나님이 산모인 시온과 구별되십니다. 시온이 자녀를 낳지만, 그 출산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백성의 회복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성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이제 출산의 이미지가 이어지면서, 시온은 자기 자녀들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로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산고를 겪기도 전에’와 ‘산고를 겪자 곧’이라는 두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절의 표현은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둘 모두 일반적인 기대보다 출산이 놀랍도록 빠르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표현을 특정한 하루 안에 모든 역사적 사건이 완성된다는 문자적인 시간표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이 인간의 예상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의 젖가슴과 하나님의 위로

이사야 66:10–14 본문 →

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여라.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아, 그녀로 인해 즐거워하여라. 그녀 때문에 슬퍼하는 모든 이들아, 그녀와 함께 크게 기뻐하여라,이사야 66:10 · 본디새김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 때문에 슬퍼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반드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도시의 고통을 함께 슬퍼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기쁨의 이유는 단순히 도시가 다시 번영하게 되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앞에서 아이를 낳은 어머니로 그려진 예루살렘이 이제 자녀들을 먹이고 위로하는 장소가 됩니다.

그녀의 위로의 젖가슴에서 젖을 빨아 너희가 배부르게 되도록, 그녀의 풍성한 영광을 흠뻑 빨아 마셔 너희가 즐거움을 누리도록.이사야 66:11 · 본디새김

젖을 먹는 아이는 어머니에게 생존을 의존합니다. 단지 필요한 영양을 공급받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품에서 안전함과 친밀함을 경험합니다.

폐허가 된 도성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그곳에 속한 사람들에게 생명과 위로를 공급하는 장소가 됩니다.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보아라, 내가 그녀에게 평화를 강처럼, 민족들의 영광을 넘쳐흐르는 물줄기처럼 흘려보내겠다. 너희는 젖을 빨고, 옆구리에 안겨 옮겨지며, 무릎 위에서 귀여움을 받을 것이다.」이사야 66:12 · 본디새김

이사야 48:18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평화가 강처럼 흘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66장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예루살렘에 그 평화를 흘려보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민족들의 영광」이 넘쳐흐르는 물줄기처럼 들어옵니다. 이사야 60:5–11에서도 여러 민족의 재물과 영광이 시온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민족들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리는 곳이 아니라, 민족들이 가져오는 풍요를 누리는 곳이 된다는 이미지입니다.

강처럼 흐르는 평화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은 아이가 같은 장면에 놓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는 민족과 도시의 운명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존재가 안심하고 보호받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람이 자기 어머니에게 위로받듯, 그렇게 내가 너희를 위로하겠다.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위로받을 것이다.」이사야 66:13 · 본디새김

지금까지는 예루살렘이 어머니처럼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어머니의 위로를 자신의 행동에 비유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위로받는 장소이고, 그 위로를 주시는 궁극적인 분은 하나님입니다.

왕의 권능과 어머니의 위로가 한 하나님 안에서 나타납니다.

너희가 보고 너희 마음이 기뻐하며, 너희 뼈가 풀처럼 싹을 틔울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손이 그의 종들에게 드러나고, 그가 자기 원수들에게 진노할 것이다.이사야 66:14 · 본디새김

뼈는 몸을 지탱하는 단단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생명이 솟아나는 식물처럼 묘사됩니다. 이사야 58:11에서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보실 때 그들의 뼈가 강건해질 것이라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66장은 그 생명력의 회복을 싹이 돋는 모습으로 더욱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오랜 고통으로 생명력이 메말랐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위로와 심판이 같은 문장에 놓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손을 드러내실 때, 그들을 해치고 하나님을 거역하던 사람들에게는 진노가 나타납니다. 이제 본문은 어머니의 품에서 불과 칼이 등장하는 심판의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풍성한 영광」에 쓰인 히브리어 지즈(⁨זִיז⁩)는 정확한 의미를 확정하기 어려운 낱말입니다. 풍성함이나 넘쳐흐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앞의 젖가슴과 병행되는 젖의 공급을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은 풍성함이라는 의미를 살렸습니다. 어느 쪽이든 젖을 흠뻑 빨아 마시는 모습은 부족함 없이 공급받는 만족을 나타냅니다.

