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기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온 땅을 치려는 왕
세상을 정복하려는 왕과 무너지는 성벽
유딧기는 뜻밖의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인데, 첫 장에는 하나님도, 이 책의 주인공 유딧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두 왕이 나옵니다. 한 왕은 거대한 성벽을 쌓고, 다른 왕은 그 도시를 차지합니다.
이 장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강한 왕이 약한 왕을 이기는 모습이 아닙니다. 누구도 자신과 동등하다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권력이 어떻게 세상을 위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위협이 얼마나 거대한지 먼저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보다 인간의 권력을 앞세웁니다.
서로 다른 제국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첫 구절은 매우 구체적인 역사 기록처럼 들립니다.
큰 도시 니느웨에서 아시리아 사람들을 다스리던 느부갓네살의 통치 십이 년째, 아르팍삿이 엑바타나에서 메대 사람들을 다스리던 때에,유딧기 1:1 · 본디새김
왕의 이름과 통치 연도, 수도와 민족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실제 고대 근동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느부갓네살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바벨론의 왕이었습니다. 니느웨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멸망했습니다. 더욱이 유딧기 4:3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살이에서 돌아온 뒤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유딧기가 제시하는 시대를 어느 한 역사적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이러한 불일치를 의도적으로 구성했는지, 어떤 전승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생겨났는지까지 확정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면 이야기 안에서 나타나는 효과는 뚜렷합니다.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의 권력으로 결합합니다.
아시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열왕기하 17:6), 바벨론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했습니다(열왕기하 25:8–10). 유딧기의 느부갓네살은 이 두 제국을 연상시키는 이름과 배경을 함께 지닙니다. 그는 다른 민족의 운명을 자기 뜻에 따라 결정하려는 제국 권력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야기는 그와 맞설 또 하나의 왕, 아르팍삿을 소개하면서 시작됩니다.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성벽
아르팍삿을 소개하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그의 성품이나 통치 업적보다 그가 건설한 성벽을 먼저 보여줍니다.
엑바타나의 성벽은 높이 일흔 규빗, 너비 쉰 규빗입니다. 망대는 백 규빗까지 솟아 있고, 성문도 높이 일흔 규빗, 너비 마흔 규빗에 이릅니다. 숫자가 거듭 등장하면서 독자는 이 도시가 얼마나 거대한지 상상하게 됩니다.
도시의 성문들을 높이 일흔 규빗, 너비 마흔 규빗으로 만들어, 그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군대가 출전하고 그의 보병들이 대열을 펼칠 수 있게 했다.유딧기 1:4 · 본디새김
이 성문은 침입자를 막기 위한 시설인 동시에 군대가 밖으로 출전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아르팍삿은 자신의 왕국을 방어할 뿐 아니라, 대규모 병력을 움직일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어서 전쟁의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라가우의 큰 평야에서 두 왕이 싸우고, 여러 강과 산지에 사는 민족들이 모여듭니다. 두 왕의 대결은 이미 두 사람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여러 지역과 민족이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서쪽 세계까지 자신의 싸움에 끌어들이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6에서는 많은 민족이 누구에게 합류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또한 켈레울 자손이 어느 집단인지, 어느 편에서 싸웠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모두 어느 한 왕의 동맹군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가는 왕의 명령
1:7부터 10절까지는 지명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길리기아, 다마스쿠스, 레바논, 갈멜, 길르앗, 갈릴리, 에스드렐론, 사마리아, 예루살렘, 이집트.
이야기의 중심은 처음에 메대와 니느웨를 둘러싼 동방의 전쟁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의 사신들이 파견되면서 시선이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레바논과 갈릴리를 지나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거쳐 이집트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은 특별한 소개 없이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합니다. 성전도, 제사장도, 이스라엘의 신앙도 아직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예루살렘은 거대한 제국의 외교 문서에 포함된 한 지역처럼 보입니다.
느부갓네살의 시야에서 각 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령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든 사람이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온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아시리아 사람들의 왕 느부갓네살의 말을 업신여기고, 그와 함께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눈에 그는 자기들과 동등한 한 사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사신들에게 모욕을 주어 자기들 앞에서 빈손으로 돌려보냈다.유딧기 1:11 · 본디새김
하지만 그렇다고 이 거절이 곧바로 신앙적 용기나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왕에게 저항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절은 분명하지만 그 동기가 의로웠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온 땅에 몹시 분노했다. 그는 자기 왕좌와 나라를 걸고, 길리기아와 다마스쿠스 지방과 시리아의 모든 지역에 반드시 보복하고, 그곳 사람들과 모압에 사는 모든 사람과 암몬 자손과 이두매 전역의 사람들과 두 바다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에 사는 모든 사람을 큰 칼로 죽이겠다고 맹세했다.유딧기 1:12 · 본디새김
왕권 자체가 자신의 결심을 보증하는 가장 높은 권위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결심의 내용은 백성의 보호나 전쟁의 종결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단순한 군사적 불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르팍삿이라는 구체적인 적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업신여긴 모든 민족이 보복의 대상이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정말 자신이 맹세한 일을 실행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왕입니까?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그 답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에는 이 표현의 차이가 전해집니다. 본디새김이 따른 본문은 이소스, ‘동등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다른 사본에는 헤이스, ‘하나’가 나옵니다. 전자는 느부갓네살을 자신들과 동등한 상대로 보았다는 뜻이고, 후자는 그를 한 사람의 상대일 뿐이라고 보았다는 뜻입니다. 두 읽기는 강조점이 다르지만, 그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통합니다. 1:12에는 본문상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른 그리스어 본문은 ‘이두매’(이두마이안)를 기록하지만, 다른 주요 사본에는 ‘유다’(이우다이안)가 나옵니다. 후자의 읽기를 따르면 유다 지역이 이 시점부터 명시적인 보복 대상에 포함됩니다. 전자의 읽기에서는 예루살렘이 1:9의 사신 파견 지역에 이미 등장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어느 읽기에서도 제국의 위협이 이스라엘의 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같습니다.
