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풀어 읽기 · 65장

이 장의 자리 · 56–66장 · 다시 세워질 시온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새 창조

이사야 65장은 뜻밖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펼치신 손을 외면하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며, 자신들이 더 거룩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끝장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반항하는 백성을 심판하신다면,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 장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 번에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고, 누구를 보존하시며, 무엇을 새롭게 창조하실 것인지를 차례로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0분소단락 1065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65:1–2 본문 →

「나는 묻지 않던 이들이 나를 찾을 수 있게 했고, 나를 찾지 않던 이들이 나를 만날 수 있게 했다.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 민족에게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고 말했다.」이사야 65: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백성은 하나님이 언제까지 잠잠히 계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예상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고 밝히십니다.

히브리어 동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열심보다 먼저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지 않던 민족」을 이스라엘 밖의 다른 민족들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여호와야훼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경우 1절과 2절에는 이방 민족들과 반항하는 이스라엘 사이의 대조가 생깁니다.

다른 읽기도 가능합니다. 앞선 이사야 63:19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는 사람들처럼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렇다면 65:1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 이스라엘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경우 1–2절은 한 백성에게 계속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문제는 본문만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을 드러내시고 부르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반항하는 백성을 향해 온종일 손을 펼쳤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좋지 않은 길을 걷는 자들이다.」이사야 65:2 · 본디새김

「온종일」이라는 시간 표현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잠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아올 기회를 거듭 주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멀리 계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보다 자기 생각을 더 신뢰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생각」은 단순히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비판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길보다 자기들이 좋다고 여기는 길을 따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사야 65:3–7 본문 →

3–4절에는 낯선 종교 행위들이 잇따라 등장합니다.

「그 백성은 내 얼굴 앞에서 끊임없이 나를 노하게 한다. 동산에서 제물을 잡아 바치고, 벽돌 위에서 제물을 태워 연기를 올린다.」이사야 65:3 · 본디새김
「그들은 무덤들 사이에 앉아 있고, 은밀한 곳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는다. 그들의 그릇에는 부정한 제물 고기의 국물이 담겨 있다.」이사야 65:4 · 본디새김

이것들은 서로 무관한 행동의 목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의 길을 떠나 다른 종교적 관습을 따르는 모습을 그립니다.

이사야 1:29에서도 동산은 하나님을 떠난 종교 행위와 관련되어 등장합니다. 무덤과 은밀한 장소에서 밤을 보내는 행위는 죽은 자들과 접촉하거나 특별한 계시를 얻으려는 의식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 의식의 정확한 절차나 목적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특정한 주술 행위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돼지고기와 부정한 제물 고기는 레위기의 음식·제물 규례와도 어긋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리 물러서라. 내게 다가오지 마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 이들은 내 코에 들어오는 연기이며, 온종일 타오르는 불이다.」이사야 65:5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죄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작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죄는 다른 신들에게 제사했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행위를 근거로 다른 사람을 멀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거룩함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서가 거룩함을 이해하는 방식과 충돌합니다. 이사야 1:16–17에서 하나님은 악을 버리고 정의를 구하며 억눌린 사람을 도우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삶은 자신의 종교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제물의 연기를 올리며 자신들이 신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내 코에 들어오는 연기」라고 부르십니다. 「온종일 타오르는 불」이라는 표현도 2절의 「온종일 손을 펼쳤다」와 대조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그들은 끊임없는 반항으로 응답했습니다.

「보아라, 내 앞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잠잠히 있지 않겠다. 반드시 갚겠다.」이사야 65:6 · 본디새김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셨거나 잊으셨기 때문에 심판이 늦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현재의 죄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도 언급하십니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 조상의 잘못만으로 처벌받는다는 일반 원칙을 세우는 구절이 아닙니다. 7절은 조상들 역시 산과 언덕에서 하나님을 거슬렀다고 설명하고, 2–5절은 지금 세대도 같은 반항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과거의 불순종이 현재의 불순종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히브리어 크다쉬티카(⁨קָדַשׁ⁩)는 해석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본디새김처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다」라는 비교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에게 미칠 수 있으므로 접근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그러나 모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종교적 배타성을 보여 줍니다.

