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딧기 풀어 읽기 · 16장
이 장의 자리 · 15–16장 · 승리와 감사 노래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 평화를 남긴 여인
유딧기는 한 여인이 적의 장군을 죽인 이야기로 기억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유딧은 칼을 들지 않습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 성소에 예물을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뒤에도 이스라엘을 두렵게 하는 자가 없었다는 말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왜 이 책은 가장 극적인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한 여인의 평온한 노년과 그 이후에 찾아온 오랜 평화로 끝나는 것일까요?
그 물음의 답은 유딧이 부르는 노래의 첫머리에 있습니다.
유딧은 하나님을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적을 물리친 승리를 노래하면서도, 그 승리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하게 만듭니다.
유딧기 16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1–17절은 유딧이 하나님께 부르는 감사의 노래이고, 18–25절은 그 노래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합니다. 노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되돌아보고, 마지막 이야기는 그 구원이 어떤 삶을 가능하게 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
유딧은 손북과 제금을 울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합니다.
유딧이 말했다. 「손북을 치며 제 하나님께 앞장서 노래하십시오. 제금을 치며 주께 노래하십시오. 그분께 가락을 맞추어 찬송과 찬양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높이고 부르십시오.」유딧기 16:1 · 본디새김
유딧은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말하기 전에, 그 기억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부터 밝힙니다. 곧이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주는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저를 뒤쫓는 자들의 손에서 저를 건져 내어 백성 가운데 있는 자신의 진영으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유딧기 16:2 · 본디새김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15:3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뒤쫓던 이집트 군대가 무너진 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유딧기에서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위협하던 압도적인 군사력이 무너진 뒤 찬양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구원의 출발점은 이스라엘의 우월한 전투 능력이 아니라,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세력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전쟁을 부수는 하나님」을 모든 무력 사용의 즉각적인 폐지라는 의미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유딧기 자체가 유딧의 살해 행위와 이스라엘의 무력 추격을 구원의 과정으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이 먼저 가리키는 것은 이스라엘을 짓밟으려던 전쟁의 위력이 꺾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아시리아는 자신들의 거대한 군사 진영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유딧은 하나님에게도 진영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계시며 자신의 사람을 구해 내시는 장소입니다.
군사적 관점에서는 아시리아의 진영이 훨씬 강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딧의 노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참된 안전의 자리가 됩니다. 안전을 결정하는 것은 진영의 규모가 아니라 그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산을 뒤덮은 군대와 한 여자의 손
유딧은 먼저 적의 압도적인 규모를 묘사합니다.
「아시리아가 북쪽 산들에서 왔습니다.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왔습니다. 그들의 무리가 시내들을 막아 메웠고, 그들의 말들이 언덕들을 뒤덮었습니다.」유딧기 16:3 · 본디새김
시내를 메우고 언덕을 덮는다는 것은 병력의 수를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땅의 모습이 달라 보일 정도였다는 시적 묘사입니다.
「그는 제 산들을 불사르고, 제 젊은이들을 큰 칼로 죽이고, 제 젖먹이들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제 어린아이들을 노략물로 넘겨주고, 처녀들을 약탈하겠다고 했습니다.」유딧기 16:4 · 본디새김
그녀는 이스라엘 전체를 자신의 가족처럼 부르고 있습니다. 백성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었고, 그들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해진 것입니다.
이 노래의 일인칭은 유딧 개인의 경험을 넘어 공동체를 대표하는 목소리로 확장됩니다.
또한 이 절은 아시리아의 위협이 단순히 군사적 정복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공동체의 현재뿐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파괴하겠다는 위협입니다.
「전능한 주께서는 한 여자의 손으로 그들을 물리치셨습니다.」유딧기 16:5 · 본디새김
거대한 군대에 대한 묘사는 길지만, 그 패배를 설명하는 문장은 짧습니다. 수만의 병력과 말과 무기가 등장한 뒤, 결정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은 「한 여자의 손」입니다.
「그들의 용사는 젊은이들의 손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티탄들의 아들들도 그를 치지 않았고, 키 큰 거인들도 그를 덮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므라리의 딸 유딧이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으로 그의 맥을 풀어 놓았습니다.」유딧기 16:6 · 본디새김
「므라리의 딸 유딧」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처음 등장할 때 제시되었던 족보를 떠올리게 합니다(8:1). 공동체를 대표하여 노래하던 목소리가 이제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실제로 누구를 통해 일하셨는지를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티탄들의 아들들」과 「키 큰 거인들」이라는 표현에는 그리스 문화권의 거인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압도적인 힘의 상징을 불러와, 그런 힘조차 사용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사기 4장의 야엘과 시스라 이야기가 겹쳐 보입니다. 시스라는 군대를 거느린 장군이지만, 결국 야엘이라는 여인의 손에 죽습니다(사사기 4:17–22). 드보라의 노래는 야엘을 여자들 가운데 복 받은 사람으로 찬양합니다(사사기 5:24–27). 두 이야기의 구체적인 사건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군사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지지 않던 여인의 손을 통해 강력한 장군이 무너진다는 문학적 구조가 공통됩니다.
