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기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1–3장 · 온 땅을 치려는 왕
왕의 말과 온 땅을 덮는 두려움
유딧기 2장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거대한 군대가 아닙니다. 그 군대를 움직이게 하는 한 사람의 말입니다.
그런데 왕의 명령을 자세히 들어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단순히 반란을 진압하거나 영토를 넓히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온 땅의 주인」이라고 부르며, 자기 말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모두 멸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왕에게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곳입니다.
유딧기 2장은 그 생각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 때 어떤 세계가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말이 모든 사람의 결정이 되다
이야기는 왕궁에서 열린 회의로 시작합니다.
그는 자기의 시종들과 대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들과 함께 자기의 은밀한 계획을 세우고, 온 땅에 내릴 모든 재앙을 자기 입으로 확정했다.유딧기 2:2 · 본디새김
앞 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서쪽 민족들에게 보복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이제 그 맹세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바뀝니다. 겉으로 보면 여러 사람이 참여하는 회의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은 왕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리스어 본문은 그가 자신의 입으로 모든 것을 확정했다고 말합니다. 이때 사용된 카키아는 ‘악’이나 ‘해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문장 전체는 왕이 온 땅에 내릴 재앙을 확정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온 땅의 악행을 낱낱이 거론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다음 절에서 회의의 결론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따르지 않은 사람을 모두 멸하기로 결정했다.유딧기 2:3 · 본디새김
여기에는 죄를 조사하는 과정도, 피해를 따지는 과정도, 각 민족의 사정을 듣는 과정도 없습니다. 특히 2절과 3절에는 ‘입’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왕의 입에서 계획이 확정되고,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이 멸망의 대상으로 정해집니다.
원래 말은 다른 사람에게 뜻을 전달하고 함께 판단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왕의 말은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판단을 끝내는 기준입니다.
대신들은 그 말의 정당성을 검토하기보다 실행할 결정을 내립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떤 의견을 냈는지 전혀 기록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였지만, 그 자리에 실제로 남아 있는 뜻은 왕 한 사람의 뜻뿐입니다.
이것이 이후에 벌어질 폭력의 출발점입니다. 전쟁은 칼을 뽑기 전에 이미 사람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결정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계획이 확정되자 왕은 홀로페르네스를 부릅니다.
그는 왕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군대의 총사령관입니다. 이제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누가 온 땅의 주인인가
느부갓네살은 홀로페르네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왕, 곧 온 땅의 주인이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너는 내 앞을 떠나 제 힘을 믿는 보병 십이만 명과 기병들이 탄 말 십이만 마리를 데리고 가라.」유딧기 2:5 · 본디새김
‘대왕’은 고대 제국의 통치자를 높이는 칭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따르는 ‘온 땅의 주인’은 훨씬 넓은 권위를 주장합니다. 여기서 왕은 특정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온 땅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듯 말합니다.
시편 47:2은 여호와야훼를 온 땅을 다스리는 큰 왕으로 노래합니다. 그곳에서 온 땅에 대한 주권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반면 유딧기의 느부갓네살은 군사력과 정복을 근거로 그와 같은 보편적인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합니다.
두 본문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누가 온 땅의 참된 주인인가 하는 신학적 질문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질문에 이미 자기 이름으로 대답하고 있는 셈입니다.
왕은 단순히 용감한 병사들을 데려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 힘을 믿는」 병사들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군사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병사들은 자신감이 넘치는 정예군일 수 있습니다. 본문 자체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교만하다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의 권력 주장과 함께 놓으면 이 표현은 특별한 의미를 얻습니다. 왕은 온 땅을 지배할 권한을 주장하고, 그 일을 실행할 병사들은 자신의 힘을 신뢰합니다.
구약의 시편 20:7은 병거와 말을 의지하는 태도와 여호와야훼의 이름을 의지하는 태도를 대조합니다. 그 본문이 유딧기의 군대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신뢰하느냐는 문제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 군대가 향하는 곳은 서쪽입니다.