포도송이를 모두 버리지 않는 이유

이사야 65:8–10 본문 →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포도송이에서 새 포도주가 발견되면 『그것을 없애지 마라. 그 안에 복이 있다』 하고 말하듯, 나도 내 종들을 위해 그렇게 하여 모두 없애지는 않겠다.」이사야 65:8 · 본디새김

심판을 선언하시던 하나님께서 갑자기 포도송이를 이야기하십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아직 포도송이에 들어 있는 즙을 가리킵니다. 포도송이 안에 유익한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보존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포도송이 전체가 온전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모두 없애 버리는 것과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는 일이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야곱에게서 자손을, 유다에게서 내 산들을 차지할 이를 나오게 하겠다. 내가 택한 이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내 종들이 그곳에 살 것이다.」이사야 65:9 · 본디새김

야곱과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서 새로운 자손을 나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문맥상 한 개인의 탄생을 특정하기보다 앞으로 땅을 차지하고 살아갈 후손들의 출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반복되는 남은 자의 주제와 이어집니다. 이사야 10:20–22에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여호와야훼께 돌아오는 모습을 말합니다. 여기서도 회복은 모든 사람이 아무런 구별 없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샤론은 양 떼의 목초지가 되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가 눕는 곳이 될 것이다. 나를 찾은 내 백성을 위해 그렇게 될 것이다.」이사야 65:10 · 본디새김

샤론은 지중해 연안의 평야 지대입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리고 인근과 관련된 장소로, 여호수아 7:24–26에서 아간의 죄와 심판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입니다.

특히 아골이라는 이름은 ‘괴로움’, ‘재앙’을 뜻하는 말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65장에서는 그곳이 소 떼가 평안하게 눕는 장소가 됩니다. 호세아 2:15에서도 아골 골짜기는 희망의 문이 되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죄와 심판을 떠올리게 하던 장소가 회복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샤론과 아골은 서로 떨어진 지역입니다. 이 두 장소를 함께 언급함으로써 약속된 회복이 시온의 한 지점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땅을 차지한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 땅에 양과 소가 평안하게 머문다는 것입니다. 침략과 황폐함을 겪은 사람들에게 목축을 할 수 있는 평온한 땅은 생계의 회복이자 삶의 안정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시는 미래는 추상적인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운명의 신에게 잔을 채운 사람들

이사야 65:11–12 본문 →

8–10절의 약속 뒤에 11절은 「그러나 너희는」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여호와야훼를 버리고, 내 거룩한 산을 잊은 자들, 가드를 위해 상을 차리고, 메니를 위해 잔에 섞은 술을 가득 채우는 자들이다.」이사야 65:11 · 본디새김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을 위해 땅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 약속에 함께하지 못합니다.

「나는 너희를 칼의 몫으로 정하겠다. 너희 모두가 도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았고, 내가 말해도 너희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눈에 악한 일을 했고,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이사야 65:12 · 본디새김

운명을 정하는 신에게 술을 바친 사람들에게, 여호와야훼께서 그들의 몫을 정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래를 좌우하려는 욕망 때문에, 정작 미래를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이 장에서 믿음의 차이는 단순히 종교적인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를 의지하며,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가드와 메니는 신의 이름입니다. 가드(가드)는 행운이나 좋은 운수와 관련되고, 메니(메니)는 운명 또는 정해진 몫과 관련된 이름으로 이해됩니다. 이 신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떤 신격이었는지에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지만, 본문에서 이들에게 상과 술을 바치는 의식이 묘사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정하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마니티(⁨מָנָה⁩)는 앞에 나온 메니라는 이름과 소리가 비슷합니다.

같은 땅에서 갈라지는 두 미래

이사야 65:13–16 본문 →

13–14절은 거의 동일한 문장 구조를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야훼가 이렇게 말했다. 「보아라, 내 종들은 먹겠지만 너희는 굶주릴 것이다. 보아라, 내 종들은 마시겠지만 너희는 목마를 것이다. 보아라, 내 종들은 기뻐하겠지만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이사야 65:13 · 본디새김

이 대비는 누구에게 복이 주어지고 누구에게 심판이 임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심판과 구원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드러냅니다.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는지는 삶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은 이런 일상적인 필요와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14절에서는 대조가 인간의 내면으로 깊어집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워 환호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음이 아파 부르짖습니다.