아름다움이 마음을 포로로 잡고, 단검이 목을 가르다
유딧은 자신이 홀로페르네스를 어떻게 쓰러뜨렸는지를 노래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고생하는 이들을 높이려고 자기의 과부 옷을 벗고, 자기 얼굴에 향유를 바르고,」 「머리 관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묶고, 그를 속이려고 아마포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유딧기 16:7–8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앞서 유딧이 과부 옷을 벗고 화려하게 단장하던 장면(10:3–4)의 의미를 다시 밝혀 줍니다. 그때 독자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홀로페르네스는 그 모습을 자신의 욕망을 채울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을 속여 자기 뜻대로 차지할 기회를 찾았습니다(12:16).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도리어 유딧이 그를 속입니다.
그러나 유딧기가 이 속임을 다룬다고 해서 모든 상황에서 거짓말과 기만을 허용하는 일반적인 윤리 원칙을 제시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특별한 전쟁 상황 속에서 유딧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일부로 평가합니다. 그 평가와 개별 행동을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으로 만드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녀의 신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단검이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습니다.」유딧기 16:9 · 본디새김
원래 사람들을 사로잡고 약탈하겠다고 위협한 쪽은 홀로페르네스였습니다. 그런데 노래는 그가 유딧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고 묘사합니다.
정복자가 포로가 된 것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아름다움의 위력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홀로페르네스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망을 위한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욕망이 자신의 판단을 무너뜨리는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는 군사적으로 패배하기 전에 이미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대군을 물리친 이름 없는 사람들
10–12절에서는 장군 개인의 패배가 군대 전체의 패배로 확대됩니다.
유딧은 페르시아 사람들과 메대 사람들이 자신의 대담함에 떨었다고 노래합니다. 이 명칭들은 유딧기의 아시리아 군대가 무너진 사건을 한층 더 넓은 세계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11절은 해석이 갈리는 구절입니다.
낮은 이들이 함성을 지르고 약한 이들은 두려워하다가, 그들의 외침으로 적이 무너지는 흐름으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반면 문맥의 대조를 강조하면, 이스라엘의 약한 사람들이 외치자 적이 겁에 질려 무너졌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은 같습니다. 이전에는 적의 위협 앞에 무력했던 사람들이 이제 목소리를 내고, 그들을 압도하던 군대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소녀들의 아들들이 그들을 찔러 죽였고, 달아나는 자들의 아이들을 치듯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들은 제 주의 전열 앞에서 멸망했습니다.」유딧기 16:12 · 본디새김
「소녀들의 아들들」은 이름난 용사들과 대조되는 어린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시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군사적으로 하찮게 여겨질 만한 사람들까지 적을 물리치는 일에 참여했다고 노래합니다.
이 장면에서 유딧은 자신의 용기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용기를 노래하지만, 마지막 문장은 승리를 「제 주의 전열」에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11절의 그리스어 문면에도 약한 이들이 두려워했다는 동사가 있어 이러한 읽기가 가능합니다. 실제로 이 구절에는 동사의 주어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고, 일부 고대 본문 전승에서는 두려워했다는 표현 대신 외쳤다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의 문장 구조를 확정적인 원문 의미로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쟁의 승리에서 창조의 하나님께로
13절에서 노래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앞부분의 노래는 특정한 전쟁과 구원의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딧은 시선을 온 피조물로 넓힙니다.
「당신의 모든 피조물이 당신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시자 그것들이 생겨났고, 당신의 영을 보내시자 그 영이 그것들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목소리에 맞설 이는 없습니다.」유딧기 16:14 · 본디새김
홀로페르네스의 군대는 땅을 뒤덮고 물길을 막을 만큼 강력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유딧은 그 군대보다 더 큰 세계를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만 강한 분이 아니라, 산과 바다와 모든 생명을 존재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14절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피조물을 세우신다는 표현은 시편 104:30의 창조와 생명의 갱신을 연상시킵니다.