「서쪽 온 땅이 내 입에서 나온 말에 불복했으니, 그들에게 맞서러 나가라.」유딧기 2:6 · 본디새김
느부갓네살에게 자신의 권위에 대한 불복종은 군사적인 공격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불복종을 전쟁으로 응징하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에는 군대 규모에 관한 본문 차이도 있습니다. 본디새김이 따른 그리스어 본문은 2:5에서 말 십이만 마리를 기록하지만, 다른 주요 그리스어 본문에는 만 이천 마리로 나옵니다. 2:15에서는 활을 쏘는 기병이 만 이천 명입니다. 따라서 두 절의 숫자를 무조건 일치시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 24:1은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들,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고 선언합니다. 반면 시편 24편에서 여호와야훼의 소유권은 먼저 창조에 근거합니다. 여호와야훼가 땅을 세우셨기 때문에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그분께 속합니다(시편 24:1–2). 한쪽은 다른 사람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고, 다른 한쪽은 그 땅을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유딧기 2장이 직접 제시하는 대조라기보다, 이 장을 구약의 하나님 이해 안에서 읽을 때 드러나는 신학적 대비입니다.
땅과 물을 요구하는 왕
왕의 명령 가운데 가장 낯선 표현은 7절에 나옵니다.
「또 땅과 물을 준비하라고 일러라. 내가 격분하여 그들을 치러 나가, 내 군대의 발로 온 지면을 덮고 그들을 내 군사들에게 약탈거리로 넘겨줄 것이기 때문이다.」유딧기 2:7 · 본디새김
여기서 ‘땅과 물’은 군대의 보급품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땅과 물을 바친다는 것은 자신들의 영토와 생활 기반을 지배할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항복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들 가운데 상처 입고 쓰러진 자들이 그들의 골짜기와 시내를 가득 채우고, 넘쳐흐르는 강은 그들의 시체로 가득 찰 것이다.」유딧기 2:8 · 본디새김
땅과 물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기반입니다. 그러나 왕은 그 땅을 군대로 뒤덮고, 그 물길을 시체로 채우겠다고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삶의 터전 자체를 죽음의 장소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위협은 전투에 참여하는 병사들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골짜기와 시내와 강은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왕은 적군을 무찌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를 파괴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사로잡힌 자들을 온 땅의 끝까지 끌고 갈 것이다.」유딧기 2:9 · 본디새김
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고향에서 살아갈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알려진 강제 이주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10절과 11절에서는 항복하는 사람과 불복하는 사람을 다르게 취급하라는 명령이 나옵니다.
「너는 나가서 나를 위해 그들의 모든 영토를 먼저 차지해라. 그들은 네게 자신을 넘겨줄 것이니, 그들의 잘못을 따질 날까지 나를 위해 그들을 지켜 두어라.」유딧기 2:10 · 본디새김
「그러나 불복하는 자들을 네 눈으로 가엾게 보지 마라. 네 온 땅에서 그들을 살육과 약탈에 넘겨주어라.」유딧기 2:11 · 본디새김
여기서 왕은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선택해도 왕의 권력 아래 놓입니다. 복종하면 왕이 처분할 때까지 보존되고, 불복하면 살육과 약탈의 대상이 됩니다.
이 왕이 허락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자기 지배 아래에서 살아남을 가능성뿐입니다.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장군은 고통받는 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연민이 생길 가능성을 왕은 미리 차단합니다. 전쟁의 성공을 위해 단순히 용기와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연민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과 내 나라의 권세를 두고 맹세한다. 내가 말했으니, 이 일들을 내 손으로 행하겠다.」유딧기 2:12 · 본디새김
그런데 실제로 군대를 이끌고 나가는 사람은 느부갓네살 자신이 아니라 홀로페르네스입니다. 왕은 자신이 직접 행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실행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왕의 말이 장군의 행동을 결정하고, 장군의 행동이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구조입니다.