「너희는 너희 이름을 내가 택한 이들의 저줏말로 남길 것이다. 주 여호와야훼가 너를 죽일 것이며, 자기 종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이사야 65:15 · 본디새김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름은 한 사람이나 공동체의 정체성, 명예, 기억과 깊이 연결되었습니다. 어떤 이름이 저줏말로 남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불행한 운명의 사례로 기억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종들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미래가 새롭게 규정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본문은 그 새로운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집단 이름을 여기에 곧바로 대입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자신을 위해 복을 비는 이는 진실한 하나님을 의지하여 복을 빌고, 이 땅에서 맹세하는 이는 진실한 하나님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지난 고난들이 잊혔고, 내 눈에서 감추어졌기 때문이다.」이사야 65:16 · 본디새김

이 호칭은 하나님께서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며, 그분의 말씀이 확고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확보하려고 다른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복을 빌고 맹세할 때 진실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들의 안전은 운명을 조종하려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놓입니다.

그리고 지난 고난들이 잊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의 고난이 더 이상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지 않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 하나님은 무엇을 새롭게 창조하시는가

이사야 65:17–19 본문 →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지난 일들은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7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표현 다음에 곧바로 예루살렘이라는 구체적인 도시가 등장합니다.

「오히려 내가 창조하는 것을 두고 영원히 즐거워하며 기뻐하여라. 보아라, 나는 예루살렘을 기쁨이 되게, 그녀의 백성을 즐거움이 되게 창조한다.」이사야 65:18 · 본디새김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은 여러 번 심판과 황폐함의 대상으로 등장했습니다. 이사야 1:21에서는 신실하던 성읍이 어떻게 불의한 성읍이 되었는지를 탄식했습니다.

그 도시가 이제는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예루살렘을 두고 기뻐하고, 내 백성을 두고 즐거워하겠다. 그녀 안에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65:19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백성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십니다. 이사야 62:5에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모습을 혼인 잔치의 기쁨에 비유합니다. 65장은 그 약속을 창조의 언어로 더욱 확장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현실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회복된 기쁨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예루살렘의 울음은 단순한 개인의 슬픔이 아닙니다. 전쟁과 압제, 불의와 상실이 만들어 낸 공동체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새 창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닙니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삶의 조건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65장의 새 창조를 읽을 때 흔히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 생활 이후의 회복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의 마지막 완성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루살렘의 회복, 집과 포도밭, 긴 수명, 자녀와 후손, 평화롭게 사는 가축들은 전쟁과 추방을 겪었던 공동체가 바라볼 수 있는 현실적인 회복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 지난 일들이 기억되지 않는다는 선언, 거룩한 산에서 모든 해침과 파괴가 사라진다는 약속은 단순한 귀환이나 도시 재건보다 훨씬 큰 전망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온의 회복이라는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 회복을 넘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전망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관점은 반드시 서로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의 언어는 폐허에서 살아가는 백성의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도, 그들이 경험한 어떤 역사적 회복보다 큰 약속을 바라보게 합니다.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자기가 심은 열매를 먹습니다

이사야 65:20–23 본문 →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선언 다음에 등장하는 내용은 놀랄 만큼 일상적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며칠만 살다 죽는 젖먹이나 제 날수를 채우지 못하는 노인이 없을 것이다. 젊은이는 백 살에 죽고, 죄인은 백 살에 저주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65:2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전히 죽음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 자체는 죽음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만을 묘사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중심에는 인생이 너무 일찍 끝나 버리는 비극이 더는 일상적인 현실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21–22절은 또 다른 비극을 다룹니다.

「그들은 집을 지어 거기서 살고, 포도밭을 심어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다.」이사야 65:21 · 본디새김
「그들이 지은 집에 다른 이가 살지 않고, 그들이 심은 것을 다른 이가 먹지 않을 것이다. 내 백성의 날수가 나무의 날수와 같겠고, 내가 택한 이들은 자기 손으로 일군 것을 끝까지 누릴 것이다.」이사야 65:22 · 본디새김

누군가 집을 지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집에 살게 됩니다. 누군가 포도밭을 가꾸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열매를 가져갑니다. 이것은 전쟁과 침략, 착취와 강제적인 상실을 겪는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신명기 28:30에서는 불순종에 따른 재앙을 설명하면서 집을 지어도 그곳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가꾸어도 그 열매를 누리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62:8–9에서도 이스라엘이 수고하여 얻은 곡식과 포도주를 적들이 다시는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처럼 이사야서에서 구원은 인간의 노동이 그 결실과 다시 연결되는 일입니다.