그리스어 프네우마(πνεῦμα)는 문맥에 따라 영, 숨, 바람을 뜻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이 창조의 능력과 연결됩니다. 다만 유딧기 16:14가 그 영의 존재 방식에 관한 후대의 신학적 설명을 직접 제시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 앞에서 피조물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들은 물과 함께 그 밑바탕부터 흔들리고, 바위들은 당신 앞에서 밀랍처럼 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당신께서 여전히 너그러우십니다.」유딧기 16:15 · 본디새김
시편 97:5에서도 산들이 주 앞에서 밀랍처럼 녹는다고 묘사합니다. 유딧 역시 산과 바위조차 하나님의 능력 앞에 굳게 설 수 없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앞에 있는 모든 존재를 똑같이 파괴하는 무차별적인 힘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신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시면서, 자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말한 끝에서, 유딧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너그러우신지를 노래합니다.
제물보다 위대한 사람, 그리고 심판의 날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모든 제물은 작고, 당신께 번제로 바치는 모든 기름도 아주 작지만,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위대하기 때문입니다.」유딧기 16:16 · 본디새김
여기서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든 자신을 해치실까 봐 공포에 질린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과 권위를 인정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진술은 사무엘상 15:22와 미가 6:6–8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본문 모두 제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정의롭게 사는 일을 제물보다 중요하게 다룹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가서 번제물과 자원 제물을 바칩니다(16:18). 따라서 16절을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읽으면 이어지는 이야기와 충돌합니다.
제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물 자체가 사람의 경외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는 물건의 크기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유딧은 부유한 여인이었습니다(8:7). 그러나 이 책에서 그녀의 위대함은 많은 재산이나 값비싼 예물을 바쳤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공동체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행동했습니다.
유딧의 노래는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심판의 노래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17절은 앞선 노래와 분위기가 크게 다릅니다.
「제 민족을 거슬러 일어나는 민족들에게 화가 있습니다. 전능한 주께서 심판의 날에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살 속에 불과 구더기를 넣으실 것이니, 그들은 고통을 느끼며 영원히 울 것입니다.」유딧기 16:17 · 본디새김
적들은 젖먹이를 땅에 내던지고, 어린아이들을 약탈하고, 처녀들을 빼앗으려 했습니다(16:4). 17절의 심판은 그런 폭력이 아무런 책임 없이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또한 노래는 최종적인 심판의 주체를 「전능한 주」로 제시합니다. 승리한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에게 끝없는 고통을 가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이 지닌 심판의 가혹함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유딧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한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강하게 기대합니다. 이것은 박해와 전쟁의 위협 속에서 공동체의 생존을 노래하는 고대 본문의 언어입니다.
오늘의 독자가 이 표현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갈망과 인간의 적대감을 구별해야 합니다. 본문은 폭력의 책임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모든 시대의 신앙 공동체가 자기 적을 마음대로 정죄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제 이야기는 그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의 행동으로 돌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표현은 이사야 66:24와 분명한 연결이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의 시체를 묘사하며 그들을 먹는 구더기와 꺼지지 않는 불을 말합니다. 유딧기는 이 이미지를 가져오면서 「심판의 날」과 「영원히 울 것입니다」라는 표현을 결합합니다. 이사야 66:24에서는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심판의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유딧기 16:17은 고통을 느끼며 영원히 운다는 표현으로 심판의 지속적인 고통을 더 강하게 묘사합니다. 이 구절이 후대의 심판 이해와 연결될 여지는 있지만, 여기서 완성된 사후 세계의 지도를 읽어 낼 수는 없습니다.
적의 침실에 있던 물건이 하나님의 성소로 옮겨지다
승리를 기념하는 노래가 끝나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하나님께 엎드려 절했다. 백성이 정결해진 뒤, 자기들의 번제물과 자원 제물과 예물을 바쳤다.유딧기 16:18 · 본디새김
여기서 정결하게 되는 절차가 예물 봉헌보다 먼저 나옵니다. 전쟁과 관련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성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유딧은 백성이 자기에게 준 홀로페르네스의 기물을 모두 바쳤다. 그의 침소에서 자기 몫으로 가져온 모기장도 하나님께 봉헌물로 바쳤다.유딧기 16:19 · 본디새김
유딧은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뒤 그 모기장을 가져왔습니다(13:9, 15). 본래 그것은 적의 장군이 잠자던 공간에 속한 물건이었습니다. 그 장소에서 홀로페르네스는 유딧을 자신의 뜻대로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딧은 그곳에서 그를 죽이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그 물건은 그녀가 겪었던 위험과 하나님께 돌리는 감사 사이를 연결합니다.
또한 유딧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리품을 개인적인 승리의 기념물로 보관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그녀에게 주었던 홀로페르네스의 물건들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유딧은 자신이 한 일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일로 얻은 영광을 자기 소유로 붙잡아 두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앞선 노래의 16절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경외가 이제 실제 봉헌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백성은 예루살렘의 성소 앞에서 석 달 동안 기뻐합니다. 여기서 유딧도 사람들과 함께 머뭅니다. 그녀의 행동으로 시작된 구원을 이제 온 백성이 함께 기념합니다.