「너는 네 주인의 말을 하나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반드시 이루어라. 그 일들을 행하기를 미루지 마라.」유딧기 2:13 · 본디새김
제국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굴복을 강요하고, 제국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명령의 완전한 실행을 요구합니다. 본문은 그가 명령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왕의 뜻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홀로페르네스와 같은 실행자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행하는 일의 성격을 보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기록인 헤로도토스의 《역사》 6.48에서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가 여러 지역에 사신을 보내 땅과 물을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17:6은 아시리아 왕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로잡아 다른 지역으로 옮긴 일을 기록합니다. 열왕기하 25:11은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남은 주민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일을 전합니다. 유딧기 2장은 이러한 사건들을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정복자가 사람들을 고향에서 떼어 내어 자기 뜻대로 이동시키는 제국의 통치 방식을 다시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신명기 10:17–19은 하나님을 신들의 하나님, 주들의 주로 소개하면서 그분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유딧기 2장의 왕은 자기 장군에게 불복하는 사람을 가엾게 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두 본문의 문학적 목적과 상황은 다릅니다. 그러나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를 통해 통치자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중요한 신학적 대조를 이룹니다.
사람과 짐승과 재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대
홀로페르네스는 왕궁을 나와 아시리아 군대의 지도자들을 소집합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병력을 모으고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짐을 나를 짐승, 식량으로 사용할 가축, 병사들에게 줄 양식, 왕궁의 금과 은을 준비합니다.
전쟁은 강한 병사만으로 치를 수 없습니다. 병사들은 먹어야 하고, 장비는 운반되어야 하며,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명령을 실현하려면 많은 사람과 물자가 하나의 체계 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왕궁에서 내려진 명령은 이렇게 제국 전체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일이 됩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자신의 군대를 위해 많은 가축과 충분한 식량을 준비합니다. 뒤에 나오는 26–27절에서 그는 미디안 사람들의 가축 우리를 약탈하고,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밭을 불태우며, 양 떼와 소 떼를 없애 버립니다.
자기 군대는 풍부한 식량을 가지고 이동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식량과 생계 수단은 파괴합니다.
이러한 대조는 전쟁을 단순히 군대와 군대의 충돌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군대의 이동 자체가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뒤섞인 큰 무리도 그들과 함께 나섰다.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서 그 수를 셀 수 없었다.유딧기 2:20 · 본디새김
‘뒤섞인 큰 무리’가 정확히 누구로 구성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정규 전투 병력 외에 군대와 동행하는 여러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그들의 신분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모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메뚜기는 단순히 수가 많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메뚜기 떼는 땅을 뒤덮고 식물을 먹어 치우는 재앙의 이미지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10:14–15에서는 메뚜기 떼가 이집트에 올라와 온 땅을 뒤덮고, 우박이 남겨 놓은 식물까지 먹어 치웁니다. 요엘 1:4–12에서도 메뚜기의 파괴는 농작물의 상실과 공동체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
유딧기의 군대가 이러한 본문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라는 이미지는 독자에게 군대의 수뿐 아니라 그들이 지나간 자리의 황폐함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왕의 명령은 이미 왕궁을 떠났습니다. 셀 수 없는 무리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
21절부터 이야기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집니다.
홀로페르네스의 군대는 니느웨를 떠나 바익틸라잇 평야에 이르고, 산지로 이동합니다. 이어서 여러 민족과 지역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붓, 루드, 이스마엘 자손, 메소포타미아, 길리기아, 미디안, 다마스쿠스.
저자는 각 지역의 문화나 역사, 주민들의 특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홀로페르네스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연달아 기록합니다.
쳐부수었습니다. 약탈했습니다. 허물었습니다. 점령했습니다. 베어 죽였습니다. 불살랐습니다.