또한 「나무의 날수」는 긴 시간과 지속성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가 쫓겨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일군 땅에서 오래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23절에서는 그 안정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고, 재앙을 당할 자식을 낳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야훼에게 복 받은 이들의 자손이며,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65:2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자녀에 대한 부모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건드립니다. 자녀를 낳고 길렀는데 그 자녀가 재앙을 겪습니다. 자신이 견딘 고통이 다음 세대에도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그 비극의 반복이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표현은 가족이 계속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그립니다. 이것은 출산이나 가족 자체를 모든 사람의 삶에 강제하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본문이 묘사하는 공동체에서 세대가 끊기고 자녀가 재앙을 당하는 비극이 극복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주요 접근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극도로 긴 수명을 사용해 완전한 복과 안전을 시적으로 표현한다고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백 살이라는 숫자는 장수의 이상을 강조하며, 죽음에 관한 표현은 새로운 세계의 충만함을 설명하는 과장된 언어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본문이 실제로 죽음이 남아 있지만 조기 사망과 수명의 단절이 극복된 회복의 시대를 묘사한다고 읽는 것입니다. 이 경우 앞의 새 창조 약속을 죽음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두 읽기 모두 본문의 중요한 특징을 설명하지만,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후대의 신약 본문 가운데 요한계시록 21:1은 이사야 65:17의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이어받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4는 죽음 자체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이사야 65:20은 여전히 죽음을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완성된 묘사를 이사야 본문 전체에 그대로 덧씌우기보다, 이사야가 자신의 역사적 문맥에서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그렸는지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부르기도 전에 대답하시는 하나님

이사야 65:24 본문 →

「그들이 부르기도 전에 내가 대답하고, 그들이 아직 말하는 동안 내가 들을 것이다.」이사야 65:24 · 본디새김

처음에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그분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관계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완고한 불순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현실에서는 그 간격이 사라집니다.

새 창조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이 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백성이 서로를 향해 더 이상 단절되어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사야 58:9에서도 백성이 부를 때 여호와야훼께서 대답하시고, 부르짖을 때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65:24는 그 응답의 즉각성을 한층 더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은 그 회복을 인간 사회 바깥으로까지 확장합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먹는 세상

이사야 65:25 본문 →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으며, 뱀의 먹이는 흙먼지일 것이다. 내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야훼가 말했다.이사야 65:25 · 본디새김

이 장은 동물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이사야 11장에서도 늑대와 어린양, 사자와 소가 등장합니다. 어린아이가 위험한 동물들 곁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모습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새로운 질서에서는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를 해치는 일이 사라집니다.

포식자가 먹이를 해치지 않는 장면은 폭력의 질서 자체가 뒤바뀌는 모습을 그립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잊었습니다(65:11). 이제 그 산은 누구도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장소에서는 다른 존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사라집니다.

조금 더 깊이

뱀은 여전히 흙먼지를 먹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3:14에서 뱀에게 주어진 저주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세기에서 뱀은 배로 다니며 평생 흙먼지를 먹으라는 말을 듣습니다. 폭력과 파괴가 제거되는 한편, 악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도 지워지지 않는 질서를 보여 준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미래의 동물들이 실제로 무엇을 먹게 될지를 설명하는 생태학적 예언인지, 평화로운 창조 질서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사야 11장과의 반복, 창세기 3장과의 연결을 생각하면 상징적 의미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것인지는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심판과 새 창조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사야 65:1–25 본문 →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그분이 창조하시려는 새로운 세계와 양립할 수 없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파괴를 일삼는 질서를 끝내시고, 생명을 보존하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질서를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남김없이 없애지 않으십니다. 포도송이 안에 아직 복이 남아 있듯, 그분의 종들을 위해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그분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아직 부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분의 거룩한 산에서 아무도 다른 존재를 해치거나 파괴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65장이 그리는 새 창조의 마지막 풍경은 가장 강한 존재조차 약한 존재를 해치지 않아도 되는 평화입니다.

그곳에서 늑대와 어린양은 함께 풀을 뜯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