화려함이 치욕으로 바뀌는 순간
느부갓네살의 통치 십칠 년째에 전쟁이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아르팍삿의 군대와 기병과 병거를 모두 무찌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엑바타나에 도착합니다.
그의 도시들을 차지했다. 그는 엑바타나까지 이르러 망대들을 장악하고 그 도시의 광장들을 약탈했으며, 그 도시의 화려함을 그 도시의 치욕으로 바꾸어 놓았다.유딧기 1:14 · 본디새김
도시를 빛나게 하던 것이 도시의 수치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경제적 손실이나 군사적 패배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엑바타나가 자랑하던 영광 자체가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과 기술로 완성한 아름다움이 정복자의 폭력 앞에서 모욕당합니다.
그리고 아르팍삿의 마지막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라가우의 산들에서 아르팍삿을 붙잡아 자기 사냥창들로 찔러 쓰러뜨렸고, 그날로 그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유딧기 1:15 · 본디새김
이야기는 아르팍삿이 건설한 성벽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죽음은 그 성벽 안이 아니라 라가우의 산들에서 일어납니다.
그토록 높게 쌓아 올린 도시의 방어 시설은 결국 왕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독자는 아르팍삿의 패배를 통해 느부갓네살의 군사력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확인합니다. 앞서 서쪽 민족들이 그를 자신들과 동등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판단이 이제는 위험한 낙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승리를 곧바로 하나님의 승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느부갓네살이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르팍삿의 멸망이 어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군사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는 판단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복자의 승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미 그의 입에서 훨씬 넓은 세계를 향한 보복의 맹세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10:5–15에서 아시리아는 여러 나라를 정복한 군사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 본문은 제국의 실제적인 승리와 그 승리에 대한 제국 자신의 해석을 구별합니다. 특히 이사야 10:15는 도끼가 자신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유딧기 1장은 이사야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군사적 승리가 자기 권력을 무제한으로 확대하려는 명분이 될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와 연결됩니다. 다니엘 4:28–32에서도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이룩한 바벨론의 위대함을 자랑합니다. 두 책은 역사적 배경을 동일한 방식으로 제시하지 않지만, 왕의 성취와 왕권의 한계를 둘러싼 공통된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간의 권력과 구별해야 한다는 신앙적 판단은 이러한 구약의 본문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유딧기 1장 자체는 아직 그 판단의 결론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백이십 일의 침묵
마지막 절은 뜻밖에 조용합니다.
그와 그의 군대는 그들과 함께 돌아가 백이십 일을 보냈다.유딧기 1:16 · 본디새김
전쟁의 함성과 도시의 약탈, 한 왕의 죽음이 지나간 뒤 시간의 흐름만 남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이 휴식을 평화의 회복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아르팍삿을 죽였지만, 자신을 거절한 서쪽 민족들에게 내린 보복의 맹세는 아직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르팍삿의 권력은 그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권력은 그의 승리 이후에도 계속 팽창하려 합니다.
이야기가 첫 장을 마치는 순간, 독자는 무너진 왕국보다 아직 공격받지 않은 민족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절은 그리스어 사본들 사이에 길이의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른 짧은 본문은 돌아가서 백이십 일을 보냈다고 기록합니다. 다른 사본들은 그가 군대와 함께 니느웨로 돌아가 쉬고 잔치를 벌였다고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어느 경우든 이 절은 전쟁의 승리에서 일정한 휴식의 시간으로 장면을 옮깁니다.
강한 자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
여기서 드러나는 권력의 위험은 단순히 힘이 강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존재와 선택을 자신의 목적에 종속시키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이미 자신의 왕좌를 걸고 다른 민족들의 생사를 결정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높이 솟은 엑바타나의 망대는 적에게 장악되었습니다. 왕이 자랑하던 도시의 화려함은 치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르팍삿은 라가우의 산에서 죽었고, 승리한 느부갓네살은 군대와 함께 돌아가 백이십 일을 보냅니다.
아직 예루살렘에는 군대가 들이닥치지 않았습니다. 아직 누구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수많은 도시와 민족을 향한 왕의 맹세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왕의 분노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