독자가 한 지역의 피해를 충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군대는 이미 다음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도시 하나가 파괴된 사건이 길게 설명되지 않고, 연속적인 정복의 일부로 처리됩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마스쿠스 평야에 도착했을 때 조금 더 오래 머무릅니다.
그는 밀을 거두는 때에 다마스쿠스 평야로 내려가 그들의 모든 밭을 불살랐다. 양 떼와 소 떼를 없애 버리고, 그들의 도시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평야를 키질하듯 휩쓸었으며, 그들의 젊은이들을 모두 큰 칼날로 쳐 죽였다.유딧기 2:27 · 본디새김
추수는 오랫동안 땅을 일군 사람들이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때입니다. 곡식은 당장 먹을 양식이면서 앞으로 살아갈 식량이기도 합니다. 군대와 싸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함께 파괴됩니다.
밭과 가축은 생계를 나타냅니다. 도시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젊은이들은 그 공동체를 앞으로 이어 갈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타나는 파괴는 현재의 재산과 생명뿐 아니라 공동체가 앞으로 살아갈 가능성까지 위협합니다.
그렇게 다마스쿠스 평야의 파괴가 끝나자 이야기의 시선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번에는 군대가 아직 직접 공격하지 않은 해안 도시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지명들 가운데 일부는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고, 서술된 이동 경로도 현대 지리 위에 일관된 하나의 행군 경로로 재구성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어느 지역을 어떤 순서와 거리로 이동했는지 지나치게 상세하게 추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키질은 원래 수확한 곡식에서 쭉정이나 불필요한 부분을 분리하는 일입니다. 곡식을 얻고 보존하기 위한 농사일에 속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홀로페르네스가 평야를 키질하듯 휩쓸었다고 표현합니다. 곡식을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농사의 이미지가, 곡식을 재배하는 땅을 파괴하는 군사 행동에 적용됩니다. 구약에서 타작과 키질은 때로 심판의 비유로 사용됩니다. 예레미야 51:33은 바벨론의 심판을 타작마당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유딧기 2장은 홀로페르네스의 파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군대보다 먼저 도착한 두려움
마지막 절은 전투가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해안 지방에 사는 사람들, 곧 시돈과 두로에 있는 사람들과 아수르와 오키나에 사는 사람들과 야브네에 사는 모든 사람을 덮쳤다. 아스돗과 아스글론에 사는 사람들도 그를 몹시 두려워했다.유딧기 2:28 · 본디새김
본문은 시돈과 두로, 아스돗과 아스글론이 이 시점에 정복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이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두려움은 아직 정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군사적 강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사람들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홀로페르네스의 전쟁이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까지 느부갓네살의 힘을 심어 놓습니다. 이제 해안 도시 주민들은 왕의 사신이 와서 명령을 전하기 전에 이미 군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식 자체가 다음 지역을 압박하는 수단이 됩니다.
두려움이 온 땅을 덮을 때
왕궁에서 명령이 내려졌을 때만 해도 왕의 분노는 말이었습니다. 홀로페르네스가 군대를 움직이면서 그것은 실제적인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파괴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까지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권력의 크기만으로는 그 권력이 정당한지 알 수 없습니다. 그 힘이 사람들의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장에서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거짓된 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군사력은 실제로 강력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이런 현실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근거 없는 상상이 아닙니다. 이미 실제적인 파괴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힘보다 더 깊이 의지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
유딧기 2장은 아직 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 장에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선언하는 목소리도 없습니다. 오직 왕의 명령이 실행되는 모습과 그 결과만 보입니다.
이야기는 다마스쿠스의 밀밭이 불타고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한 뒤, 해안 도시들로 시선을 옮깁니다.
시돈과 두로, 아스돗과 아스글론의 주민들은 홀로페르네스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 군대와 직접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왕은 자기 군대의 발로 온 지면을 덮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군대보다 먼저 도착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덮고 있습니다.
왕궁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말이, 아직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점령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