불 속에서 오시는 하나님과 거짓된 정결

이사야 66:15–17 본문 →

보아라, 여호와야훼가 불 속에서 올 것이며, 그의 병거들은 회오리바람 같을 것이다. 그의 분노를 격노로, 그의 꾸짖음을 불길로 갚으려는 것이다.이사야 66:15 · 본디새김

하나님이 오시는 모습은 전쟁에 나서는 왕의 모습과 같습니다. 16절은 그 심판의 범위를 넓힙니다.

여호와야훼가 불로, 그의 칼로 모든 육체를 상대로 재판을 벌일 것이며, 여호와야훼에게 죽임당할 자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66:16 · 본디새김

하나님의 심판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역에만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행위를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죽임을 당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음 구절들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민족들 가운데 파견되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장면도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있는 하나를 뒤따라 동산으로 가려고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는 자들, 돼지고기와 혐오스러운 것과 쥐를 먹는 자들은 함께 끝장날 것이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이사야 66:17 · 본디새김

여기에는 65장에 등장했던 동산과 부정한 음식의 문제가 다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사람들은 자신을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 거룩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결하게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문에서 비판받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겉으로는 정결해지는 행위가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길로 들어가는 준비가 된 셈입니다.

참된 거룩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거룩함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가운데 있는 하나」가 누구 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읽기 전통에서는 여성형 아하트(⁨אֶחָד⁩)를 전하며, 문맥상 의식을 이끄는 인물이나 숭배의 대상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정체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실 영광을 아직 보지 못한 민족들에게

이사야 66:18–21 본문 →

18절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특히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생각…… 모든 민족과 언어를 모으러 온다. 그들은 와서 내 영광을 볼 것이다.」이사야 66:18 · 본디새김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언어를 모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민족이 보아야 할 현실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표징을 두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을 민족들 곧 타르시스와 풀과 활을 당기는 루드와 두발과 야완, 내 소문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보지 못한 먼 해안 땅들로 보내겠다. 그들은 민족들 가운데 내 영광을 알릴 것이다.」이사야 66:19 · 본디새김

먼저 하나님이 민족들을 모으십니다. 그다음에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먼 민족들에게 보내십니다.

모이는 움직임과 흩어져 나가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49:6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도록 종이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이사야 66장은 그 약속을 조금 다른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이제 다른 민족들에게 그 영광을 알립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본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앞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 선별된 이들일 수 있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출신인지, 여러 민족 가운데서 나온 이들인지까지 분명히 밝히지는 않습니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 「그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너희의 모든 형제를 말과 병거와 가마와 노새와 단봉낙타에 태워, 여호와야훼에게 바치는 제물로 내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올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여호와야훼의 집으로 가져오는 것처럼 말이다.」이사야 66:20 · 본디새김

여기서 「너희의 모든 형제」는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은 여러 민족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는 일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제물은 사람을 죽여 바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뒤에 이어지는 깨끗한 그릇의 비유가 보여 주듯, 하나님께 드려지는 사람들의 귀환을 제사의 언어로 묘사한 것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은 잘못된 제사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의 귀환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단순히 제물이 성전에 많이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도 사람들을 뽑아 제사장과 레위 사람으로 삼겠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66:21 · 본디새김

적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시는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 공동체를 섬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내쫓던 장면과는 선명하게 대조됩니다.