자기 땅으로 돌아가 자기 삶을 살다
석 달의 기쁨이 끝나자 사람들은 자기 땅으로 돌아갑니다.
그날들이 지난 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유산으로 받은 땅으로 떠났다. 유딧도 베툴리아로 돌아가 자기 소유지에서 지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 온 땅에서 명성을 얻었다.유딧기 16:21 · 본디새김
아시리아 군대가 베툴리아를 포위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자기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물이 끊어지고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자기 땅으로 돌아가 살아갑니다.
「자기 유산으로 받은 땅」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땅에 대한 오랜 신앙적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는 지파들이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 받으며(여호수아 13–21장), 사사기에서도 적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일은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평안히 살아가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유딧기 16:21은 사람들이 단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전쟁 때문에 잃어버릴 뻔했던 삶의 자리가 보존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등장할 때 유딧은 베툴리아에 사는 한 과부였지만, 이제 그녀는 온 땅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왕궁으로 옮겨 가거나 새로운 권력을 행사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유딧이 다시 결혼하지 않은 이유
22절은 많은 남자가 유딧을 원했지만, 그녀가 남편 므낫세가 죽은 뒤 평생 어떤 남자와도 잠자리를 갖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그녀가 다시 남자와 결합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평생 혼자 살기로 명시적인 서원을 했는지,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는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서였는지까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야기 전체에서는 유딧이 상당한 경제적 독립성을 지닌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남편이 남긴 재산을 관리했고(8:7), 공동체의 위기 속에서 스스로 계획을 세워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의 삶을 기록하면서 본문은 결말에서도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어 갔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모든 과부는 다시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거룩하다는 규범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유딧기의 서술자는 유딧 개인의 삶을 존중과 명예의 맥락에서 기록하지만, 모든 여성에게 동일한 삶의 방식을 명령하지는 않습니다.
백다섯 살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갈수록 매우 큰 존경을 받았고, 남편의 집에서 백다섯 살이 되도록 늙어 갔다. 그녀는 자기 몸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었다. 유딧은 베툴리아에서 죽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남편 므낫세의 무덤 굴에 묻었다.유딧기 16:23 · 본디새김
성경에서는 인물의 긴 수명이 종종 복된 삶을 나타내는 문학적 요소로 사용됩니다. 유딧기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긴 수명은 그녀가 죽음의 위협을 넘어서 오랫동안 존경받으며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몸종은 유딧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인물입니다. 유딧이 계획을 세우고 적의 진영으로 들어갈 때 그녀와 동행했고, 위험한 상황을 함께 통과했습니다.
유딧은 적의 군대에서 자기 민족을 구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은 그녀가 자기 곁에 있던 종속적인 지위의 사람도 자유롭게 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딧의 위대함은 전쟁의 순간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평생 어떻게 살았고, 자기에게 속해 있던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도 마지막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24절에서는 유딧이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남편의 친족들과 자기 친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녀가 물려받아 관리하던 재산은 이제 두 집안의 친족들에게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집안은 그녀를 위해 이레 동안 애도합니다.
처음에 유딧은 남편을 잃은 과부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도 남편 곁에 묻힙니다. 그러나 그 두 장면 사이에 놓인 그녀의 삶은 남편의 죽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유딧은 스스로 행동하고, 공동체를 구하고, 오랫동안 존경받으며, 자기 삶을 살아 낸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유딧이 죽은 뒤에도 아무도 그들을 겁주지 못했다
유딧기의 마지막 문장은 유딧의 죽음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유딧이 살아 있는 동안과 그녀가 죽은 뒤 오랫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겁주는 자가 더는 없었다. 아멘.유딧기 16:25 · 본디새김
아시리아 군대가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베툴리아의 물이 고갈되자 사람들은 절망했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구원의 가능성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여기서 평화는 단순히 전투가 없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적의 위협 아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빼앗길까 봐 떨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런 공포에 지배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이후 이스라엘이 영원히 침략당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주장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오랫동안」이라고 말하며 그 기간을 제한합니다. 특정 연수를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남는다
하나님이 전쟁을 부수셨다는 고백은 적의 장군이 죽은 순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물러가고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그 평안이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지속되었다는 이야기 전체가 그 고백을 구체화합니다.
책의 끝에 이르면 거대한 아시리아 군대도, 홀로페르네스의 호화로운 장막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딧을 위해 이레 동안 애도한 사람들이 남아 있고, 그들이 살아갈 땅이 남아 있습니다.
유딧은 남편의 무덤 굴에 묻혔습니다. 사람들은 애도를 마치고 자신의 삶을 이어 갔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들을 겁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