조금 더 깊이

18절의 히브리어에는 「나는」,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생각」, 그리고 「모으러 온다」라는 표현이 이어지지만, 그 사이의 문법적 연결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와 생각을 아신다는 뜻을 보충하고, 어떤 번역은 그들의 행위와 생각 때문에 심판의 때가 이른다는 식으로 연결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원문에 없는 요소를 보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이 부분을 말줄임표로 남긴 것은 그런 불확실성을 독자에게 드러내는 선택입니다. 21절의 「그들 가운데서도」를 앞절의 돌아오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읽으면, 하나님께서 귀환한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세우신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 그들을 데려온 여러 민족의 사람들까지 포함한다고 읽으면,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세우신다는 매우 급진적인 약속이 됩니다. 두 읽기 모두 가능하지만, 어느 쪽인지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56:3–7에서 이미 하나님은 자신과 결합한 이방인과 내시를 배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을 누리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6:21을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약속으로 읽는다면, 여기서는 단순히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 성전의 봉사와 직무까지 확대되는 셈입니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역할이 혈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매우 큰 변화입니다.

모든 육체가 예배하러 오는 세상

이사야 66:22–23 본문 →

「내가 만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계속 남아 있듯,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도 계속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야훼의 선언이다.이사야 66:22 · 본디새김

앞 장에서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66장에서는 그 새 창조의 지속성이 강조됩니다. 「계속 남아 있듯」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이름은 공동체의 정체성과 기억,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사야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여러 차례 멸망과 추방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땅을 잃고, 흩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단지 어떤 민족의 혈통이 유지된다는 사실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과 맺으신 관계를 지속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때에는 초하루마다, 안식일마다 모든 육체가 내 앞에 엎드리러 올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66:23 · 본디새김

초하루는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 때이며, 안식일은 일곱 날마다 돌아오는 쉼과 예배의 날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정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이 계속될 것을 묘사합니다.

「모든 육체」라는 이 표현은 16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대상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그분을 예배하게 된다는 약속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 2:2–4에서는 여러 민족이 여호와야훼의 산으로 올라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전쟁의 도구를 농사 도구로 바꾸는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이사야서의 처음에 가까운 곳에서 제시된 그 전망이 마지막 장에서 다시 울려 퍼지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더 이상 특정한 민족이 자기 힘을 과시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장소입니다.

이쯤에서 이사야서가 모든 사람의 예배와 평화로 끝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절이 남아 있습니다.

왜 이사야서는 꺼지지 않는 불로 끝나는가

이사야 66:24 본문 →

「그들은 나가서 내게 반역한 사람들의 시체를 볼 것이다. 그들의 벌레는 죽지 않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육체에게 혐오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이사야 66:24 · 본디새김

새 하늘과 새 땅, 모든 민족의 예배, 하나님과 백성의 회복된 관계가 묘사된 다음에 갑자기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등장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고통을 느끼며 살아 있는 모습을 직접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의 죽은 몸이 남아 있고,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되는 장면입니다.

벌레는 죽은 몸을 먹고, 불은 그것을 태웁니다. 그런데 그 벌레는 죽지 않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중간에 멈추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드러냅니다. 심판의 결과가 가볍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는 약속은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이 마지막 장면을 앞의 회복과 평화의 약속을 무효화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삶은 더 이상 성공이나 영광의 표본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마땅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드러납니다.

현실에서는 악을 행한 사람들이 존경받거나, 폭력을 행사한 사람들이 승리자로 기억되는 일이 있습니다.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동을 정의롭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66장의 마지막에서는 그런 가치의 전도가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만으로 심판받는 사람들의 의식 상태나 고통이 지속되는 방식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살아 있는 영혼의 상태보다 죽은 몸과 꺼지지 않는 불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후대의 신약에서 마가복음 9:48에 직접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사야 66장 자체에서는 마지막 심판의 구체적인 시간표보다,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안에서 반역과 악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가 더 직접적인 관심사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왕좌이고, 모든 육체는 그분 앞에 섭니다

이사야 66:1–24 본문 →

처음에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지을 집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육체가 그분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는 남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의 길은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러 왔다가 밖으로 나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들의 시체를 봅니다. 벌레는 죽지 않고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단지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에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른 존재를 해치는 삶이 더 이상 영광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는 끝에서 두 가지 광경을 나란히 남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든 육체, 그리고 하나님을 거역한 삶의 참혹한 결과입니다.

하늘을 왕좌로 삼으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마지막 영광은 자신이 세운 성전이나 주장했던 거룩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이 베푸시는 위로와 평화 안에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